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는 고마움에 대한 자연스런 반응입니다. 그런데 고마움이라는 것이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감사 역시 구구 각색일 수밖에 없고 감사의 질도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나에게는 좋은 일이 다른 사람에게는 해가 되는 일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때문에 나는 감사하고 있는데 똑같은 일을 두고 저 사람은 원망하고 불평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감사의 질이 서로 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감사의 기준이 자기 자신이고 감사의 이유 역시 자신에게서 찾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모든 교회가 추수 감사절로 드리는 날입니다. 추수감사절은 옛날 청교도 사람들이 미국 땅을 발견하고 첫 곡물을 수확한 것에 대해 감사했던 것이 오늘날 기독교의 전통이 되어 내려온 것인데 그것을 모든 교회가 추수감사주일로 정해서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감사절을 특별히 정해서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것 자체가 의문이 많이 갑니다. 즉 일년 중 특별한 날을 정해서 하나님께 감사하겠다는 그 의중에 과연 뭐가 숨어 있느냐는 것입니다. 혹시 평소에는 전혀 감사를 안하다가 특별한 날을 정해서 그날에 일년치 감사를 모두 하겠다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습니다.
감사절에 드리는 감사헌금이 평소에 드리는 감사헌금보다 액수가 많은 이유가 바로 그런 의중에서 나온 것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감사주일이기 때문에 더 많은 감사를 해야 한다든가 아니면 추수감사주일은 일년동안 받은 것에 대한 총결산이기 때문에 감사주일의 감사 한번으로 일년 동안의 모든 감사가 청산된다고 여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길 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교인들이 감사절을 이런 식으로 이용하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그런데 모든 교회들의 감사가 앞서 말한 대로 구구 각색입니다. 똑같이 하나님을 말하고 똑같이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감사의 질은 교회마다 교인마다 다릅니다. 이러한 현실을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합니다. 결국 교회 역시 자신이 기준이 되어서 감사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에 수능시험이 끝났습니다. 그 결과를 두고 희비가 엇갈릴 것입니다. 점수가 많이 나올 것으로 예상되는 자녀의 집안은 기쁨과 즐거움에서 저절로 많은 감사를 하게 될 것이고, 점수가 많이 나오지 못한 자녀의 집안은 암울한 기운이 가정에 가득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가정이 감사절에 똑같이 감사헌금을 했다고 했을 때 과연 그 감사의 질이 같겠습니까? 같을 리가 없습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 점수가 많이 나오지 못한 자녀의 집안은 감사할 기분이 아닌 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도 감사헌금을 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자존심을 세우기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감사할 형편이 아닌데도 나는 감사한다는 것, 다시 말해서 내 자녀가 점수를 못받았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하나님께 감사할 정도로 신앙이 있다는 것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결국 그 속마음에는 '하나님 제 자녀가 시험을 못봤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감사를 합니다. 저의 이러한 신앙을 높이 보신다면 복을 주십시오'라는 반감이 숨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같은 하나님을 섬기면서 감사의 질이 다르다면 그것은 분명 하나님이 다르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비록 하나님이란 말은 같지만 서로가 각기 다른 하나님을 상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가 하나님께 하고 있는 감사의 실태입니다. 감사에서조차 서로 다른데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겠습니까? 나는 적게 받았고 너는 많이 받았다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같은 마음으로 한 하나님을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부자의 감사와 가난한 자의 감사가 서로 다르다면 그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수능 점수가 많이 나온 자와 적게 나온 자의 감사의 질이 다르다면 그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오늘 은석교회도 여러 성도들이 모였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하기 전에 우리가 서로 같은 질의 감사를 하고 있는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와 내 형제가 드리는 감사가 일치된다면 은석교회는 진심으로 한 하나님을 섬기고 같은 질의 감사로서 여호와를 높이고 찬양하는 교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내어놓은 감사와 다른 사람이 내어놓은 감사가 다르다면 은석교회는 교회라고 말하기가 곤란합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하나님 제 자식이 공부를 잘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한다면 자식이 공부를 못한 부모는 그 감사에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서로 다른 질의 감사를 들고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나에게 주어진 것으로 내가 감사하는데 문제될 것이 있느냐?'라고 할 수도 있지만 에베소서 4:3절에서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말씀하고 또 이어서 몸도 성령도 주도 믿음도 세례도 하나님도 하나라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을 본다면 결국 한 하나님 아래서 감사도 하나로 일치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서로 같은 질의 감사란 어떤 감사를 의미하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은 그동안 이스라엘이 했던 전투를 다시 상기하는 내용의 말씀입니다. 11:23절에 보면 "이와 같이 여호수아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신 말씀대로 그 온 땅을 취하여 이스라엘 지파의 구별을 따라 기업으로 주었더라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여호수아가 가나안의 온 땅을 취함으로 전쟁이 그쳤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다시 12장에서 지나간 전쟁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은 지금까지의 전쟁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말씀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요단강을 건넌 후에 있었던 여호수아의 전쟁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세의 전쟁도 말함으로써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말씀하겠다는 것입니다.
1-6절까지는 여호수아가 전투한 것이 아니라 모세가 전투한 내용입니다. 그리고 7-24절까지는 여호수아가 전투한 것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요단강을 건넌 후의 전투만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요단강을 건너기 전의 전투부터 언급을 하는 것입니까? 만약 여호수아의 입장에서 전투에서 승리하게 하시고 가나안 땅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전투만 언급하면 될 것입니다. 모세가 싸워서 승리한 전투에 대해서 여호수아가 감사할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들고 감사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도움으로 전투에서 승리를 했든 말든 그것은 나하고는 상관이 없고 나는 내 전투를 도우신 하나님께 감사하면 된다는 생각이 바로 각기 다른 감사의 질로 나오는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감사가 나오게 된다면 그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것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감사를 하는 것이 대부분 교회들의 실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가 이러한 감사를 서슴치 않기 때문에 감사절만 되면 소위 복을 받은 사람들은 기가 살고 의기 양양한 모습으로 두둑한 봉투를 내어놓을 수 있지만, 소위 복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힘든 일만 가득 터진 사람은 기가 죽을 수밖에 없고 축 늘어진 어깨로서 마지막 신앙의 자존심을 세워보고자 마음에도 전혀 없는 봉투를 내밀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사람들에게 감사란 억지 춘향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모세가 요단 동편을 정복한 일과 여호수아가 요단을 건너서 가나안 땅을 정복하게 된 일을 언급하고 계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모든 일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지금까지의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기 위해서 하신 것이지 너희 인간들이 나서서 되어진 일이 아니라는 점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모든 성읍의 정복은 인간의 힘에 의해서 되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되어진 일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전투에서 승리하게 하시고 땅을 차지하게 하신 것이지 인간의 능력과 군사력이 결코 아니라는 점을 잊지 말라는 의도에서 모세의 전투와 여호수아의 전투를 다시금 언급하시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을 잊어버린 상태에서 가나안 땅을 정복한 일을 생각한다면 가나안 땅을 정복했다는 것으로 만족하고 가나안 땅을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즉 가나안 땅을 정복하게 하신 능력의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것으로 감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것이 있기 때문에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중에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 없을 때는 감사 역시 없을 수밖에 없습니다.
가나안 땅을 주신 것으로 감사한다면 그 감사의 유효기간은 언제까지이겠습니까? 이스라엘이 평생을 가나안 땅을 주신 것으로 감사하지는 못합니다.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것에 대해서는 언젠가는 식상하게 되고 당연하게 여겨버리기 때문입니다. 결국 일회성 감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편에서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감사하게 하려면 또 뭔가를 이스라엘에게 줘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교회가 취하고 있는 감사가 아닙니까? 주어진 것으로 감사하려고 하기 때문에 아무리 감사한다고 해도 일회성이며 계속된 감사가 되어지지 않습니다. 결국 다시 감사하기 위해서는 뭔가 새로운 것을 받아야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능력의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그분께서 우리와 함께 한다는 것으로 감사한다면 그 감사는 계속되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받은 것이 있는 자에게나 없는 자에게나 하나님은 동일하게 살아 계신 분입니다. 수능시험을 만점 받았다고 해서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적게 맞았다고 해서 하나님이 살아 계시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인간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것으로 하나님을 찾아가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일 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한 교회 안에서도 하나님은 각각이고 감사도 각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신 3:21-22절에 보면 "그 때에 내가 여호수아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두 왕에게 행하신 모든 일을 네가 목도하였거니와 네가 가는 모든 나라에도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행하시리니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 하였노라"고 말씀합니다. 즉 요단 동편에서 하나님이 헤스본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을 정복하게 하신 것처럼 여호수아 역시 정복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호수아가 가나안 전투에서 승리하고 가나안을 정복하게 된 것은 살아 계신 하나님이 하신 것임을 잊지 않는다면 결코 두려워함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수 1:9절에서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단 동편에서 두 나라를 정복하게 하신 하나님이 가나안을 정복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이스라엘이 믿고 의지했던 모세 없이도 된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위대한 인간이 없이도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앞으로도 가나안 땅에서 살아갈 때 결코 인간을 의지하지 말고 살아 계셔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라는 의미에서 12장의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요단을 가운데 두고 모세가 여호수아로 교체되는 시점에서 이스라엘은 두려워할 수 있습니다. 애굽에서 자신들을 이끌어 내고 광야를 지나면서 수많은 이적으로 자신들을 이끌었던 모세이기에 모세가 자신들과 함께 요단을 건너서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사실이 두려움으로 다가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되어진 것은 모세로 인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이고 요단을 건넌 후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모든 일을 이루실 것이기 때문에 여호수아나 이스라엘은 모세가 없다고 해서 두려워 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되어진 일이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있든 없든 여호수아가 있든 없든 상관없이 여전히 하나님이 살아 계십니다. 그리고 약속대로 시행하실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할 때 참된 이스라엘로 남아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참된 교회의 모습입니다.
오늘날 교회에는 확실한 믿음의 대상이 없습니다. 비록 입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사실 믿는 것은 사람이고 돈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것보다는 부자가 교회에 출석한다는 것을 더 마음 든든해하지 않습니까? 결국 하나님을 믿지 않는 다는 것이 하나님이 그 교회에 부자를 보내심으로 발각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은 그것을 의식하지 못합니다. 온통 자기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는 분명히 확인하십니다. 누가 하나님 편에서 살아가고 있는 하나님의 종인지를 하나님은 확인해 가시는 것입니다.
신자의 감사는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약속대로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그리스도의 피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신다는 그 말씀이 우리에게 감사로 다가와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일치된 감사를 드릴 수가 있습니다. 시험을 잘봤든 못봤든 좋은 직장에 취직을 했든 못했든 상관없이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주님 역시 살아 계십니다. 천국 역시 변함 없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그러면 된 것 아닙니까?
부자든 가난한 자든 같은 해 아래서 살아갑니다. 같은 달을 보고 살고 같은 공기를 마시며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언제나 자신을 높이기 위해서 힘을 쓰며 살기 때문에 자신에게 주어진 소유를 가지고 감사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 감사하지 못하게 되는 이유입니다.
요단 동편을 정복하게 하신 하나님이 가나안을 정복하게 하셨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되어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을 믿는다면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것으로 마음 든든해야 합니다. 그럴 때 내가 받은 것 때문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도하신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감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