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특징은 '자기 극복'이 아니라 '자기 헌신'입니다. 한라산을 등반하듯 점차 점차 한 단계씩 올라가는 것이 신앙이 아니라 있는 자리에서 자기가 하나님에게 헌신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신앙을 자기 헌신이 아닌 자기 극복으로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스스로 극복하면서 점차로 신앙적인 모습을 만들어 내는 것을 신앙의 덕목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목적했던 모습이 보여질 때, 그것으로 성취감을 느끼고 자신의 신앙의 힘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또 신앙의 특징을 다르게 말하자면, 감정의 억압이 아니라 감정의 방향 수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감정을 스스로 억압함으로서 신앙인의 모습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감정이 드러날 때 자신을 확인하는 기회로 삼는 것입니다. 화가 날 때 그 감정을 스스로 억압할 수는 있습니다. '신자인데 화내면 안되지. 내가 화내면 하나님에게 영광이 안되지'라고 하면서 감정을 억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신앙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자신을 지키고자 하는 욕망에 지나지 않습니다. 남들에게 자신을 그럴듯하게 보이고자 하는 욕망입니다. 화가 날 때 그것을 억압해서 신앙인 임을 과시하려고 하지 말고 차라리 화를 내십시오. 그리고 역시 나라는 인간은 구제불능이라는 것을 확인하시고, 예수님의 피에 모든 희망을 두십시오. 이것이 바로 신앙의 특징이며 감정의 방향 수정입니다.
오늘날의 신앙의 특징이 자기 극복과 감정의 억압으로 드러나는 것은 하나님보다는 자신에게 관심을 두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내가 관심이기에 나라는 존재에 의미를 두게 되고, 자기 존재에 의미를 두다보니까 좀 더 나은 인간으로 존재하고자 하게 되는 것입니다. '대중들 앞에서 뭔가 다른 인간으로 보이는 것' 이것이 자신을 향한 인간의 욕망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높은 차원으로 평가하는 신자의 모습을 스스로 만들어 내고자 힘쓰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화내는 신자보다는 화를 안내고 항상 인자하고 인품이 좋은 신자를 기뻐하신다' 이런 생각이야말로 말씀을 계시하시고 우리 가운데 뛰어 들어 오신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생각과 상식 안에서 머무는 분이 아닙니다. 인간의 생각을 뛰어 넘으시고 인간의 상식을 뒤엎으면서 하나님의 생각과 상식을 가지고 인간에게 오신 분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자기의 생각을 지키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신자는 주를 따라가는 자이지 스스로 행하는 자가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일을 골라서 그것을 실천함으로서 신자됨을 증명하겠다는 것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전혀 믿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알아야 하는 것은, 천지 창조 이후로 지금까지, 또 영원토록 하나님에게서 결코 변하지 않는 법칙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힘을 빌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모든 하나님 스스로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의지이고 뜻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이 의지와 뜻에 순종하는 자로 부름을 입은 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필히 우리의 의지와 뜻은 포기되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신자에게 일하실 때 인간의 의지와 뜻이라는 것이 세상의 모든 것을 홀로 주관하시고 움직이시는 창조주 앞에서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참으로 쓰레기 같은 것인가를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린 지금껏 우리의 의지와 우리의 계획과 우리의 뜻에 의해서 살아온 것이 아닙니다. 내 힘으로 내 인생을 살아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의지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내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온 것으로 착각을 합니다. 그리고 간혹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도와달라'고 기도해서 일이 해결되어진 것들을 하나님의 도우심이었다고 인정할 정도입니다. 결국 우리가 생각할 때 쉽다고 생각되어지는 것은 우리의 힘으로 했고, 내 힘으로도 어쩔 수 없는 것들만 하나님의 도우심이라고 생각하는데,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을 내 생각 속에 가두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일을 해야 하고 공부를 해야 합니까?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면 우리가 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다 해주실 것이고 내가 하고 싶고 되어지고 싶은 것이 있다고 해도 내 마음대로 되지도 않을 것인데 애당초부터 아무런 노력 없이 살면 되지 않습니까?'라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과 교통하지 못하는 인간입니다.
신자는 성령을 받은 자입니다.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과 교통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성령이 함께 하는 만큼 성령 받은 신자는 자연히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신자는 과연 어떤 생각으로 세상을 살아가겠습니까?
앞서 말씀드리기를 신앙의 특징은 자기 극복이 아니라 자기 헌신이고 감정 억제가 아니라 감정의 방향 수정이라고 했습니다. 자기 헌신이란 자신이 하나님에게 헌신되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고 신학교 가서 목사 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자기 헌신이라고 해서 생활 형태가 불신자와 서로 다르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내가 왜 살고 있는지를 알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생각을 알기 때문에 그 마음과 생각에 순종하며 사는 것이 자기 헌신입니다.
하나님은 신자의 모든 삶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보이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신자는 자신의 힘과 노력이라는 말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말을 스스로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고 나를 알기에 자연적으로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출 14:13절을 보면 애굽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 바로 군사의 추격을 받고 쫓기다가 홍해 앞에서 가로막히게 됩니다. 뒤로도 물러 갈 수 없고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위기에 처합니다. 그때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기를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고 말합니다.
위기에 처해 있는 사람에게 가만히 있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여러분이 이런 경우에 처했다면 가만히 있을 수 있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깨닫지 못하고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차라리 우리 상식에 맞는 말이라면, 홍해에 들어가서 헤엄을 쳐라 그러면 내가 도와주겠다라는 말이 더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살기 위해서 무엇이라도 움직일 때 그것을 도와주시는 하나님은 이해가 될지언정 그냥 가만히 있으라고 하시는 하나님은 쉽게 이해되지 않을 것입니다. 시 46:10절에 보면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라고 말씀하는 것 같이 "가만히 있으라"고 하시면서 "내가 하나님임을 알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 뜻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자기 노력이라는 원칙으로 살았던 삶에서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한 믿음과 순종을 원칙으로 하는 삶의 세계로 옮겨짐을 의미합니다. 이 두 세계는 각각 다른 양상을 보여줍니다. 자기 노력으로 사는 세계는 노력이 있고 성취가 보여질 때는 자신을 대단한 신앙인으로 착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노력이 부진할 때는 자기 신앙생활이 무척 저조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한 믿음과 순종으로 사는 세계는 언제나 평안으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은 언제나 변함없이 흔들림 없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불안함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너갑니다. 요단강이란 홍해처럼 이스라엘이 나아가는 길을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입니다. 요단강은 강의 특성처럼 가물 때는 물이 마르는 것이 당연하지만, 이스라엘이 건널 당시에는 강 언덕에까지 물이 넘쳤다고 했습니다. 그 때가 보리를 거두는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보리를 거두는 시기에는 비가 많이 왔었습니다. 그래서 요단강의 언덕까지 물이 넘친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건너갈 수 없는 상황이라는 뜻입니다. 약속의 땅을 앞에 두고 도저히 인간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장애물을 만난 것입니다. 이 요단강을 이스라엘이 어떻게 건너가는지 그것을 살핌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깨달아야 하고 그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알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 오늘 본문의 의미입니다.
요단강이 인간의 힘에 의해서 갈라지지 않았다는 것은 당연한 말 같지만 우리는 이것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이런 생각을 해 보십시다. 만약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너기 위해서 요단강 앞에서 제물을 잡아서 제사를 드리고 찬송을 불렀다면 요단강이 갈라졌을까요? 아니면 40일 금식기도를 하고 철야기도회를 했다면 요단강이 갈라졌겠습니까? 분명히 아닐 것입니다. 결국 인간의 그 어떤 정성과 노력도 요단강을 갈라지게 할 수 없다면 우리는 요단강이 가로놓인 상황에서 인간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할 것이 아니라, 요단강이 어떻게 갈라졌는가를 생각하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어떤 목사들은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앞세우고 믿음으로 발을 내 딛었기 때문에 요단강 물이 말랐다는 말을 하면서 우리도 믿음으로 발을 내 딛자고 가르칩니다. 결국 인간 쪽에서 발을 내 딛었기 때문에 요단강이 갈라졌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제사장들이 발을 내 딛는지 안 딛는지를 보고 계셨다는 것입니까? 15,16절에 보면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발이 물에 잠기자 흐르던 물이 그쳤다고 합니다. 그것이 제사장들의 발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언약궤 때문입니다. 언약궤로 인해서 요단강 물이 흐르기를 그친 것이지 제사장들이 믿음으로 발을 딛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11절에 이르기를 "보라 온 땅의 주의 언약궤가 너희 앞서 요단으로 들어가나니"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앞에 나가는 것은 주의 언약궤입니다. 언약궤란 이스라엘의 죄를 사하기 위하여 피가 뿌려지는 곳을 말합니다. 희생의 피가 이스라엘의 앞에 행하면서 인간의 힘으로 건널 수 없는 요단강을 건너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희생의 피 앞에서 인간의 수고와 노력을 말하는 것은 희생의 피를 모독하는 것입니다.
요단강을 건너가는 이스라엘의 할 일이 무엇입니까? 희생의 피가 뿌려진 언약궤만 따라가는 것입니다. 언약궤가 우리를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한다는 것을 명심하고 언약궤를 바라보는 것이 이스라엘의 할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신자가 어떻게 사는 것이 신자로서의 바른 모습인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언약궤로 인해서 길이 열렸다는 것은, 언약궤가 곧 길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말씀과 같습니다. 희생의 피가 흘려진 십자가에서 천국의 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자는 다른 것을 길로 삼지 않게 됩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길이기 때문입니다.
파스칼은 인간을 "생각하는 갈대"라고 말했습니다. 갈대처럼 연약하지만 생각한다는 면에서는 다른 존재보다 월등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이성과 의지를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물론 인간은 의식하고 생각할 줄 아는 이성적인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 의식과 생각이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의 이성과 생각이 길이 되버릴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요단강이 어떻게 해서 그쳤는지 그 이유도 모르고 자기 생각 자기 뜻대로 살아가면서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다'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이성은 죄를 드러내기에 바빴지 그리스도를 따라갈 수 있는 이성이 아니었다는 것을 모릅니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자기 생각 자기 뜻을 버리지 못하고 기도한답시고 하나님에게 억지를 쓰기도 합니다. "이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내 맡기고 하나님만 의지하겠습니다"라고 하면서도 여전히 어설픈 자기 생각을 굴리면서 뭔가 해답을 찾으려고 합니다.
신자가 정말 하나님을 알았다면, 요단강이 어떻게 해서 물이 그쳤는지 그 비밀을 알았다면 하나님 앞에 항복한 포로처럼 두 손들고 나와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영이 역사할 것이고 어둠 속에서 빛을 찾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언약궤를 앞장 세워서 요단강을 건너는 체험을 하게 하신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한마디로 말해서 인간의 수고와 노력으로 자기 계획을 이루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너게 된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이미 아브라함 때부터 4대 후에 약속의 땅을 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약속 안에서 살아온 것입니다. 자기들이 알았든 몰랐든 이스라엘은 약속 안에서 모든 역사가 이루어진 민족입니다. 그리고 언약궤를 앞세움으로 요단강을 건너게 됨을 통해서 그것을 깨달아야 했던 것입니다. 지금껏 내 힘으로 산 줄 알았는데 요단강을 건너면서 하나님의 계획과 의지와 신실하심이 오늘날의 우리를 있게 했구나라는 것을 깊이 깨닫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단강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승리의 능력이 없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말은 하면서도 예수님의 능력은 전혀 없습니다. 이것이 주님을 말하면서도 주님을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과 의지를 앞세우는 결과입니다.
이스라엘과 약속의 땅 사이에 요단강이 놓여 있듯이 인간과 천국 사이에는 도저히 건널 수 없는 강이 놓여 있습니다. 언덕까지 물이 넘치는 강이 우리 앞에서 축복과 생명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현실입니다. 신자는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요단강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래야 요단강의 물을 그치게 한 언약궤의 의미가 마음속에 새롭게 자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있어서 요단강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죄의 본성입니다. 여러분에게 있는 죄는 생명으로 나아가는 길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노력도 수고도 정성도 다 헛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여러분의 죄이며 요단강입니다. 그런데 그 요단강이 언약궤를 매고 나아가자 물이 그칩니다. 즉 천국으로 나아가는데 전혀 방해물이 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언약궤의 능력이며 그리스도의 피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피의 의미를 아는 신자라면 자기 중심의 삶에서 그리스도 중심의 삶으로 방향이 전환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요단강의 물을 그쳐진 것을 바라보면서 신자가 가는 길이 어떤 길인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언약궤를 따라가는 신자의 길과 언약궤 없이 자기 힘을 믿고 살아가는 자의 길이 같을 수는 없습니다. 언약궤 없이 사는 자는 세상에서의 싸움이 혈과 육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나 언약궤를 따라가는 신자는 혈과 육에 대한 싸움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어둠을 주관하는 자들과의 싸움입니다. 어둠을 주관하는 자는 자기 수고와 노력을 의지하게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피를 믿지 못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자기 앞에 요단강을 발견할 때마다 낙심할 것이 아니라 요단강을 이긴 언약궤, 희생의 피를 바라보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둠의 주관자를 이기는 것입니다. 내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기신 그리스도를 따라감으로 승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능력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안에 있는 능력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라는 것이 아니라 능력이 그리스도에게 있으니 주님을 의지하고 살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약궤를 따라가는 이스라엘이 '하나님 우리는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십니다. 희생의 피가 우리를 인도합니다'라고 고백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은 신자된 여러분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간다고 하면서 온갖 세상 걱정 근심을 다하는 모습이 아니라, '예수님 우리는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하십니다'는 고백으로 주님만 의지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답답함과 근심 걱정에 휩싸일 때가 많습니다. 아니 지금도 근심과 걱정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세상 일로 괴로워한다는 것은, 자신의 문제를 벗어날 탈출구가 없기 때문입니다. 문제를 벗어날 수 있는 구멍이 없다는 것이 더 괴롭고 답답한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에게 있어서 탈출구는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가 길입니다. 언약궤가 앞장섬으로서 요단강이 열렸습니다. 이젠 뒤를 보는 것이 아니라 열려있는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이 이스라엘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보지 못하고 요단강 이편의 삶 때문에 고민하고 괴로워한다면 스스로 그 길을 닫아 버린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러분, 여러분과 여러분 앞에 있는 요단강 사이에 예수님을 모실 마음이 없습니까? 그리스도가 열어 놓으신 요단강을 그리스도를 따라서 건넌 마음이 없습니까? 있다면 여러분 자신은 사라지고 오직 그리스도만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십니다. 나의 가능성과 힘을 보지 않고 승리하신 주님만 보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어디든 주님이 계신다는 것을 생각하십시오. 그럴 때 여러분이 나아갈 길이 보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