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2:8-14 라합의 믿음

예수님 시대에 있어서 제자들은 아무도 예수님을 믿지 못했습니다. 만약 믿음이라는 문제를 단순히 예수님을 따라다니고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옆에서 수종을 드는 것만으로 얘기한다면 제자들은 모두 믿음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자기 직업까지 팽개치고 예수님을 따라나섰는데 그만한 믿음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잘 알았다면 몰라도 알지도 못한 사람이 '나를 따르라'고 하는 한마디에 자기의 일을 다 버리고 좇는다는 것은 참으로 힘들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믿음도, 적어도 우리는 대단한 믿음이라고 여기는 그 믿음도 결국 자기 죽음이라는 엄청난 권세 앞에서는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따라나디고 설교를 들었던 그 모든 세월들이 '자기 죽음'을 극복할 힘이 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당시 제자들의 믿음은 믿음이 아니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구원과도 상관없는 믿음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오늘 이 시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다니는 것을 믿음이라고 하기 이전에, 교회를 다니고 설교를 듣는 우리들의 행위들이 과연 죽음을 이길만한 힘이 되는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죽음을 앞에 두고서도 당당하게 그리스도로 기뻐할 수 있는 믿음의 힘이 교회를 다니는 것으로 발생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만약 그렇다면 왜 제자들은 예수님을 직접 모시고 직접 말씀을 들으며 살았는데 십자가 죽음이라는 두려움 앞에서 도망을 치고 만 것입니까?

믿음이라는 문제는 인간 쪽에서는 해결할 수 없는 것입니다. 믿겠다고 해서 믿어지는 것도 아니고 나는 믿는다고 해서 믿고 있는 것이 아닐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믿음의 확신도 아닙니다. 믿음에 대한 확인입니다. 믿음이 무엇인가를 알고 그 믿음이 과연 내 속에서 나를 지배하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믿음이 아닌 것으로 발각되는 것은 모두 쓰레기로 여기고 빈 마음으로 예수님을 찾아 나오는 것이 필요합니다.

자기 스스로 자신이 믿음을 판단하지 마십시오. 내가 나를 생각하면 뭔가 부족한 것은 있을지라도 '나는 예수를 믿고 있다'고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교인이라면 누구나 내 행동에 있어서는 부족한 것이 있지만, 내 마음은 예수를 믿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마음에 자기가 속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믿음을 확인하라고 성경을 통해서 믿음이 있는 자를 등장시킨 것입니다. 믿음에는 이러한 모습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을 본받아서 이 사람처럼 믿으라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과 같은 삶이 아니면 믿음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경우를 예로 들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삭을 바칠 때 하나님은 그것으로 아브라함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으로 인정하셨습니다(창 22:12).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기가 사랑하는 것을 포기한 것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으로 인정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건을 우리에게 남겨주심으로서 믿음은 자기가 사랑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임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즉 믿음은 인간이 사랑하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지 병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러한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기는 했지만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이 자기가 사랑하는 것이 부정되어지는 길이라는 것을 깨닫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신 10:12절에 보면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요구는 사랑입니다.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사랑을 찾고자 합니다.

인간에게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는 사랑이 있다는 증거는 자기 사랑이 부정되어짐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자기 사랑과 하나님의 사랑은 서로 공존할 수도 병행 될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어느 하나가 있으면 필히 다른 한쪽은 물러나야 합니다. 타협도 있을 수가 없고 화해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서로에게 적이고 원수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예수님을 따르고자 오는 것이 아니고 자기 사랑이 부정되어 있는가를 확인하기 위해서 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먼저 자기 사랑에 대한 부정이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에 먼저 이것을 확인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여전히 자기 사랑을 간직하고 있으면서 스스로는 예수님을 따른다고 자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인간의 힘으로는 되어질 수 없다고 말씀드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성령이 오신 것이고, 성령이 오셨다는 것은 인간의 자질과 의지와 믿음은 모두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을 받은 자는, 진심으로 예수님을 믿는 자는 자기에게 있는 것을 부정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내것을 버리고 외부에서 주어진 것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의지하는 것, 이것이 바로 성령에 의해서 주어진 참된 믿음인 것입니다. 오순절에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성령에 의해서 주어진 믿음으로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했지 않습니까?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안될 일도 되어진다는 자기 최면과 몽상으로 사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주여 믿습니다'라고 한다고 해서 믿음이 있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사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믿음이 없기 때문에 '주여 믿습니다'라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까? 내가 믿음이 있다는 것을 알아달라고 '믿습니까'를 연발하는 것이고, 불안하기 때문에 '믿습니다'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진짜 믿음이 있는 사람은 조용합니다. 예수님의 믿음이 자신을 채우고 있다면, '믿는다'고 소리칠 이유도 없고 악을 써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미 믿음이 있는데, 믿음이 있다면 이미 그리스도안에 있는 것인데 굳이 예수님에게 자신이 믿고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야 할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믿음은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가 바로 나의 현실에 그대로 적용되고 있음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현실이지 세상을 현실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새로운 현실이 주어진 것이고 새로운 세상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이러한 믿음의 모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본문은 여러분이 잘 아는 라합의 이야기입니다. 라합의 이야기는 단순히 자신이 위험할 수도 있는데 자기를 돌보지 않고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숨겨줬기 때문에 여리고성이 멸망당하는 가운데 구원을 얻었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만약 그렇게 되면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 상황에 전혀 맞지 않는 이야기가 되고 맙니다. 왜냐하면 오늘의 시대 상황에서 정탐꾼이란 찾아볼 수 없고, 따라서 정탐꾼을 숨겨주는 상황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오늘 우리들의 이야기란 점을 생각해 본다면 라합은 오늘 우리들의 이야기가 되어야 하고, 그렇다면 정탐꾼을 숨겨준 것은 오늘 우리들의 상황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오늘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은 라합이 정탐꾼을 숨겨준 사건 이전에 이스라엘이 정탐꾼을 보낸 사실입니다. 여호수아는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먼저 정탐꾼을 보내서 여리고 성을 살피라고 합니다. 하지만 과연 정탐꾼을 보낼 필요가 있었겠습니까? 이미 가나안 땅은 하나님이 주시기로 약속한 땅입니다. 그냥 들어가면 되는 땅인데 정탐꾼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정탐꾼을 보낸 여호수아가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이 있지만 뭔가 불안했기 때문에 미리 점령할 땅을 살펴보고자 했던 것입니까? 그렇다면 여호수아의 불신앙에 대한 책망이 있어야 하는데 전혀 그런 부분이 없습니다. 따라서 여호수아가 정탐꾼을 보낸 것은 곧 하나님이 하게 하신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여리고에 정탐꾼을 보냄으로서 이스라엘에게 무엇을 가르치고자 하신 것입니까? 그것은 정탐꾼이 여리고 성에서 기생 라합을 만난 것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기생 라합을 통해서 믿음을 보임으로서 이스라엘에게 약속의 땅에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결국 라합은 이스라엘에게 믿음을 가르치기 위해서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이스라엘이 입장에서 라합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라합을 통해서 나타난 믿음의 실체는 버림과 얻음입니다. 버림과 얻음이 함께 공존하는 것이 믿음의 실체입니다. 정탐꾼이란 곧 간첩을 말합니다. 더군다나 이스라엘이 여리고를 정탐한다는 것은 여리고를 점령하기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정탐꾼은 여리고에 있어서는 위험천만한 인물들입니다. 반드시 잡아서 죽여야 할 자들입니다. 그런데 만약 정탐꾼을 숨겨준다면 그것은 단지 절도나 강도를 숨겨주는 차원을 지나서 국가를 위태롭게 하는 반역죄에 해당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절도나 강도를 숨겨주는 것보다는 간첩을 숨겨주는 것을 더 중한 죄로 여깁니다. 간첩과 똑같은 자로 여겨버립니다. 국가 안보를 위태롭게 한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라합이 정탐꾼을 숨겨줬다는 것은 절대로 쉬운 일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자기 목숨을 건 일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분명 정탐꾼에게서 자기 목숨을 내걸 정도로 가치 있는 것을 발견했을 것입니다. 자기 목숨을 잃을 상황이 닥친다고 해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뭔가가 있었기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고 정탐꾼을 숨겨준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을 단순히 인정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만약 이스라엘의 정탐꾼이 아니라 다른 나라의 정탐꾼이었다면 라합이 어떻게 했겠습니까? 그래도 숨겨 줬겠습니까? 아닐 것입니다. 왜 이스라엘의 정탐꾼이었는가하는 것은 9-12절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백성이 다 너희 앞에 간담이 녹나니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편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라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 그러므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여 나의 부모와 남녀 형제와 무릇 그들에게 있는 모든 자를 살려 주어 우리 생명을 죽는 데서 건져내기로 이제 여호와로 맹세하고 내게 진실한 표를 내라" 이것이 라합이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숨겨준 이유입니다.

이스라엘의 정탐꾼에게는 하나님이 있었습니다. 그냥 신으로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신 상천하지의 하나님입니다.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신 하나님을 알았기에 여리고 성은 이스라엘에게 무너진다는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군사가 몇 명인지, 힘이 얼마나 센지 이런 것을 따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가나안을 이스라엘에 줬다는 것, 이것 하나만으로 여리고 성은 무너진다는 것을 믿은 것입니다. 그리고 정탐꾼을 선대하는 것이 곧 내가 사는 것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라합에게 다급한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정탐꾼이 왔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곧 가나안 땅에 들어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홍해를 갈라지게 하셔서 이스라엘을 건너게 하시고 아모리 사람을 전멸하게 하신 일을 알고 있는 라합으로서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 이스라엘이 곧 쳐들어 온다는 증거인 정탐꾼을 볼 때 다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다급함 속에서 라합이 취한 행동은 이스라엘 편에 서는 것입니다. 정탐꾼을 숨겨주는 것은 결국 이스라엘을 도와주는 것임과 동시에 자신의 나라에게는 반역입니다. 자기 나라를 무너뜨리는 행위가 아니겠습니까? 이것을 여리고의 입장에서 보면 굉장한 이기심으로 보여질 것입니다. 나 살자고 자신이 몸담고 있는 나라를 배신한 행위는 아주 파렴치한 것으로 보여질 것입니다. 인간적인 입장에서 라합은 설사 여리고가 무너진다고 해도 끝까지 여리고 편에 있어야 당연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정탐꾼을 숨겨주고 자기 나라를 버리고 이스라엘 편에 선 것을 믿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히 11:31절에서도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라고 말합니다. 라합이 정탐꾼을 영접한 것을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이 믿음이 없었다면 라합은 여리고에서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라합의 믿음과 같은 믿음이 아니면 멸망당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기 때문에 라합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고 심각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정탐군이 들어왔음을 아는 자가 라합만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정탐꾼이 들어온 것을 목격을 했고, 그 사람은 그 사실을 여리고 왕에게 고했습니다(2절). 그리고 여리고 왕은 라합에게 기별해서 여리고를 탐지하러 온 정탐꾼을 끌어 내라고 지시합니다. 그러나 라합은 자신은 그들이 누구인지도 몰랐고, 또 이미 성밖으로 도망을 쳤다고 거짓말을 함으로서 위기를 모면합니다.

이러한 사실에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똑같이 정탐꾼을 목격한 입장인데 왜 한쪽은 그들을 보호하고 한쪽은 죽이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쉽게 생각하면 내 나라를 해치는 정탐꾼을 잡아 죽이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라합은 국가를 배신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앞서 말한대로 라합이 국가를 배신하고 이스라엘 편에 선 이유입니다. 그것은 라합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던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이미 확정되어져 있음을 믿었습니다. 가나안 땅을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기로 약속했다면 가나안의 멸망은 이미 확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자신들의 운명이 약속에 의해서 확정되어 있음을 믿지 않았습니다. 자기들 스스로 자신의 나라를 지킬 수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이들을 가리켜서 순종치 아니한 자라고 말합니다.

정탐꾼을 죽이려고 한 것이 왜 순종치 않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여리고 왕에게 정탐꾼을 죽이지 말라고 지시를 하기라도 했습니까? 그러나 지시는 하지 않았다고 해도 가나안 땅을 이미 이스라엘에게 주었다는 것을 안다면 정탐꾼을 영접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에 순종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그들을 죽이고자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정면으로 거부한 것이고 그것이 곧 하나님께 순종치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정탐군을 죽이고자 한 것은 자기 세계를 보존하고자 한 것이고, 영접한 것은 자기 세계를 버리고 도래하는 새로운 세계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라합의 믿음은 자기 세계를 버리고 도래하는 새로운 세계를 생각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라합을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로 하여금 가나안 땅에서 자기 세계를 구축하지 말고 자기 세계를 위해서 살지 말고 새로운 세계인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는 믿음으로 살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 앞에서 선한 자는 약속을 믿는 자입니다. 약속의 확고함을 믿고 흔들림이 없이 사는 것이 곧 믿음입니다. 이 믿음으로 사는 자는 그가 어떤 직업을 가졌고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이건 상관없이 의로운 자입니다. 믿음이 이미 그를 의롭게 했기 때문입니다. 하필이면 기생 라합이 정탐꾼을 영접한 것이 이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생은 분명 세상 도덕적으로 볼 때 나쁜 일입니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고들 하지만 그래도 창녀 일을 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그가 구원을 받는다면 그 행위를 본 것이 아니라 믿음을 보았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다말과 유다의 경우와도 같습니다. 다말이 스스로 창녀로 위장을 해서 유다와 동침한 것은 분명 나쁜 일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것을 의로 보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다말이 유다의 후손을 이어가고자 하는 의 때문에 다말의 행위가 정당화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나쁜 것은 나쁜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행위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인간은 어떤 행위를 하든 죄인입니다. 다말이 창녀로 위장을 해서 유다와 동침을 했든 안했든 그는 죄인입니다. 죄인이 의인으로 여겨지는 것은, 약속에 대한 믿음입니다. 다말 역시 하나님의 약속의 후손에 대한 믿음으로 의로 여김 받은 것입니다.

라합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라합은 여리고 왕의 물음에 대해서 거짓을 대답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도 '정탐꾼을 살리고자 한 것은 잘한 것이지만 거짓말한 것은 나쁜것이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지금 저는 거짓말을 정당화하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옳고 그름은 인간의 행위로 규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옳고 그름은 하나님의 약속을 기준으로 규정됩니다. 약속을 믿는 자는 옳은 자입니다 그러나 약속을 믿지 않는 자는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는 그른 자입니다.

라합의 믿음은 약속에 대한 확고함입니다. 세상 일은 하나님에 의해서 이미 확정되어 있음을 아는 것입니다. 확정되어 있는 하나님의 일을 따라가기에 여리고라는 자기 세계를 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목숨까지도 담보로 내 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우리 역시 믿음으로 산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과연 라합의 믿음입니까? 약속에 대한 확고함으로 살고 있습니까? 세상의 모든 일은 이미 하나님에 의해서 확정되어 있음을 믿고 살아갑니까? 이 세상은 멸망당하고 새로운 세상이 도래한다는 확정되어진 일에 대한 확고함으로 살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분은 세상에 대해서 미련도 없고 아까울 것도 없이 사는 분입니다. 얼마든지 라합의 자리에서 정탐꾼을 영접할 수 있는 신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확인하기 위해서 여러분들에게 정탐꾼을 보내신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정탐꾼을 새로운 세계를 몰고 옵니다. 다시 말해서 복음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여러분에게 말할 때 그가 바로 여러분이 믿음을 확인하는 정탐꾼입니다. 그럴따 하나님의 약속의 확고함에서 새로운 세상을 바라보는 신자라면 정탐꾼을 영접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영원한 생명의 나라보다는 자기 세계를 붙들고 자기 세계를 지키고자 하는 자는 필시 정탐꾼을 밀쳐 낼 것입니다.

라합이 자신이 나라인 여리고를 부인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나라를 볼 수 있었고 그 나라에 자기 인생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나의 나라는 여리고가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는 나라라는 것을 알았기에 여리고를 버릴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의 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대한민국입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나라에 남은 인생을 걸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