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15:13-19 필요한 것

지난 주일에 세상이 보인다는 것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보인다는 것이 세상을 살아가는데는 편리할지 모르지만 보이는 세상을 사는 것은 사실 힘든 일입니다. 왜냐하면 보이는 세상을 살아가면 자연 보이는 것이 전부인 것으로 생각하게 되고, 보이는 것이 전부이기 때문에 보이는 것을 내 소유로 만들어야 비로소 행복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침에 눈을 뜨면 세상이 보입니다. 하나님, 예수님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좋은 차를 굴리는 사람들이고 좋은 집에서 떵떵거리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자연 마음속에는 나도 저처럼 살아봤으면 하는 욕심이 자리합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족한 줄 알고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는 잊어버린지 오래입니다. 돈이 있어야 사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은혜로 족한 줄 알아라는 말은 세상을 전혀 모르는 말이고, 아직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 줄 모르고 돈이 힘이 되는 현실을 몰라서 그렇다고 치부해 버립니다.

세상은 온통 보이는 것을 서로 차지하기 위한 싸움터입니다. 세상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자가 되기 위해서 온갖 발버둥을 치며 살아갑니다. 이렇게 보이는 것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두말할 것 없이 돈입니다. 돈만 있으면 못할 것이 없습니다. 하고 싶은 것을 다 할 수 있습니다. 갖고 싶은 것을 다 가질 수 있습니다. 이 돈에 대해서 초월할 자가 과연 누구이겠습니까? 돈의 힘은 참으로 무섭습니다. 예수께 대한 관심까지 포기하게 해 버릴 정도로 돈의 힘은 강합니다. 돈 앞에서 무릎 꿇지 않을 인간이 누구이겠습니까?

교회가 예배당을 짓고자 할 때 필요한 것은 돈입니다. 기도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필요하고 예수님의 십자가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기도가 예배당을 짓습니까? 믿음이 땅을 살 수 있습니까? 하나님 예수님이 예배당 짓는데 무엇을 보태주겠습니까? 예배당 건축에 필요한 것은 돈이기 때문에 돈 많이 바칠 교인이 필요하지 예수님은 오히려 방해만 될 뿐입니다. 결국 돈많은 교인이 하나님이 되버립니다. 하나님이 교회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돈 많은 부자가 교회를 다스리는 위치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대 교회의 실정이라고 할 수 있다.

교회가 예수님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교회마다 하나님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돈이 보입니다. 돈만 있으면 땅도 사고 건물도 짓고 이것저것 좋은 것은 다 할 수 있을텐데 하면서 돈 없는 내 교회의 현실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없고 예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 교회, 그러면서도 교회라는 간판을 유지하기 위해서 성경을 펼치고 기도하고 예배를 드리는 교회, 오직 자기 필요에 의해서 기도하고 성경보고 헌금하는 교회, 이것이 현대 교회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같이 되고자 했을 때 필요한 것은 선악과였습니다. 선악과는 먹으라고 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즉 인간의 필요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모든 것을 다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냥 먹으라고 주신 것을 먹으면 되었던 것입니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찾아가고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에 그냥 먹는 것입니다. 따라서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는 인간에게 주지 않은 것이기에 안먹으면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단의 유혹에 빠진 인간은 자기 스스로 목표를 가지게 됩니다. 스스로 목표를 가졌다는 것은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뭔가를 필요로 하는 인간으로 달라졌음을 의미합니다. 결국 스스로 목표를 가진 인간은 자신의 목표를 이루는데 선악과가 도움이 될 것으로 여기고 선악과를 필요로 한 것입니다. 그래서 선악과를 따먹은 것이 인간입니다.

세상이 바로 이러한 인간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모든 인간이 자신의 목표를 세운 채 살아갑니다. 자기 목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필히 있어야 할 것이 있고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얻기 위해서 경쟁을 하고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남을 짓밟아서라도 내 것으로 만들려고 하고, 심지어는 남의 입에 들어있는 것까지 빼앗아야 직성이 풀리고 그것을 능력으로 여기는 세상입니다.

여러분이 이러한 세상에서 신자로 살고자 할 때 곤란하게 여기는 것도 내가 추구하는 예수님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전혀 도움이 못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내가 추구하는 목표를 이루는데 전혀 쓸모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난감해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십자가를 포기할 수도 없고, 그런데 성경은 십자가와 세상을 반반씩 적당히 나누어서 쫓는 것을 용납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많은 갈등에 휩싸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도 이러한 갈등이 있을 것입니다. 실력이 있어야 하고 돈이 필요한 이 세상에서 예수님 한분만 주장하고 산다는 것이 어리석게 보이고 세상에서 실패하고 나약한 자로 전락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할 것입니다. 경쟁에서 이겨야 살아갈 수 있는 세상에서 하나님이 주신 것만 먹고산다는 것이 뭔가 못마땅하게 들려질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못된 성품이고 아담이 보였던 실수를 오늘 우리가 똑같이 자행하고 있는 모습인 것입니다.

세상은 눈에 보이는 것에 매달려 허우적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 때문에 울고 웃으면서 모든 인생의 가치를 보이는 것에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인간에 대해서 잘 아십니다. 그래서 세상에 보내시는 아들도 목수의 아들로 보내신 것입니다. 보이는 것으로 살아가는 세상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목수의 아들로만 볼뿐이지 하나님으로 보지 않을 것을 아신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 유대인들에게만 국한된 문제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도 있는 타락된 성품입니다.

예수님 당시 세상은 예수님을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보이는 것으로 살았던 세상이기에 예수님이 없이도 자신들의 죄는 자신들의 힘으로 처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제사지내고 금식하고 십일조하면서 하나님을 섬기면 충분히 죄가 해결되는데 무엇 때문에 예수라는 사람의 피가 필요하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을 죽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너의 피가 아니라 제사고, 우리들의 열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여러분은 진심으로 예수님을 필요로 하십니까?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가 묻는 것은 천당 가기 위해서 필요한 분으로만 인정하느냐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살아가는데도 예수님만 있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살아가느냐는 것을 묻는 것입니다. 과연 여러분의 생각은 어떤 것인지 궁금합니다.

예수님만을 필요로 할 수 있는 것은 현실을 제대로 볼 때 가능한 일입니다. 즉 세상을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판단했을 때 왜 예수님이 필요한지 그 답을 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갈렙이 자신의 딸을 옷니엘에게 시집보내는 내용이 나옵니다. 16절에 보면 "갈렙이 말하기를 기럇 세벨을 쳐서 그것을 취하는 자에게는 내가 내 딸 악사를 아내로 주리라 하였더니"라고 말합니다. 누구든지 기럇 세벨을 쳐서 그것을 취하는 자는 자신의 딸 악사를 아내로 준다고 약속을 합니다. 그러자 옷니엘이 기럇 세벨을 쳐서 취하게 되고 약속대로 악사를 아내로 맞이합니다. 그런데 18,19절에 보면 "악사가 출가할 때에 그에게 청하여 자기 아비에게 밭을 구하자 하고 나귀에서 내리매 갈렙이 그에게 묻되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가로되 내게 복을 주소서 아버지께서 나를 남방 땅으로 보내시오니 샘물도 내게 주소서 하매 갈렙이 윗샘과 아랫샘을 그에게 주었더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악사가 갈렙에게 요구한 것입니다.

시집간 악사가 갈렙을 찾아옵니다. 그리고 나귀에서 내릴 때 갈렙이 악사에게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라고 묻습니다. 아마 악사가 나귀에서 내린 것은 뭔가 자신에게 요구할 것이 있는 것으로 판단한 것 같습니다. 어쨌든 악사는 갈렙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라고 묻는 물음에 대해서 '아버지가 나를 남방 땅으로 보내시니 샘물을 주소서'라고 요구합니다. 왜 악사는 갈렙에게 샘물을 요구하였겠습니까? 우리가 보기에 샘물은 하찮은 것입니다. 오히려 더 많은 땅을 요구한 것이 지혜로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악사는 많은 것을 차지하는 것이 관심이 아니라 주어진 것에서 생명을 유지하는 것이 관심이었던 것입니다.

남방 땅이란 건조하고 메마른 지역입니다. 건조하고 메마른 지역이라면 물은 필수적입니다. 많은 땅을 차지하는 것보다는 물을 확보하는 것이 더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악사는 자신이 살 지역에서는 물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고 갈렙에게 샘물을 요구한 것입니다. 이러한 악사의 요구에 갈렙은 윗샘과 아랫샘을 악사에게 줍니다. 윗샘과 아랫샘은 높은 지역에 있는 샘과 낮은 지역에 있는 샘을 말합니다. 즉 높은 지역의 땅이든 낮은 지역의 땅이든 물로 인해서 어려움이 없도록 한 것입니다.

이렇게 악사가 갈렙에게 샘물을 요구한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악사는 자신이 살 땅이 어떤 땅인가를 알았습니다. 메마르고 건조한 땅이기 때문에 그 땅에 필요한 것은 물이라는 것을 알았고 물을 요구한 것입니다.

여러분, 만약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다가오셔서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라고 하신다면 여러분은 과연 하나님께 무엇을 요구하시겠습니까? 악사는 갈렙에게 '내게 복을 주소서'라고 하고서 요구한 것은 샘물이었습니다. 악사에게 있어서 복은 메마른 땅에서 자신들에게 생명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메마른 땅에서 생명 되는 것은 물이지 않습니까?

오늘날 세상은 생명 되는 것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세상이 바라보는 것은 자신의 목표와 소원을 이뤄주는 것입니다. 세상을 보고 살면서도 세상이 어떤 땅인가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단지 세상에서 나라는 존재가 남보다 성공하고 자랑할 것이 있는 모습으로 존재하기만 원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라고 물으신다면 대답은 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갈 2:20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삶의 모든 근거를 그리스도에게 두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도 바울이 보는 세상은 심판의 땅이기 때문입니다. 심판 받기로 이미 작정되어진 땅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심판에서 생명 되는 것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신자가 세상을 보는 눈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을 심판의 대상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보는 눈은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마24:37-39)는 말씀 그대로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시집가고 장가들면 그것을 단지 축하할 일로만 보지만 예수님은 심판을 의식하지 않고 살아가는 그런 모습들을 이미 심판 속에 있는 것으로 보신 것입니다. 결국 심판을 의식하지 않는 모든 삶은 심판 때까지 잠시 유보되어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돈 벌었다고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돈 번 재미도 심판 때까지 잠시 허락되어 있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심판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세상만 보입니다. 심판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피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돈을 필요로 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실체인데, 이 세상 속에서 저와 여러분은 과연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세상 사람과 똑같이 돈을 필요로 하고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의 심판을 보고 산다면 세상의 모든 것이 헛된 것으로 보여질 것입니다. 거대하고 으리으리한 예배당이 심판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공한 자식이 심판을 극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돈이 우리로 하여금 심판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심판에서 생명 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피밖에 없습니다. 십자가가 우리를 심판에서 건지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을 심판의 장소로만 보고 산다면 자연히 그리스도의 피가 나에게는 생명이고 주님이 곧 나에게 생수라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도들이 세상을 보이는 대로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진심으로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 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곧 지혜이고 사는 길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은 우리의 믿음을 확인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있게 하신 것으로 여기십시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무시하고 세상만 보고 사는 사람은 결국 마귀의 종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구멍이 나서 침몰하는 배에서 한가롭게 춤추며 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침몰하는 배에서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니고 집이 아닙니다. 구명보트 하나입니다. 배가 침몰하지 않을 때는 눈길도 돌리지 않던 보트인데 침몰하는 상황에서는 생명선으로 보여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배가 침몰할 것을 미리 안 사람이라면 어떤 행동을 하겠습니까? 다른 사람이야 춤을 추고 놀든 말든 상관없이 구명보트를 확보하고 그것을 붙들고 놓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인자가 다시 올 때 사람들은 평상시처럼 먹고 마시고 밭에서 일을 하고 살아가지만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버림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참으로 심각하고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것을 안다면 밭에서 일을 하면서도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시각에서 일을 해야 하는데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것을 잊고 살아가기 때문에 옆사람이 수확한 것을 바라보게 되고 나보다 많이 소유하게 된 것을 시기하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심판을 믿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교회에 나오실 이유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목표한 대로 열심히 살아가시면 됩니다. 그러나 심판이 있음을 인정하신다면 심판 속에서 생명 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분명히 하시기 바랍니다. 왜 그리스도의 피에 모든 소망을 두고 가장 귀하고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야 하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분명히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심판의 세상에서 오직 그리스도만을 생명으로 여기고 살아가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것이 오늘 이시간 심판의 세상에 보냄을 받고 멸망의 땅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에게 주신 기도 제목입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은 돈 없이 살고 남보다 부족하게 사는 것으로 애통해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만을 생명으로 여기고 생명이 나에게 계신 것으로만 감사하지 못하는 자신의 못남 때문에 애통해 하는 자로 살아갈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신자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신자는 하늘에 계신 예수님이 세상을 지배하시고 장차 심판하기 위해서 오신다는 것을 전하라고 뽑힌 자입니다. 돈도 아무것도 아니고 성공도 헛된 것이고 인생도 다 허무한 것이로되, 오직 주님이 흘리신 피만이 가치 있는 것이고 우리를 살리는 생명이라는 것을 전하라고 여러분을 신자로 뽑았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