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항상 하나님이 우리편이 되어야 한다는 발상을 버리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편만 되어주신다면 인생의 형통은 보장받은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축구 경기를 관전할 때 실력 좋은 외국 선수가 골을 넣을 때마다 '저 선수가 우리편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승리는 따놓은 당상인데'라는 상상을 많이 할 것입니다. 실력이 좋은 선수가 우리편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상상을 하게 되는 것처럼 능력이 있으시고 세상일을 자기 마음대로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 내 편이 되어 주신다면 내 인생은 탄탄대로가 될 것이 아니냐는 환상 속에서 하나님이 내 편이 되어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상상하는 하나님이란 신은 인간과 호흡을 맞춰서 함께 해주는 신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들기만 하면 뭐든지 원하는 대로 다 들어 줄 것 같은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저마다 하나님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애를 쓰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애당초 하나님의 마음에 들 인간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꿈에도 모른 채 말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위해서 행동하는 인간은 거부하십니다. 그가 어떤 일을 했느냐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해 했느냐를 따지시는 것입니다. 빌 2:13절에 보면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말씀합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의 소원을 이루어주시는 분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분이라고 말씀합니다. 결국 하나님은 우리들의 소원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분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행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속에 자기의 소원을 두고 행합니다. 자기의 소원을 따라 행동하는 것입니다. 모든 활동의 목적이 자기 소원을 위한 것인데, 그리고 자신의 소원성취를 위해서 하나님을 찾는 것인데 난데없이 하나님은 우리의 소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행하게 하신다고 할 때 반감이 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소원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의 소원이 우리들의 유익과 연결이 되어 있다면 하나님의 소원을 위해서 행한다고 해도 별 상관이 없을텐데 하나님의 소원은 철저하게 이 세상과 단절된 것이기 때문에 세상에 소원을 두고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환영을 받을 수 없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인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문제점은 항상 하나님을 보지 않고 산다는 것입니다. 내 주위에 있는 누군가가 하는 일이 잘되고 소위 축복이라는 것을 받았을 때 우리는 그의 배후에서 그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보지 못하고 좋은 것을 받고 누리는 그 사람만 보입니다. 그래서 '내가 저 사람보다 못한 것이 뭔데 나는 이렇게 하고 저 사람은 저렇게 해주느냐?'고 짜증을 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위해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만 눈에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는 시각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은 보지 못하고 아브라함만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좋은 신앙을 가지자'는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모든 삶에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열심이 개입되어 있는데도 말입니다.
바울을 바라볼 때도 함께 하신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바울만 보입니다. 선교를 많이 하고 능력을 행한 바울만 보이기 때문에 바울이 위대한 사람이고 능력의 사도이지 바울을 바울 되게 하신 하나님의 능력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설교를 해서 몇 천명이 회개했다고 하니까 베드로의 그러한 능력을 탐을 냅니다. 베드로와 함께 하나님은 도무지 생각하지를 못하고 설교 하나에 몇 천명을 회개하게 한 베드로의 설교 솜씨만 보이는 것입니다. 나에게 베드로와 같은 설교 능력만 주어진다면 내 교회가 부흥되는 것은 문제도 아니다는 탐욕과 함께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편이 되었으면 하는 기대를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편만 되어준다면 내 교회 편만 되어준다면 내 소원을 이루는 것은 식은 죽 먹기보다 더 쉬울 것이니 말입니다. 이것이 눈에 보이는 것을 전부로 알고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보이는 것을 서로 많이 차지하기 위해서 경쟁을 하며 살아갑니다. 이것이 마귀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인간입니다.
마귀의 유혹에 빠진 인간에게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와가 마귀의 유혹을 받았을 때, 그에게는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오직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과일이 보였을 뿐입니다. 이러한 타락한 인간의 속성이 바로 아담 이후로 태어난 모든 인간에게 있습니다. 바로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그러한 속성이 고스란히 살아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 역시 아담의 실수를 반복하면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보이는 세상이 마음에 확 들어오기 때문에 세상은 보여도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돈은 보여도 생명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볼 수 있고 생명을 볼 수 있느냐?'는 어리석은 말은 하지 마십시오. 그 속에 생명이 있는 자는 생명을 보게 되고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물론 실제 우리의 눈으로 본다는 말은 아닙니다. 육신의 눈은 믿을 것이 못됩니다. 보이는 것만 볼 수 있는 것이 육신의 눈입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은 생명입니다. 생명으로 인해서 그 마음이 하나님에 대해서 살아있을 때 그는 하나님을 보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을 봐도 바울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바울과 함께 하신 하나님을 같이 봅니다. 베드로를 봐도 베드로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에게 함께 하셨던 하나님이 함께 보이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베드로에게 함께 하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면 나도 베드로처럼 몇 천명을 회개하게 할 수 있는 설교를 할 수 있을 것이 아니냐는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그런 생각 역시 회개한 몇 천명의 사람만 보는 것이지 하나님은 보지 않는 것입니다.
이처럼 항상 보이는 것에 매료되어서 살아가는 인간들이 하나님을 보지 못함으로 인해서 두려움과 근심과 염려 속에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보이는 세상의 것, 즉 세상을 살아가는데 힘이 되는 것들이 자신의 곁에 있을 때는 마음 든든해하며 살아가지만 보이는 것이 없으면 허전해하면서 주님을 원망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면 행복하고 평안하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주님이 함께 있는 증거를 엉뚱한데서 찾는 것입니다. 놀라운 기적이 있고 보이는 것이 채워지는 것을 통해서 '주가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체험하려고 하고 예수 믿는 재미를 느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보이는 것이 전부인 인간들에게는 보이는 것이 두려움의 대상으로 다가올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소원을 두고 행하신다면 그것은 보이는 것으로 살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으로 살아가는 인간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많은 부분에서 '담대하라'는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세 대신에 여호수아를 앞장세우시고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실 때 말씀하신 첫 마디가 '내가 너와 함께 하리니 두려워 말고 담대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요단강을 건너는 여호수아를 기다리는 것은 전쟁입니다. 가나안 족속을 모두 진멸해야 하는 전쟁이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관건은 군사력에 있습니다. 잘 훈련된 군사, 무기, 힘 이런 것들이 조화를 이루어서 승리를 이끌어 낸다는 것은 전쟁에서 의 상식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 모든 조건에 부합되지 않습니다. 40년을 광야에서 떠돌았기 때문에 군사훈련을 제대로 했을 리가 만무합니다. 힘은커녕 지칠 대로 지친 그들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전쟁을 한다 해도 승리하고는 전혀 거리가 멀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을 책임져야 할 여호수아로서는 두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여호수아에게 담대하라고 말씀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살지 말라는 말씀과 같습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는 것입니다. 가나안 족속의 힘을 보지말고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보고 살아라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패배했다고 해서 기고만장하지 말고 상대방이 강하고 힘이 있어 보인다고 해서 절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증거는 보이는 세상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니까 세상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물을 찾으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는 세상보다 하나님이 더 크게 보이는 것입니다. 세상의 좋은 것보다는 하늘의 것이 더 좋고 귀하고 가치 있는 것으로 보여지고 천국에 의해서 내 마음이 사로잡힌 상태로 살아가는 것이 곧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입니다. 오늘 우리는 보이는 것으로 살지 않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으로 그 마음이 사로잡힌 채 살아가는 한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바로 갈렙입니다.
여호수아가 나이 많아 늙고 이제 취한 가나안 땅을 각 지파에게 분배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기업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유다 지파 중에서 갈렙이 나와서 기업을 분배하는 일에 대해서 말하는 내용입니다. 물론 나에게 기업을 더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원래 기업을 분배할 때 방법은 제비뽑기입니다. 14: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그들의 기업을 제비뽑아 아홉 지파와 반 지파에게 주었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제비를 뽑아서 기업을 분배하라고 하신 것은 분배의 주관자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분배의 주관자가 하나님일 수밖에 없는 것은 가나안 땅을 얻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제비를 뽑아라는 것은, 내 것을 내가 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대로 받아라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이 모두가 같을 수는 없습니다. 좋은 땅이 있으면 좋지 않은 땅도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사람들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서로 좋은 땅을 차지하고 싶을 것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제비를 뽑는다면 좋은 땅이 걸린 지파는 좋아하겠지만 좋지 않은 땅이 걸린 지파는 투덜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땅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본다면 결과는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굳이 제비를 뽑아라고 하신 것은, 땅을 차지하기 위한 지파들간의 분쟁을 막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제비를 뽑아서 각자의 소유를 결정한다는 것은,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내 것을 가지고 제비를 뽑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내것이라는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는 것을 서로 나누어야 할 때 가장 좋은 방법이 제비뽑기입니다. 결국 가나안 땅을 제비뽑아라고 하신 것은, 가나안 땅은 너희들 소유가 아니다는 것입니다. 너희들 힘으로 취한 땅이 아니라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 제비뽑기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갈렙은 전혀 다른 형태를 취합니다. 그것은 스스로 기업을 얻을 땅을 지목을 하는 것입니다. 제비를 뽑아서 분배해야 할 땅을 제비뽑기를 하지 않고 스스로 지목하여 취한다는 것은 분명히 이스라엘의 반발을 살 수 있는 행동입니다. 그런데 전혀 반발이 없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갈렙이 지목한 땅이 이스라엘이 보기에 전혀 욕심을 일으킬만한 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12절에 보면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혹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필경 여호와의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고 말씀합니다.
갈렙이 요구한 땅은 헤브론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헤브론 땅은 이스라엘이 정복한 땅이 아닙니다. 헤브론에는 아직 아낙 자손들이 있습니다. 아낙 자손은 체구가 거대한 족속입니다. 이스라엘 중에 누가 과연 이 땅을 차지하고자 하겠습니까? 제비뽑기를 해도 그 땅이 자기들에게 걸릴 것을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갈렙은 그 땅을 원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갈렙이 왜 굳이 헤브론 땅을 원하는 것입니까? 아낙 자손과 싸우기를 좋아해서입니까? 이것은 과거 가나안 땅을 정탐했을 때의 사건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갈렙은 바로 그 일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갈렙은 여호수아에게 나와서 가데스바데아에서 있었던 일을 언급합니다. 9절에 "그 날에 모세가 맹세하여 가로되 네가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은즉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영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하였나이다"라고 말합니다. 과거 열 두 영의 정탐꾼이 가나안을 정탐했을 때 열 명의 사람들은 가나안을 정복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에 어떤 사람들이 있든 상관없이 가나안은 하나님이 약속한 땅이기 때문에 들어가면 된다고 말합니다. 이와 같이 가나안 땅의 족속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만 바라보고 가나안 족속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던 갈렙에 대해서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오직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좇았은즉 그의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민14:24)고 합니다. 즉 갈렙은 이미 자신이 기업으로 얻을 땅을 약속 받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굳이 제비 뽑을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당시 갈렙이 정탐한 땅은 헤브론이었습니다. 그래서 헤브론을 요구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이기 때문에 그 땅이 곧 내 기업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드린 대로 헤브론 땅에는 건장한 아낙자손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결국 헤브론 땅을 취하기 위해서는 그들과 전쟁을 해야 했던 것입니다. 만약 갈렙이 하나님의 약속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었다면 아무리 하나님이 자신에게 약속한 땅이라고 해도 가만히 있는 것이 정상입니다. 차라리 제비를 뽑아서 저 땅을 기피하고 싶은 것이 인간 본연의 마음일 것입니다. 그런데 갈렙은 여호수아에게 나와서 아주 당당하게 하나님이 나에게 약속하신 땅을 내게 달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건장한 아낙 자손과 싸워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걱정이 없습니다. 45년 전에 모든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대해서 두려워하고 모세를 원망하던 것과는 달리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민14:9)고 외쳤던 갈렙의 믿음이 그대로 드러난 것입니다. 가나안의 상황보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은 갈렙의 믿음이 45년이 지나서 85세의 나이가 된 지금에서도 여전히 갈렙에 의해서 보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10-11절을 보면 "이제 보소서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모세에게 이르신 때로부터 이스라엘이 광야에 행한 이 사십오 년 동안을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를 생존케 하셨나이다 오늘날 내가 팔십오 세로되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날 오히려 강건하니 나의 힘이 그 때나 이제나 일반이라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사온즉"라고 말합니다. 갈렙이 가나안을 정탐한 때가 40세입니다. 그리고 45년이 지난 85세가 되어서 오늘 본문과 같은 말을 하는 것입니다. 85세면 이미 늙은 나이입니다. 기력이 다 떨어진 나이에 건장한 아낙자손들이 있는 헤브론을 달라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무모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갈렙에게는 아낙자손들이 건장하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만 위대하게 보일 뿐입니다. 아낙자손들의 체구가 얼마나 크든 하나님이 주신다고 했으면 저 땅은 우리 땅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보이는 것으로 살지 않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으로 살아가는 갈렙의 믿음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갈렙에 대해서 여호수아가 어떻게 합니까? 13절에 "여호수아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을 위하여 축복하고 헤브론을 그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매"라고 말합니다. 갈렙을 위해 축복했다는 것은 갈렙이 힘을 얻어서 아낙 자손을 이기기를 기원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갈렙과 같은 그런 믿음이 곧 축복 안에 살아가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국 축복 받은 자로 살아가는 것은 보이는 것을 보고 사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살아가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하늘의 것을 바라고 하늘의 것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것이 바로 복의 상태인 것입니다.
그러나 갈렙의 복의 상태는 세상이 보기에는 복이 아니라 오히려 난처하고 어려운 상황에 빠진 것입니다. 세상이 생각하는 복이란 손쉽게 세상의 것이 자기의 손에 주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갈렙을 기다린 것은 건장한 아낙자손입니다. 더군다나 아낙 사람가운데서도 가장큰 아르바 사람들이 갈렙을 기다립니다. 갈렙은 그들과 전투를 해야 할 상황인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축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갈렙이 가고자 한 길은 자신을 살리는 길이 아니라 죽이는 길이었습니다. 그 길을 복이라고 말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겠습니까? 어떻게든 편한 길로 가기를 애를 쓰는 것이 사람인데, 오히려 고생이 되는 길로 가겠다고 나서는 갈렙이 정상으로 보여지겠습니까?
하나님이 갈렙에게 남겨 놓으신 길은 편한 길이 아니라 힘든 길이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또한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남겨 놓으신 신앙의 길이기도 합니다. 신앙의 길은 절대로 편한 길이 아닙니다. 우리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상황으로 몰아 넣기도 하십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나는 할 수 없다고 할 때 하나님이 하게 하심으로서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보이지 않는 것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 약속을 믿고 산다는 것은 보이는 것을 힘으로 삼지 않는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그것이 신자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돈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러한 자가 되게 하기 위해서 일하시는 것입니다. 생명으로 인도 받는 자는 언제나 보이는 것과 싸우는 삶이 계속될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에게 고난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 것에 부러워하지 않고 세상 것에 기죽지 않고 약속된 하늘의 것으로 감사하며 살아갈 때 그것이 생명을 보여주는 증인으로 사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