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13:1-7 늙으매

인간이 낙심을 하고 교만해지고 시기하고 미워하게 되는 이유는 자기를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소망을 가지고 겸손해 질 수 있는 것은 자기가 아닌 하나님을 생각할 때입니다. 결국 '그리스도인'이란 자기를 바라보지 않고 그리스도만 생각하고 사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신앙이 있는 사람입니다.

신앙이 있는 사람이란 그리스도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지 인간 스스로 계발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신앙이 좋다 나쁘다'는 말은 잘못된 말입니다. 신앙이 좋다 나쁘다는 것은 결국 '신앙이 많다 적다'라는 말로도 이해할 수 있는데, 신앙이 우리들의 힘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주신 것이라고 한다면 과연 그리스도께서 어떤 사람에게는 신앙을 100을 주고 어떤 사람에게는 50을 줬겠습니까? 만약 그리스도께서 신앙을 적게 줘서 신앙이 나쁘다면 신앙이 나쁘다고 해서 그 사람을 탓할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신앙을 주실 때 누구는 많이 누구는 적게 차별되게 주신다는 말은 하지 못할 것입니다. 신앙이 나쁜 책임이 그리스도에게로 돌아가게 됨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신앙은 동일하게 주어지는 것이지만, 그 신앙을 어떻게 관리하고 계발했느냐에 따라서 차이가 있게 된다고 말합니다. 이 말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동원하는 성경은 흔히 말하는 달란트 비유입니다.

그러나 달란트 비유를 보면 각각 주인으로부터 받은 것이 동일하지 않습니다. 많이 남긴 사람은 많이 받은 자였고 적게 남긴 사람은 적게 받은 자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예 받은 것을 땅에 파묻어 버린 종에 대해서만 언급합니다. 받은 것을 땅에 파묻고 남기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서 현재의 신앙을 그냥 파묻어 버리는, 즉 신앙이 좋아지도록 하기 위해서 열심을 내지 않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을 교훈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한 달란트 받은 사람도 그것을 묻어 버리지 않고 열심히 그것으로 장사했다면 과연 얼마를 남겼을까요?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이 다섯 달란트를 남겼고,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은 두 달란트를 남겼다면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한 달란트를 남겼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많이 남겼느냐를 따진다는 것은 분명 잘못된 것입니다. 애초부터 주인으로부터 받은 것이 각각 다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인에게 누가 충성했느냐는 것은 누가 많이 남겼느냐를 비교해서 결정할 수 없습니다. 단지 주인이 오실 것을 생각하고 주어진 것으로 열심히 장사했다는 것만 봐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공평입니다. 따라서 신앙이 좋다 나쁘다는 말은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신앙이 나쁘다는 것은 신앙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있기는 하지만 그 질이 나쁘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신앙에 질 나쁜 신앙 질 좋은 신앙이 있다는 것입니까? 신앙은 있다 없다로 판단되는 것이지 좋다 나쁘다로 판단되는 것이 아닙니다. 적게 남겼기 때문에 좋은 신앙이 아니라면 그것은 하나님에게 따질 문제입니다. 처음부터 소위 좋은 신앙을 보여줄 여건을 주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상에 차이도 없습니다. 만약 남긴 다섯 달란트를 상으로 받은 것과 달란트를 받은 것을 상의 차이라고 말한다면 이것 역시 공평하지 못한 하나님입니다. 하지만 만약 상에 차이가 없다면 신앙에도 역시 차이가 없어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즉 좋은 신앙 나쁜 신앙이란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단지 그리스도를 아는 신앙이 있는 자와 없는 자로 구별될 뿐입니다. 때문에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제발 신앙이 좋은 사람되려고 애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신앙이 좋은 사람되려고 할 때 나오는 것은 종교행위입니다. 종교행위가 많을수록 신앙이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앞에서는 단지 신앙이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면 됩니다. 신앙이 있는 좋은 사람으로 사는 것, 이것이 신앙생활이지 신앙이 좋은 사람으로 살려고 하는 것은 신앙생활이 아니라 종교 생활일 뿐입니다.

제 말이 쉽게 이해가 안될 수도 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신앙을 다만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사는 것으로 이해하자는 것입니다. 인간의 행위에서 신앙의 흔적을 찾으려고 하지말고, 어떤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느냐를 통해서 신앙의 흔적을 찾자는 것입니다. 행위에서 신앙의 흔적을 찾으려고 할 때 꼭 나타나는 것은 신앙생활 하려고 행동하게 됩니다. 즉 주님에 의해서 자연스럽게 행동하게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의식한 행동이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결국 자신의 행위를 자랑하게 되고 자기와 같은 행위가 없는 자나 자신에게 미치지 못한 자는 신앙이 좋지 못한 신자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신앙이란 자기를 바라보지 않고 그리스도만 바라보고 사는 것입니다. 때문에 자신에게 물을 것은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사느냐 아니면 나를 바라보고 세상을 바라보고 사느냐이지 내 신앙이 좋으냐 나쁘냐가 아닌 것입니다. 만약 우리식대로 신앙을 판단한다면 결국 신앙이 좋아서 받게 되는 상은 건강 있고 돈 있고 시간 많은 사람들이 차지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반면에 날 때부터 건강이 좋지 않거나 가난하게 태어난 사람은 신앙이 좋은 사람되고 싶어도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공평의 하나님이라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신앙이 좋으냐를 묻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 있느냐를 물으시는 것입니다. 즉 봉사 많이 하고 헌금 많이 했느냐를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만 생각하고 사느냐를 물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만 생각하고 그리스도만 바라보고 사는 것에 돈이 있어야 합니까? 건강이 있어야 하고 시간이 있어야 합니까? 숨만 쉬고 있고 의식만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공평이지 않겠습니까?

오늘 본문이 이러한 신앙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신앙은 자기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다'는 얘기가 본문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1절에 보면 "여호수아가 나이 많아 늙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나이 많아 늙었고 얻을 땅의 남은 것은 매우 많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지난 시간에 12장에서 모세의 전투와 여호수아를 전투를 같이 언급하고 있는 것은 전투에서 승리가 인간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승리하게 하신 것임을 가르치기 위함이라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즉 여호수아로 하여금 내가 전쟁을 잘해서 승리했다는 생각을 가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모세의 전투에서 승리하게 하신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같이 함으로서 승리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13장에 보면 '여호수아가 나이 많아 늙으매'라는 말로 시작을 합니다. 가나안 정복이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닙니다. 2절부터 보면 남은 땅에 대해서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아직 정복해야 할 땅이 많이 남아 있는 시점에 모세의 후계자로 세움 받은 여호수아가 나이 많아 늙었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나이 많아 늙었다는 것은 기력이 떨어졌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스라엘에 앞장서서 가나안과 싸우며 정복할 힘이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다시 여호수아의 후계자를 내정한 것도 아닙니다. 여호수아를 대신 할 사람을 내정하지도 않은 상태인데 여호수아가 나이 많아 늙었고 또 정복해야 할 가나안 땅이 많이 남아있다는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근심거리가 되게 할 수 있습니다. 가나안 땅을 정복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인데 이제 누가 앞장서서 그 명령대로 가나안을 정복하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수아의 근심일 수 있고 이스라엘의 근심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이러한 근심으로 살 때가 많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인간은 무슨 일을 할 때 가장 먼저 생각하는 것이 그 일을 이룰 수 있는 자신의 여건과 힘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자신에게 목적한 바를 이룰 수 있는 여건이 주어져 있다면 근심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런 여건이 갖추어져 있지 않다면 아마 막막한 심정일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라는 근심이 그 마음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근심이란 인간이 자기를 바라볼 때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해결책이 자신에게 전혀 없을 때 근심하고 염려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 있는 여호수아에 하나님은 어떤 말씀을 하십니까? 6절에 보면 "또 레바논에서부터 미스르봇마임까지의 산지 모든 거민 곧 모든 시돈 사람의 땅이라 내가 그들을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리니 너는 나의 명한 대로 그 땅을 이스라엘에게 분배하여 기업이 되게 하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나이 많아 늙은 여호수아에게 아직까지 정복해야 할 많은 땅이 남아 있음을 상기시킵니다. 그것이 2-6절까지의 말씀입니다. 그러고 나서 하시는 말씀은 "내가 그들을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리니 너는 나의 명한 대로 그 땅을 이스라엘에게 분배하여 기업이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나이 많아 늙어서 싸울 기력이 없는 상태에서 그 땅을 이스라엘에게 분배하여 기업이 되게 하라는 것은 모든 일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호수아가 가나안과 전투한 것은 자신의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고 명령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가나안을 정복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 명령대로 전투한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신자가 잘못 오해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인간에게 명령하시고 인간은 그 명령을 이행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인간을 통해서 일하신다는 것인데 이것이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는 점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인간을 통해서 일하신다면, 인간에게 명령하시고 인간이 그 명령에 순종함으로서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오늘 본문 말씀처럼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할 수 없는 여건이 되었을 때 명령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우리의 상식대로라면 나이 많은 여호수아 대신 다른 사람을 지도자로 세우시겠다고 말씀 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명령이 계속 이어질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교를 명령하셨고 그 명령대로 선교하기 위해서 떠났다면 언젠가는 나이 많아 늙어서 모든 것을 중지해야 할 때가 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선교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은 다른 사람을 세우셔서 계속 이어가신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내가 그들을 쫓아내리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이 말씀 한마디는 '너 자신을 보지말고 나를 보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하시기 때문에 인간이 늙고 병든 것과 상관없이 하나님이 모든 일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하나님을 바라본다면 자신이 늙었다는 것이 근심거리로 남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늙은 것과 상관없이 내가 힘이 없다는 것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이루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바라보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하나님이 싸우시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것이지 하나님이 명령하시고 여호수아가 그 명령에 순종해서 자신의 힘으로 얻은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싸우시고 하나님이 주신 것을 받아서 나눌 뿐입니다. 6절 말씀대로 '이스라엘에게 분배하여 기업이 되게 하라'고 하시지만 분배할 땅은 여호수아가 싸워서 얻은 땅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땅입니다. 이것을 안다면 자신의 여건을 바라보며 근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나이 들어 늙은 상황에서 이스라엘이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싸우시고 하나님이 약속의 땅을 주신다는 믿음입니다. 여호수아를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볼 때, 그들은 여호수아에 상관없이 든든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신자는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사는 자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여건과 힘을 생각하고 근심하고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이루어 가신다는 것을 생각하고 든든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자가 신앙이 있는 신자입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수아를 의지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 역시 앞으로의 일을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여호수아가 자신이 늙었다는 것을 이유로 앞으로 일에 대해서 염려한다면 그것은 지금까지의 승리를 자신의 힘으로 얻은 승리로 생각했다는 증거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는 모세도 아니고 여호수아도 아니고 하나님이었습니다. 모세도 죽고 여호수아도 죽지만 하나님은 죽지 않습니다. 영원히 지도자로 이스라엘과 함께 할 것입니다. 이것을 안다면 그는 절대로 인간을 의지하거나 인간을 지도자로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의지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의지할 만한 여건과 힘과 조건이 갖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재주가 있다든지 아니면 돈이 있다든지 그것도 아니면 권력이 있다든지 어느 것 하나라도 내게 없는 것을 누군가가 가지고 있을 때 그 사람을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의지하는 자가 힘을 잃어버렸을 때 낙심하게 됩니다. 의지할 대상이 사라졌기 때문에 염려가 되고 근심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인간은 언젠가는 늙고 병들고 힘이 없어질 존재에 지나지 않습니다. 때문에 인간은 결코 의지할 대상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흔히 교회가 소위 능력이 있다는 목사를 의지하기가 쉽습니다. '우리 교회는 목사님이 없으면 안돼'라는 말을 서슴없이 하기도 합니다. 목사가 잘해서 교회가 이만큼 되었는데 저 목사가 없다면 교회 꼴이 뭐가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것이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안중에도 두고 있지 않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해도 우리 목사님을 더 능력 있게 하고 우리 교회를 더 부흥시킬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서 함께 하신다는 것으로 이해해버립니다. 그러나 교회의 지도자는 목사가 아니라 주님입니다. 목사는 교회를 지도하라고 세워진 것이 아니라 '주님이 교회를 지도하십니다'라는 말을 하라고 세워진 자입니다. 세상이 교회의 지도자라고 인정하는 목사를 세워서 '내가 지도자가 아니라 주님이 지도자입니다'라는 말을 하게 함으로서 목사라는 사람을 보지 않고 주님만 바라보는 신자, 순수하게 하나님이 주신 신앙으로 살아가는 자를 찾으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가나안 땅은 축복의 땅입니다. 그런데 그 축복의 땅은 인간의 힘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 여호수아의 늙음을 통해서 드러났습니다. 여호수아가 늙어서 전투를 더 이상 못하게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약속대로 가나안 땅 모두가 이스라엘에게 주어집니다. 결국 가나안 땅은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고, 그래서 그 땅을 축복의 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만약 인간의 힘에 의해서 얻어지는 땅이라면 축복의 땅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 얻어지는 땅이기 때문에 축복의 땅인 것입니다. 가나안 땅이 살기가 좋은 땅이고 곡식이 잘 열리는 비옥한 땅이기 때문에 축복의 땅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들어가게 하시고, 하나님이 주신 땅이기 때문에 축복의 땅입니다. 그리고 이 축복의 땅에서 사는 자는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사는 자들입니다.

오늘날 성도에게 축복의 땅은 무엇입니까?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이 땅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루어주실 땅입니다. 우린 단지 받아 누리는 자로 부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기둥 같은 일꾼이 많아야 한다는 것은 교회를 바라보는 것이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잘되기 위해서는 분명 일 잘하고 많이 하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는 특별히 일 잘하고 많이 하는 사람이 필요치 않습니다. 일은 하나님이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가 병든 자라면 나를 병들게 해서 하나님이 병든 나를 이용하고자 하시는 것이고, 돈이 없다면 돈 없는 가난한 자 되게 해서 가난한 나를 이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진심으로 주님을 지도자로 여기고 모인다면,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믿고 모이는 교회라면 일꾼이 따로 없을 것입니다. 모든 성도가 일꾼이고 주님의 일을 하는 봉사자로 모여질 것입니다. 그러한 교회는 돈있고 힘있는 자가 오는 것을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만 바라보는 신앙이 있는 자가 오는 것을 기뻐할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늙고 기력이 떨어진 것과 상관없이 가나안 정복은 약속대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래서 신자는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만 신뢰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 일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이 아닙니다. 돈도 없으면서 '예배당을 짓자'고 하면서 '우리는 못하지만 하나님은 하신다'는 말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루시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지 우리의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기 위해서 일하시는 것입니다.

신앙의 근거를 자신에게 두게 되면 젊고 건강할 때 교만하게 되고 늙고 기력이 떨어지면 낙심하게 됩니다. 그러나 젊을 때는 내가 힘이 있고 건강하기 때문에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게 하셨다는 것을 믿고, 늙어지면 지금까지 나를 인도하신 분은 하나님이었다는 것을 새롭게 깨달으며 하나님만 신뢰하는 것으로 살아가는 것이 신앙입니다.

고전 3:6-7절을 보면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심는 이 물 주는 이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심고 물 주는 인간의 행위에 상관없이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모든 것을 이루신다는 것을 항상 생각하며 사십시오. 그럴 때 자신에게 주어져 있는 여건을 바라보면서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않게 되고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든든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만 바라보는 신앙, 이 신앙으로 사는 자가 그리스도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