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남자를 먼저 만드시고 나중에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의문을 가져볼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굳이 여자를 창조하셔야 했는가? 여자 없이는 안되는 일이라도 있었는가? 종족 번성이 이유라면 굳이 여자를 만드실 것 없이 아담과 하와처럼 하나님이 많은 사람을 만들어 내시면 되지 않겠는가?' 이런 의문에 대해서 우리는 성경 안에서 그 해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여자를 만드신 이유는 창 2:20절의 돕는다는 말에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도움 주고 도움을 받는 관계로 만드신 것입니다. 상호 역할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도움을 주고 도움을 받는 관계라는 것은 강자와 약자라는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똑같이 강자라면 도움을 받는 역할이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약자인 여자를 만드심으로서 도움을 받고 도움을 주는 인간관계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 속에서 증거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도우심으로 존재하는 인간의 모습을 남자와 여자의 관계라는 역할극을 통해서 세상에 증거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세상이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하기를 기뻐하셨고, 그 역할을 인간에게 부여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 관계는 신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이웃과의 관계는 팽개친 채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겠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신자가 하나님을 사랑치 않음과 믿음 없음과 은혜를 무시하며 살아가는 모든 증거가 내 개인의 삶이 아니라 우리 주위에 이웃이 존재하고 있음으로 인해서 폭로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웃은 내 신앙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처럼 여겨버리는 것입니다. 단지 내가 믿음이 있고 사랑이 있음을 이웃에게 도움을 줌으로서 드러내면 되는 것으로 여겨버립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을 보면 그들의 신앙은 항상 이스라엘이라는 단체로 이야기됩니다. 죄를 지었으면 이스라엘이 지은 것이지 이스라엘 안에 한 개인이 죄지은 것으로 얘기하지 않습니다. 또한 개인이 잘못한 것은 이스라엘이 잘못한 것으로 여기고 이스라엘이 징벌을 받습니다. 이처럼 개인이 아니라 전체를 말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신앙이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한 몸의 관계 안에서 판단되어진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웃의 중요성을 망각한 채 믿음을 말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남자 여자를 만드신 의도를 전혀 생각지 않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구체적으로 현실적으로 증거 되어져야 합니다. 아무리 신자가 하나님에 대해서 정확하게 진술하고 증거 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단지 입술의 증거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웃을 위한 죽음으로 드러납니다. 낮아지시고 고난을 받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바로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와 하나님의 관계는 나라는 개인 안에서 증거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만나는 이웃을 위한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자기 개인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관심이 자기에게 집중된 사람은 그가 아무리 복음을 외치고 십자가를 말한다고 해도 그는 결국 '종교적 사람'이라고는 평가를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 자체가 개인을 용납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신앙을 오해하면 안됩니다. 신앙은 개인적인 종교적 행동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에 대한 지식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의 신앙은 여러분의 삶이 말해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만인의 존경을 받는 성자가 되기를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실패와 성공 속에서 기쁨과 슬픔 속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로 붙들려 가는 삶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삶을 통해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의미합니다.
사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이라는 말을 하면 뭔가 나하고는 거리가 멀고 상관이 없는 것으로 여겨질 수가 있습니다. 고난을 이웃으로부터 핍박을 받고 욕을 먹고 매를 맞는 것으로만 상상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고난은 매맞음과 핍박만이 아니라 우리의 짐을 대신 지시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고난을 이웃의 짐을 지는 것을 생각지 않고 단지 복음을 전함으로서 같은 교회 목사로부터 욕을 먹고 핍박을 받는 것으로만 생각한다면 그는 고난의 진정한 의미를 망각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셔야 할 것은, 십자가의 능력과 힘은 이웃의 짐을 대신 지게 하는 것에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신앙이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님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본문은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기업을 분배하고 마지막으로 레위 지파에게 48성읍을 나누어주는 것으로 땅 분배가 모두 끝이 난 후에 여호수아가 르우벤 사람과 갓 사람과 므낫세 반지파를 불러서 옛날에 모세가 너희들에게 주었던 요단 동편 땅으로 돌아가라고 이야기하는 내용입니다.
민수기 32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을 향해 가는 도중에 요단강에 이르렀을 때 요단강 동편의 땅이 가축을 기르기에 매우 좋은 땅이라는 것을 알게 된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이 모세에게 자신들은 요단을 건너지 않고 여기 거하겠다고 요청을 합니다(민32:1-5). 이 요청에 대해서 모세는 "너희 형제들은 싸우러 가거늘 너희는 여기 앉았고자 하느냐"(민 32:6)라는 말로 책망을 합니다. 형제들이 앞으로 가나안 땅을 싸워서 얻어야 것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자기들의 편안함만 추구한다는 책망입니다.
모세는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이 도와주지 않으면 가나안을 정복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그들을 책망한 것이 아닙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 다함께 가나안에 들어가서 싸울 것을 원했습니다. 비록 승리는 여호와께 있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승리하게 하신 것을 편안히 앉아서 누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승리 안에서 이스라엘다운 정신을 배워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정신이 이스라엘 전체 퍼지고 그 정신이 이스라엘을 다스려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르우벤과 갓 자손들이 요단 동편 땅 때문에 요단을 건너가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형제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자신들의 편안함과 풍요로움만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모세는 그것을 책망을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르우벤과 갓 자손들의 행동은 형제를 낙심케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민32:7).
모세의 책망에 대해서 그들은 요단 동편에 자기 가족들이 거할 성읍을 건축한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기업을 얻기까지 같이 싸우겠다고 말합니다(민32:16-19). 이로 인해서 요단 동편에 거하겠다고 요청했던 자손들은 다른 이스라엘 자손과 함께 요단을 건너서 가나안과의 싸움에 참여를 했던 것입니다. 사실 그들에게는 가나안의 싸움은 자신들에게 아무런 득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민수기 32:19절에 보면 '우리는 요단 동편에 산업을 얻었으니까 요단 저편에서는 기업을 얻지 않겠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즉 주어질 기업이 전혀 없는 싸움을 하게 된 것입니다. 돌아올 대가가 전혀 없는 싸움에 단지 이웃과 함께 하기 위해서라는 명분 하나만으로 7년이라는 세월 동안 싸움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돌아올 대가가 전혀 없는 싸움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은 무엇 때문입니다. 본문 2,3절을 보면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한 것을 너희가 다 지키며 또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일에 내 말을 너희가 청종하여 오늘날까지 날이 오래도록 너희가 너희 형제를 떠나지 아니하고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하신 그 책임을 지키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여기 보면 여호수아는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지파가 대가도 없는 싸움에 7년 동안 성실히 참여한 것에 대해서 모세와 내 말에 청종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형제를 떠나지 아니하고 형제를 위해 싸움에 참여한 것을 여호와의 명하신 책임을 지킨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이스라엘의 관계는 여호와의 명령과 그 명령에 대한 책임으로 이루어진 관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여호와의 말씀을 생략한 채 단지 인간 관계로서 도와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이었고 명령에 대한 책임이 그들로 하여금 대가없는 싸움에 성실히 참여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형제라는 관계 안에는 단지 인간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말씀에 대한 책임이 존재한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고 그 말씀에 대해서 책임을 지키는 삶을 산다면 그 삶은 형제를 통해서 증거 되어지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그들에게 돌아가라고 말합니다. 너희 형제에게 하나님이 안식을 주셨으니 이제 기쁜 마음으로 요단 동편에 있는 소유지 장막으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덧붙이기를 "크게 삼가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한 명령과 율법을 행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 계명을 지켜 그에게 친근히 하고 너희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그를 섬길지니라 하고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축복하여 보내매 그들이 자기 장막으로 갔더라"(5-6절)고 말합니다. 자기 소유지에 돌아가서도 여호와의 명령과 율법을 행하라고 말합니다. 과연 그들이 자기 소유지에서 여호와의 명령과 율법을 지켜 행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여호수아는 명령과 율법을 지켜 행하는 것을 여호와를 사랑하는 것으로, 그 모든 길을 행하는 것으로, 여호와를 친근히 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과연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여호와의 명령과 율법을 지켜 행하는 것이 단지 제사를 드리고 제물을 바치는 것을 의미하겠습니까? 요단 동편에 거하는 이들은 자기들의 땅에 제단을 세울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제단은 오직 지정한 한곳에만 세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증거로 22:10절부터 보면 요단 동편으로 돌아가는 이들이 요단 가에 단을 쌓았다는 이유로 그들과 싸움을 하려고까지 한 것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자기들을 위해서 7년 간 대가없는 싸움을 하고 희생을 했는데 단지 요단 가에 단을 쌓았다는 이유만으로 싸움을 하려고 하는 것은, 제단이라는 것이 그들에게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말해주는 것이고, 아무 곳에서나 세울 수 없는 것임을 보여주는 증거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단을 세울 수 없는 그들이 요단 동편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명령과 율법을 지키는 것입니까? 모세는 이미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을 말한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계명들은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로 집약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구약의 계명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결론을 내렸던 것입니다. 결국 요단 동편의 땅에서 하나님의 계명과 말씀을 지켜 행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모든 것은 형제와의 관계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형제를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명하신 책임을 지켰던 것처럼 요단 동편에서도 그 책임을 다하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그들을 보내면서 빈손으로 보내지 않습니다. 가나안 땅에서 얻은 전리품을 나누어주면서 너희 장막으로 돌아가서 대적에게서 탈취한 것을 형제들과 나누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과의 싸움에서 탈취한 전리품은 이스라엘의 힘으로 얻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승리로 인해서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승리를 이스라엘이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그 전리품을 주면서 장막으로 돌아가서 형제들과 나누라고 한 것은 하나님의 승리의 기쁨을 전쟁에 참여하지 못한 형제들과 같이 나누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은 형제라는 관계를 떠나서 생각할 수 없고, 나눈다는 개념을 벗어나서 이스라엘을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총, 은혜는 형제들과 나누는 개념 안에서 이해되어져야 했던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총과 은혜를 누린다면 그것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형제들에게 나누어주라고 나에게 허락하신 은혜이고 은총인 것입니다. 내가 잘나서 얻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야말로 하나님의 은총이고 은혜이기 때문에 내것으로 여긴다는 것은 은혜 안에는 찾아볼 수 없는 개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 교회에서 참으로 희박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형제라는 개념입니다. 형제라는 개념을 떠난 채 하나님의 은총을 말하고 은혜를 말하고 교회를 말하고 사랑을 말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은석교회도 예외가 아닐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관계 안에서, 형제라는 관계에서 증거 되어야 할 은혜와 사랑이 형제는 단절해 버린 채 단지 내 지식 안에서 십자가를 말하고 그리스도를 말한 것은 아닙니까? 참으로 깊이 생각해 봐야 할 문제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추구합니다. 그 은혜가 잘못된 은혜인가 바른 은혜인가를 따지기 이전에 우린 먼저 왜 은혜를 추구하는가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은혜가 주어진다면 주어진 은혜로 뭘 하려고 은혜를 추구하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은혜가 있다면 그 은혜로 무엇을 하려고 합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질문을 한다고 합시다. '너는 내가 은혜를 주면 그 은혜로 뭘 하겠느냐?'고 물으신다면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예, 저는 은혜가 주어지면 열심히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겠습니다'라고 대답하겠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이 다시 묻는다고 합시다. '나는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나를 섬기고 사랑하겠는가?' 이 물음에는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듣고 보니 의문이 생길만한 질문이 아닙니까? 섬김과 사랑이란 대상이 있어야 하는데, 과연 보이지 않으신 하나님을 어떻게 섬기고 사랑을 하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따로 분리해서 말씀한 것이 아니라 하나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증거는 곧 이웃 사랑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는지의 여부 역시 이웃을 통해서 증거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웃은 나의 믿음과 사랑이 어떠한지를 가르쳐주고 증거해 주는 존재임을 잊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아신다면, 그것은 이웃과 함께 나누라고 주어진 것입니다. 이웃에게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을 전달하고 같이 나누라고 여러분을 주님의 피로 사신 것이고 주님의 은총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싸워서 이긴 전리품은 바로 여러분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하나님의 전리품인 여러분 자신을 형제와 나누는 것이 곧 진심으로 주의 은총 안에 사는 자의 모습일 것이고, 은총을 받은 자의 책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항상 형제와의 관계를 말하고, 나누어야 할 것에 대해서 말하면 뭔가 마음에 커다란 부담으로 다가오는 것을 많이 느낍니다. 내것에 대해서 너무 많은 애착을 가지고 살기 때문입니다. 너무 자기 틀을 주장하고 손해보지 않으려는 의식이 강하기 때문에 나눈다는 것에 대해서 옳다고 하면서도 선뜻 내키지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우리 죄를 대신 지시고 죽으신 주님의 십자가에 깊숙이 빠져 있지 않은 증거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자기 문제, 자기 필요에 대해서 고민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길로 붙들려 가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하는 삶입니다. 여러분이 무엇을 회개해야 할 것인가는 여러분 주위에 있는 형제가 가르쳐 줄 것입니다. 여러분 주위에 있는 형제와의 관계를 통해서 여러분 스스로 나 자신이 주님의 십자가의 길에서 얼마나 멀어진 삶을 살고 있는지를 깨닫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형제와의 관계를 얼마나 강하게 말하고 있는지는 사도 바울의 말씀을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19-20절을 보면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대개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우리가 자랑할 수 있는 면류관은 우리 자신의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평소에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고 좋은 일을 많이 한 나의 행위가 자랑의 면류관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그것이 나의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목사들은 수십 년을 목회를 하다가 명예롭게 은퇴하는 것이 곧 자랑의 면류관이고 영광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전혀 다릅니다. 바울은 예수님이 재림하셨을 때 소망, 기쁨, 자랑의 면류관은 바로 너희들, 데살로니가 교회들,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된 형제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곧 사도 바울에게 영광이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의 이 말은 우리에게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단지 같은 교회를 출석하는 교인으로만 여겼던 사람이, 형제라는 칭호 속에서 이런 엄청난 존재로 우리 앞에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합니다. 내가 한 행위가 자랑이 되고 영광으로 다가오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내 주위에 있던 형제가 나의 면류관이고 영광이라는 말이 이해가 되십니까? 왜 형제가 나의 자랑의 면류관이고 영광이고 기쁨이고 소망입니까?
사도 바울은 자신이 남긴 복음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그들 안에서 역사함을 보고 감사했습니다. 형제들을 보면서 바울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확인할 수 있었고 따라서 형제들이 사도 바울에게는 하나님을 더욱 확신하게 되는 기쁨이고 소망이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살아 계심을 형제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형제란 돕고 도움을 받는 관계입니다. 돕고 도움을 받으면서 우리는 형제 안에서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역사 하심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을 배우고 나눠줘야 할 관계입니다.
르우벤, 갓, 므낫세 반지파가 여호와의 명하신 책임을 지키는 행동은 형제를 떠나지 아니하고 대가 없는 싸움에 7년을 헌신한 것으로 증거 됩니다. 오늘 여러분도 형제의 관계가 어떠함을 배우십시오. 그리스도의 한몸된 형제의 관계란 가벼운 인간 관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을 나누고 배워야 할 관계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여러분에게는 자연히 회개의 삶이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형제로 인해서 말씀에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여러분의 불의함이 여실히 나타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형제의 관계 속에서 주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더욱 깊이 배우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