수 1:10-18 싸움

세상에서의 종교는 인간이 어느 정도로 자기 집착에 빠져있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증거물입니다. 세상에서 살아남고, '나'라는 존재성을 보다 더 굳건히 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이 종교라는 이름으로 등장을 하는 것입니다. 신의 지시를 받기 위해서 신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존심을 확립하고, 세상 속에서의 자기 영역 확보와 자리 굳히기, 또는 욕망의 성취를 위해서 신을 부르고 있을 뿐입니다.

'신'이라는 것은 이미 인간의 차원을 뛰어 넘은 존재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인간과는 전혀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분입니다. 생각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 다를 수밖에 없고, 그 누구에게도 지시를 받지 않고 오직 신 홀로 신의 의지에 의해서만 활동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신 앞에서 자기의 생각과 뜻을 요구해서는 안됩니다. 신이 판단하시고 신이 행동하시는 것에 대해서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만 있을 뿐이지 신이 하신 일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따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다움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신의 지시에 움직이려는 의도보다는 신이 내 부탁대로 내 소원대로 움직여 주기를 바라고만 있습니다. 믿겠다는 것도, 신의 지시에 순종하겠다는 것도 사실은 신의 활동을 내가 원하는 쪽으로 끌어당기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신을 향한 모든 행동을 자기의 의지와 노력으로 했다고 주장하게 됩니다. 신을 믿은 것도 내 의지로 믿은 것이고, 신을 찾아 경배하는 것도 내 의지와 노력으로 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자기 행동을 자기의 것으로 주장할 수밖에 없는 것은, 내가 한 행동이 되어야 행동에 대한 대가를 자기에게로 끌어 당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신으로부터 복을 받아내기 위해서는 필연코 그에 합당한 행동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모든 행동을 자기에게서 자신의 의지와 선함으로 통해서 생산된 것으로 주장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교라는 울타리 안에 있는 인간의 모습이다. 그런데 문제는 종교가 이러한 인간의 욕망을 옹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에 의해서 인간을 위한 종교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만약 신에 의해서 신을 위한 종교가 있다면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러한 종교는 철저하게 신 중심으로 존재할 것입니다. 그리고 신의 영역을 침범하고 스스로 신되고자 하는 모든 것을 공격하고 거부할 것입니다. 그럴 때 그것을 신에 의해서 발생한 종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말씀드린 종교의 문제에 오늘날의 기독교를 대비시켜 보십시다. 과연 무엇이 드러납니까? 인간을 위하고 인간 중심으로 뭉쳐져 있는 인간의 종교가 보일 것입니다. 신에 의해서가 아닌 인간에 의해서 조작되어지고 탈바꿈된 종교 하나가 거대한 바벨탑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기독교'라는 종교를 만드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자기 욕망에서 빠진 채 자기 집착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인간에 의해서 '기독교'라는 종교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스스로 나타내셨는데, 인간들이 그 이름에 복종하고 순종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하나님'이란 이름을 이용하고 자기를 위해서 부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인간의 모습이라면, 이런 인간 세상에 오직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 존재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언제나 세상에서 자기가 중심 되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입니다. 사람 몇이 모이는 조그만 모임이라고 할지라도 내가 중심 되어서 그 모임이 움직여야 비로소 만족합니다. 조그만 일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중심에서 벗어난 채 되어진 일이 있으면 트집을 잡고 꼬투리를 잡아서라도 그 일이 잘못되었음을 주장합니다. 내 아이가 학교에서 반장을 했을 때 부모 마음을 흐뭇해지는 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내 아이가 중심이라는 것이 부모 마음을 흐뭇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중심으로 살아가는 인간이 스스로 내 중심에서 벗어나서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며 만약 그런 자가 보인다면 그것은 인간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의 능력에 의해서 새롭게 탄생되어진 새로운 인간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교회에서 교인들에게 '믿으라' '사랑하라'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라'는 말들이 얼마나 말이고 허공을 울리는 공허한 말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되어지지도 않는 일을 하라고 시키니 교인들로서는 무거운 짐만 떠안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 결국 이것을 눈치 챈 목사들은 '하라'는 말을 안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되지도 않는 것을 하라고 하자니 목사 자신도 껄끄럽기 때문에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인간도 할 수 있는 일로 바꿔 버린 것입니다. 즉 인간이 하나님을 믿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인데, 그렇게 말을 하자니 지금 당장 교인들이 할 일이 없어져 버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기 때문에 '믿으라'고 해놓고는 믿는 것을 주일에 교회에 나오고 기도하고 헌금하는 것 등으로 제시하는 것입니다. 이것만하면 믿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끝까지 인간이 신 되어서 인간 중심으로 남아 보겠다는 악한 의지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참된 신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악한 의지로서 존재하고자 하는 인간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자기를 향한 욕망을 옹호하지 않고 도와주지 않으시고 오히려 공격을 하고 죽이시는 분이 하나님이기 때문에 우린 그분을 참된 신이라고 일컫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의 하나님은 바로 그런 분이십니다. 따라서 기독교에서 인간의 자존심과 의지를 죽이시는 하나님을 말하지 않고 오히려 인간의 욕망과 소원을 위해서 달려오는 하나님을 말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우상일 뿐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죽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인간은 절대로 자기를 포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벗어나서 하나님께로 뛰어들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죽이실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로 뛰어드는 척 하는 인간들도 많이 있지만 사실 그들도 자기의 것을 안은 채 뛰어들 뿐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죄를 깨닫는 것입니다. 인간에 대해서 알고 인간 속에 뿌리깊이 박혀 있는 죄가 무엇인가를 깨닫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우리 앞에 성경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순순히 죄인임을 고백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봐도 나는 죄인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이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보기에 인간다운 인간, 즉 적당히 좋은 일을 하면서 윤리와 도덕에서 벗어나지 않고 살아가면 된다는 사고방식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인정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말씀하시면서 '행하라'고 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율법의 완성체가 바로 하나님이 원하는 인간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율법에 대해서 실패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법을 어겼다는 차원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의 모습이 아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율법의 완성자로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하나하나 실천해서 지켰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구약의 모든 법을 하나하나 실천하셨습니까? 예수님은 법을 실천하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것도 아니고, 또 법을 실천하기 위한 삶을 사신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을 율법의 완성자라고 하는 것은, 실천의 차원이 아니라 율법을 만족시키는 인간의 모습, 즉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의 모습이 바로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율법을 지키는 것은 '실천'이 아니라 율법의 완성자이시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과 오늘 우리 자신과 비교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예수님의 사랑과 인간이 인간애로서 만들어 내는 사랑이 비교될 것이고, 예수님의 순종과 인간의 순종이 비교될 것이고, 예수님의 희생과 인간의 희생이 비교 될 것이고, 예수님의 섬김과 인간의 섬김이 비교되면서 선한 것으로 알았던 인간의 모든 것이 악하고 더러운 것으로 발각될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의 모습인 예수님과 자신을 대비시키는 것이 아니라 내 주위에 있는 인간의 것과 내 것을 비교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죄인으로 인정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적어도 저 사람보다 나은 뭔가가 나에게 있음이 발견되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인간과 싸우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것을 내세우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적이고 원수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여호와의 군대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 싸움에 참여된 자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너가기 앞서서 여호수아가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 그리고 므낫세 반 지파에게 당부하는 내용입니다. 당부의 내용은 함께 요단강을 건너가서 싸우자는 것입니다. 12,13절을 보면 "여호수아가 또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에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안식을 주시며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시리라 하였나니 너희는 그 말을 기억하라"고 말씀합니다. 이 것은 민32장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민수기 32장에 보면 요단 동편 땅을 이스라엘이 점령하고 난 뒤에, 르우벤과 갓 자손이 모세를 찾아와서 '우린 요단을 건너지 않고 가축 기르기에 좋은 이곳에 머무르겠다'는 요청을 합니다. 그러자 모세는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에게 이르되 너희 형제들은 싸우러 가거늘 너희는 여기 앉았고자 하느냐"(민32:6)라는 말로써 그들을 책망을 하는 사건이 있었던 것입니다.

민수기는 여호와의 군대로서 싸움을 할 군사를 뽑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즉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향해 가는 것은 잘먹고 잘 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군대로서 싸움을 위해서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르우벤과 갓지파는 가나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남겠다고 합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진노를 일으킨 것은, 여호와의 군대로서 할 일을 생각하기보다는 세상에서 자기 인생을 위해서 안주하는 것에 더 관심을 두는 사고방식 때문입니다. 자기의 생존 문제를 먼저 챙긴 것입니다. 군사가 싸움을 하려고 하기 보다 자기 생존을 먼저 챙긴다면 분명 그 싸움은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군대이면서 오히려 싸움을 방해하는 장애물로 등장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배경으로 해서 오늘 본문을 생각하면, 여호수아가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에게 '너희 형제보다 앞서 가서 그들을 도와라'는 것은 이스라엘이 싸워야 할 여호와의 적의 정체가 무엇인가를 암시하는 내용인 것입니다.

르우벤, 갓, 므낫세 반지파가 전투에 빠진다고 해서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승리한 전쟁이라고 선언하셨으니 이스라엘의 숫자와 군사력과는 전혀 상관없이 이미 이긴 전쟁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굳이 가나안에 가기 싫다는 그들을 들여보내는 것은 가나안의 전투가 무엇과 싸우는 전투인가를 알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군대라고 했습니다. 군대는 싸워야 할 적이 누구인가를 제대로 파악을 해야 하고, 오직 싸움에 관심이 집중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자기 생존에 관심을 두게 되면 싸움에 대해서 희미해지기 마련입니다. 우선 먹고사는 것이 우선이 되버리기 때문에 싸운다는 것 자체를 무의미하고 귀찮은 것으로 여겨버리는 것입니다. 세상에 자기 생존을 위한 조건이 갖추어져 있고 그것만 확보하면 생존에 대해서는 아무런 걱정이 없는데 무엇 때문에 싸움에 신경을 쓰겠습니까? 굳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해도 눈에 보이는 이 땅에서 잘먹고 잘 살수 있는데 굳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싸워야 하는 피곤을 자처할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당시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 지파의 심정이었고, 오늘날 우리들의 심정이기도 합니다.

사실 제가 지금 여호수아서를 읽고 싸움이라는 것에 대해서 설교하고 있지만, 이 말씀에 대해서 여러분이 얼마나 관심을 두고 있습니까? 저와 여러분은 여호와의 군대로 부름 받았다고 할 때, '내가 여호와의 군사라면 내가 싸워야 할 적은 무엇인가?'에 관심을 가지고 싸우는 인생이 되고자 힘쓰겠다는 마음이 있습니까? 어쩌면 저는 지금 여러분이 전혀 관심도 두지 않고 생각지도 않고 있는 것을 저 혼자 떠들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싸움이라는 것보다는 생존이라는 문제에 더 관심이 집중되어 있고, 내가 생존하기에 적당한 조건들만 갖추어지면 그것으로 대만족이라고 여기는 사고방식 앞에서 싸움을 말한들 그것이 귀에 들어오겠습니까? 이처럼 인생에 실패하지 않고 성공하려는 사고방식이 싸움을 회피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생존에 집착하고 살고자 애쓰는 사람에게 선한 것은 자기의 생존에 유리한 것을 제공하는 경우입니다. 그래서 르우벤 갓 므낫세 반지파는 가나안을 건너가는 것보다는 여기에 남는 것이 자기들에게 선한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시 39:4,5절에 보면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의 어떠함을 알게 하사 나로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뿐이니이다"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것은 인간이 자기 생존을 위해서 스스로 서보겠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실패하지 않겠다' '실패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아닌 자신의 힘과 능력을 의지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 방식이 하나님의 적으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가나안에서 싸워야 할 이스라엘이 적은 누구입니까? 단순히 가나안 민족이 아니라 자기 생존을 위해서 현실에 안주하고자 하는 사고방식 자체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즉 가나안 민족을 치면서, 하나님은 지금 가나안 민족을 치는 것이 아니라 가나안 민족과 같은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바로 나 자신을 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신자의 싸움은 무엇과 싸우는 것입니까? 신자의 적이 누구입니까? 세상의 불의입니까 아니면 지배계급입니까? 그 누구도 아니고 바로 나 자신이 하나님의 적이며 나의 적입니다. 인간은 절대 생존이라는 범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모든 행동이 생존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 향해 있습니다. 단지 숨만 쉬면 되는 생존이 아니라 세상에서 내 존재성을 굳건히 하는 생존을 원합니다. 생존을 위한 싸움을 하기에 바쁘고 생존을 위해서 경쟁을 하며 살아갑니다. 이것이 세상임과 동시 바로 우리들 모습 그대로입니다. 내가 곧 세상이며 세상이 곧 나입니다. 내가 세상 사고방식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교회를 나와서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하고 설교를 듣고 있다고 해도 우리 머리 속에서는 세상에서 생존하기 위한 발버둥이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것을 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싸움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싸움에 참여하는 여호와의 군대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적을 나의 적으로 삼고 하나님과 더불어 치는 것입니다. 즉 내가 나를 치는 것, 이것이 신자의 싸움이며 가나안 싸움의 의미입니다.

우리 자신을 이미 생명에 있는 자로 보십시다. 이미 천국에 들어와 있는 자로 보십시다. 그럴 때 드러나는 죄가 무엇입니까? 이미 생명을 얻었는데도 불구하고 생존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생명을 얻었다는 것은 이미 성공한 자이고 완성한 자이며 모든 것을 얻은 자입니다. 이미 성공했기 때문에 실패한다고 해도 그것은 실패가 아닙니다. 따라서 내가 성공한 자라는 것을 아는 신자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없습니다. 생명을 얻었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얻었기 때문에 잃게 될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얻지 못해서 안타까워하고 애타하지 않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생명 안에 사는 신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이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은 생명을 얻은 자의 모습이 아니고 천국에 앉아있는 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언제나 실패를 두려워하고 얻지 못해서 섭섭해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나를 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싸움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하늘의 생명을 붙들지 못하고 세상에 애착을 가지고 있는 그것을 하나님이 치시고 무너뜨려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여호와의 군사로서 싸움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18절에 보면 "누구든지 당신의 명령을 거역하며 무릇 당신의 시키시는 말씀을 청종치 아니하는 자 그는 죽임을 당하리니 오직 당신은 마음을 강하게 하시며 담대히 하소서"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말씀을 청종 하지 아니한 자는 죽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싸움에 참여하는 군사의 자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말씀을 청종하고 명령에 순종하고 산다고 할 수 있습니까? 말씀을 청종하고 명령에 순종한다면 자기 생존에 대한 집착에서는 떠난 자가 분명합니다. 자기 생존에 집착한 자가 말씀을 청종할 수 없고 여호와의 명령에 순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은 인간의 생존을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분명 생존을 위한 강한 집착과 의지가 살아 움직이고 있습니다. 말씀을 듣는 순간에도 기도하는 순간에도 예배를 드리면서도 우리 속에서 꿈틀거리는 것은 생존에 대한 집착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죽어야 할 자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생전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모이는 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그것은 종교 집단이며 인간의 단체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인간의 말이 난무하는 저주와 멸망의 현장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민 32:15을 보면 요단 동편에 안주하려는 이들의 행동을 여호와를 떠난 행동으로 말합니다. "너희가 만일 돌이켜 여호와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또 이 백성을 광야에 버리시리니 그리하면 너희가 이 모든 백성을 멸망시키리라" 이들은 여호와를 떠나겠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또 여호와를 떠날 생각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단지 가나안에 들어가기보다는 가축을 키우기에 알맞은 땅에 거하겠다고 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그것을 여호와를 떠난 행동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약속보다는 약속이 아닌 것에 집착하는 것 때문입니다.

신자가 자기를 치는 삶이 없다는 것은, 여호와를 떠났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현실을 붙들고자 하는 욕망이 자기를 치고 공격하는 것보다는 자신의 능력을 더욱 의지하는 쪽으로 밀어붙이기 때문입니다.

싸워야 할 적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욕하고 미워하는 이웃이 적이 아닙니다. 우리의 적은 바로 내 안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하늘의 생명보다 생존을 위해 살도록 부추기는 세력이 바로 내 안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와 같은 사고방식이 바로 우리 안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사고방식을 치시고 공격하십니다. 따라서 신자는 하나님의 적이 바로 나 자신임을 깊이 자각하고 '하나님 내가 붙들고 있는 이것을 치십시오. 내 행위를 자랑하는 이 악함을 그냥 두지 마십시오. 나를 죽이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게 하소서'라는 기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자입니다. 이미 하늘의 생명을 얻었기 때문에 생명의 가치를 모독하는 것은 용납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적이 무엇인가를 깨달으시고 하나님 편에서 제대로 된 싸움에 참여하는 신자되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