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21:1-3, 43-45 레위인의 성읍

마태복음 11:28-30절에 보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이 참이라고 믿으십니까? 단지 '성경 말씀이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니까 거짓일 리가 있는가 참이겠지'라는 어림짐작으로 믿는 참이 아니라, 실제로 여러분의 삶에서 참으로 증명되어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은 우리가 참이라고 믿는다고 해서 참으로 증거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참이라는 것은 우리들의 입으로 얼마든지 증거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말씀은 우리의 입술로 증거 되는 것이 아니라 삶을 통해서 증거 되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신자로서 성경이 진리임을 믿는다면 진리는 입술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삶에 머물러야 할 것입니다. 성경이 참이라면 진리라면, 그리고 신자가 그것을 믿는다면 참이고 진리인 성경이 말씀하는 삶을 기쁘게 따라가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입으로는 참이고 진리라고 말하면서 삶이 진리를 따라가지 않는다면 과연 성경을 참된 것으로 믿는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을 진리로 믿는다면 성경의 모든 말씀이 믿어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신자의 삶 역시 그것이 어떤 삶이든 상관없이, 설령 고통의 삶이고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는 삶이라고 할지라도 마땅히 그러한 삶으로 가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을 진리로 믿는다는 참된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은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마음이 쉼을 얻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말씀은 우리들이 생각하는 이치에는 맞지 않는 말씀입니다. 멍에라는 것은 분명 힘들고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멍에를 메고 예수님에게 배우면 마음이 쉼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멍에라는 표현을 쓰신 것은 분명 힘들고 무거운 것임을 의미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면 마음이 쉼을 얻는다고 하시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이 진리며 참이라는 것을 멍에를 매고 쉼을 얻는 것을 통해서 증거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지난 수요일에 성경 말씀을 소설책을 읽듯 읽지 말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성경 말씀의 내용을 자신의 문제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으로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소설책의 내용은 그것이 불행이든 행복이든 상관없이 나의 삶은 아닙니다. 내 삶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 말씀은 우리 삶 자체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자신의 문제를 인식을 해야 하고, 삶의 문제점이 보여져야 합니다. 성경은 이런 자에 한해서 말씀으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경이 여러분 자신들 앞에서 침묵을 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질 것입니다. 내가 읽고 싶으면 읽고 읽기 싫으면 읽지 않을 수 있는 것으로 여깁니다. 아무런 생동감도 없이 꼼짝하지 못하고 우리들이 읽어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성경으로 취급하는 모습들이 많습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도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대하시는지 무슨 일을 하려고 하시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무심한 채 성경을 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말씀을 대하고 있는 우리들의 솔직한 모습이라고 진단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신자는 하나님의 질문을 받아야 할 것이고 하나님에 대해서 질문을 하는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그는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대답을 들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신자에게 있어서 진심으로 말씀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음성으로 자리하게 될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도피성 역시 이러한 마음으로 대한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도피성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까? 하나님이 무엇을 기대하고 계시고 무엇을 원하고 계시는지에 대해서 명확히 아셨습니까? 아셨다면 그 앎은 여러분의 삶을 통해서 증거 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도피성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참이라는 것이 증거 되어지기 위해서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도구로 선택되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도피성은 보수자의 보복에 의해서 죽어야 할 자가 보호되는 성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제사장이 죽음으로 자유를 얻는 것을 통해서 오늘날 우리의 자유는 그리스도의 의로 주어진 은총임을 말씀드렸습니다. 도피성은 은혜와 용서를 말합니다. 가해자의 입장에서는 보호받는 은혜를,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은혜의 용서 안에 있는 자이기에 누가 누구를 정죄하거나 판단할 수 있는 자격이 없음에 대해서 배우게 되는 것이 도피성입니다. 그러나 도피성이 무엇인가를 알았다고 해서 하나님의 기대가 충족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는 자가 아니라 증거자로 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도피성을 아는 자가 아니라 도피성을 증거 하는 자로 살아가라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도피성을 증거 한다는 것은 결국 우리의 삶에 도피성의 은혜와 용서가 담겨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은 말씀을 증거 하는 도구라는 것을 한시도 잊지 마십시오. 내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라고 주어진 삶입니다. 이것을 잊지 않을 때 말씀과 삶이 하나되어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신자는 삶에 대해서 걱정을 하기보다는 삶의 내면에 대해서 걱정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이러한 시각에서 대할 때, 본문의 내용을 통해서 하나님을 음성을 듣게 될 것이고 우리들의 삶의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 21장은 레위지파에게 성이 분배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2절을 보면 "때에 레위 사람의 족장들이 제사장 엘르아살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의 지파 족장들에게 나아와 가나안 땅 실로에서 그들에게 말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모세로 명하사 우리의 거할 성읍들과 우리의 가축 먹일 그 들을 우리에게 주라 하셨었나이다 하매"라고 말씀합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에게 땅을 분배하고 나자 레위 사람의 족장들이 제사장 엘르아살과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의 지파 족장들에게 나아와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사 우리가 거할 성읍과 가축 먹일 들을 주라고 하셨었다'는 말을 합니다. 민 35:2-8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각 지파가 얻은 기업 중에서 레위 지파 사람들에게 그들이 거할 성읍을 줘서 레위인들이 거하도록 하고 그 성읍 사면의 들을 줘서 그들의 가축이 거할 곳이 되게 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나옵니다. 레위 지파는 이 말씀을 근거로 해서 자기들에게 돌아올 몫을 요구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레위 지파가 맨 마지막에 성을 분배받는 것을 이유로 당시 이스라엘이 레위지파에 대해서 소홀하게 대했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이것은 지나친 생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레위 지파는 다른 이스라엘처럼 가나안 땅의 한쪽 일부를 분배받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분배받은 기업 중 일부를 분배받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각 지파가 분배받은 것 중에서 얼마를 레위 몫으로 분배받는 것이기 때문에 먼저 이스라엘 자손이 분배를 받아야 했던 것입니다.

창 49:7절에 보면 "그 노염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레위를 향한 야곱의 저주입니다. 즉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라는 예언대로 레위는 이스라엘 전역에 흩어짐을 당하는 것이고 흩어지기 위해서는 먼저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이 기업을 분배받아야 했던 것입니다.

레위 자손의 요구에 의해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레위 지파에게 성을 내주게 되는데 그 성의 수가 모두 48성읍입니다. 아론 자손이 13성읍, 그핫 자손이 10성읍, 게르손 자손이 13성읍, 므라리 자손이 12성읍, 모두 합해서 48성읍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레위 자손들이 이스라엘의 기업 안에서 각기 거할 성읍을 분배받는 이 내용들이 오늘 우리들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까? 이러한 말씀 안에서 우리는 어떠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습니까?

먼저 생각할 것은, 레위인들이 받은 성읍과 들은 모두가 이스라엘이 분배받은 기업에서 다시 분배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들의 것에서 레위인의 몫으로 떼어 낸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레위인이 거할 곳을 만들고 그들이 목축을 할 수 있도록 들을 주시는 것이 목적이라면 애당초 이스라엘이 땅을 분배할 때 레위인도 제비뽑기에 참여해서 자기들의 몫을 챙기도록 하면 안되는 것입니까? 어차피 레위인들이 거할 성읍을 줘야 하고 또 들도 줘야 한다면 아예 처음부터 레위인들도 제비뽑기에 참여해서 자기들의 몫을 챙기면 덜 번거로울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굳이 먼저 이스라엘에게 기업이 분배되도록 하고 그 후에 각기 이스라엘 자손들 안에서 레위인의 몫으로 성읍과 들을 분배하도록 한 것은, 레위인을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고 전달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 레위 자손들은 한쪽에 집단 거주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레위 자손에 대한 이스라엘의 땅 분배는 모든 자손에 대해서 골고루 행해졌습니다. 즉 레위 자손은 이스라엘이 거주하는 모든 지역에 골고루 분포되어서 거주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레위인을 이스라엘 안에 흩으시는 것입니까? 이스라엘 전역에 레위인을 흩어서 거주하게 하시는 것은 분명 레위인을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증거 하시고자 하는 것이 있다는 뜻입니다. 도피성이 이스라엘 내부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를 증거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라면 레위인 역시 이스라엘 안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레위인이 누구인가를 먼저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알다시피 레위인은 기업이 없는 자입니다. 레위인은 성전에서 봉사하면서 기업이 없이 이스라엘 자손들이 성전에 바치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바치는 십일조로 생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결국 레위인은 한마디로 말해서 '약자'입니다. 이스라엘이 나눠주지 않으면 그들은 생계에 위협을 받게 됩니다. 남들이 주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자, 그들이 바로 약자입니다. 하나님은 레위인을 약자로 만들어서 이스라엘 안에 거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자손이 진심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하심으로 살아가고 있느냐는 것은 레위인이 그들의 삶에 개입되어 있는 것을 통해서 증거 되어지기 때문입니다.

나눠준다고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여러분도 이것은 다 경험하실 것입니다. 교회에 바치는 것은 즐겨하기도 하고 선뜻 하기도 하면서 개인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자에게 나눠준다는 것에 대해서는 선뜻 마음이 가지 않을 때가 많지 않습니까? 그리고 나눠주지 못한 자신의 잘못을 조금이라도 정당화하기 위해서 '나는 어렵게 살고 넉넉하지 못하니까 나눠주지 않아도 된다'라고 생각하거나 '교회에 바쳤으니까 그것으로 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보지는 않았습니까?

나눈다는 것은 자신의 소유를 흩어 버리는 것입니다. 헌금 역시 자신의 소유를 흩어버린다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나눠줘야 할 자를 있게 하신다는 것은, 소유에 대해서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는가를 확인하시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레위인이 거할 성읍은 기업을 받은 이스라엘 모든 자손들에게서 분배받은 것입니다. 유다 지파 8성읍, 베냐민 지파 4성읍, 시므온 지파 1성읍, 에브라임 지파 4성읍, 단 지파 4성읍, 요단 서편의 므낫세 반 지파 2성읍, 요단 동편의 므낫세 반지파 2성읍, 잇사갈 지파 4성읍, 아셀 지파 4성읍, 납달리 지파 3성읍, 스불론 지파 4성읍, 르우벤 지파 4성읍, 갓 지파 4성읍, 이렇게 해서 도합 48성읍을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가 분배를 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레위인을 위해서 자신들의 소유를 나눈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레위인을 통해서 가르치시고자 하시는 것은 이와 같이 나눔을 통해서 자기 소유의 흩어짐을 경험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소유의 흩어짐을 경험하며 살아가십니까? 사람은 자신이 열심히 일해서 벌어들인 소득에 대해서는 애착을 가지게 됩니다. 나의 수고와 노력의 대가이기 때문에 헛되이 쓰지 않으려고 애를 씁니다. 남을 도와준다고 해도 보람이 되는 곳에 도움을 주려고 할 것입니다. 아무런 보람도 없고 의미도 없는 일에 자신의 땀의 결실을 허비하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남 주기도 아까운 것이 바로 내 소유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이러한 인간 세상 속에 레위인을 흩어 놓으십니다. 그리고 레위인을 도구로 삼아서 과연 소유의 흩어짐을 경험하며 살아가는가를 물으시는 것입니다.

도피성은 은혜와 용서를 담고 있는 성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그 도피성의 정신으로 살아가야 참된 이스라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도피성 다음에 레위인에게 거할 성읍이 주어지는 내용이 나오는 것은, 이스라엘이 은혜와 용서의 정신으로 존재한다면 그들 가운데 흩어져 있는 약자에 대해서는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이 진심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가나안의 기업을 얻었고 어린양의 피의 은혜로 인해서 죽어야 할 자들이 자유를 얻고 살아가고 있음을 잊지 않는다면 그 증거는 자신들의 소유를 통해서 드러나야 했던 것입니다. 즉 애당초 아무런 소유가 없던 자가 소유가 있게 되었다면 그것은 하나님으로 인해 주어진 것임을 아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기업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분명히 자신들의 손에 쥐어지는 소득이 있을 것입니다. 소득이 주어질 때마다 과연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소득을 바라보고 있는지는 단지 십일조를 바침으로서 증명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십일조를 바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들의 십일조가 진정한 십일조인지를 물으시기 위해서 그들 속에 약자를 흩어 놓으시는 것입니다. 레위인과 가난한 자 고아 과부 나그네들을 흩어 놓으시고 그들에게 어떻게 대하는가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십일조가 진심으로 자신의 소득에 대해 흩어버리는 마음에서 나온 것인지를 증거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 모든 지파에게 레위인이 거할 성읍을 분배하라고 하시는 것은, 앞으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살아갈 때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하심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지 아니면 자신들의 힘과 노력으로 살아가는 자가 되었는지는 레위인을 통해서 확인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도와줘야 살 수 있는 레위인의 모습은 이스라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도와줘야 살아갈 수 있는 자들이고, 또 하나님이 도우셨기 때문에 가나안 땅에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이것을 잊지 않는 것이 참된 이스라엘의 모습인데,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자기들 속에 흩어져 있는 레위인을 통해서 항상 참된 이스라엘의 정신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레위인에게 계속해서 나누는 삶을 살아가고 약자들에게 나누는 삶이 그치지를 않는다면 그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도우시는 은혜와 용서하심을 잊지 않고 살아간다는 증거입니다. 하지만 나누는 것을 그쳐 버리고 그로 인해서 레위인, 약자가 고통을 받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와 용서하심을 의지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힘을 의지하고 살아간다는 증거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물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너는 나의 도움과 은혜와 용서함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잊지 않느냐?'는 물음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예'하실 수 있습니까? '나는 하나님의 도움으로 산다.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하심이 아니면 나는 살 수 없는 자다' 이 고백은 우리의 입술로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힘든 것도 아니고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내가 수고해야 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예'라고 대답할 수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입술은 '예'라고 할 수 있지만 삶에서는 '아니오'라고 한다면 결국 입술의 고백은 거짓이라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사실 레위인은 이스라엘에게는 귀찮은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물론 소유의 흩어짐을 경험하며 살아간다면 레위인은 전혀 귀찮은 존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들이 잊을 수 있는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를 생각나게 하는 레위인에 대해서 감사하면서 기꺼이 자신들의 소유를 나눌 것입니다. 애당초 자기 것이 없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내 손에 있게 된 것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흩어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의 삶에 주변에 약자를 흩어 놓으셨습니다. 은석교회에도 약자를 흩어 놓으셨을 수 있습니다. 그들이 귀찮지는 않습니까? 마음에 부담이 되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로 살기보다는 돈으로 살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43-44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열조에게 맹세하사 주마 하신 온 땅을 이와 같이 이스라엘에게 다 주셨으므로 그들이 그것을 얻어 거기 거하였으며 여호와께서 그들의 사방에 안식을 주셨으되 그 열조에게 맹세하신 대로 하셨으므로 그 모든 대적이 그들을 당한 자가 하나도 없었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의 모든 대적을 그들의 손에 붙이셨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 보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사방에 안식을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안식이란 대적이 모두 사라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대적은 가나안 족속들입니다. 이스라엘과는 다른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은 은혜로 살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살아가지만 가나안은 자기들의 힘으로 살아갑니다. 결국 안식이란 여호와께서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는 세력을 물리치시고 오직 은혜로만 살고 도우심만 바라고 살아가는 상태가 되게 하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받아 낼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아시면서도 끊임없이 베푸시고 도우시고 주시는 분입니다. 아들이신 예수님조차도 아끼지 않으시고 주시지 않았습니까? 약자로 오신 예수님의 모습은 바로 우리들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우리가 당해야 할 모든 것을 예수님이 담당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받기만 하는 자입니다. 그 은혜를 잊지 않았다면,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에 살아가고 있음을 잊지 않고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들 주위에 흩어져 있는 받기만 하는 자들을 통해서 그 모습이 드러나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바로 약자임을 알고 나눌 수 있다는 그 마음 자체가 안식입니다. 왜냐하면 그 마음에는 힘으로 살고자 하는 하나님의 대적이 없고 전쟁이 그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모으는 것이 안식이 아니라 나누고 흩어버리는 것이 안식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 마음 되게 하시기 위해서 일하시는 것입니다. 나누고 흩어버리는 마음을 위해서 기도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