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18:8-10 제비 뽑기

신자들은 자신에게 어떤 문제가 있을 때 왜 내게 이런 문제가 생겼는지, 그리고 이런 문제를 통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시는지를 묻기 위해서 성경을 펼치기도 하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묻기도 합니다. 하지만 언제나 뭔가 속시원한 해답을 얻고 성경을 덮는 것이 아니라 답답한 마음 그대로 성경을 덮게 될 뿐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펼쳐보면 보이는 것은 모두가 이스라엘의 이야기이지 내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이야기가 곧 내 이야기라는 것은 들어서 알고는 있지만, 이스라엘의 이야기를 내 이야기로 변환시켜서 이해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아무리 성경을 펼쳐도 답답함이 남아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결국 답답함을 해결하기 위해서 타인의 도움이나 조언을 구하게 되고 가장 쉬운 것은 성경을 전문으로 연구하는 사람인 목사에게 자신의 문제를 내어놓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물어 보게 되겠지만 신자가 아무리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그 답을 찾는다고 해도 성경은 우리들의 문제에 대해서 속시원한 해결점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점을 모를 때 신자는 자신의 문제에 대한 해결을 얻지 못한 채 답답함만 계속될 뿐입니다.

우리는 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생각하지만, 그러나 성경은 우리 문제에 대해서 해답을 제공하기 위해 우리가 찾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내 문제에 대해서 해답을 준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성경이 어떤 답을 하나 정해 놓고 과연 그 답이 참인지를 찾고 질문하는 사람을 찾기 위해서 문제를 일으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즉 내 쪽에 내 문제를 들고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쪽에서 하나님의 사람을 찾기 위해서 문제를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말씀하는 것은 오직 하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답은 오직 이것뿐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과연 인생의 모든 부분에서 발생하는 문제의 답을 '예수 그리스도' 한분으로만 내릴 수가 있습니까? 남들은 다 취직을 하는 직장에 나 혼자 취직을 못하고 있다고 할 때 '하나님, 제가 취직이 안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저는 취직이 안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 어디를 펼쳐봐도 내가 취직이 안되는 이유에 대해서 답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취직을 하고 못하고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만 증거 하는 것에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취직이 안되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답은 '예수 그리스도로 족한 줄 알아라'는 것입니다.

원래 문제가 있은 후에 답이 있는 것이 정상입니다. 우리 역시 문제가 있고 나서 답을 찾아갑니다. 하지만 답은 이미 하나님께서 미리 정해 놓으셨습니다. 오직 하나의 답만 정해 놓으시고 과연 이 답이 참인지 진심으로 이 답이 우리 인생에서 유일한 해답인지를 찾는 자기 백성을 찾기 위해서 우리에게 문제를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문제가 생겼다면 '내가 과연 그동안 진심으로 그리스도만 소망했는가?' '과연 인생에서 그리스도만 있으면 되는 것인가?'를 문제를 통해서 생각해 보게 되는 것입니다. 즉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려진 답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학생이 시험을 칠 때 답을 이미 알고 있다고 한다면 문제가 쉽겠습니까 어렵겠습니까? 문제가 어렵다는 것은 답을 모르기 때문에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어려운 문제라 할지라도 이미 답을 알고 있다면 문제는 쉬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은 이미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모든 문제의 답을 내려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답은 오직 하나입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있는 것 같이, 모든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로 통하게 되어 있습니다. 신자가 이것을 인정한다면, 인생의 모든 문제의 해답은 그리스도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어떤 문제라 할지라도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답답해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에게 닥치는 문제가 어렵고 하나님의 뜻을 묻게 된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이 이미 내리신 답에 대해서 신뢰하지 않는다는 증거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을 신뢰하는 삶이 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문제가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답을 알게 되었다고 할지라도 답에 대해서 신뢰를 하지 못한다면 여전히 문제는 어려울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찾고 계시는 그 사람이 과연 누구이겠습니까? 충성하고 열심 있는 자입니까? 그런 사람이라면 교회마다 얼마든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신자는 교회마다 얼마든지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참되게 알고자 하는 사람이 발견되었을 때 감동이 되고 눈물이 날 정도로 찾아보기 힘든 것이 바로 하나님이 찾고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찾는 사람이 바로 나 자신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과연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인가는 여러분에게 일어나는 여러 문제들을 통해서 증거 되고 확인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쉬게 하리라는 말씀과는 달리 예수님은 그리스도의 멍에를 메우게 하기 위해서 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쉰다는 것을 그리스도의 멍에를 메는 것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답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이 답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평소에는 아무 생각 없이 편안하게 이 말씀을 들여다보면서 고난이나 쉼에 대해서 그리스도의 멍에에 대해서 묵상하면서 감동하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진심으로 그 답을 찾아가는 신자인가하는 것은 스스로 무겁다고 느껴지는 문제가 발생했을 때 확인되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본문의 말씀은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을 분배하는 내용입니다. 이스라엘 12지파 가운데, 요단강 건너편의 땅에 정착한 지파가 있고, 요셉 지파와 유다 지파가 땅을 분배받았고, 이제 남은 것은 일곱 지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남은 일곱 지파에게 땅을 분배하시면서 제비를 뽑는 방식으로 하시는 것이 본문 내용입니다.

사람들이 무슨 일을 결정할 때 종종 제비뽑기 방식을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똑같은 것을 똑같은 분량으로 나눌 때는 제비뽑기라는 것이 필요가 없습니다. 똑같은 것을 똑같은 분량으로 나누었기 때문에 불평이나 불만이 있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각기 다른 것을 다른 분량으로 나눌 때 분쟁이 발생할 염려가 많습니다. 좋은 것을 많이 차지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분쟁을 미리 없애기 위해서, 다른 사람보다 나쁜 것을 받았다고 해도 할말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가장 좋은 방법이 제비뽑기하는 것입니다. 즉 운에 맡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쁜 것이 걸리면 '운이 나빴다'라고 속편하게 생각해 버리는 것이 제비뽑기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일곱 지파에게 제비뽑기라는 방식으로 땅을 분배하시는 것은, 일곱 지파의 분쟁을 염려해서가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너는 이것 너는 저것'이렇게 결정하셨다면 일곱 지파는 분쟁했을 것입니다. 똑같이 하나님을 섬기고, 똑같이 광야에서 고생해서 이곳까지 왔다는 것이 그들의 입장이기 때문에 누구는 좋은 것 받고 누구는 나쁜 것 받는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을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분쟁을 미리 막기 위해서 제비를 뽑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의도가 있으십니다. 그것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앞으로의 삶에서 자신들이 딛고 살아가는 땅은 자신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으로 주어진 땅이라는 것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인간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나안 땅에서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이렇게 제비뽑기라는 방식을 동원하시면서 까지 인간의 선택권을 부정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세상 자체가 자기 자신의 선택을 존중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남의 선택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내 좋아하는 것을 스스로 선택하고 내가 선택한 것을 최상의 것으로 인정하고 그것을 취하기 위해서 경쟁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을 받아들이고 그것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서 사는 이스라엘은 바로 이러한 사람이어야 하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 곧 제비뽑기인 것입니다. 제비뽑기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답입니다. 앞으로 이스라엘은 이 답에 충실한 삶을 살고 있는지를 하나님이 주시는 문제를 통해서 확인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일곱 지파에게는 자신들이 보기에 좋은 땅을 스스로 선택을 하고 그 땅을 취할 수 있는 선택권이 없습니다. 제비뽑기, 즉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 맡기는 방식으로 땅으로 얻게 된 것입니다. 좋다 나쁘다는 구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얻은 땅이라는 것만 생각해야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는 인간입니다. 분명 가나안 땅은 좋은 땅이 있는 반면 상대적으로 나쁜 땅이 있습니다. 이것을 이스라엘에게 맡겨 논다면 서로 좋은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 다투고 싸울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을 사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하나님은 자기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은 인간의 어떠한 불만과 불평도 허용을 하지 않는 말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어떠한 것이든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자신의 소유에 대해서 불만과 불평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부족하다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은혜가 부족하다는 것은, 자신의 선택에 미치지 못하는 은혜라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항상 우리들 속에는 나의 선택이라는 것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내 선택이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제비뽑기'에 불응할 것입니다. 비록 처음에는 좋은 땅이 주어질 것을 기대하면서 제비를 뽑았다고 해도 결과가 나쁜 땅이었을 때는 불만이 자리하게 될 것입니다. 은혜는 이런 인간을 불허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맨 처음 만든 세계가 바로 이런 세계였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으로 살아가는 세상이고, 주어진 것으로 감사하고 살아가는 세상이었습니다. 그런 세상에 사단은 인간의 선택을 집어넣은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다시 하나님이 원하시는 나라를 만드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의 선택으로 사는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에 순종하는 삶의 방식을 보이심으로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이셨습니다. 이것이 이미 세상에 주어진 답입니다.

신자는 바로 이미 내려진 답을 아는 자로서 답에 서서 문제를 바라보고 살아가는 자입니다. 문제에 서서 답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답에 서서 문제를 바라보는 자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답에 서서 문제를 바라볼 때 문제가 보이는 것이지 문제에 서서 답을 찾으려고 한다면 문제는 보이지 않고 답도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계속되는 답답함 속에서 자신 스스로도 하나님을 믿는지 믿지 않는지 혼란스러워 질뿐입니다.

이스라엘에게 내려진 답은 제비뽑기입니다. 제비뽑기가 앞으로 그들의 인생에서의 답인 것입니다. 그들은 모든 문제를 제비뽑기라는 답에 서서 바라보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런 사람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8절에 보면 "그 사람들이 일어나 떠나니 여호수아가 땅을 그리러 가는 그들에게 명하여 가로되 가서 그 땅으로 두루 다니며 그려 가지고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여기 실로에서 여호와 앞에서 너희를 위하여 제비뽑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여호수아는 일곱 지파에게 3명씩 뽑아서 하나님이 주실 가나안 땅을 두루 다니면서 그 땅을 그려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실로에서 너희를 위하여 제비를 뽑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아무리 자신들이 취할 땅을 다니면서 그려온다고 해도 자신이 원하는 땅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땅이 그들의 소유가 될 뿐입니다. 이것이 제비뽑기입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요셉 자손의 불평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땅이 적다고 불평을 했습니다. 제비뽑기라는 분배원칙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들은 철병거를 가진 사람들이 기거하는 땅에 대해서 불만을 가졌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주신 땅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은혜로 여기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은혜를 좇아가는 것이 아니라 땅을 좇아갔던 것입니다. 은혜라는 답에 서서 철병거라는 문제를 바라본 것이 아니라 철병거라는 문제에 서서 답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은혜를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곧 오늘날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제비뽑기란 '너희들의 선택이 아니라 나의 선택이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얻은 것이 아니라 내가 준 것이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인생의 답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 모두 자기 선택의 결과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뜻대로 되어지지 않을 때 방황하고 낙심하게 됩니다. 하지만 세상은 우리의 선택으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사실 우리가 문제거리로 생각하는 것도 하나님의 선택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일인데, 우린 그것을 스스로 부정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선택이 옹호되는 답을 구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러한 물음에 대해서 성경은 침묵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답은 이미 주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문제만 생각하기 때문에 이미 내려진 답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답을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남들보다 적은 돈을 소유한 것이 여러분의 문제입니까? 그렇다면 그 문제를 들고 하나님께 무엇을 묻겠습니까? '하나님, 언제쯤이면 돈을 벌 수 있겠습니까?'를 묻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 저에게 적은 소유를 주신 것이 무슨 뜻입니까?'를 묻겠습니까? 하나님은 그 어느 물음에도 답을 안하십니다. 이미 주어진 답이기 때문입니다. 제비뽑기가 여러분에게 주어진 답입니다. 인생은 제비뽑기라는 것입니다. 너희들의 선택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나의 선택으로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이 답으로 이미 내려져 있습니다. 따라서 진심으로 하나님의 답을 마음에 담고 살아가는 신자라면, 하나님의 답이 있는 자리에 서서 '하나님의 선택으로 살아가는 것이 나의 인생인데 왜 내가 적은 소유로 인해서 마음이 괴롭고 낙심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신자는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이 이것입니다.

18:3절에 보면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너희가 너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땅을 취하러 가기를 어느 때까지 지체하겠느냐"라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이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땅을 취하러 가기를 지체하겠습니까? 그 땅은 아직 점령한 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문제는 우리에게 주신 땅에 아직 가나안 거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들을 지체하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문제를 바라본 결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서서 여러분의 문제를 바라보십시오. 만약 자기 문제에 서서 답을 구한다면, 자신의 문제가 하나님의 은혜임을 부정할 것입니다. 은혜가 자신에게 문제로 다가올리가 없다는 생각이 자신을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요셉 자손이 약속의 땅에 철병거를 가진 거민이 거한다는 현실이 이해가 안된 것처럼, 은혜가 문제거리로 다가온다는 현실을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은혜에 서서 자신의 현실을 바라보게 되면, 은혜를 은혜로 여기지 못하는 자신의 잘못이 보여질 뿐이지 작은 것이어서 보잘 것 없는 것이어서 은혜를 은혜로 여기지 않는 모습은 보이지 않게 될 것입니다.

가나안에서 살아갈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삶의 답이 제비뽑기라면, 오늘 현실을 살아가는 여러분들에게 주어진 답은 하나님의 선택이고 은혜입니다. 은혜의 자리에 서서 오직 그리스도만을 인생의 답으로 여기고 여러분의 모든 문제를 바라보십시오. 그럴 때 여러분은 하나님이 주신 답에 미치지 못하는 자신을 문제를 통해서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회개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신자를 찾고 계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