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16:1-10 요셉 자손

오늘날 교회가 크게 잘못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삶의 기쁨과 보람을 교인들로 하여금 느끼도록 해주려고 애를 쓰는데 있습니다. 믿음이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의로 구원받는다고 할 때 그 의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보이지도 않는 것을 막연하게 바라본다거나 의지한다는 것에 대해서 나름대로 회의를 가지기도 하고 의심을 나타내기도 하고 자신 스스로도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교인들이 믿음에 대해서 회의와 의심을 가지고 교회로 나올 때 결국 교회라는 단체에 그 영양이 미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목사들이 생각한 해결책은 교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구체적으로 실제적으로 느끼도록 해주고 믿음의 삶에 대해서 보람과 기쁨을 갖도록 해주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들이 강조하는 것이 '자기 교회'라는 의식을 갖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자기 교회라는 의식을 갖게 될 때 교회에 대한 투자에 보람을 갖게 되고, 교회의 외형적인 변화를 통해서 믿음의 현실성을 느끼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자기 교회'라는 의식이 인간들에게 쌓여감으로서 보여진 것은 교회를 고수하는 것입니다. 자기 교회와 그리스도를 하나로 인식을 해버리고, 내 교회가 쇠퇴하는 것은 곧 그리스가 쇠퇴하는 것이고, 내 교회를 공격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를 공격하는 것이고, 내 교회가 잘되는 것이 곧 그리스도가 잘되는 것이고, 내 교회가 영광 받는 것이 곧 그리스도가 영광 받는 것으로 인정을 해버린 것입니다. 따라서 이들에게 있어서 믿음이란 교회와 연관되는 것일 수밖에 없고, 헌신 역시 교회와 연관된 것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믿음, 보이지 않는 그 나라와 그의 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세운 교회라는 단체를 보여줌으로서 하나님의 능력이 마치 자기 교회에 스며들어 있는 것처럼 선전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복음이 뒤바뀌고 믿음이 뒤바뀌고 하나님의 영광이 뒤바껴 버린 것이 오늘날 교회의 현실입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믿음이 결코 이 세상에서 가시화되고 현실화되어서 나타날 것이라는 생각은 버리셔야 합니다.

많은 신자들이 믿음, 은혜, 성령, 은사, 축복, 이러한 것을 자신의 삶과 몸을 통해서 체험하려고 하고 실체화하려는 시도를 끊이지 않습니다. 인간들의 교회에서의 행위들이 거의 모두 여기에 목적을 두고 행해지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로 인해서 교인들이 그리스도의 피보다는 교회 행사에 더 매료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냥 가만히 앉아서 그리스도의 피를 생각하는 것보다는 수련회니 기도회니 하는 교회 행사를 하면서 손을 들고 찬송하고 기도하고, 종이 쪽지에 자기 죄를 적어서 불에 태우는 행사에 참여함으로서 자신의 믿음에 변화가 온 것 같은 느낌을 가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종교성을 자극해서 기독교라는 종교에 매력을 가지게 함으로서 내 교회에 붙들어 놓으려고 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단이 예수님을 시험할 때 제공했던 모든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즉 보이지 않는 예수님의 일을 보이지 않는 것으로 대체하려는 시도를 한 것입니다. 오늘날 사단의 하수인 노릇을 하는 교회가 바로 이러한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 역시 보이지 않는 것들입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 역시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보이는 것으로 대체해 버리고 있는 것이 오늘날 교회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그저 막연하게 믿고 있는 것보다는 보이는 것을 제시하는 것이 더욱 확실하고 사람들을 붙들 수 있는 좋은 도구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믿음을 교회 생활로, 축복은 세상에서의 소유의 증가가 성공으로, 은혜 받음은 병고침이나 인격의 변화로, 성령 충만은 열심과 봉사로 뒤바꿔 버린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사단이 예수님을 시험했던 것 그대로라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여러분도 때로는 아무런 현상도 일어나지 않고 느낌도 없고 감정의 변화도 없고 그저 밋밋하기 짝이 없이 없는 믿음에 대해서 회의감이나 의심이 들 때가 있을 것입니다. 뭔가 은혜를 받았고 성령이 충만하다면 행동은 아니더라도 내 마음 속에서 평소와는 다른 느낌이 있어야 하고 변화가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생각이 들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단의 속삭임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대체함으로서 보이지 않는 예수님의 영을 보이는 것으로 대체해 버리려는 사단의 시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애초부터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존재가 아닙니다. 보이는 것,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 실제 체험한 것을 진리로 여기고 살아가는 것이 인간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믿음이란 믿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우리 힘이나 의지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인간으로 불가능한 것이 가능하게 되어졌다면 그것이 기적이고 은혜이며 성령의 충만함이 아니겠습니까? 다시 말해서 여러분이 눈에 보이는 것에 연연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피가 나를 살렸다는 것이 믿어진다면 이미 그것으로 믿음이 주어진 것이고 은혜 안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또 다른 무엇을 보탤 필요가 있겠습니까? 결국 믿음이 주어지지 않고 은혜 안에 있지 못한 자들이 믿음을 보이는 것으로 확인하려는 시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목사들이 교인들의 믿음을 도와준답시고 교회에서의 종교 생활을 요구하는 것은 모두 같이 지옥을 향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에 매료된 인간은 절대로 보이지 않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이 없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고 부정을 해버립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닙니까?

당시 바리새인들에게는 눈에 보이는 종교 생활이 있었습니다. 바리새인은 눈에 보이는 종교 생활을 통해서 자신들의 구원을 확신했으며 자기들만이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자신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눈에 보이는 그 모든 것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행동으로 의가 되는 것도 아니고 선민이 되는 것이 아님을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죽인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일조를 하나 해도 그결과가 내가 살아있는 이 세상에서 현실로 구체적으로 나타나기를 기대하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피로 새로운 생명을 얻은 것으로 족한 줄 알아라고 한다면 과연 그 말이 귀에 들어오겠습니까? 새로운 생명보다는 만원 짜리 한 장이 더 쓸모 있는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진리는 그리스도의 피가 아니라 돈입니다. 결국 오늘날도 예수님은 이런 자들에 의해서 핍박을 받고 계시고 십자가에 달리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 신경을 쓴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포기했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참된 신자는 보이는 것에 대한 관심에서 멀어지기 위해서 기도하는 자입니다. 보이는 것이 소망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자입니다. 그 나라와 그 의는 보이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000년 올해 달력 밑부분을 보면 이런 성구가 있습니다.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후 4:18)는 말씀을 적어 놨습니다. 저는 이것이 한해를 살아가는 여러분의 정신이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한해만이 아니라 여러분이 세상에 살아있는 그 날까지 이 정신은 여러분에게서 사라지면 안됩니다. 신자란 보이는 것으로 사는 자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으로 사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항상 여러분의 삶을 점검하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라는 의미에는 또 다른 물음을 적어 놨습니다. '그대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무엇으로 살아가는가? 무엇에 의해 살고 있는가?' 달력이 눈에 보일 때마다 이 물음 앞에서 자신을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인간은 보이는 것을 위해 사는 자가 있고 보이지 않는 것을 위해 사는 자가 있습니다. 또 보이는 것으로 살아가는 자가 있고 보이지 않는 것으로 살아가는 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보이는 것에 의해서 살아가는 자가 있고 보이지 않는 것에 의해서 살아가는 자가 있습니다. 과연 누가 진리에 속한 자인가는 여러분이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알면서도 우린 항상 보이는 것에 이끌리는 본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여러분 자신을 점검하라고 그러한 문구를 적어 놓은 것입니다. 저에게는 보이는 것보다는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절실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이며 우리 모두가 이러한 예수님의 마음으로 살기를 바라는 마응에서 그러한 글을 적어 놓은 것입니다.

보이는 것이 아무리 좋다 한들 그것이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으로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이 사람이라면 부자는 모두가 다 행복해야 정상입니다. 그러나 부자라고 해서 행복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부자란 남보다 나은 여건에서 편리하게 산다는 것을 제외하면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를 천국으로 들러가게 하는 것은 돈이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피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렇게 참된 신자는 보이는 것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으로 사는 자이며, 하나님 역시 우리에게 보이는 것이 아닌 보이지 않는 것으로 주시는 분이라는 말을 할 때, 사람들이 반발하는 것은 구약입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은 분명 보이는 것을 축복으로 받은 자들입니다. 이것을 근거로 해서 사람들은 보이지 하는 하늘의 복도 있지만, 지금 세상에서는 보이는 복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렇다면 묻겠습니다. 이스라엘이 과연 눈에 보이는 축복을 받았을 때 그것으로 천국 가는 자가 되었습니까? 그들은 축복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망하는 자로 마쳐지고 만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들이 생각할 때는 '내가 지금 당장 세상의 복을 받으면 지금보다 더 하나님께 감사하고 믿음으로 살아가겠다'는 자신감을 나타내기도 하겠지만, 어느 인간도 세상의 복을 근거로 해서 믿음이 향상된다거나 그리스도의 의를 의지할 수 없습니다.

가령 만원을 십일조 했을 때 십만 원이 복으로 돌아왔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애초의 생각대로라면 십만 원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더욱 하나님만 믿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마음은 '만원해서 십만원 받았으니까 십만원 하면 백만원 받겠네'라는 생각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1시간 기도해서 복 받았다면 2시간 기도해서 더 많은 것을 받아내려고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따라서 복을 받았다고 해서 믿음이 좋아진다는 것은 큰 착각일 뿐입니다.

오늘 본문은 요셉 지파에 대한 땅 분배입니다. 땅 분배에서 특이한 것은 요셉 지파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지파는 모두가 한 지파당 하나의 몫이지만 요셉 지파는 두 몫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4절에 보면 "요셉의 자손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그 기업을 얻었더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받은 땅이 나옵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아무런 여과 없이 요셉의 믿음과 연결시킵니다. 요셉이 형들에 의해서 애굽으로 팔려 가는 고통을 받았는데도 믿음을 변치 않고 여자의 유혹을 이기면서 믿음으로 살았기 때문에 그 자식에게 남보다 많은 두배의 축복이 주어졌다고 얘기합니다. 그리고 결론은 우리 역시 아무리 힘든 일이 있다고 해도 믿음이 변치 않고 죄를 이기고 살아가면 남보다 많은 두배의 축복을 받게 된다는 것으로 내려지게 됩니다.

우리나라가 IMF로 인해서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을 때 교회에도 그 여파가 미쳤습니다. 사람들의 수입이 줄어들자 교인들도 헌금을 하는데 부담을 가지게 되고 자연히 헌금이 줄어들게 된 것입니다. 그때 목사들로서는 불안하고 조바심이 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강조한 것이 어려울 때일수록 헌금을 힘을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려울 때 믿음이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에 어려울 때일수록 하나님께 헌금함으로서 그 믿음이 하나님에게 상달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절대로 그냥 지나치지 않으시고 남들보다 더 많은 복으로 갚으신다는 거짓말을 눈하나 깜짝안하고 하는 것입니다. 이미 내 교회에 정신 팔린 목사가 하나님이 그 마음속에 있기나 하겠습니까? 오직 내 교회 부흥되고 크게 되는 것만 마음에 가득 찼기 때문에 나오는 말은 생명의 말씀이 아니라 모두가 교회와 연관된 말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요셉의 자손이 남보다 많은 두 몫을 받게 된 것은 두배의 축복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이 무엇을 통로로 해서 주어지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요셉 자손에게만 두 몫의 땅을 주는 것은 요셉 자손을 다른 자손들과 달리 특별 대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요셉 자손에게 특별히 두 몫의 땅을 주는 것은 이스라엘이 요셉 자손을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시선을 요셉 자손에게로 집중시켜서 뭔가 보이실 것이 있다는 하나님의 의도가 있는 것이지 요셉 자손만 특별 대우해주시겠다는 의미가 아닌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요셉 자손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이스라엘에게 보이시고자 한 것입니다. 따라서 요셉 자손을 통해서 보여진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고 다른 하나님은 가짜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창 48:22절에 보면 "내가 네게 네 형제보다 일부분을 더 주었나니 이는 내가 내 칼과 활로 아모리 족속의 손에서 빼앗은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야곱이 요셉에게 한 축복입니다. 야곱은 요셉에게 다른 형제보다 일부분을 더 주었다고 말합니다. 결국 야곱이 축복한 대로 요셉 자손에게는 다른 자손보다 더 많은 두 몫이 돌아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야곱이 축복을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인간이 축복한 대로 움직이는 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야곱의 축복의 내용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야곱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했기 때문입니다. 즉 요셉을 통해서 보여진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것인가를 야곱이 알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통해서 희생을 보이셨습니다. 요셉의 희생을 통해서 다른 형제가 살아난 것입니다. 요셉의 희생은 자기를 희생하심으로서 고난 가운데 오시는 하나님을 계시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요셉을 축복하는 것은 복은 하나님의 희생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임을 야곱이 알았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요셉을 만나 요셉의 두 아들에게 축복을 할 때 우수로는 장자인 므낫세에게 좌수로는 차자인 에브라임에게 얹어서 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요셉도 그것을 원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손을 반대로 해버립니다. 우수는 힘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그 우수를 차자인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 축복을 합니다. 그러자 요셉이 손이 바뀌었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아비가 허락지 아니하여 가로되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 하고"(창 48:19)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된 야곱의 행동입니다.

야곱은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새로운 하나님의 법칙을 알았습니다. 낮아지고 섬기고 희생의 자리에 있는 자가 큰 자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즉 섬기는 자가 위대한 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이것을 알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요셉 자손에게 두 몫의 땅을 주심으로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요셉 자손을 바라보게 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보이는 것에 마음이 쏠리는 것은 세상에서 높은 자, 지배하는 자, 힘있는 자로 살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섬기는 것보다는 섬김을 받는 것이 더 재미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힘없는 약자보다는 힘있는 강자로 사는 것이 더 멋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배를 받는 것보다는 지배하는 것이 더 매력적이지 않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필히 힘이 있어야 하고, 그 힘은 세상의 것으로 주어집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것보다는 보이는 것을 즐거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보이지 않는 것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세상 것이 무엇입니까? 보이지 않는 것을 아무리 마음에 담아두고 바라본다고 해도 세상의 형편이나 지위가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거지 나사로가 하나님을 믿고 하늘을 소망하고 살았다고 해서 달라진 것은 무엇입니까? 믿음으로 살았다고 해서 거지에서 부자로 변신한 것이 아닙니다. 죽을 때까지 거지였습니다. 사람들이 이것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자꾸 거지에서 부자로 변신되는 것을 꿈꾸며 삽니다. 그것을 축복이라고 우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을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은 오직 희생과 섬김을 말할 뿐입니다.

신자는 예수님의 희생과 섬김으로 인해서 죽은 자에서 산자로 된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신자라면 죽을 때가지 이것이 포기되어서는 안됩니다. 세상은 세상 원리에 의해서 돌아가는 것 같지만 결국 그 세상 원리가 심판의 근거가 될 날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신자는 그 날을 미리 보고 살아가는 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섬김을 받기보다는 섬기는 자리에 있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아는 신자입니다.

요셉을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을 아시겠습니까? 하나님은 바로 그런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는 눈에 보이는 유익의 달콤함에 빠져 살아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달콤함이 언젠가는 우리의 고통으로 다가오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옥간 부자가 세상을 살아갈 때 얼마나 달콤함에 빠져 살았겠습니까? 돈의 위력을 실감을 하면서 떵떵거리고 희생이나 섬김이란 단어는 전혀 모른 채 섬김 받고 지배하는 재미에 세월 흐르는 줄 몰랐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인간은 죽습니다. 아무리 재미있는 세상을 지낸다고 해도 결국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인간입니다. 잠시 동안의 세상은 사라지지만 남는 것은 영원입니다. 그 영원이 말할 수 없는 고통으로 다가온다는 것을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우리가 곧 그런 처지의 인간이었습니다. 그런 우리가 그리스도의 희생과 섬김에 의해서 고통에서 건짐 받은 자가 되었다면 그리스도의 희생과 섬김에 대해서 소홀히 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의 섬김 때문에 산 자 된 것을 안다면 그가 어찌 섬김 받기를 기대하겠습니까?

여러분은 다른 사람의 하나님을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다른 교회의 하나님을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교회를 부흥시켜주고 세상에서의 성공을 보장해주는 그런 하나님을 찾아 나온 것이 아니라 섬김과 희생의 자리로 낮아지셔서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나온 것입니다. 그분만이 우리에게 참된 하나님이시지 다른 하나님은 모두 우리에게는 우상일 뿐입니다.

요셉 자손이 받은 두 몫에 관심을 두지 마시고, 유독 요셉 자손에게만 두 몫을 주신 하나님에게 관심을 두십시오. 우리의 시선을 요셉 자손에게 두게 하셔서 과연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시는지 조용히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울릴 것입니다.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이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에 살아있기 바랍니다. 그리고 항상 자신에게 물으십시오.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무엇으로 살아가는가? 무엇에 의해 살고 있는가?' 물으실 때 여러분의 모습이 보여질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섬김과 희생은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것을 남겨 주셨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사는 자가 참으로 복안에 있는 자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 세상 사람입니다. 교회를 다닌다고 해도 그는 세상 사람입니다. 세상 원리를 따라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세상 원리에 충실하는 자가 아닙니다. 오로지 하늘의 원리에 충실하며 하늘의 원리를 따라가는 자입니다.

올 한해도 여전히 보이는 것들이 여러분을 괴롭힐 것입니다. 보이는 것 때문에 근심과 염려에 빠지기도 하고 곤란에 처하기도 할 것입니다. 어떨 땐 보이지 않는 것만 들이미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회의감이 들 수도 있고 의심이 나기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여러분을 지키실 것을 믿습니다. 성령이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이고, 여러분으로 하여금 세상이 전부가 아니고 보이는 것이 복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늘의 것이 참된 복이며 그 나라와 그 의를 바라보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 여러분도 이런 마음으로 살아가는 한해가 되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