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예배 신앙고백 / 사도신경 찬송 / 49 장 교독 / (21) 시95편 기도 / 이영민 장로 찬송 / 334 장 성경봉독 / 수 22:30-34 설교 / 32강 형제의 증거물 찬송 / 97 장 기도 / 설교자 찬송 / 1장 축도 / 설교자 |
이미 삶의 터전을 마련한 입장에서는 하루속히 그곳에 정착해서 기반을 마련하고 싶은 생각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모세에게 '우리는 요단을 건너가지 않고 여기에 남겠다'는 요청을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한 그들이 생각을 돌이키고 형제의 기업을 위한 전쟁에 손해를 감수하고 참여하게 된 동기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자신들로 인해서 형제가 낙심하게 될 것을 염려했던 것입니다. 결국 자신들의 행복보다도, 자신들의 이득보다도, 자신들로 인해서 형제가 낙심하게 되는 것을 더 크게 여겼던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을 아무런 이득이 없는 전쟁에 참여하게 한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사는 것이 곧 이스라엘의 마음이고 정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주에 저는 신자에게는 말씀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말씀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것은 말씀을 행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히 4:12절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라고 말합니다. 말씀은 죽어있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운동력은 우리의 혼과 영을 찔러 쪼개고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즉 말씀이 우리 안에서 활동을 하고 있는 흔적은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뜻을 감찰하면서 우리의 생각이나 행하고자 하는 것들이 말씀에서 벗어나 있는 것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는 말씀 안에서 사는 신자라면 자연히 말씀이 원하는 쪽으로 순종되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것을 말씀에 대한 책임이라고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즉 말씀에 대한 책임은 말씀을 실천하고 행하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순종되어지는 삶을 의미한 말입니다.
요단 동편에 삶의 터전을 마련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로 인해서 형제가 낙심케 될 것을 염려해서 이득이 없는 전쟁에 참여하게 된 그것이 곧 살아서 운동력이 있는 말씀에 순종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들의 편안함과 이익 때문에 어린양의 피로서 함께 구출되고 함께 하나님의 약속을 땅을 향해서 살아온 형제들을 낙심하게 할 수 없다는 생각이 그들로 하여금 요단강을 건너가게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형제라는 관계는 혈통이나 인간적인 친근함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어린양의 피로서 이루어진 특이한 관계입니다. 이러한 관계는 세계 어디를 둘러봐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민족과 혈통과 인간적 이해로 형성되어지는 인간관계가 있는 세상에 어린양의 피로서 이루어지는 특이한 관계가 새롭게 형성된 것입니다. 따라서 어린양의 피가 지니고 있는 모든 의미는 피로 형성된 이스라엘을 통해서 드러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형제의 관계에서 보여지는 모든 것 하나하나가 결국 그들이 어린양의 피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지를 그대로 드러내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인간 관계는 자식이 부모에게 불효하고 형제가 서로 다투고 자기 이익을 위해서 타인에게 피해를 입히는 문제가 있다고 해도 단지 도덕과 윤리적인 기준에서 판단할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에게 있어서는 윤리와 도덕이 아니라 말씀에 순종하고 있는지, 그리스도의 피로 인한 희생과 섬김에 대한 감사와 은혜로 살아가고 있는지가 폭로되는 현장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신자들이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무시하고 살기 때문에 개인적인 신앙 행위만 착실하다면 자신의 신앙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으로 판단해 버리고 형제를 대할 때 어떤 생각으로 어떤 태도로 대한다고 해도 그것을 별 문제 없는 것으로 여겨버리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신앙을 중요하게 여기고, 교회 역시 중요하게 여긴다고 하면서 형제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그 신앙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근거하지 않은 신앙일 수밖에 없고 그가 생각하는 교회란 형제를 염두에 두지 않는 단지 자신의 종교 생활을 영위하는 터전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란 형제들의 모임입니다. 형제관계가 없는 교회란 있을 수 없습니다. 에베소서 2:21-22절에서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고 말합니다. 나 혼자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함께 처소로 지어져 가는 관계가 교회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따라서 형제 관계를 무시한 채 모여지는 교회를 교회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형제 관계에 대해서 말을 합니다. 본문의 내용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여호수아가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 지파를 요단 동편으로 돌려보낸 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요단 동편에 터전을 잡은 지파들은 가나안 땅을 떠나서 자기들의 기업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10절에서 "르우벤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가 가나안 땅 요단 언덕 가에 이르자 거기서 요단 가에 단을 쌓았는데 볼 만한 큰 단이었더라"는 말씀을 보면, 그들이 요단 동편으로 다시 돌아가다가 가나안 땅 요단 언덕 가에 이르렀을 때 아주 큰 단을 쌓았다고 말합니다. 볼 만한 큰 단이었다는 것은 멀리서도 잘 볼 수 있을 정도로 큰 단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단을 쌓은 것으로 인해서 이스라엘은 전쟁의 위기에 빠지게 됩니다. 12절에 "이스라엘 자손이 이를 듣자 곧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실로에 모여서 그들과 싸우러 가려 하니라"고 말합니다. 결국 단을 쌓았다는 것 때문에 요단 동편에 터전을 잡은 이스라엘과 요단 서편 가나안에 터전을 잡은 이스라엘 사이에 전쟁이 일어날 위기가 닥친 것입니다.
그렇다면 단을 쌓았다는 것이 왜 전쟁을 할 정도로 심각한 문제입니까? 신 12:4-14절의 규례를 보면 여호와의 제단은 오직 한곳에만 세우도록 되어 있습니다. 제단이란 사람들이 세우고 싶다고 해서 마음대로 세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한곳 여호와가 지정한 곳에만 세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이 규례를 어기면 하나님의 진노로 인해서 진멸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요단 서편의 이스라엘은 이 규례를 내세워서 요단 동편의 이스라엘이 단을 쌓은 것을 여호와께 범죄한 것으로 규정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요단 동편 이스라엘의 범죄가 그들의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만약 요단 동편의 이스라엘이 단을 세운 범죄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에게만 국한되어지다면 요단 서편의 이스라엘이 그들과 전쟁을 해서라도 그 범죄를 막으려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과거에 한 개인의 죄로 인해서 이스라엘 회중 전체에 진노가 임한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요단 동편의 죄를 그들의 죄로만 여기고 수수방관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전쟁을 하기 전에 먼저 사람을 보내서 그들의 죄에 대해서 책망을 하고 죄에서 돌이키기를 권면하게 됩니다. '너희가 왜 이스라엘 하나님께 범죄하여 여호와를 좇는데서 떠나서 자기를 위하여 단을 쌓아 여호와를 거역하고자 하느냐? 과거에도 브올의 죄로 인해서 회중에 재앙이 내렸고 오늘날까지 우리가 그 죄에서 정결함을 입지 못했는데 그 죄악이 우리에게 부족해서 오늘날 너희가 여호와를 떠나려고 하느냐? 만약 너희가 여호와를 배역하면 또 다시 여호와가 이스라엘 온 회중에 진노하실 것이다'(16-18절) 이것이 서편 이스라엘이 파견한 사람들이 동편 이스라엘을 찾아와서 책망한 내용입니다.
서편 이스라엘은 동편 이스라엘이 자기들 마음대로 단을 쌓는 이유를 자기들을 위해서라고 생각했습니다. 19절에 보면 "그런데 너희 소유지가 만일 깨끗지 아니하거든 여호와의 성막이 있는 여호와의 소유지로 건너와 우리 중에서 소유를 취할 것이니라 오직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단 외에 다른 단을 쌓음으로 여호와께 패역하지 말며 우리에게도 패역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너희 소유지가 만일 깨끗지 아니하거든'이라는 말씀은 '너희들이 살 땅이 단을 세워서 여호와를 섬기기에 거룩하다고 생각지가 않거든'이라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서 '단을 세워서 제사 드리고 제물을 바쳐야 복이 임할 것인데 요단 동편 땅은 단을 세우기에 적당하지 않고 그렇게 되면 복을 받을 수가 없어서 요단 가에 큰 단을 세웠다면'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요단 동편의 소유지를 버리고 여호와의 단이 있는 이곳으로 와서 우리 중에서 너희들이 살 땅을 취할지언정 아무데나 단을 세워서 여호와께 패역하고 우리에게도 패역하지 말라는 것이 동편 이스라엘을 향한 서편 이스라엘의 엄중한 책망이었던 것입니다.
서편 이스라엘의 이러한 말을 보면 그들이 중요시하고 있는 것은 '너희들이 범죄해서 하나님의 진노를 받는다면 우리 역시 진노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한 개인을 생각할 수 없고 항상 회중 전체를 생각해야 하는 것이 이스라엘입니다. 오늘날의 인간관계와는 전혀 거리가 멉니다.
우리들의 인간관계란 어떤 죄를 짓고 벌을 받든 그것은 철저하게 개인의 문제로 여깁니다. 내가 범죄하지 않았으면 나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여겨버립니다. 신앙의 문제도 나 혼자 잘해서 나 혼자 복받으면 된다는 마음이 우리를 강하게 지배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은 나 개인의 문제이고 책임이지 다른 형제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생각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통해서 보여지는 공동체 관계란 우리의 생각과는 거리가 멉니다. 애당초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구출될 때부터 개인의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개인개인을 판단해서 구출할 만한 사람을 골라낸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단 하나였습니다. 어린양의 희생이라고 하는 단 하나의 의가 이스라엘을 있게 한 것입니다. 그때부터 이스라엘은 어린양의 희생 안에서는 하나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서 가르치십니다. 한 사람의 잘못이 이스라엘 회중의 잘못으로 여겨져서 이스라엘에 진노가 임합니다. 반면에 하나로 인해서 전체가 살아나는 은혜도 가르치십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왕을 주셨을 때도 왕 한 사람이 잘하면 이스라엘이 복을 받고 왕이 잘못하면 이스라엘이 진노를 받는 원칙 속에 이스라엘을 두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하나로 보신 것이지 각기 개별적으로 보시고 판단하시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역시 같습니다. 교회란 개별적으로 신앙이 좋은 사람들이 모인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한분의 의로 인해서 전체가 산 것입니다. 세상 전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 전체입니다. 이렇게 의로 인해서 산자들의 모임이 교회이기 때문에 교회는 '나 만 잘하면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범죄란 몸의 범죄이며 고통은 몸의 고통으로 여겨야 합니다. 따라서 은혜 안에서 한 몸된 형제가 여호와를 버리는 범죄를 하게 될 때 마치 나 자신이 하나님의 진노함에 들어가는 것으로 여기고 형제를 대하는 것이 함께 지어져 가는 교회로서의 참된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서편 이스라엘의 엄중한 책망에 대해서 동편 이스라엘이 무엇이라고 답을 합니까? 22절부터 보면 그 답이 나옵니다. 먼저 동편 이스라엘은 '지금 우리들의 행동이 여호와께 패역한 것이고, 단을 쌓은 목적이 여호와를 좇지 않으려고 한 것이거나 번제나 소제를 드리기 위해서 쌓은 것이라면 우리를 구원치 말고 벌해 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단을 쌓게 된 이유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을 합니다.
동편 이스라엘이 단을 쌓은 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장차 서편 이스라엘의 후손들이 동편 이스라엘의 후손을 향해서 너희는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다'라고 말할지 모른다는 염려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제단은 아무데나 세울 수가 없습니다. 때문에 동편 이스라엘이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는 요단강을 건너서 서편 이스라엘로 와야 합니다. 이것이 반복될 때 후대에 이르러서는 하나님이 기업을 주신 약속의 땅에 거하지 않는 동편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하지 않고 제사 드리러 오는 것을 막을 수도 있다는 염려가 그들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요단 가에 멀리서도 보일 수 있는 큰 단을 세워둠으로서 서편 이스라엘에게 요단 동편에도 그들의 형제가 있음을 잊지 않게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결국 동편 이스라엘이 단을 쌓은 것은 자기를 위해 제사를 드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다만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회중에서 멀어지지 않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혹 서편 이스라엘의 후손이 '너희는 하나님과 상관이 없다'라고 할 경우 '우리도 하나님의 백성이다'는 것을 내세울 수 있는 증거로서 단을 세웠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자손이 되어지지 않기 위해서 단의 모습을 한 가짜 단을 세운 것입니다.
서편 이스라엘은 이것을 매우 좋게 여겼습니다. 31절에 보면 "제사장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자손에게 이르되 우리가 오늘날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 줄을 아노니 이는 너희가 이 죄를 여호와께 범치 아니하였음이라 너희가 이제 이스라엘 자손을 여호와의 손에서 건져내었느니라"고 말합니다. 비느하스는 동편 이스라엘의 그러한 마음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로 여겼습니다. 자기를 위하지 않고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자가 되어지지 않기 위해서 단을 쌓는 그 마음을 하나님이 함께 하신 결과로 여긴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에 자기를 위해 단을 쌓는 죄를 범치 않았다는 것입니다. 만약 동편 이스라엘이 자기들의 복을 위해서 제사를 드릴 목적으로 단을 쌓았다면 그 죄가 이스라엘 회중에 미칠 것인데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범죄하지 않게 된 것이고 그로 인해서 진노를 받지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가지 이상하게 여길 수 있는 것은, 애당초 동편 이스라엘은 제사드릴 목적으로 단을 쌓은 것이 아닙니다. 만약 동편 이스라엘이 처음에는 제사드릴 목적으로 단을 쌓았다가 서편 이스라엘의 책망과 설득에 의해서 마음을 바꿔서 제사드릴 단으로 여기지 않았다면 '너희들이 범죄하지 않음으로서 진노를 받지 않게 되었다'고 하면서 기뻐하고, 그들의 마음을 바꾼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겠지만 처음부터 제사드릴 목적으로 쌓은 것이 아닌데 '너희가 범죄하지 않음으로서 우리를 여호와의 손에서 건져내었다'고 하면서 기뻐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과연 이해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제사드릴 목적으로 단을 쌓은 것이 아니다 그저 너희들의 후손이 장차 우리 후손을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자로 여길 것이 염려되어서 우리도 하나님과 상관이 있는 백성이라는 증거로 삼으려고 쌓은 것이다' 이 말 한마디로 오해도 풀어지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마치 동편 이스라엘이 처음에는 제사 드리려는 목적으로 단을 쌓아서 여호와께 범죄를 했다가 나중에 마음을 고쳐 먹은 것처럼 얘기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서편 이스라엘은 아주 큰 불안감으로 동편 이스라엘을 찾아옵니다. 자칫하면 전쟁까지 해야 할 위험이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모두 오해였음이 밝혀집니다. 오히려 동편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멀어지지 않고자 하는 좋은 마음을 가지고 단을 쌓았습니다. 비느하스는 바로 이러한 마음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과 상관없는 자가 되어지지 않고자 하는 마음, 그 마음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결과로 주어진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다면 자기를 위해서 단을 쌓을 수밖에 없는 강퍅한 인간인데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그러한 마음이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동편 이스라엘이 범죄치 않고 좋은 마음으로 단을 쌓은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 결과이고 그래서 하나님을 찬양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형제의 믿음으로 인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확인하게 되고 그로 인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바울 서신에서도 사도 바울이 교회들의 믿음을 인해서 감사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예로 살전 1:2-3절에서도 "우리가 너희 무리를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함은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이라고 말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믿음과 사랑과 소망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형제들의 믿음과 사랑과 수고가 곧 하나님이 함께 하심의 증거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교회가 서로 경쟁관계로 나아간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허무는 것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서 경쟁 관계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서로 자신의 것을 자랑하며 내세운다는 것도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교회라 할 수 없습니다.
34절에 보면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이 그 단을 엣이라 칭하였으니 우리 사이에 이 단은 여호와께서 하나님이 되시는 증거라 함이었더라"고 말합니다. 동편 이스라엘도 서편 이스라엘도 여호와가 하나님이 되신다는 증거로 단의 이름을 '엣'이라고 칭한 것입니다. '엣'이란 '증언' 또는 '증거'라는 뜻입니다. 동편 이스라엘이 세운 단으로 인해서 서편 이스라엘도 동편 이스라엘도 똑같이 여호와 하나님만 섬기고자 하는 마음이 확인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단을 증거로서 우리 모두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섬기는 이스라엘임을 확인한다는 것입니다.
양쪽 이스라엘은 전쟁의 위기 속에서 한분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된 백성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하나님만 섬기고자 하는 그 마음이 그들이 서로 하나임을 확인하게 한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적 관계도 아니고 친분 관계도 아닙니다. 한분 하나님을 섬기는 관계 속에서 하나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서로 하나라는 것이 확인되어질 수 있는 것은 '은석교회'라는 단체 안에서가 아닙니다. 우리 안에 남겨져 있는 '증거'를 통해서 하나님이 확인되어질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엣'이라고 이름하는 단이 증거가 된 것처럼, 오늘 우리들에게도 '예수 그리스도'라는 증거물이 있습니다. 성령이 오셔서 여러분의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라는 증거물을 세우셨습니다. 우리는 그 증거물을 바라보고 교회로 모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의 마음에서 오직 그리스도만 섬기고 주님의 희생과 섬김을 따라 살기를 소원하는 믿음이 보여질 때 우리 모두가 한분 하나님을 섬기며 그리스도의 희생 안에 있음을 확인하고 감사하고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각기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느냐는 것은 동편과 서편 이스라엘의 관계에서 드러납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 각자 자신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는 교회로 모이는 여러분의 관계에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삶속에서 하나님이 필요 없고 그리스도의 은혜 역시 필요가 없는 사람은, 교회에서도 형제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네가 내 신앙에 무슨 도움을 주느냐?'는 생각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예수님의 은혜도 필요가 없는 사람이 형제가 필요하겠습니까? 특히 약자의 모습으로 존재하는 형제를 필요로 하겠습니까? 참된 교회가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보시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물로 삼고 모이는 신자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