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가 자식에게 재산을 분배할 때 아무런 불평 없이 모든 자식에게 만족을 주는 분배가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겉으로만 만족하는 척 하는 것이 아니라 속마음까지 온전히 만족시키면서 전혀 불평 불만이 없는 재산 분배가 가능하다고 생각되십니까?
신문 지상에 보면 부모의 유산 문제를 가지고 형제들이 다투고 법정까지 가게 되고, 심지어는 폭력 사태까지 일어나는 일들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꼭 부모의 재산을 분배하는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분배한다고 해도 불평이라는 것은 항상 내재되어 있는 문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분배할 때, 또는 분배를 받을 때 사람은 자신의 입장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공로를 말하면서 기득권을 주장하기도 하고, 자신의 헌신이나 봉사를 말하면서 당연히 분배에 차별화가 되어야 함을 주장하기도 합니다. 가령 다른 형제들보다 부모를 더 많이 모신 것을 주장하며 차별화된 분배를 요구하거나, 아니면 평소 부모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지 못했던 것을 주장하면서 그에 따른 보상으로 차별화된 분배를 요구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부양 가족이 있음을 말하면서 분배의 차별화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입장에 강하고 남보다는 자신이 더 불리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불평 없는 분배란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모습을 오늘 본문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다른 지파보다 두 몫을 받는 요셉 자손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다른 지파와는 달리 요셉 자손은 므낫세와 에브라임 각각에게 땅이 분배됩니다. 그런데 요셉 자손들이 여호수아에게 나아와 불평을 합니다. 땅 분배가 잘못됐다는 것입니다. 14절에 보면 요셉자손들이 불평하는 이유가 나옵니다. "요셉 자손이 여호수아에게 말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지금까지 내게 복을 주시므로 내가 큰 민족이 되었거늘 당신이 나의 기업을 위하여 한 제비, 한 분깃으로만 내게 주심은 어찜이니이까" 이 말을 보면 요셉 자손들은 '우리가 큰 민족'이라는 입장을 내 세워서 분배받은 땅이 자신들이 살기에는 좁다는 불평을 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자기들이 큰 민족이 된 것이 여호와께서 복을 주셨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여호와가 복을 주셔서 이렇게 큰 민족이 되었는데, 왜 당신은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해주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마치 과거에 받은 축복이 특별한 대우를 받고 많은 분배를 받아야 할 정당한 이유가 되는 것처럼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여호와로부터 복을 받았음을 안다면 복에 대해서 감사하는 것이 당연한데 요셉 자손은 복을 받은 것을 빙자해서 그에 따른 정당한 대우를 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목사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명과 은혜를 받아서 되어진다. 따라서 교인들은 특별한 사명과 은혜를 받은 목사에게 순종하고 섬겨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고 은혜를 받음으로 목사가 되었음을 생각한다면 목사인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이 무엇이고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라고 목사 되게 하셨는가를 염두에 두고 사는 것이 당연한데도 불구하고 사명과 은혜를 특별 대우를 받아야 할 자격쯤으로 생각해 버린다면 이것이 바로 복을 받은 것을 빙자해서 자기 이익을 챙기려는 요셉 자손들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요셉 자손들이 기업을 더 달라고 요구한 것은 비록 겉으로는 '우리는 큰 민족인데 비해서 기업으로 주어진 것은 적다'는 이유였지만 사실은 그들이 받은 땅이 실제로 좁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16절에 보면 "요셉 자손이 가로되 그 산지는 우리에게 넉넉지도 못하고 골짜기 땅에 거하는 가나안 사람에게는 벧 스안과 그 향리에 거하는 자든지 이스르엘 골짜기에 거하는 자든지 다 철병거가 있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즉 이들의 불평은 기업으로 받은 땅이 좋은 땅이 아니었다는데서 나온 불평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산지와 골짜기라는 말이 나온 것을 보면 요셉 자손들이 받은 땅은 곡식을 가꾸기가 좋은 평지가 아니라 자신들이 스스로 개척을 해야 하는 삼림지역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셉 자손은 이것이 싫었던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 땅에는 철병거를 가진 사람들이 기거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과도 싸워서 물리쳐야 그 땅을 차지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들이 요셉 자손들로 하여금 받은 땅이 적다는 불평을 하도록 한 것입니다.
이러한 요셉의 불평은 오늘 우리들의 불평에서도 보여집니다. 여러분은 살아가시면서 대개 무엇에 대해서 불평을 하시며 살아갑니까? 소유가 적은 것에 대해서 불평하지 않으십니까? 또는 내가 받은 것이 다른 사람이 받은 것에 대해서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에 대한 불평은 없습니까? 다른 사람에게는 좋은 것을 주면서 나에게는 왜 별로 좋지 못한 것을 주느냐는 불평이 없습니까? 똑같이 자식을 주셨는데도 불구하고 왜 내 자식은 저 사람의 자식보다 똑똑하지 못하고 잘나지 못했느냐는 불평을 하는 것이 바로 우리들이 아닙니까?
사람들은 항상 손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을 선호하며 살아갑니다. 자신의 수고와 애씀과 노력이 없이 얻어진 것을 복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누구나 복을 좋아하는 것은 내 노력 없이 얻어진다는 것 때문이 아닙니까? 그렇지 않고 내가 수고하고 노력해서 얻은 것이라면 그것은 내가 수고한 결과이지 어떻게 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요셉 자손이 받은 땅은 삼림에다가 골짜기에는 철병거를 가진 사람들이 거하는 땅이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그들은 그 땅을 복으로 여기지도 않았고, 자신들이 살 수 있는 땅으로 바라보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들이 수고하지 않아도 손쉽게 곡식을 가꾸고 양을 키우면서 먹고 살아갈 수 있는 좋은 땅을 갖고 싶은 속마음이 '땅이 적다'는 불평으로 나오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요셉 자손이 여호수아에게 한 분깃을 더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결국 힘들고 어려운 것은 버리고 편하고 좋은 것만 취하겠다는 속셈을 드러낸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들은 복의 가치를 편하고 좋은 것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분깃으로 받은 땅이 복으로 보여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가 바라보는 복의 시각은 과연 어떻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목사들이 말하는 소위 좋은 교회란 과연 어떤 교회를 의미하는 것입니까? 요셉 자손이 받은 철병거를 가진 거민이 거하고 있는 땅을 과연 복으로 인정할 수 있겠습니까? 자기들의 수고와 싸움이 있어야 얻을 수 있는 땅을 복으로 인정하기란 힘들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목사들이 상상하는 좋은 교회란 한마디로 말해서 말썽 없는 교회입니다. 교인들끼리 서로 사이좋게 지내고 목사에게 말썽 부리는 교인 없고 목사 잘 섬겨주고 목사에게 순종 잘하는 그런 교회라면 목회하기 아주 좋은 교회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반면에 항상 목사에게 따지기 좋아하고, 말썽 많은 교인들도 많고, 항상 시끄럽고, 대하기 까다로운 장로가 있는 교회라면 피하고 싶고 가기 싫어하는 교회로 여겨질 것입니다. 즉 목사를 편하게 하는 교회가 좋은 교회이고, 힘들게 하는 교회는 좋지 않은 교회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좋은 교회 나쁜 교회라는 기준이 목사 개인의 편함에 의해서 결정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요셉 자손과 같은 성향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자기의 편함을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인간이 이러한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산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희생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결과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거하게 된 것은 그들의 수고와 애씀 덕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희생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서 가나안 거민과 싸우심으로 인해서 가나안 땅에 거하게 된 것인데, 요셉 자손은 자신들이 누구 덕분에 가나안 땅에 거하는가를 생각하지 않고 다만 자기 눈앞에 펼쳐진 현실만 바라보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불평이 나온 것이고 좀 더 나은 땅을 얻기 위해서 분깃을 하나 더 달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땅이 좁다는 이유로 말입니다. 우린 이러한 요셉 자손을 보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기보다는 자기 입장을 더 우선으로 하고 자기 이득을 더 챙기려고 하는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요셉 자손의 요구에 대해서 여호수아는 거절을 합니다. 15절에 보면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이르되 네가 큰 민족이 되므로 에브라임 산지가 네게 너무 좁을진대 브리스 사람과 르바임 사람의 땅 삼림에 올라가서 스스로 개척하라"고 말합니다. 여호수아는 요셉 자손에게 '스스로 개척하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요셉 자손은 그곳에 거하는 사람들은 다 철병거를 가졌다고 말합니다. 즉 그들에게는 철병거가 있는데 우리에게는 그들의 철병거를 이길만한 힘이 없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스스로 개척하라'는 것은 말도 안된다는 식으로 얘기를 한 것입니다. 이러한 요셉 자손에게 여호수아가 다시 말하기를 "여호수아가 다시 요셉의 족속 곧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일러 가로되 너는 큰 민족이요 큰 권능이 있은즉 한 분깃만 가질 것이 아니라 그 산지도 네 것이 되리니 비록 삼림이라도 네가 개척하라 그 끝까지 네 것이 되리라 가나안 사람이 비록 철병거를 가졌고 강할지라도 네가 능히 그를 쫓아내리라"(18절)고 말합니다.
여호수아는 요셉 자손에게 그들이 비록 철병거를 가졌고 강하다고 하지만 너희들은 그들을 능히 이기고 쫓아낼 것이라고 합니다. 여호수아가 남의 일이라고 해서 손쉽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여호수아가 바라보는 것과 요셉 자손이 바라보는 것이 각각 다르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는 순순하게 하나님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기에 능히 이긴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순수함입니다. 눈앞에 있는 현실과 상황을 따져 가면서 계산을 하고 성공과 실패의 여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에 성공이고 약속이 아니기 때문에 실패라는 시각으로만 바라보는 것, 이것이 믿음의 순수함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손쉽고 편안하게 그저 주어지는 것이라면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편하고 손쉽게 주어지는 것이 약속이라면 요셉 자손에게 주어지는 땅도 편안하게 얻을 수 있는 땅이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요셉 자손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철병거를 가진 사람들이 거하는 땅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개척하라'고 합니다. 이것을 과연 약속의 땅을 주시는 것으로 이해가 되겠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요셉 자손에게 이러한 땅을 주시는 것입니까? 철병거가 없고 편안하게 얻을 수 있는 땅을 주시면 안되는 것입니까? 인간이 고생할 필요 없는 그런 땅을 주시면 안되는 것입니까? 여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이 무엇인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쳐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신다는 것에 대한 신뢰가 아닙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구하면 하나님은 틀림없이 주신다'는 것에 대한 신뢰가 믿음이 아니라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어려움과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은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는 것이 곧 믿음이라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이 하실 수만 있다'는 고백을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할 수 없는 어려운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시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요셉 자손이 철병거가 있는 상황은 피해버리고 편안하고 쉬운 것을 찾아가는 것은, 전혀 믿음이 없는 모습입니다. 믿음을 생각하기보다는 자신들의 편안함을 더욱 소중히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역시 마찬가지 아닙니까? 우리에게 어려움과 고통이 주어질 때 그런 상황 속에서 배울 수 있는 믿음의 유익을 생각하기보다는 힘들고 고통스럽고 어렵다는 것만 생각해 버립니다. 믿음의 유익을 얻기보다는, 하나님을 깨닫고 그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흔들리지 않는 든든한 믿음으로 살아가고 싶어하기보다는 어려움이 없는 편안함이 더욱 우선이라는 생각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까? 그렇기 때문에 항상 자신의 현실만을 바라보고 사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이런 상황은 싫고 이런 환경도 싫고 이런 것이 좋다고 하면서 자기 입맛에 맞는 인생을 살아가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기 입맛에 맞는 환경을 주실 것을 믿는 것을 믿음이라고 오해하고 있는 것은 아니냐는 것입니다. 많은 교인들이 믿음을 이런 식으로 오해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입맛에 맞는 환경을 주심으로서 '하나님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듣고 싶어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환경에서 감사하는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철병거가 있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고 감사의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순수하게 하나님만 바라보는 신자들에게만 해당된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도 좋은 것을 받고, 힘되는 것을 소유하고, 편안 환경 속에서 감사하고 영광 돌리려고 하지 마시고, 어떤 환경이든 주어진 것 속에서 하나님만 바라보겠다는 생각을 하셔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해가 되고 득이 되지 않을 것 같은 것은 버려 버리고 도움이 되고 힘이 되는 것만 골라 소유하려고 하지만, 세상일은 그렇게 우리들 희망대로 순순히 되어지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일은 하나님에 의해서 되어진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덧붙여서 어떤 형편이 주어지든 그것은 하나님이 하신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하신 것이라면 인간이 거부할 수 없고, 골라서 취할 수 있는 것도 아님을 아셔야 합니다. 요셉 자손은 이것을 몰랐기 때문에, 힘이 들고 어려운 것은 버리고 대신 손쉽고 편한 것을 골라잡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요셉 자손에게는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대신 철병거를 가진 강한 사람들만 보였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가 말한 스스로 개척하라는 말은 자신들에게 너무 무리한 말이라고 여겨졌습니다. 요셉 자손은 자신들이 나서고 싸울 필요가 없는 편안함을 원했지만 하나님은 들어 주지 않았습니다. 철병거가 있는 상황 속에서 믿음이 무엇인가를 배워야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우리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가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자가 만약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보다 눈에 보이는 세상을 더 바라보고 산다면 힘들고 어려운 삶보다는 편안한 삶을 살려고 애를 쓰게 될 것입니다. 힘든 삶이든 편안한 삶이든 하나님이 있게 하신 것입니다. 신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그리스도의 은혜가 함께 함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삶에 대해서 불평을 하거나 낙심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어떻게 사는 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인가를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