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세상은 과학 기술에 의해서 조성되어지고 유지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얼마전 1999년에서 2000년으로 해가 바뀔 때 세계의 모든 과학이 가슴을 졸이며 노심초사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Y2K, 즉 밀레니엄 버그라는 컴퓨터의 연도 인식 오류라는 문제 때문에 전 세계가 며칠동안 불안해했던 것입니다. 컴퓨터를 처음 만들 때 년도를 네자리가 아닌 두자리로 인식하도록 한 것이 이유입니다. 년도를 두자리로 인식을 하면 1999를 99로 인식하기 때문에 2000년이 되면 00으로 인식을 합니다. 따라서 컴퓨터는 00년을 1900년으로 인식을 해버린다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1900년에 이미 죽은 사람에게 군 입대 영장이 나온다든지 하는 오류가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은 컴퓨터로 유지되는 세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컴퓨터가 오동작을 하거나 멈춰버린다면 세상은 삽시간에 혼란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결국 컴퓨터의 오류를 방지하고 감시하기 위한 컴퓨터를 또 다시 만들어 내야 하는 웃지 못할 상황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Y2K문제만 해도 지금의 세상이 얼마나 과학에 의존하고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연도 인식'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이 문제 하나가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한 것입니다. 이러한 컴퓨터의 힘 때문에 어떤 사람은 요한계시록의 짐승의 수, 즉 666을 컴퓨터라고 주장하기도 할 정도입니다.
컴퓨터에 유지되는 세계, 이것을 사이버 세계라고도 부릅니다. 컴퓨터 안에서 만들어지고 컴퓨터 안에서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회사에서 회의를 할 때도 화상회의라는 것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시간이 절약되고 효율적이라는 이유로 사람이 사람을 만나지 않고 컴퓨터 안에서 만나는 것입니다. 학교 교육도 직접 선생님을 만나지 않고 친구들을 만나지 않고 컴퓨터 안에서 만나서 공부하는 세상이 코앞에 있다고 합니다.
요즘 게임방을 가보면 어린 학생들이 게임에 열중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 혼자 하는 게임이 아니라 컴퓨터 안에서 다른 누군가를 만나서 얼굴도 모르는 그와 함께 게임을 즐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컴퓨터를 통해서 누군가와 대화를 합니다. 직접 만나서 얼굴을 마주볼 필요 없이 모니터를 통해서 대화를 합니다. 이것을 '채팅'이라고 하던가요?
컴퓨터 세계, 이것이 인간들의 생활에 편리함을 주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컴퓨터가 없다면 인간의 생활은 불편하기 짝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편함을 느낀다는 것은 이미 편리함을 경험했을 때의 현상이 아닐까요? '차가 있기 때문에 편리하다'는 말은 누구나 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차를 소유함으로서 편리함을 경험한 자들의 말입니다. 오토바이를 이용하는 제 입장에서는 차보다는 오토바이가 편리하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물론 비가 오고 눈이 오면 이용을 할 수 없는 불편함이라는 것이 있지만, 그러나 도로가 막히고 복잡할 때 기동성이 좋은 오토바이의 편리함이란 오토바이를 이용한 분들만의 경험일 것입니다.
이와 같이 불편이라는 것은 자기 경험을 기초로 해서 나오는 말입니다. 옛날에 차가 없었을 때는 차가 없어서 불편하다는 말이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저 걸어 다니는 것이 최고였습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과학의 편리함만 생각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비록 컴퓨터가 우리의 생활을 편리하게 하고 있고, 컴퓨터가 없으면 살 수 없는 세상이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컴퓨터로 인해서 인간과 인간의 만남이 단절되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앞으로 집에서 컴퓨터를 통해서 공부를 하는 세상이 된다면, 성도들이 모여서 드리는 예배도 컴퓨터를 통해서 하게 되어질지도 모릅니다. 결국 성도와 성도의 만남이 없는 세상이 조성될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예배만 드리면 되기 때문에 컴퓨터를 통해서 예배드리고 헌금은 사이버 은행을 통해서 자동으로 지출되는 세상이 만들어지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을 하겠습니까?
사람들이 점점 컴퓨터에 친숙해져가고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일에 대해서는 불편해져 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요즘 동네를 보면 아이들이 뛰어 노는 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각기 학원에 가고 남은 시간은 컴퓨터 앞에 앉아서 게임을 즐기기 때문에 서로 모여서 뛰어 노는 것에 대해서는 아예 잊어버렸고, 어색한 것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요즘 교회 홈페이지가 유행입니다. 그리고 그 홈페이지를 통해서 같은 성도끼리의 대화가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홈페이지에 글을 써놓고 그 글을 통해서 성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함으로서 계속 형제를 만나고 있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느낌으로 인해서 사람과 사람이 만나야 할 필요성을 잊어버릴 수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컴퓨터를 통해서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이 결코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것 때문에 '교제를 하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컴퓨터를 통해서 대화를 했다는 것 때문에 만남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잘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과 사람의 만남은 단지 대화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만남 안에는 경쟁과 시기와 미움과 다툼과 사랑과 절제와 화평 모든 것이 들어 있습니다. 신자가 주님의 은혜를 안다면 그 은혜는 인간과의 만남을 통해서 드러나야 합니다. 내가 죄인임을 알게 되는 것도 인간과의 만남을 통해서 발견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에게 있어서 만남이란 소중하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만남이 과학과 개인적인 생활로 인해서 점차 줄어들고, 만남을 불편하게 여기게 되었다면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볼 문제임을 아셔야 합니다.
오늘 본문도 이러한 맥락에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도피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도피성 이야기 역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살기 전에 말씀하신 규례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 전에 그 땅을 분배하고 그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말씀하고 있는 것은 가나안 땅에서의 삶은 어떤 원칙이 세워진 삶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마음대로 원칙을 정해서 자기들 편리한대로 자기들의 마음에 드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칙에 맞추어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비뽑기로 땅을 분배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얻은 땅이라는 원칙 아래서 불평 불만이 아니라 주신 것에 감사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도피성 역시 이스라엘 안에 어떤 원칙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피성은 어떤 원칙을 말하고 있습니까? 2,3절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내가 모세로 너희에게 말한 도피성을 택정하여 부지중 오살한 자를 그리로 도망하게 하라 이는 너희 중 피의 보수자를 피할 곳이니라"고 말합니다. 도피성이란 살인을 한 사람이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피하는 성을 말합니다. 그러나 모든 살인자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실수로 살인을 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도피성입니다. 민 35장에 보면 여기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나옵니다. 불의의 사고로 사람을 죽이게 된 자가 이 성으로 피하도록 되어 있는데 이것은 죽은 자의 친족의 보복으로부터 피하기 위해서 내려진 조치입니다. 피의 보수자란 죽은 자의 억울함을 복수할 자라는 뜻입니다. 이들은 죽은 자의 가까운 친족을 의미합니다. 그들의 복수로부터 살인자를 보호하는 것이 도피성이라는 것입니다.
6절에 보면 "그 살인자가 회중의 앞에 서서 재판을 받기까지나 당시 대제사장의 죽기까지 그 성읍에 거하다가 그 후에 그 살인자가 본 성읍 곧 자기가 도망하여 나온 그 성읍의 자기 집으로 돌아갈지니라"고 합니다. 도피성으로 피한 살인자는 재판을 통해서 고의가 아니라 실수였음이 판명되면 그 도피성에서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사느냐면 도피성에 거하고 있는 대제사장이 죽을 때까지입니다. 그리고 대제사장이 죽고 나면 그때부터는 자유의 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누구도 자유의 몸이 된 그에게 옛 죄에 대해서 복수하거나 책망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도피성 제도를 이스라엘 안에 두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것은 이스라엘이 자유의 몸이 되고 가나안 땅에서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이 누구 덕분인가를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비록 실수로 사람을 죽였다고 해도,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그 사람의 실수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나의 부모 형제가 너 때문에 죽었다는 것만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고 피의 복수를 하기 위해서 그 사람을 찾을 것입니다. 만약 도피성이 없다면 가해자는 피해자에 의해서 살인에 대한 대가로 죽임을 당해야 합니다. 그러한 살인자가 도피성에 의해서 보호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즉 죽어야 할 자가 도피성에 의해서 죽음을 면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도피성에 거하고 있던 대제사장이 죽으면 살인자는 더 이상 도피성에 매일 필요 없이 자유의 몸이 됩니다. 자유의 몸이 된 이상 피해자의 친족들도 그에게 죄를 물을 수는 없습니다. 자유의 몸이 되었다는 것은 죄의 몸이 아니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 정도로 말씀을 드리면 여러분은 도피성의 의미가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이해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안에 도피성을 두시고, 그 도피성에는 대제사장을 두셨습니다. 그리고 도피성으로 피한 살인자는 도피성에 의해서 보호를 받다가 대제사장이 죽으면 자유의 몸이 됩니다. 이런 모든 것이 곧 오늘의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피성으로 피한 살인자는 대제사장의 죽음으로서 자유를 얻습니다. 대제사장이 죽기 전에는 그도 도피성이라는 제도에 매어 있어야 합니다. 성밖으로 나올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대제사장이 죽으면 자유의 몸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피라고 하는 은혜 안에서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들의 자유는 오직 어린양의 피로 인해서 주어진 자유였음을 잊지 않기를 원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역시 하나님의 장자 재앙에서 죽어야 할 자들이었지만 문설주에 바른 어린양의 피가 그들을 죽음으로부터 보호했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에서 살아가는 자유의 몸이 된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라고 그들 안에 도피성을 세우신 것입니다. 도피성을 볼 때마다 무엇이 그들을 죽음으로부터 보호했는지, 그리고 무엇으로 인해서 자유를 얻게 되었는지를 항상 상기하며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도피성의 의미를 상기한다고 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도피성의 의미와 정신이 이스라엘 안에 확산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이 살아가는 삶의 정신이 도피성의 원칙에 세워진 정신이어야 했던 것입니다.
실수로 사람을 죽이고 가해자와 피해자가 발생하게 되는 것은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있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의 만남 속에서 발생되어지는 여러 가지 실수와 상황 속에서 과연 하나님의 은혜를 원칙으로 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확인되어지는 것입니다.
가해자는 도피성에서 보호를 받고 제사장이 죽은 후 자유를 얻음으로서 '내 생명은 하나님의 은혜로 새롭게 주어진 생명이다'는 것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피의 보수자의 손에 의해서 죽임을 당해야 할 자신이 도피성 때문에 보호를 받고, 또 제사장의 죽음으로 인해서 자유를 얻었다는 것은 놀라운 체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과연 오늘 우리에게 이러한 체험이 있는지 물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지금 우리나라에는 도피성이라는 제도가 없습니다. 아무리 실수로 사람을 죽였다고 해도 그에 대한 처벌을 받아야 합니다. 또 누군가가 내 친족을 죽였다고 해서 내 손으로 복수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도피성의 제도는 제도 자체가 우리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도피성의 의미가 우리에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죽임을 당해야 할 자가 무엇으로 살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반면에 피해자는 가해자가 도피성으로 피함으로서 보호를 받고 있는 것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자유의 몸으로 버젓이 살아가고 있는 것을 봐야 합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사람을 죽인 자가 보호를 받고 나중에는 자유를 얻어서 살아가고 있는지를 바라봐야 하는 것이 피해자의 입장입니다. 결국 가해자나 피해자나 동일하게 도피성을 통해서 나타나는 하나님이 사랑과 은혜를 생각해야 했던 것입니다.
실수로 사람을 죽였다는 것은 내 의지도 아니고 내 생각도 아니고 내 계획도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그저 우연히 죽게 된 것입니다. 죽일 마음 없이 사람을 밀쳤는데 넘어져 죽어버렸다던가 함께 나무를 하고 있는데 도끼가 빠져나가서 옆 사람을 죽이게 했다던가 이 모든 일들이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어난 일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일들이 진짜 우연입니까?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가해자와 피해자를 만들어서 그들 속에 하나님의 은혜를 담아서 증거하기 위하여 그런 일들을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가해자는 대제사장이 죽음으로서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됩니다. 그리고 그 누구도 그의 죄에 대해서 물을 수가 없습니다. 대제사장이 죽음으로서 모든 죄가 해결되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가해자를 통해서 보여지는 것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죽으신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우리를 자유케 하셨음을 옛날 도피성에 피한 살인자를 통해서 이스라엘 안에서 증거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피해자는 내 친족을 죽인 자가 자유의 몸이 되어 살아가는 것을 보면서도 참아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그는 제사장의 죽음으로 인해서 자유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가해자의 자유의 배경에는 제사장의 죽음이 있습니다. 따라서 피해자는 내 친족의 죽음이 아니라 가해자를 자유케 한 제사장의 죽음을 생각해야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가 도피성이라는 원칙 아래서 살아갈 때 원한이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인간의 만남 안에서는 본의 아니게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것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본의 아니게 실수를 해서 형제에게 피해를 입힐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 안에서 사는 성도의 관계라면 바로 이 도피성의 정신이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 관계에서야 가해자와 피해자가 있을지 모르지만 예수님을 두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가해자고 예수님은 피해자이십니다. 내가 피해를 입은 것보다는 내가 예수님에게 피해를 입힌 것이 더 크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나로 인해서 죽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죽인 가해자이고 내가 죽어야 할 자인데 예수님의 피가 나를 자유케 하셨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나를 자유케 한 주님의 은혜가 성도와의 만남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보호받는 존재이고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해서 죄에서 자유케 된 사람들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은혜를 입은 자들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은혜가 크다는 것을 아십니까? 그것을 인정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이 형제를 만나는 모든 관계에서 주님의 은혜가 놀랍고 크다는 것이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말로는 형제라고 하면서도 조그만 문제를 가지고 자존심 싸움을 하고, 아무것도 아닌 하찮은 것 가지고 싸우고 다투지는 않습니까?
입으로만 예수님의 은혜를 말한다고 해서 은혜를 아는 자라 할 수 없습니다. 은혜를 안다면 그 앎은 필히 보여지게 되어 있습니다. 형제를 통해서 이웃과의 만남을 통해서 증거 되고 드러나는 것입니다. 은혜와 믿음은 감추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드러나고 확산되는 것입니다. 그 일을 하라고 여러분을 교회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리고 때때로 여러분들 관계에서 가해자가 있게 하고 피해자가 있게도 하십니다. 다른 형제의 조그만 실수 때문에 상처 입을 수도 있고 또 내가 상처를 입할 수도 있습니다. 전혀 그럴 마음이 아니었는데 본의 아니게 피해를 입히는 일들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 나에게 상처를 주고 피해를 입힌 형제를 바라보지 마시고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지금 은석교회 안에는 도피성이 세워져 있습니다. 그 도피성은 주님입니다. 주님이 친히 도피성이 되시고 제사장이 되셔서 가해자를 보호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도피성 되신 주님 때문에 내가 살았습니다. 모든 것을 주님의 은혜 안에서 생각하십시오. 용서 못할 것이 없습니다.
마 18장에 보면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나옵니다. 주인은 처음에는 그 몸과 처와 자식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서 갚게 하라고 지시합니다. 그러나 종이 엎드려서 간구하자 그 종을 불쌍히 여겨서 놓아 보내주고 그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종이 길을 가다가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을 지고 갚지 않은 동관을 만납니다. 그리고 빚진 자의 목을 잡고 빚을 갚으라고 합니다. 그 동관은 빚을 갚을 테니 참아달라고 사정을 합니다. 그러나 종은 빚을 갚도록 그 동관을 옥에 가둬버립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얘기를 들으면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 받은 자로서 그럴 수가 있는가?'라고 분을 낼 것입니다. 아마 그 종이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았다는 사실을 생각했다면 그도 백 데나리온의 빚을 탕감해줬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종은 자신이 탕감 받은 엄청난 돈에 대해서는 생각지 않고 자신이 받을 돈만 생각했던 것입니다. 혹, 우리들이 바로 그 종과 같은 태도로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까?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면서 천국은 바로 회계하려 하던 임금과 같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 18:33절에 보면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임금의 마음이며 이 마음이 곧 천국입니다. 천국은 불쌍히 여김 받은 것과 같이 불쌍히 여기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도피성은 불쌍히 여기는 성입니다. 불쌍히 여김으로서 죽임을 당해야 할 가해자가 보호를 받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주님의 불쌍히 여기심으로 새로운 생명을 얻은 자들입니다. 이것을 믿으신다면 여러분은 불쌍히 여기며 살아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용서를 받았기에 용서할 수 있는 사람으로 새롭게 태어난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아마 여러분은 '어떻게 인간이 그럴 수가 있는가?'라는 생각을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용서를 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한 것이 아니라, 용서 할 수 있는 자로 뒤바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용서할 수 있는 자로 새롭게 만드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은석교회의 도피성임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 모두가 주님의 용서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주님의 피가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건지셨습니다. 도피성이신 주님을 바라보며 살아가십시오. 여러분이 진심으로 주님을 바라보고 사신다면 여러분의 마음은 주님의 용서와 긍휼하심으로 가득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주님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그 증거는 형제들과의 만남에서 나타나는 긍휼과 용서일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만남은 귀한 것입니다. 내가 주님을 바라보며 사는가를 성도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