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15:20 땅

요즈음 세상이 2000년 때문에 떠들썩합니다. 2000년의 시대에는 뭔가 한번 해보자고 하면서 새로운 각오도 세웁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21세기를 맞이하는 교회의 비전이라든지 21세기를 맞이하여 우리의 할 일이라든지, 여러 가지 주제를 가지고 세미나를 하기도 하고 부흥회를 하기도 합니다. 마치 2000년이 새로운 희망을 가져다주기나 하는 것처럼 2000년에 21세기에 매달려서 동분서주하는 모습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2000년이니 21세기니 하는 것들은 모두가 허구고 환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2000년에 뭔가 새로운 것이 담겨 있는 것이 아닙니다. 2000년이 되는 첫날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해를 보기 위해서 동해 쪽에는 이미 모든 숙박시설의 예매가 매진되었다는 말을 들었지만 1999년 12월 31일에 떠오른 해나 2000년 1월 1일에 떠오른 해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천년전의 해나 천년 후의 해나 다를 바가 전혀 없습니다. 그 해가 그 해 그대로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날짜를 계산하고 년수를 계산하다보니 년수가 천단위로 바뀌는 해에 스스로 큰 의미를 두게 되는 것입니다.

가령 교회가 창립 몇 주년 하면서 행사를 하는 것을 많이 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창립 행사를 하면서 내건 년수가 꼭 10단위 아니면 100단위라는 것입니다. 즉 창립 10주년, 20주년 이렇게 10단위로 하다가 50주년이 되면 더욱 크게 행사를 합니다. 그러다가 100주년이 되면 떠들썩하게 행사를 합니다. 왜 11주년은 없는 것입니까? 12주년 13주년은 없습니까? 결국 사람들은 숫자 단위가 바뀌는 것에 이상하게 관심을 두고 산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비록 세상은 2000년 시대를 떠들고 2000년이 되면 뭔가 될 것 같은 착각에서 새로운 희망들을 가진다고 해도 교회는 그러한 분위기에 휩쓸리면 안됩니다. 교회의 희망은 새로운 21세기, 밀레니엄 시대, 2000년이 아니라 어제도 오늘도 변함 없이 그리스도입니다. 아무리 2000년이 된다고 해도 하나님을 모르고 그리스도를 모르고 산다면 망할 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2000년이라는 허구에 눈을 돌리지 마시고 여기저기서 해가 바뀌고 세기가 바뀌는 것에 의미를 두면서 새로운 각오를 다지고 다짐을 하는 분위기가 가득하다고 할지라도 언제나 하나님을 알고 그리스도를 아는 일에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은 2000년이 되건 21세기가 되건 상관없이 심판 받을 장소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모르는 자는 심판하시고야 만다는 것이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하나님의 이 의지는 어제도 오늘도 변함이 없습니다. 1999년이나 2000년이나 동일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해가 바뀌든 세기가 바뀌든 관계없이 신자의 모든 관심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 집중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교회가 세상과 똑같이 2000년이라는 년수에 흥분되어서 마음이 분주하다면 그것은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2000년이란 단지 숫자의 바뀜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다만 해가 뜨고 지는 것을 반복하셨을 뿐인데, 그것을 인간이 구분해서 날과 달과 년으로 계산한 것이고, 그 계산법에 따라서 숫자가 바뀐 것이 2000이라는 수까지 도달한 것뿐입니다. 그런데 숫자가 바뀐 것이 무슨 큰 의미가 있는 것처럼 떠들고 야단법석을 떤다면 과연 그들이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새로운 해가 되어서 새로운 각오를 다져봐야 며칠 가지 못하는 것은 한두번 경험한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 인간이 2000년에 떠오르는 해를 보면서 뭔가 다짐을 하고 결심을 한들 다를 바가 뭐가 있겠습니까? 꼭 2000년에 떠오르는 해를 보고 다짐을 해야 실천을 할 힘이 생기는 것입니까? 그것은 단지 인간의 느낌이고 감정일 뿐입니다.

2000년이든 21세기든 상관없이 그리스도를 모르는 자는 망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원칙입니다. 이 원칙은 세상이 창조된 이래 수없이 해가 뜨고 지는 것이 반복되어지는 가운데서도 변함 없이 확정되어 있는 원칙임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오늘도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2000년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고 그리스도를 아는 것임을 마음에 굳게 세우셔야 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니까 세상이 헛된 것이고 2000년이 헛된 것임을 모릅니다. 시 144:3,4절에 보면 "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알아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관데 저를 생각하시나이까 사람은 헛것 같고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으니이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알면 사람이 헛것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인생이라는 것이 지나가는 그림자 같은 것이고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안개와 같은 것임을 알게 됩니다. 나만 헛것이 아니라 2000년을 기다리고 2000년에 떠오르는 해를 보겠다고 동해로 몰리는 사람들도 헛것이고 세상 모든 자들이 다 헛것임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아는 자와 모르는 자의 차이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는 자신이 헛것임을 모르고 살아가지만 하나님을 아는 자는 자신이 헛것임을 알고 사는 것입니다. 내가 헛것임을 알기에 헛것이 아닌 것을 찾게 되었을 때, 오직 그것만 소망하고 붙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가 말씀을 대하는 것은 우리가 헛것임을 발견하고 헛되지 않은 분을 알아가며 그 분을 우리 마음속에 굳게 세우기 위해서 모여서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교회에서 자신의 경험으로 배운 하나님을 말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는 우리들의 삶의 경험에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통해서 배워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말씀이 계시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모든 관심이 집중되어야 합니다. 세상이 성탄절이니 2000년이니 하면서 들떠 있는 분위기라고 해도, 신자는 거기에 상관하지 말고 차분한 마음으로 오늘도 여전히 말씀이 계시하는 하나님을 알고자 할 뿐입니다. 그럴 때 은석교회는 한 하나님에 대해서 한 목소리를 낼 수 있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21세기에 새로운 비전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을 알고 그분에게만 순종하며 살아가는 신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계시되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지를 알아가기에 힘을 써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은 여호수아가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각 지파가 제비뽑아 얻은 땅을 분배하기 시작하는 내용입니다. 땅분배는 15장의 본문으로 시작해서 19장까지 계속되어집니다. 땅 분배의 내용을 읽어보면 사실 별 의미가 없는 말씀처럼 여겨질 것입니다. 유다 자손이 어느 땅을 얻었고 요셉 자손이 어느 땅을 얻었고 베냐민 자손이 어느 땅을 얻었다는 등등의 내용들이 사실 오늘날 우리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아리송할 수밖에 없습니다. 기껏 생각한다고 해봐야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약속한대로 가나안 땅을 주셨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축복의 땅을 주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축복을 하실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겠습니까? 성경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말씀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이해가 되지만, 도대체 이런 본문이 우리에게 말하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냐는 사실에 대해서는 난감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약속대로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을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하나님의 약속은 분명히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고 살아갑시다'라는 말을 해도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약속을 성취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땅 분배의 내용을 단지 약속을 성취하신 하나님으로만 생각하고 지나치기에는 뭔가 부족한 면이 있다고 여겨집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이스라엘에게 땅을 분배하시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지를 알아보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무엇을 요구하시는지를 배워서 하나님의 요구에 순종하는 삶이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20절 "유다 자손의 지파가 그 가족대로 얻은 기업은 이러하니라" 이스라엘의 땅 분배는 오늘 본문을 시작으로 합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가나안 땅이 분배되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단지 40년의 세월을 광야에서 고생한 것에 대한 대가이겠습니까?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한다면 오늘 우리들에게도 하나님은 땅을 주심으로서 축복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땅이란 인간에게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땅은 인간에게 소출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땅이 있어야 소출이 있고, 땅이 많으면 소출도 많아집니다. 반면에 땅이 없다는 것은 소출이 전혀 없는 것을 의미하고 소출이 전혀 없다는 것은 가난하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이스라엘은 처음에는 땅이 없는 민족이었습니다. 애굽 땅에서 자기들의 소출이 아니라 애굽의 소출을 얻어먹고 살았던 가난한 자였습니다. 그러한 그들에게 이제 땅이 주어집니다. 소출이 없던 자가 소출이 있는 자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게 땅을 분배한다는 것을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땅 없는 자, 소출이 없는 자가 하나님의 은혜로 땅이 있고 소출이 있는 자가 되었다는 것으로 결론지을 얘기가 아니라 땅 없는 자에게 땅이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땅 없는 자에서 땅 있는 자로 바뀐 것은 그들의 의지나 노력이나 재능으로 되어진 것이 아닙니다. 땅 없음에서 땅 있음이 된 것은 모두가 어린양의 희생의 피가 근거되어 있습니다. 애당초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나오기를 싫어했던 자들입니다. 그러한 그들을 애굽에서 끌어내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애굽에서 나올 때도 그냥 나온 것이 아니라 어린양의 피를 근거 삼아서 나오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땅은 어린양의 피로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분배하신 가나안 땅은 누구나 받는 땅이 아니라 어린양의 희생을 아는 아브라함의 믿음의 후손들에게 주어지는 땅인 것입니다. 어린양의 희생을 모르는 이방 민족은 가나안 땅에 축복의 약속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오직 진멸 당할 대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땅을 분배받으면서 이것을 잊으면 안되었던 것입니다. 왜 자신들이 가나안 땅을 분배받게 되는지, 어떻게 해서 땅이 없는 존재에서 땅이 있는 존재로 되는지, 그리고 가나안 족속은 왜 진멸을 당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제대로 알아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분배받게 되는 것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그들의 노력이 아니라 어린양의 희생을 근거한 것입니다. 그리고 땅을 얻게 된 것도 모두 그들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이 승리하게 하신 덕분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비록 땅이 없는 자에서 땅 있는 자로 되었지만, 결코 땅의 소유권을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즉 땅이 주어졌지만 이스라엘이 땅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땅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분배받은 땅에서 살아가면서 항상 이 땅은 하나님의 소유임을 나타내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이것을 잊어버릴 때 그들은 이방인과 똑같은 취급을 받게 됩니다. 왜냐하면 땅을 자신의 소유로 여기는 것은 이방인과 같은 사고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땅 분배는 단지 이스라엘이 곡식을 재배하고 소출을 얻을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이스라엘다운 모습을 담아 낼 도구로 주어졌음을 알아야 합니다. 땅이 주어졌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축복의 민족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 축복이 무엇을 근거로 해서 주어진 것인가를 제대로 알 때 비로소 진정한 축복의 민족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땅 분배에는 이러한 하나님의 뜻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 오늘날 신자라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축복을 단지 받는 것으로만 이해합니다. 받아 누리는 것이 축복의 전부인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받았다는 것으로만 기뻐하고 즐거워 할 뿐이지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 무엇을 근거로 해서 누구로부터 온 것이냐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누구로부터 왔든 무엇을 근거로 해서 주어졌든 상관없이 그저 내가 받았다는 것에만 관심을 둘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2000년에는 좀 더 많은 것을 받아 누리기 위해서 우리 쪽에서 뭘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가지고 떠들고 있지 않습니까? 바로 이러한 것들이 이방인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세상이 2000년으로 들떠 있을 때 교회까지 덩달아 들떠 버린다면 도대체 세상과 교회의 구별점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이 분배받은 땅에서 계속 유지해야 하는 것은 어린양의 희생을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어린양의 희생 덕분에서 애굽에서 탈출하게 되었고 땅없는 자에서 땅있는 자로 되었다는 것에 대해서 한시라도 잊으면 안되었던 것입니다. 복은 자신들의 노력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어린양의 희생으로 오는 것임을 항상 마음에 두고 살아가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지파가 땅을 분배받지만 유독 레위 지파만은 여전히 땅 없는 자로 존재하게 하고 오직 제사에만 전념하는 지파가 되게 함으로서 이스라엘의 복은 누군가의 희생 덕분에 주어진 것임을 가르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얘기들이 오늘 우리들과 무슨 상관이 있는 것입니까? 땅 분배는 이스라엘의 이야기이지 오늘 우리들에게 가나안 땅의 분배가 무슨 상관이 있는 것입니까? 혹 우리에게도 땅을 주겠다는 얘기는 아닙니까?

맞습니다. 이스라엘의 땅 분배 얘기는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땅분배로 다가옵니다. 다만 다른 것은 이스라엘은 실제 눈에 보이는 땅을 분배하심으로서 가르치시지만 오늘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는 땅을 주심으로서 가르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땅 없는 자였듯이 오늘 우리들도 땅 없는 자였습니다. 아마 땅을 가진 분들이 이 말을 들으면 '나는 땅이 있다'라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분배하시는 땅은 바로 하늘 나라입니다.

우리가 땅 없는 자였다는 것은 바로 하늘 나라가 없는 자였다는 뜻입니다. 우리 모두는 악한 자였습니다. 나쁜 행동을 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모르는 악한 자였고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철저히 무시한 채 오직 우리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죄인이었습니다. 이런 우리가 땅 있는 자가 되었다면 그것은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자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늘 나라와 상관없는 존재가 어린양 되신 예수님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따라서 구약의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서 할 일은 축복의 근원 되시는 어린양의 희생에 감사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처럼, 신약의 새 이스라엘 역시 예수님의 희생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게 되었음을 감사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신자에게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바로 이것이며, 이러한 하나님의 요구를 제대로 아는 신자는 항상 예수님의 희생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게 되어진 것에 대해서 찬송하고 감사하고 기뻐하며 살아갈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요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이 땅을 주셨으니까 열심히 일을 해서 많은 소출을 내가지고 많은 십일조를 하나님께 바치면 그것이 하나님에게 충성하는 것인 줄로 착각을 해버립니다. 즉 하나님이 신자되게 하고 천국가게 하셨으니까 이제 그 보답으로 열심히 교회에 충성해서 많은 일을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는 방법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요 6:29절에서는 분명히 밝히기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예수님의 희생으로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게 되었음을 믿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러한 말에 대해서 노골적으로 반대의사를 표현합니다. '믿는 것이 뭐냐 교회 일 하는 것이 아니냐?'라고 고집을 부리면서 믿음과 교회를 연관시키고 하나님의 일과 교회의 일을 연관시켜서 어떻게든 교회를 위한 일군을 만들어 보겠다는 의도를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복은 교회와 연관된 것이 아닙니다. 교회 일이 복을 끌어 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분배받은 땅에서 복을 받기 위해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복을 받은 자로 살아가야 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드리는 제사는 복을 받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은 희생의 피로 인해서 주여 졌음을 인정하는 행위로서의 제사가 되어야 했던 것이고, 가나안 땅에서의 소출로 드리는 십일조 역시 복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복안에 살아가는 자로서 이 모든 복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인정하는 행위로서 드려지는 십일조가 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분배받은 땅은 그냥 땅으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약속의 땅입니다. 땅 없는 자에게 약속으로 주어지는 땅입니다. 그럴 때 그 땅에서 살아가는 이스라엘이 어떤 사고방식으로 살아가야 하는가는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 땅에 거하게 된 것은 모두가 어린양의 희생 덕분이다'는 것을 잊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들의 땅에서의 모든 삶은 희생으로 주어진 은혜가 표현되는 삶이고 행동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이스라엘을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의 희생으로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게 되었음을 아는 자로서 예수님의 은혜가 담겨서 표현되는 삶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은 복을 탐하는 땅이 아니라 주어진 복의 출처가 어디인가를 깨닫고 복의 출처가 되는 분을 향해 감사하며 살아가는 땅입니다. 신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신자라 하면서 복을 탐하고 산다면 그는 신자가 아니라 이방인입니다. 신자는 주어진 복의 출처를 바라보며 감사하며 사는 자이지 복을 받기 위해서 발버둥치는 자가 아닙니다. 그래서 참된 신자가 모이는 교회는 복을 내세워서 신자를 현혹하는 것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에서 살게 하는 것은 어린양희생이지 이스라엘의 노력이 아닙니다. 역시 마찬가지로 우리를 하나님 나라에 살게 하는 것은 예수님의 은혜이지 우리의 노력이나 종교 행위가 전혀 아닙니다. 1999년이든 2000년이든 신자는 변함 없이 예수님의 은혜로 살아갈 뿐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에서 저주를 받지 않은 자 되었다는 것보다 더 큰복은 없습니다. 그리고 이 복은 예수님께서 피흘리셔서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의 열매가 곧 영생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면 됩니다. 세상에서 벌어들인 것 가운데 얼마를 열매로 내어놓으려고 하지 마시고, 하나님에 의해서 맺어진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도록 하십시오. 그것이 곧 영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하나님 나라에 참여된 자가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는 열매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만 맺어지는 열매인 것입니다. 이러한 성도는 세상의 열매를 위해서 살아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열매를 얻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분배받은 땅에서 어린양의 희생을 자랑하며 살면 되는 것처럼, 오늘 여러분 역시 그리스도안에서 그리스도의 은혜를 마음껏 자랑하며 살면 그것이 최고의 신자입니다. 이런 신자가 그리스도의 증인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증인된 삶을 포기하지 마시고 예수님의 은혜로 주어진 하나님 나라가 여러분의 최고의 자랑거리로 나타나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