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믿는 것이 쉽다고 생각하십니까 어렵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마 평소 하나님을 신앙하는 삶에 대해서 마음을 두면서 믿음으로 살려고 애를 쓴 분이라면 어렵다고 할 것이고, 믿음에 대해서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다만 교회 출석과 기독교인으로서의 기본이라고 생각되는 기초적인 행동만으로 신자로 자처하고 살았던 분이라면 믿음에 대해서 전혀 어렵다는 마음을 가지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이런 말을 할 때마다 뭔가 여러분의 현재 신앙을 부정하고 무시하는 것 같은 말투로 들려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염려가 들기도 하지만, 저는 지금 여러분의 현재 신앙을 부정하거나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에 대해 확인 작업을 하자는 의도임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나 자신의 현재 신앙이 어떤 것인가가 학인 되어져야 내가 무엇에 문제가 있는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믿음이 교회 안에서만 국한된 문제라면 믿음에 대해서 크게 염려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이유는 일단 교회는 교인들에게 크게 어려운 것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교인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성실한 교회 출석과 신자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십일조 생활의 철저함과 그 외 교회에서 행하는 여러 행사에 가급적 열심히 참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좀더 첨가한다면 이웃에게 친절히 대하고 봉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에만 열심을 내준다면 그는 교회 안에서는 믿음이 있는 자로 얼마든지 인정받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 밖에서의 생활의 여부와는 전혀 상관없이 말입니다.
따라서 믿음의 문제가 대다수의 교인이 생각하는 것처럼 교회 안에서의 활동의 여부로 결정되어지는 것이라면 믿음은 결코 어렵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앞에서 언급했던 교회 안에서의 요구는 우리들의 결심과 노력만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신앙생활을 그러한 것으로 이해하고 지냈다면 그런 분에게 있어서 믿음이란 하등의 어려운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조금 문제가 있다고 해도 그것은 열심의 정도이기 때문에 좀더 열심을 내면 되는 것으로 생각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교회 안에 국한 된 문제가 아닙니다. 믿음은 여러분의 삶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교회에 나오면 믿음을 생각하고, 교회를 나가면 믿음은 잠시 잊어버려도 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신자는 일년 365일 믿음의 문제에서 떠나 살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믿음의 문제가 어렵다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14절에 보면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성실과 진정으로 그를 섬길 것이라 너희의 열조가 강 저편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고 말씀합니다. 만약 여호수아가 지금 여러분에게 이런 말을 한다고 생각합시다. 여러분은 분명 주저 없이 '예'라는 답을 내릴 것입니다. 여호와만 섬겨야 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문제이기 때문에 이것이 어려운 문제인지 쉬운 문제인지 점검할 필요조차 없이 주저하지 않고 대답을 할 것입니다. 마치 지금껏 여호와만 섬겨왔던 것처럼 자신만만하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껏 여호와만 섬겨왔다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자신할 수 있습니까? 자신의 믿음에 대해서 전혀 의심도 없이 '나는 다른 신을 섬긴 적도 없고 또 앞으로도 다른 신은 절대로 섬기지 않을 것이다. 나는 여호와만 섬길 것이다'라는 말을 자신 있게 할 수 있습니까?
물론 교회 안에서의 신앙만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다른 신을 섬기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교회 안에서 여러분이 하는 것은 예배고 기도고 헌금이고 봉사이지 않습니까? 그 속에 다른 신을 섬기는 모습이 있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나는 여호와만 섬긴다'라고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앞서 말한 대로 믿음은 교회 안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삶 자체를 말합니다. 삶 자체가 믿음의 삶이냐를 묻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내 삶은 과연 여호와만 섬기는가?'라는 물음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에게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성실과 진정으로 그를 섬길 것이라'고 말합니다. '너희의 열조가 강 저편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보면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애굽에 있을 때 애굽의 신들을 섬겼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만 섬겨오던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조상은 애굽에서 애굽인과 똑같이 우상을 섬겼습니다. 우상을 섬기던 그 모습이 모세가 산에서 오랫동안 내려오지 않을 때 금으로 송아지를 만들어서 하나님이라고 섬기던 것으로 드러납니다. 애굽에서 봤던 것을 그대로 행동한 것입니다. 모세가 사라진 불안한 상황에서 힘이 되는 것을 만들고 그것을 의지하고 살고자 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산 것이 아니라 모세를 의지하고 살았던 이스라엘이기에 모세가 사라진 상황에서 다시 힘이 될 것을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애굽에 있게 된 것이나, 애굽에서 나오게 된 모든 것의 배경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을 모아 놓고 하나님에 의해서 오늘날 너희가 이 자리에 있게 된 것임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그 어떤 것도 이스라엘의 힘이 아니었으며, 이스라엘을 도운 것이 아니었음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 때부터 가나안을 차지하기까지 그 수백 년의 세월 동안 많은 고생도 있었고 어려움도 있었으며 애굽의 종으로서 430년의 세월을 지내야 했던 모든 삶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셨고, 약속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약속에 의해서 이스라엘이 애굽에 있게 되었고, 모세가 이스라엘을 인도할 지도자로 나타났으며 결국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을 차지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에는 오직 '내가'라고 말씀하는 하나님의 개입만이 있을 뿐 그 어떤 세상의 힘도 인간의 노력도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차지하는데 도움이 되지 못한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더러 '이제부터 우상을 섬기지 말고 성실과 진정으로 여호와만 섬기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교회 생활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삶 자체가 오직 여호와만 힘이요 도움으로 삼고 살아가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상을 섬긴다는 것은, 여호와를 힘으로 의지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호와만 나의 도움이시오 힘이시라는 고백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다른 힘되는 것을 좇아가고 의지하는 것이 곧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아브라함 때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는가를 선포하고 나서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15절에 보면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고 말합니다. 한마디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에게 '여호와를 섬기든 우상을 섬기든 섬길 자를 택하라'는 말을 합니다. '지금까지 너희들을 도우시고 힘이 되시고 인도하신 분은 여호와다. 따라서 너희는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싫다면 우상을 섬기든 말든 너희들이 알아서 섬길 자를 선택을 하라'는 말입니다.
이 말을 보면 지금껏 우리들이 들어왔던 설교 내용과는 뭔가 느낌이 다른 말이 있습니다. 지금껏 우리가 들어왔던 믿음이란 우리들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우리들 스스로 선택을 해서 믿고 천당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셔서 믿게 하시고 그런 인해서 천국가게 되어지는 것으로 들어왔던 또 그렇게 믿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오늘 여호수아의 말은 마치 하나님에 대한 선택권이 우리들에게 있는 것처럼 들립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선택하지 않으면 지옥가게 되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지금껏 우리가 들어왔던 '하나님이 선택하셔서 믿게 되었다는 말'과 어떻게 비교될 수 있겠습니까?
먼저 여러분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된 경위를 말하고 나서 '섬길 자를 택하라'고 요구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에 대해서 주의를 기울어야 합니다. 무턱대고 '너는 하나님을 섬길래 우상을 섬길래'라고 묻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너희가 지금 가나안 땅을 차지하고 건축치 아니한 성읍에 거하고 심지 아니한 것을 먹는 것은 모두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는 것을 설명하고 '누구를 섬기겠는가?'라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나는 여호와만 섬기겠다'라고 나설 사람은 누구겠습니까? '우리가 지금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된 것은 모두가 우리들의 힘이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는 것이 믿어지고 인정되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결국 이스라엘 스스로 하나님을 섬길 자로 정하고 택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인도하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아는 그 믿음이 하나님을 섬길 자로 택하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의 의지와 생각과 판단으로 여호와를 택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아는 그 믿음으로 인해서 새롭게 된 지식과 생각으로 인해서 여호와만이 섬길 자라는 판단을 하게 되고 선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경험이 없습니까? 말씀을 들으면서 '그래 맞다. 내가 지금까지 산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지 않았는가? 그런데 내가 왜 세상 것으로 염려하는가? 돈 보지말고 하나님만 보고 살아야지'라는 결심을 해보신 적이 없습니까? 아마 말씀을 들으실 때마다 마음속으로 다짐하는 분이 많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결심은 누가 하게 한 것입니까? 하나님을 모른다면 그러한 결심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모르는 자라면 자기만 생각할 것입니다. 기도를 해도 '하나님, 이번 일만 잘되게 해주세요'라는 말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이런 기도를 하는 사람이 '실패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은혜에 의심하지 않게 해주십시오'라는 기도를 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하나님을 아는 앎이 하나님을 선택하게 만드는 것이고 하나님만 섬기고자 하는 결단을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섬길 자를 택하라'는 여호수아의 말은 전혀 이상한 말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아는 앎은 우리들로 하여금 날마다 여호와를 섬길 자로 선택하게 한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말씀 앞에서 마치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이 사라져 버리는 듯한 느낌을 가집니다. '내가 안해도 하나님이 다 하실 것이니까 안해도 되는 것이 아니냐'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물론 우리가 하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일에 지장이 발생하거나 문제가 있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일이 잘되고 안한다고 해서 잘못되는 경우는 절대로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에 대해서 마음놓고 네 마음대로 살아가라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은 우리에게 '네가 오늘 섬길 자를 택하라'는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신자는 날마다 여호와만 섬길 자로 부름 받았다는 것입니다. 날마다 여호와를 섬길 자로 택하고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신자된 여러분에게 있어야 할 삶인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쉬운가 어려운가를 질문한 것입니다. 날마다 여호와를 섬길 자로 택하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날마다의 삶에서 지금까지 인도하신 분이 여호와이심을 잊지 않고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돈이 있어서 살아온 인생이 아니고, 직장이 있어서 살아온 인생이 아니라 돈도 직장도 모두 하나님이 있게 하신 것임을 알았기 때문에 오늘도 나는 돈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 섬길 자로 택하는 삶을 살겠다는 것, 이것이 바로 신자된 여러분의 삶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만 섬기겠다고 합니다. 그들의 결단을 16절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백성이 대답하여 가로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 섬기는 일을 우리가 결단코 하지 아니하오리니"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17-18절에서 말하기를 "이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 그가 우리와 우리의 열조를 인도하여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나오게 하시고 우리 목전에서 그 큰 이적들을 행하시고 우리가 행한 모든 길에서, 우리의 지난 모든 백성 중에서 우리를 보호하셨음이며 여호와께서 또 모든 백성 곧 이 땅에 거하던 아모리 사람을 우리 앞에서 쫓아내셨음이라 그러므로 우리도 여호와를 섬기리니 그는 우리 하나님이심이니이다"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수아의 말을 듣고 자신들이 왜 하나님만을 섬겨야 하는지 그 이유를 확실히 알았습니다. 그래서 오직 여호와만 섬기겠다고 결단을 합니다. 여호와만이 우리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만 섬기겠노라고 다짐을 합니다. 이것만 보면 이스라엘은 앞으로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다짐에 찬물을 끼얹는 말을 합니다.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은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요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 너희 허물과 죄를 사하지 아니하실 것임이라"(19절) 하나님만 섬기겠노라고, 결단코 우상을 섬기지 않겠노라고 다짐을 하는 이스라엘을 칭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너희가 능히 여호와를 섬기지 못할 것이다'는 말을 합니다.
이것을 여러분의 상황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제가 여러분에게 '여러분, 누구를 섬기겠습니까? 하나님입니까 우상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여러분은 이구동성으로 '우리는 결단코 하나님만 섬기겠습니다'라고 다짐을 합니다. 그런 여러분에게 '웃기지 마세요. 여러분은 하나님을 섬기지 못합니다'라고 한다면 여러분의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지금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을 이렇게 대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다짐을 무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다짐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스스로의 결심처럼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임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호수아는 왜 이러한 말을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광야에서 어떻게 하였는지를 모두 목격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 살면서 환경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 줬습니다. 한 예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홍해를 건너고 나서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을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광야에 들어와서 먹을 것이 없는 상황에 부딪히자 '왜 우리를 애굽에서 끌어내었는가?'라고 하나님을 원망을 합니다. 이러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원망을 하면 하나님이 먹을 것을 주십니다. 그들은 하나님에게 감사합니다. 그러다가 또 다른 부족한 것이 있으면 원망을 합니다. 이러한 삶이 반복되었던 것이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이것을 모두 알고 있는 여호수아로서는 이스라엘의 다짐을 믿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다짐과 결심을 가지고 믿음을 유지할 수 없는 자임을 안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는 여호와를 섬기지 못할 것이다'는 말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유를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고 질투하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너희의 허물과 죄를 사하지 아니할 것이다'는 이것이 곧 여호와를 섬길 수 없는 이유라는 것입니다. 이 말에 대해서 두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하나는 여호수아가 장차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섬기지 못할 것을 미리 예견한 말이라고 하고, 또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에게 보다 더 강한 결단을 촉구하기 위해서 이런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연약함을 알고 있는 여호수아가 보다 더 강한 말을 함으로서 그들의 신앙을 철저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연약함이란 스스로 다짐을 한다고 해도 하나님을 섬길 수 없는 연약함이지, 강한 말을 한다고 해서 하나님을 섬기게 되는 그런 연약함은 아닙니다. 그리고 또 여호수아가 단지 앞으로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섬기지 않을 것임을 미리 예언하기 위해서 이런 말을 하고 있다고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수아는 지금 앞으로 이스라엘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두 견해 모두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저의 입장입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능히 섬길 수 없는 이유를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고 질투하시는 분이고 허물과 죄를 사하지 않으실 분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여호와는 인간들이 섬기겠다고 다짐을 했다고 해서 섬길 수 있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거룩을 요구하시고, 질투하시는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오직 여호와만 사랑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그리고 이러한 요구에서 벗어나는 것을 죄로 보시고, 그러한 죄는 결코 용납하지 않으신 분이 여호와이십니다. 이런 여호와를 과연 섬길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이런 하나님을 과연 섬길 수 있으십니까?
이스라엘은 여호수아의 말에 '우리가 정녕 여호와를 섬기겠나이다'라고 다짐을 합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자신감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에 대한 그들의 생각입니다. 우리 역시 믿음에 대해서 생각하면 자신감이 있을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만 섬기겠다는 자신감이 여러분의 마음에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자신감도 세상 현실이라는 문제에 부딪히면 무력해지는 것이 저와 여러분의 모습이 아닙니까?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섬길 자를 택하라고 해 놓고 섬길 수 없다고 하고 자신감이 있다고 해도 안된다면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라는 의문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 해답이 바로 '증인'이라는 말에 있습니다. 22절에 보면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택하고 그를 섬기리라 하였으니 스스로 증인이 되었느니라 그들이 가로되 우리가 증인이 되었나이다"라고 말합니다. 너희가 여호와를 섬기겠다고 했으니까 이제 너희가 너희에게 증인이라는 것입니다.
무엇에 대한 증인입니까? 20절에 보면 "만일 너희가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 신들을 섬기면 너희에게 복을 내리신 후에라도 돌이켜 너희에게 화를 내리시고 너희를 멸하시리라"는 말씀에 대한 증인인 것입니다. 즉 여호와를 섬기겠다는 것은, 여호와를 섬기지 않고 우상을 섬길 때에는 복을 받은 후라도 돌이켜서 화를 내리시는 하나님을 증거 하는 증인이 된 것이라는 뜻입니다.
26절에 보면 여호수아가 큰돌을 세워서 증거로 삼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 돌이 증거가 되어서 앞으로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섬기지 않을 때는 그들을 멸하심으로서 죄와 허물을 사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보여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증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을 얻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임을 잊어버린다면 그들은 우상을 따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아십니까? 은혜를 아신다면 그 은혜가 얼마나 귀한지도 아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귀한 은혜가 나로 인해서 짓밟히는 것은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생각으로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만약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지 않는다면 허물과 죄에 대해서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진노가 나에게 임하여도 좋습니다'라는 다짐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여호수아를 마치면서 말씀드릴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소홀히 여기지 마시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생각하게 되고 십자가를 바라보게 된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의 믿음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천국이 귀한 줄 안다면 자연히 은혜가 귀한 줄 알 것입니다. 그리고 은혜가 귀함을 아신다면 나로 인해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가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은혜를 가리는 삶을 살게 된다면 차라리 하나님이 나를 징계해서라도 은혜를 가리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 마음으로 살아가는 신자이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