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11:20 선택

"그들의 마음이 강퍅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우러 것은 여호와께서 그리하게 하신 것이라 그들로 저주받은 되게 하여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시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진멸하려 하심이었더라"는 말씀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에 대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선택, 즉 로마서 9장의 말씀대로 긍휼히 여길 자와 불쌍히 여길 자가 하나님의 뜻대로 이미 확정되어 있다는 것에 대해서 사람들은 달갑게 여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선택을 인정한다면 인간의 모든 행위는 자동적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되버리기 때문입니다. 내가 교회를 찾아 나오고,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 바쁜 와중에서도 철저하게 주일을 지키고, 없는 가운데서도 십일조를 열심히 하고, 시간에 쫓기면서도 기도를 게을리 하지 않았던 모든 행위가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말 앞에서는 수포로 돌아가고 내세울 것이 전혀 없는 것이 되버리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선택에 대해서 귀를 막아 버리고 선택의 부당성을 외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여러분도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선택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자와 불쌍히 여김을 받을 자에 대한 하나님의 확정이라면, 그리고 그 확정이 인간이 태어나기 전, 다시 말해서 착한 행동 악한 행동이 있기 전에 이미 완료된 확정이라면 도대체 선택 앞에서 인간의 행함을 언급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은혜를 받을만해서 받았다고 생각했는데 은혜를 받을만한 행동이 있기 전에 이미 은혜 받을 자를 하나님이 확정하셨다면 결국 내 행위와는 상관이 없이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긍휼이고 은혜이지 않겠습니까?

사람들은 자신의 행위를 보면서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과 자비와 은혜를 판단합니다. 즉 긍휼을 입을 자, 사랑을 받을 자, 은혜가 주어질 자, 이 모든 것의 근거를 자기 행위에서 찾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을만 해서 받았다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을만한 착한 행위와 신앙이 자신에게 있기 때문에 그것을 보시고 복을 주고 은혜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신 스스로 자기를 선택하는 인간 방식입니다. '나는 구원받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자신에 대한 선택을 스스로 결정해 놓고 하나님이 자신에 대한 선택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행함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선택의 조건이라고 생각되는 착한 행동, 신앙적인 행동들을 안고 있으면 하나님이 자신을 선택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선택하도록 하고야 말겠다는 스스로의 의지로 살아가는 인간적 사고방식을 폭로시키는 것이 곧 하나님의 선택의지인 것입니다. 이렇게 기어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아내고야 말겠다는 인간의 의지로 살아가기 때문에 인간의 종교 행위에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근거와 조건을 인간의 행동에 둘 때, 자연히 인간 행동은 둘로 구분됩니다. 즉 선한 행동과 악한 행동으로 구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생각하는 종교적인 입장에서의 선한 행동과 악한 행동은 무엇이겠습니까? 당연히 종교적인 모든 행동을 선한 것으로 규정하게 됩니다. 또한 종교에서 말하는 선의 의미가 포함된 모든 행동 역시 선한 것으로 규정합니다. 즉 기도하고 예배드리고 봉사하고 헌금하고 전도하는 등등의 종교적 행위, 그리고 종교에서 말하는 선의 의미가 들어 있는 남을 돕는 행위 등이 선한 행동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자비하심이 선한 행동이 있는 자에게 주어진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이것을 기독교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전혀 기독교이지 않습니다. 다만 종교적인 생각일 뿐입니다.

모든 종교에서 말하는 신의 사랑의 원칙은 신의 일방적인 선택이 아니라 조건적인 선택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행동을 보고 사랑할 자는 사랑하고 벌줄 자는 벌준다는 것이 모든 종교에서 공통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는다고 해도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상식은 선한 자는 상을 주고 악한 자는 벌을 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때로 착하게 살고 선한 일을 많이 하며 살았던 사람이 뜻하지 않은 변고로 고통을 겪거나 죽게 되었을 때 '왜 나쁜 사람은 가만히 두고 착한 사람을 죽게 하느냐?'고 하면서 하늘을 향해서 삿대질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이 착하다고 생각하고 복을 받을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고통으로 밀어붙이고 또 죽게도 하심으로서 하나님의 선택에 반발을 하며 살아가는 인간 죄악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의 행위를 무로 돌려버립니다. 그런데 인간의 선택은 행위를 근거로 해서 선한 자와 악한 자로 규정하게 될 수밖에 없고, 이러한 인간의 선택이 교회 안에 강자와 약자가 존재하게 하는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행위를 근거로 하면 필히 행위가 있는 자는 자연히 강자의 위치에 있게 되고 행위가 없는 자는 약자의 위치에 있게 됩니다. 그리고 행위가 있는 강자에 의해서 행위가 없는 약자는 신앙도 없고 교회에 도움도 되지 못한 자라는 무시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교회 안에서 노골적인 차별을 하지 않는다고 해도, 열심히 봉사하고 많은 헌금을 하는 사람이 있어야 교회가 된다는 말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교회 유지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더 우대 받게 되는 것이 기정사실이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행위가 없는 사람은 단지 교회 자리만 채우는 자로 전락될 뿐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의 종교 활동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철저히 부정해 버립니다. 그 어떤 긍정적인 평가도 내리지 않습니다. 구원을 향한 인간의 열망이나 바램도 철저히 무시해 버립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일생을 교회를 위해서 살아갑니다. 시간을 투자하고 돈을 쏟아 부으면서 교회를 향한 열망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곧 자기 스스로 선택한 일에 대해서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는 인간의 열성입니다. 이 열성이 하나님의 선택에 대해서 반발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이 가나안 사람들의 마음을 강퍅하게 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가나안 사람으로 하여금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시는 것은 그들을 진멸하시기 위함입니다. 가나안 사람을 진멸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을 강퍅케 하시고 이스라엘과 싸우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결국 가나안은 은혜를 입지 못할 자로 이스라엘은 은혜를 입을 자로 서로 대치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가나안은 진멸을 당할 자로 이스라엘은 진멸에서 구원받을 자로 만난 것입니다. 하지만 은혜를 받고 못받고의 근거는 가나안에도 이스라엘에도 있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선택일 뿐입니다.

애당초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로 선택된 것부터가 이스라엘의 행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던 것입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보내신 모세를 밀쳐 내려고 했고 애굽에서 안주하면서 자신들의 평안을 꾀하려고 했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약속보다는 애굽의 힘을 더 믿고 의지했던 그들인데 그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구원의 근거가 무엇이겠습니까? 오직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선택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가나안은 밀쳐내고 이스라엘은 선택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인간의 죄를 드러내고자 하심입니다. 하나님의 선택 앞에서 인간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를 이스라엘을 통해서 드러내시겠다는 것입니다.

은혜를 입지 못한 가나안이 진멸을 당하는 것은, 인간의 행위는 구원에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가나안 사람들에게 우리가 생각하는 선이 전혀 없었겠습니까? 그들도 얼마든지 자기들끼리 연합해서 서로 도우며 잘 살아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구제도 하면서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기도 하면서 착한 일을 얼마든지 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나안은 진멸의 대상입니다. 이유는 그들이 나쁜 짓을 했다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입지 못했다는 것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스라엘은 잘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편이 되어서 가나안을 싸워서 이길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신 것은 이스라엘이 잘나서도 아니고 선한 행동을 해서도 아니라 단지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선택하시고 은혜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강퍅한 마음을 하나님이 깨뜨리시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도록 하셨기 때문이지 이스라엘 스스로의 열성도 아니고 의지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알 때 진심으로 이스라엘다운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할 일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는 잘난 것이 없다. 모두가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물로 주어진 은혜 덕분이다'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이고 이러한 신앙생활을 가리켜서 전쟁이라고 말합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평안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평화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옴으로 인해서 깨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인간적인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 분명히 하나님은 가나안 땅을 빼앗아서 이스라엘에게 주셨습니다. 즉 이스라엘을 좋게 하기 위해서 가나안을 진멸한 것으로 보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한 해답은 왜 이스라엘에게 은혜를 주셨는가로 알 수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단지 이스라엘에게 땅을 주셔서 잘 살게 하는 것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애굽을 나오게 하신 목적이었다면 굳이 사람이 사는 가나안 땅이 아니라 다른 땅도 얼마든지 줄 수가 있습니다. 또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가나안 땅을 주셔야 한다면 가나안을 진멸하지 않고 같이 살아가게 할 수 있는 방법도 있습니다. 기브온 사람들을 받아들인 것을 보면 함께 사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하지만 애당초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은혜를 주실 때부터 하나님의 관심은 이스라엘이 아니었습니다. 애굽에서 종살이하는 이스라엘이 안쓰러워서 그들을 애굽에서 나오게 하시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신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종살이하게 된 것은 모두가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또 고생하는 민족이 이스라엘 하나뿐이었겠습니까? 제가 여러분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삶에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좋은 땅을 차지하고 풍족하게 잘살아가게 하는 것이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이 세상이 왜 진멸을 당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드러내고 싶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나안을 통해서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약속대로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하시고 가나안 사람들의 마음을 강퍅하게 해서 이스라엘과 싸우게 하시고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해서 그들을 진멸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이 모두는 가나안과 이스라엘이란 국가의 문제가 아니라 세상전체의 문제이고, 오늘 우리들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가나안과 이스라엘의 싸움이 곧 우리의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 현실을 알아야 제대로 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현실이란 한마디로 말해서 전쟁입니다. 이스라엘과 가나안이 만났을 때 나타난 현상은 전쟁입니다. 여리고를 무너뜨린 이스라엘의 소문을 듣고 가나안 쪽에서 자기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힘을 연합하고 싸움을 걸어왔습니다. 신앙의 전쟁이란 내가 일부러 적을 찾아 싸우러 가지 않아도 저쪽에서 싸움을 걸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싸움이 없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이유는 타협을 했기 때문입니다. 싸움이 될만한 조건을 내쪽에서 감춰버렸기 때문에 싸워야 할 이유가 사라진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바로 이러한 모습이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신앙은 전쟁입니다. 이것은 선택받은 자와 선택받지 않은 자가 함께 했을 때 필히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런데 많은 신자들이 생각하는 신앙생활에는 전쟁을 한다는 개념이 없습니다. 단지 주일이면 예배당에 나와서 예배드리는 것으로 다됐다고 여겨버립니다. 싸운다고 해도 기독교와 반대되는 타종교나 미신들과 싸우는 것으로 여겨버립니다. 그리고 내 교회가 부흥되기 위해서 이웃 교회와 경쟁하는 것으로 여기기도 합니다. 또는 주일에 교회에 가려고 하는데 가지 못하도록 유혹하는 것과의 싸움으로 연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싸움은 전쟁이 아닙니다. 신자의 전쟁은 '여호와의 전쟁'입니다. 그런데 타종교와 대립하거나 타교회와 경쟁하거나 주일에 교회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유혹을 물리치는 식의 싸움은 모두가 자신의 종교적 자존심 싸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자신을 위한 싸움이지 여호와의 전쟁은 아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하심으로 전쟁이 있게 하신 것은 말씀드린 대로 은혜를 입은 자는 살지만 은혜를 잊지 못한 자는 진멸 당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은혜를 입은 자이고 누가 은혜를 입지 못한 자입니까? 그것은 앞서 말한 대로 하나님의 선택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자는 은혜를 입은 자이고 선택에 대해서 반발을 하는 자는 은혜를 입지 못한 자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택을 이해하고 받아들였다면 그 사람은 절대로 자신의 행위를 앞세우지 않습니다. 선택의 근거를 자기에게 두지 않습니다. 다만 죽어야 할 자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살아가고 있을 뿐이라는 고백만 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 지신 그리스도만 의지하고 그리스도의 행위만 의로 삼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택에 대해서 반발을 한다는 것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포기를 못했다는 것이고, 행위를 포기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이 선하다고 생각되는 행동을 자랑하게 되고 그 행동을 자기의 의로 삼게 되는 것입니다. '역시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이 있어야 교회가 된다'는 그런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를 입지 못한 자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은혜와 사랑이 인간의 행위에 의해서 밀쳐지고 짓밟히는 것에 대해서는 결코 용납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전쟁을 하시고 진멸하고야 마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진멸을 당한 자의 특징은 신자보다 더 나쁜 짓을 많이 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아들까지 아끼지 않고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무시하고 자기의 행위와 스스로의 의지와 힘을 믿고 산다는 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선택으로 은혜를 입은 자로 모이는 교회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사랑만 높이고 주님의 은혜만 확산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만 높여지기 위해서는 필히 인간의 행위는 무시되어야 합니다. 행위를 가지고 자신을 드러내는 교만과 자랑은 모두가 사라져야 할 대상으로 여겨야 합니다. 따라서 신자의 전쟁이란 아들까지 아끼지 않고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을 지키는 것입니다. 내 모든 것을 포기하더라도 은혜가 짓밟히는 것에 대해서는 용납하지 않겠다는 각오로 살아가는 것이 곧 전쟁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죄인된 인간의 자기 사랑에서 나오는 행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음을 알고 살아가는 것이 바로 전쟁에 참여된 군사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은혜를 주셨다면 그것은 여러분 개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지키는 군사로 쓰시기 위해서라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불교와 싸우고 무당과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교회는 무조건 내 편이 되버립니다. 신자의 전쟁은 종교와 종교의 싸움이 아니라 은혜로 사는 자와 자기 힘으로 사는 자와의 싸움입니다. 따라서 불교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도를 깨우쳐서 부처가 되고자 함으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는 자와의 전쟁이 되는 것입니다.

가나안은 애당초 은혜를 입지 못하고 저주 속에서 진멸을 당할 자로 있습니다. 이스라엘이라고 예외가 아닙니다. 그들 역시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못했다면 저주 속에서 진멸을 당할 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은혜를 입을 자로 선택이 되었기 때문에 저주에서 축복의 자리로 옮긴바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은혜 입을 자로 택하신 것은 은혜가 아니라 자기 힘과 기술과 능력을 의지하고 자기 행위를 앞세우며 자기를 자랑하고 마치 자신이 잘나서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여기는 세상을 향해서 사실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이 우리를 살리고 있었노라고 마음껏 자랑하고 떠들어라고 이스라엘을 택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저와 여러분이 이스라엘의 자리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이 선택받은 자라는 증거는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사랑과 은혜만을 높이고 자랑하는 것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은혜를 무시하고 자기 힘으로 사는 자와는 전쟁을 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어주신 사랑과 자비하심이 하찮은 인간의 행위에 의해서 밀쳐냄을 당하는 것을 그냥 두고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은혜를 모르는 자와 치고 박고 싸우라거나 말다툼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전쟁은 힘으로 살고 힘을 제일로 여기고 힘을 자랑하는 이웃 앞에서 끝까지 은혜를 드러내라는 것입니다.

은혜를 드러낸다는 것은, 나도 역시 악한 자이고 저주 안에 있어야 할 자인데 하나님의 은혜로 복안에 있는 자가 되었다는 것을 이웃에게 드러내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웃을 내가 이겨야 하고 정복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실수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을 가지고 대화를 하다가 다툼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그것은 기어코 내가 저 사람을 이겨서 굴복시키고 말겠다는 의도가 있을 때 나타나는 것입니다. 결국 은혜를 보이기 위한 전쟁이 아니라 상대방을 내 아래 굴복시키기 위한 전쟁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은혜를 보여주는 도구로 전쟁을 한다는 것은 이웃을 경쟁의 대상이나 내가 지배하고 굴복시킬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섬겨야 할 대상으로 여기고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여러분이 해야 할 전쟁입니다. 힘으로 사는 세상은 이웃을 굴복시키고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택하셔서 저주에서 생명으로 옮긴바된 은혜를 아는 신자는 이웃을 섬김의 대상으로 여길 뿐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삶의 현실입니다. 전쟁이라는 이 현실에 충실하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