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23:1-13 왜 신자인가?

만약 누군가가 '당신은 왜 그리스도인인가?'라는 질문을 한다면, 여러분은 어떤 답을 하시겠습니까? 사실 이러한 질문은 평소 자기 자신에게 '나는 왜 그리스도인인가?'라는 물음을 하지 않고 자신을 그리스도인으로 여기고 살았던 사람에게는 조금은 당황스러운 질문일 수 있습니다. 대개의 신자들은 '나는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했고 '나는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생각해왔기 때문에 '나는 왜 그리스도인인가?'라는 질문 자체를 필요로 하지 않았는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나는 왜 그리스도인인가?'라는 질문은 자신의 신자됨에 대해서 스스로 부정하고 의심하고 의문을 던지는 것 같은 물음이기 때문에 자신이 신자라는 사실에 대해서 전혀 의문을 가져 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필요 없는 질문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당신은 왜 그리스도인인가?'라는 질문은 자신의 신자됨에 대해서 확고한 신념과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신앙인에게는 자신을 무시하거나 자기 믿음에 대해서 의심을 하고 시비를 거는 듯한 질문으로 들려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시간 여러분에게 '여러분은 왜 그리스도인인가?'라는 질문을 던져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 질문은 여러분 스스로에게 되묻는 '나는 왜 그리스도인인가?'라는 물음으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제가 이러한 질문을 하는 것은 여러분의 신앙을 의심하거나 미덥지 못해서가 아니라 자기 신앙에 대해 진지함을 가져보자는 의미에서입니다.

'당신은 왜 그리스도인인가?'라는 질문은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는 증거가 당신에게 있는가?'라는 질문과 같은 것입니다. '왜'라는 질문 자체가 '참'이라고 할 수 있는 증거를 요구하는 물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질문 앞에서 무엇을 생각해야 합니까? 그것은 '과연 나에게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는 증거가 있는가?'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는 증거는 무엇입니까? 오늘 이 시간에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는 증거가 무엇인가를 깨닫고 그 증거가 과연 우리 자신들에게 있는지를 살펴보는 시간이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나는 왜 그리스도인인가?'라는 질문에 스스로 답을 내려보시기 바랍니다.

본문은 여호수아가 나이 많아 늙게 되었을 때 이스라엘의 장로들과 두령들과 재판장들과 유사들을 불러다가 앞으로 가나안 땅에서 살아갈 때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에 대해서 당부하는 내용입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에게 당부 할 때의 상황은 하나님에 의해서 안식이 주어져 있는 때입니다.

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사방 대적을 다 멸하시고 안식을 이스라엘에게 주신 지 오랜 후에 여호수아가 나이 많아 늙은지라"고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사방 대적을 다 멸하시고 안식을 이스라엘에게 주신 지 오랜 후에 여호수아가 당부를 하는 것입니다. 안식이란 이스라엘이 더 이상 주변 가나안 족속으로부터 위협을 당하지 않고 평화롭게 지내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한 때 여호수아가 당부를 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당부는 무엇입니까? 6,7절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는 크게 힘써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 것을 다 지켜 행하라 그것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너희 중에 남아 있는 이 나라들 중에 가지 말라 그 신들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 그것을 가리켜 맹세하지 말라 또 그것을 섬겨서 그것에게 절하지 말라" 이것이 여호수아의 당부입니다.

그러면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에게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 것을 다 지켜 행하고 아직 남아 있는 가나안 이방 민족에게 가지도 말고 그 신을 부르지도 말라고 하는데, 이스라엘이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무슨 이유로, 무엇 때문에 율법을 지켜 행하여야 하고 이방민족에게 가서는 안됩니까? 말씀드린 대로 여호수아의 당부는 이스라엘이 어려움이 빠졌을 때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안식이 주어졌을 때입니다. 가나안 민족을 하나님이 다 물리치시고 조금 남아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시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킨다는 말은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미 안식이 주어진 상태이기 때문에 어떤 다른 복을 얻기 위해서 율법을 지킨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3-5절에 보면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이 모든 나라에 행하신 일을 너희가 다 보았거니와 너희 하나님 여호와 그는 너희를 위하여 싸우신 자시니라 보라 내가 요단에서부터 해지는 편 대해까지의 남아 있는 나라들과 이미 멸한 모든 나라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제비뽑아 너희 지파에게 기업이 되게 하였느니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희 앞에서 그들을 쫓으사 너희 목전에서 떠나게 하시리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그 땅을 차지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셨고 그 땅을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율법을 지키는가 안지키는가 상관없이 하나님이 자신의 약속대로 하신 일입니다. 때문에 율법을 잘 지키면 여호와가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고 가나안을 기업을 주실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도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이 율법을 지키고 이방민족의 신들의 이름을 부르지 않음으로서 어떤 상이나 대가를 약속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뭔가 주시기 위해서 율법을 지키고 좌우로 치우치지 말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율법을 지킬 것을 당부하고 이방신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을 가지고 살아가는가를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자에게 무엇인가 주시기 위한 조건으로 명령이행을 요구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신자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뭔가 받기 위해서 행하는 것은 잘못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자기 행함을 근거로 해서 하나님에게 무엇인가를 기대하는 것도 잘못된 것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우리 행함이나 요구를 기준으로 해서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필요한 것을 미리 아심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호수아가 무엇 때문에 모든 것이 다 주어진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지키고 이방 신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고 하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3절에 보면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이 모든 나라에 행하신 일을 너희가 다 보았거니와 너희 하나님 여호와 그는 너희를 위하여 싸우신 자시니라"고 말합니다. 여호수아는 '너희는 지금껏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어떻게 행하셨는가를 다 목격을 했다'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이 어떻게 행하셨는가를 목격을 하고 아는 자로서 율법을 행하고 이방 신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가나안 민족과 싸우신 것은 이스라엘이 착해서도 아니고 그들이 신앙생활을 잘해서도 아닙니다. 이미 오래 전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을 이루시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뜻을 이루어 주시기 위해서 존재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스스로 작정하시고 세우신 여호와 자신의 뜻을 위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인 것입니다.

따라서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신 하나님을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해서 이렇게 수고하시고 애쓰시고 안식을 주셨으니까 그 보답으로 너희들도 하나님의 법을 지키기에 힘쓰고 이방 신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일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 너희들의 뜻과 요구를 내세우지 말라는 의미로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스라엘이 이방 신의 이름을 부른다면 그것은 무슨 이유이겠습니까? 자신의 원함과 뜻을 이루기 위해서 부르는 것입니다. 이방인이 신을 부르는 목적은 모두가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방 신을 부르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만 부르고 부처니 알라니 하는 다른 신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라 자신의 뜻을 위해서 신을 부르지 말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십계명에서 2계명에 보면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라고 말합니다. 우상이란 곧 자기를 위해서 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에게 이방 신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는 것은, 앞으로 너희는 너희 자신을 위해서 살지 말고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고 안식을 주신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고 좌우로 치우치지 말라는 것도 너희를 위하여 살지 말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인간의 소원을 이루어 주기 위해서 주어진 법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세상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는 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약속대로 이루실 것이고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오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 그들과 싸우시고 그들의 땅을 기업을 주시는 것을 통해서 실제로 약속대로 일하시는 하나님임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그것을 고스란히 목격을 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이스라엘에게 있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만 신뢰하면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인생을 자기 스스로 개척하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 뜻대로 안된다고 해서 조급해하고 낙심할 이유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을 책임지시고 있음을 믿으며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하심을 안다면 자신들의 생각과 뜻대로 안된다고 해서 낙심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일하신다는 것을 마음에 두고 산다면 자연히 이방 신의 이름을 부르지 않게 될 것입니다. 부를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미 인생은 내 뜻대로 되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신의 이름을 부를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얼마든지 율법이 요구하는 것에 순종하는 삶이 되어질 것입니다. 율법의 요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8절에서 말하기를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친근히 하기를 오늘날까지 행한 것같이 하라"고 합니다. 여호와를 친근히 하라는 것은 여호와를 가깝게 하라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들의 힘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란 우리들의 힘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 속에 있는 자에게 가능한 일입니다. 따라서 여호와를 친근히 하라는 것은 '너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라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을 정리하면 이런 얘기입니다. 이스라엘은 지금껏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왔습니다. 애굽에서 나오게 되고, 홍해를 건너고, 요단강을 건너고, 힘센 가나안 민족을 물리치고 그들의 땅을 기업을 얻게 된 배경에는 모두가 하나님이 살아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서 싸우신 것은 이스라엘이 귀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는 민족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약속으로 인해서 지금껏 살아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신뢰해야 하는 것은 자신들의 힘이나 재능이나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며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약속대로 일하시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의 뜻을 내세울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곧 하나님을 아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에게서 이러한 하나님을 아는 모습이 드러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다면 하나님을 아는 모습이 분명히 드러나야 합니다. 여호수아는 그것을 율법을 지키고 이방 신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이방인과 교제하지 않는 것으로 말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이렇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친근히 하며 살아갈 때 나타나는 결과인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게 된다면 그것은 이스라엘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기 때문으로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이지 사랑을 받지도 않았는데 하나님을 사랑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살아갈 때 할 일은 자신들이 받은 바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을 마음껏 드러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스라엘다운 모습인 것입니다. 모세는 바로 이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11-13절에 보면 "그러므로 스스로 조심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너희가 만일 퇴보하여 너희 중에 빠져 남아 있는 이 민족들을 친근히 하여 더불어 혼인하며 피차 왕래하면 정녕히 알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민족들을 너희 목전에서 다시는 쫓아내지 아니하시리니 그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며 덫이 되며 너희 옆구리에 채찍이 되며 너희 눈에 가시가 되어서 너희가 필경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이 아름다운 땅에서 멸절하리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사랑치 않는다는 증거로 가나안 중에 남아 있는 민족들과 더불어 친근히 지내고 혼인하고 피차 왕래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가나안의 남은 민족을 쫓아 내지 않으시고 이스라엘의 올무가 되고 가시가 되도록 하시고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땅에서 멸절하겠다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심하다고 할 정도로 무서운 말씀입니다. 사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들의 상황으로 보면 교회에 안다니는 불신자들과는 혼인도 말고 교제도 말고 친하게 지내지도 말라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만약 불신자와 친하게 지내면 멸절해 버리겠다는 뜻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본문은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과는 친하게 지내지도 말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의 사고방식과 합류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친근히 지내고 혼인하고 피차 왕래한다는 것은 그들과 하나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생각이 하나되고 마음이 하나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방인의 생각이나 마음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의 마음이고 생각입니다. 즉 인생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되어진다는 것을 모르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자기 뜻을 세우고 자기 뜻의 성취를 위해서 부지런히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뜻대로 안되면 낙심하고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불평하고 한탄을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이런 이방인의 생각과 하나가 된다면 그것은 그들 안에 하나님의 약속이 없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스라엘이라면 이스라엘로 여기지 않으시고 멸절해 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누구의 후손이냐를 보시면서 이스라엘을 보호하시고 지키시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안에 하나님이 주신 사랑이 있는가를 확인하심으로서 이스라엘로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앞서 했던 질문을 다시 해보겠습니다. '당신은 왜 그리스도인인가?' 자, 이제 어떤 답을 내릴 수가 있습니까? 우리를 그리스도인 되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이며 은총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되어진 일입니다. 수많은 사람 중에 저와 여러분을 택하시고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의 피에 대해서 알게 하시고 그 피를 마음에 두고 살아갈 수 있게 하시고 주님 앞에서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고백이 나올 수 있게 하신 모든 것은 하나님의 작정하심 속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사랑이며 은총이고 긍휼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왜 그리스도인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내 안에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과 긍휼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라는 답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내 안에 사랑을 집어넣으시고 은총과 긍휼을 주셨기 때문에 내가 신자되어진 것이라는 고백을 자신있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적어도 이 고백 앞에서는 '내가 이렇게 못났는데' '나는 교회도 잘 나오지 못하는데' '나는 술도 못 끊고 담배도 못 끊었는데'라는 의심들은 물러가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악함과 못남을 극복하고 자리하고 있는 사랑이고 긍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질문을 한가지 더 하겠습니다. '당신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고 은총과 긍휼이 있다는 증거는 뭔가?' 이 질문에는 뭐라고 답하겠습니까? 우리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고 긍휼이 있는 증거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지 않았다면 나는 멸망 받아야 할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앎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 사람에게서 보여지는 것은 곧 사랑의 모습일 것입니다. 고전 13:4-7절에서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는 말씀대로 사랑의 모습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이 스스로 가장하고 위장함으로서 흉내내는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스스로 사랑의 모습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된 자가 온유함을 보여주고, 겸손을 보여주고,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는 모든 것도 하나님의 사랑이 내 안에서 일하시는 것이지 내가 사랑이 많아서 하는 것이 아님을 아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공로와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하며 살아가는 것이 곧 하나님의 사랑이 그 속에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자에게서는 결코 발견할 수 없는 증거인 것입니다.

교회란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자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사랑이 아닌 자기 사랑을 가지고 교회로 오는 자가 있다면 그 자에 의해서 교회는 어지러워 질 것입니다. 자랑이 나오게 되고, 교만이 나오게 되고, 모든 공로와 영광을 자기 것으로 가로챌 것입니다. 교회는 이렇게 자기 사랑으로 오는 자들을 막아내면서 오로지 하나님의 사랑만 증거될 수 있도록 힘을 써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에 힘을 쓰며 모인다면 그러한 교회는 서로서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교제하고 받은 바 은총과 긍휼을 나누기에 여념이 없을 것입니다. 교회는 우리에게 있는 사랑과 긍휼을 마음껏 토해 놓는 현장입니다. 같은 사랑과 같은 긍휼을 받아서 그리스도인된 형제임을 확인하면서 한 마음과 한 뜻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감사하고 찬양하라고 모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가나안 땅에서의 이스라엘의 미래는 하나님 안에 감춰져 있습니다. 지금껏 이스라엘을 인도하시고 하나님이 친히 싸우심으로 안식을 주신 하나님에게 미래가 있는 것입니다. 나의 미래는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을 아는 것, 이것이 곧 하나님을 아는 자의 자유입니다. 이 자유함이 '왜 그리스도인인가?'라는 물음에서 '왜'라는 물음의 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왜'라는 물음에 대해서 뭔가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면 그 사람은 자유를 잃어버릴 것입니다. 왜냐하면 되어지는 것은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는 것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12절에서 퇴보하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삶에서 떠나지 마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는 멸절을 당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라면, 하나님의 은총과 긍휼하심으로 살아났음을 아는 신자라면 하나님을 친근히 하는 삶을 살아가셔야 합니다. 세상이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고 있음이 증거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