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예수님이 하신 일과 비교할 만한 업적을 남긴 인간이 있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 업적을 내세우면서 스스로를 의인이라고 주장할만한 사람이 있습니까? 만약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신 일에 경쟁하고 도전하면서 자기의 우월성을 계시하려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고, 만약 없다고 한다면 없다는 그 말이 단지 말로 그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과연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다가 예수님의 피의 흔적을 남겼습니까? 물론 신자야 그동안 교회를 다니면서 확보되어진 지식에 의해서 '예수님의 피가 우리 죄를 용서하고 우리를 구원하기 때문이다'고 말을 하지만 그것은 단지 지식적인 답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피가 우리 죄를 용서한다'는 것은 다만 문자로 구성되어 있는 단어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피가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그 용서하심으로 말미암아 천국에 간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약속이지만, 그러나 '예수님의 피가 나를 용서한다'는 말을 한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즉 문자로 구성되어 있는 단어 자체에 구원의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신자는 '나는 예수님을 믿는다'든지 '나는 십자가의 피로 용서함 받는다'라든지 '예수님의 은혜로 산다'는 말이 자신의 입에서 고백되어진다고 해서 그것을 믿음으로 단정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말이라고 하는 것은 얼마든지 인간의 내면을 위장한 채 뱉어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외면보다는 속중심을 보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예수님을 보내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시고 부활하게 하신 후에 '주 예수를 믿으라'고 하신 것은, 믿음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제시하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은 믿음이 없이도 믿는 행위를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속에 예수가 없이도 예수를 말할 수가 있고, 천국이 없이도 천국을 말할 수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얼마든지 속과 겉을 서로 다르게 보여줄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겉의 악함이 아니라 속의 악함을 드러내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시고 피의 흔적을 남긴 것입니다.
아무리 인간의 겉이 선하게 보이고 믿음으로 보인다고 할지라도 속의 정체가 악하다는 것이 드러난다면 겉의 선을 주장할 수 없게 됩니다. 속은 악하면서 겉의 행동이 선하다고 선한 자라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속은 악한데 겉은 선한 모습이라면 그것은 결국 위장이고 위선이고 이리가 양의 옷을 입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속 정체가 예수님으로 인해서 발각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는 인간의 악함을 부인하고 감추려고 하고 끝까지 선한 존재임을 주장하면서 자기 가치를 포기하지 못한 인간에 의해서 발생되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피는 인간의 악함을 보여주는 거울이며 그 피를 믿는다는 것은 자신의 악함을 인정한다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이 찾고 있는 사람은 선을 행하는 자가 아니라 자신의 악함을 인정하는 자입니다. 자신의 악함을 인정하는 것을 선으로 본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악함을 인정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피의 흔적이 담겨 있는 증거이기 때문에 그 피를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피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악함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물론 입으로는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말로만 죄인일 뿐 행위에 있어서는 결코 죄인이 아닙니다.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업적을 인정해 달라고 하고, 자신의 믿음 행위를 가치 있게 봐달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피가 인간의 악함과 더러움을 드러내는 데도 불구하고 '나는 기도를 많이 하기 때문에 신자다'라고 한다면 과연 그것이 자신의 더러움을 아는 태도입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세상에 십자가를 남겨 놓으신 것은,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높임 받을 인간이 없다는 것에 대한 선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심으로 십자가의 의미를 아는 자는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며 예수님께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믿음과 믿음 아닌 것이 무엇인가를 드러내는 기준이 됩니다.
만약 십자가가 이 세상에 없었다면 인간은 자기들 멋대로 믿음을 만들어 내어서 '이것이 진짜 믿음이다'고 주장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주 난감했을 것입니다. 세상에 참된 믿음이 무엇인가를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 편에서 '이것이 믿음입니다'라고 주장한다고 해도 그것을 믿음이 아니라고 할 수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믿음이 무엇이며 인간의 악함이 무엇이며 천국이란 어떤 자에게 합당한 나라인가를 분명히 제시하셨습니다. 때문에 인간 편에서 아무리 '이것이 믿음이다'고 내세우고 우긴다고 할지라도 결코 용납될 수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십자가를 안다고 해서 아는 것이 아니며,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믿는 것이 아니며, 천국을 소망한다고 해서 천국을 소망하고 있는 자가 아님을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거듭 촉구하지만 여러분 자신을 스스로 믿는 자로 여기지 마십시오. 그것은 큰 착각일 뿐입니다. 주일이면 교회에 나오고 있고, 십일조하고 있고, 기도하고, 성경보기를 오랜 세월 동안 해왔기 때문에 스스로 믿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속으로는 돈을 추구하면서도 겉으로는 얼마든지 '나는 천국을 소망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속다르고 겉다른 것이 인간이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신앙이 전혀 없이도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우리 자신임을 잊지 마십시오. 때문에 우리가 살펴봐야 할 것은 절대로 기도했느냐 교회 나왔느냐가 아닙니다. 내 속에 예수님이 있어서 예수님을 말하는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오늘도 저와 여러분들의 앞에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의 흔적이 있습니다. 그것을 바라보고 나온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교회에서 어떤 행위를 했든 무슨 수고를 하고 봉사를 했든 그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생각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그 모든 것도 예수님의 십자가에 비교하면 내세울 수도 없는 가치 없는 것으로 보여져야 합니다. '이것을 했습니다'라고 말하기가 부끄러울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내 행위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예수님의 행위만이 우뚝 서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고 나왔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악함과 더러움으로 가득찬 세상에 십자가는 있어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죄를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신앙생활이란 항상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앞세우는 생활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낮아지심의 현장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높임 받고 영웅으로 사는 삶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세상 영광을 기피한 삶이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따르고 높인다는 것은 결국 내 속에서 끊임없이 솟구치는 자기 영광성과 싸워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 영광을 포기한 십자가는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것이 곧 십자가의 원수임을 말합니다. 따라서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모든 사람은 40일 금식기도를 했든, 100일 철야기도를 했든, 성경을 수백 번을 봤든 상관없이 십자가의 원수된 자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영광은 세상의 영광과는 전혀 상관없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교회 일을 하든 무엇을 하든 자기 영광과 배를 채우는 것에 목적을 둔다면 그가 십자가의 원수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십자가로 내가 무엇을 추구하며 사는지를 점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이라는 것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도 분명히 할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 4장도 3장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이 요단을 건너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4장을 읽어보면 요단강의 물을 그치게 해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요단을 건너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이 단지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에 들여보내기 위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4장의 내용들이 이스라엘 백성이 먼저 요단을 건넌 후의 상황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다는 것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3장에 보면 백성들 앞에는 언약궤를 맨 제사장들이 앞서고 있습니다. 그리고 궤를 맨 제사장들의 발이 요단에 잠기자 물이 그쳤습니다. 그렇다면 그대로 계속해서 전진하면 되는데 무엇 때문에 백성들을 먼저 건너게 합니까? 본문 1절에 보면 "온 백성이 요단 건너기를 마치매"라고 말을 하고 있고, 11절에서 "모든 백성이 건너기를 마친 후에 여호와의 궤와 제사장들이 백성의 목전에서 건넜으며"라는 말씀을 보면, 제사장들의 발이 먼저 잠겨서 물이 그치긴 하였으나 요단을 먼저 건너간 것은 백성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분명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단지 요단을 건너게 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편에서 보면 속히 요단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남은 여생을 편하게 사는 것이 전부일 수 있지만, 하나님의 마음은 전혀 달랐던 것입니다. 요단을 건너게 하신 것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신 것도 이스라엘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우린 이 점에 대해서 주의를 기울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는 자입니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 예수님을 선택해서 믿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부르셔서 예수님을 알게 하시고 믿게 하신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왜 우리를 불러서 예수님을 믿게 하셨습니까? 우리를 천국 보내는 것이 목적이겠습니까? 아닙니다. 이점에 대해서 여러분은 주의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게 하신 것을 단지 하나님의 백성을 천국 보내시기 위해서라고 쉽게 생각해 버립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셔서 예수님을 알게 하시고 십자가를 바라보게 하시고 믿게 하신 것은 저와 여러분을 천국 보내려는 의도가 아닙니다. 물론 궁극적으로는 천국에 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천국 가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에 들여보내시는 것이 전부라면, 무엇 때문에 제사장이 앞서 있는 데도 불구하고 먼저 백성들을 건너게 했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무엇인가를 목격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스라엘은 물이 그친 요단강을 건너서 강 저편에 서서 강에서 일어나는 모든 상황을 목격하도록 한 것입니다. 자신들이 어떻게 해서 요단을 건너게 되었는지를 확실하게 목격하게 하신 것입니다.
만약 제사장들이 앞서고 이스라엘이 그 뒤를 따라서 요단을 건넜으면 이스라엘에게 남은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단지 요단강의 물이 그쳐서 건넜다는 기적의 체험에 대한 감격과 가나안 땅에 들어왔다는 감격만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적을 체험했다는 감격은 체험한 세대에만 있을 뿐입니다. 결국 세대가 교체되면 요단강 물이 그쳐서 건넜다는 감격도, 가나안 땅에 들어왔다는 감격도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먼저 요단을 건너가게 하셔서 언약궤 앞에서 물이 끊어져 있는 장면을 목격하게 하시고 이스라엘의 매 지파에서 한 명씩 불러내어 끊어져 있는 요단에서 돌 한 개씩을 어깨에 메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돌들이 이스라엘 가운데서 표징이 되리라고 말씀합니다.
요단강을 건넌 기적을 체험하지 못한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는 요단강에서 가져온 돌들이 표징이 되어서 기적을 전할 것입니다. 7절에 보면 "그들에게 이르기를 요단 물이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서 끊어졌었나니 곧 언약궤가 요단을 건널 때에 요단 물이 끊어졌으므로 이 돌들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영영한 기념이 되리라 하라"고 말씀합니다. 즉 열 두 돌은 이스라엘 지손에게 요단강이 언약궤 앞에서 끊어져서 요단을 건넜다는 것을 전하는 표징이라는 것입니다. 22-24절을 보면 "너희는 자손에게 알게 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이 마른땅을 밟고 이 요단을 건넜음이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너희 앞에 마르게 하사 너희로 건너게 하신 것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앞에 홍해를 말리시고 우리로 건너게 하심과 같았나니 이는 땅의 모든 백성으로 여호와의 손이 능하심을 알게 하며 너희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영원토록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라"고 말씀합니다. 즉 기념돌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요단을 어떻게 건넜는가를 계속 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옛날 조상들에게 있었던 기적의 역사를 가르치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로 하여금 요단을 건너게 하셔서 언약을 지키신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능력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게 함으로서 영원토록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념돌의 의미입니다.
따라서 돌 자체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어떤 능력도 없습니다. 언약궤로 인해서 물이 그치고 요단을 건넜다는 체험도 의미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지금 요단에서 가지고 나온 돌이 남아 있다고 한다면 아마도 사람들은 그 돌을 대단한 돌로 여기고 돌을 섬기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설령 열 두 돌이 우리 앞에 있다고 해도 그 돌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 돌이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입니까? 돌은 단지 돌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요단강을 건넜다는 체험도 역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적을 체험했다고 해서 천국 가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도 아닙니다.
때문에 오늘날 교회에서 체험을 중요시하면서 특이한 것을 체험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께 전혀 관심이 없음을 증거 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만약 기적을 체험한 것이 신자된 증표이고 기적의 체험으로 하나님을 알기에 충분하다면 굳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른 표징을 남겨둘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다른 표징을 남겨 둠으로서 요단강을 어떻게 건넜는가를 계속 상기시키고자 하시는 것은 결국 무엇을 아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기적을 체험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님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돌을 표징으로 남겨 두시는 것은, 그 돌을 통해서 이스라엘 자손이 모르는 것을 가르쳐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즉 자신들이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서 살게 된 것은 조상의 힘도 아니고 자신들의 노력도 아니고 오직 언약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언약을 이루신 능력은 언약궤를 통해서 확실하게 증거된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열 두 돌을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계속 가르치시는 것은, '너희가 요단을 건너고 약속의 땅에서 살 수 있게 된 것은 너희들에게 선한 행위가 있어서가 아니고 너희들이 귀한 존재이기 때문도 아니고 오로지 너희들의 실패와 죄를 대신한 희생의 피가 뿌려진 언약궤가 앞서 행했기 때문이다'는 것입니다.
열 두 돌은 '하나님이 다 하셨다'는 것을 증거 하는 표징입니다. 하나님이 다 하셨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공로를 내세울 수 없습니다. 오직 언약을 이루신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하심과 신실하심 때문에 약속의 땅에서 살아가는 존재가 되었음을 항상 고백하며 감사하며 사는 것이 곧 이스라엘다운 모습이며 그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16-18절을 보면 "증거궤를 멘 제사장들을 명하여 요단에서 올라오게 하라 하신지라 여호수아가 제사장들에게 명하여 요단에서 올라오라 하매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요단 가운데서 나오며 그 발바닥으로 육지를 밟는 동시에 요단 물이 본 곳으로 도로 흘러 여전히 언덕에 넘쳤더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증거궤를 멘 제사장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요단에서 올라온 것이 아니라 '올라오게 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 올라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 굳이 '올라오라'는 명령이 내려지고 그 명령에 의해서 올라오게 되었을까요? 그리고 왜 그 명령에 의해서 제사장들이 올라오자마자 물이 다시 흘려서 요단강이 언덕에 넘치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요단강의 물이 그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되어진 일임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이스라엘로 하여금 목격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너희가 요단을 건넌 것은 너희들의 힘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턱대고 '하나님이 건너게 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에 있는 언약궤가 빠져 버립니다. 즉 이스라엘의 실패와 죄가 어떻게 극복되었는가가 빠져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언약궤가 요단강에 들어옴으로서 요단강의 물이 그치고, 언약궤가 요단 가운데서 나옴으로서 물이 다시 흐르게 된 것을 목격하게 하심으로서 자신들의 생명이 언약궤에 있음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요단강은 죽음의 현장입니다. 물 속에서 살아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 죽음의 자리에 언약궤가 함께 합니다. 그러자 물이 그치고 이스라엘은 요단강을 건넙니다. 이것은 죽어야 할 이스라엘 속에 언약궤가 함께 함으로서 죽음을 극복하게 된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열 두 돌은 바로 이 모든 것을 이스라엘에게 말해주는 것입니다. 열 두 돌은 모두가 물 속에 잠겼던 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열 두 돌을 바라보면서 자신들이 어떻게 살아났는가를 자손 대대로 잊지 말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것만이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고 이스라엘 안에 영원토록 계속되어져야 할 삶의 태도라는 것을 열 두 돌이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열 두 돌의 의미를 안다면 자신을 죽어야 할 자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죽어야 할 자가 희생의 피로 인해서 살아났으며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거하게 되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자신을 자랑하지 못하고, 자기 영광을 나타낼 수 없으며, 세상의 힘으로 살아가지 않게 됩니다. 이것이 진짜 이스라엘입니다. 열 두 돌의 의미를 알고 가슴속에 열 두 돌을 세우고 살아가는 진짜 믿음의 신자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언약궤가 있으면 뭐합니까? 언약궤가 있다는 것으로 진짜 이스라엘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요단강을 건넌 체험을 했다는 것이 이스라엘 되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열 두 돌을 세웠다는 것도 이스라엘 되게 하지 못합니다. 열 두 돌이 말하고 있는 요단강과 언약궤의 의미를 가슴속에 두고 살아갈 때 그것이 믿는 자요 이스라엘입니다.
앞서 말씀드리기를 하나님이 왜 이 세상에 십자가를 남겨 두셨는가를 물었습니다. 그리고 단순히 십자가를 믿는다는 말 한마디로 신자되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십자가가 이 세상에 남겨진 그 의미를 열 두 돌을 통해서 새롭게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십자가를 기준으로 인간을 구분합니다. 그리스도의 피를 아는 자와 모르는 자로 구분합니다. 그리스도의 피는 인간은 모두 죽어야 할 자임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죽음 속에서 희생의 피로 인해서 살아났음을 말합니다. 이것을 안다면 세상에서의 영광은 헛된 것이고 의미 없는 것임을 깨달을 것입니다.
죽음은 모든 인간을 똑같이 만듭니다. 죽음 안에는 잘난 사람 못난 사람이 없습니다. 가진 자 못 가진 자가 없습니다. 이것이 요단강입니다. 언약궤로 인해서 강을 건너게 된 처지인데 그 속에서 자기 잘남을 자랑한들 그것이 무슨 소용입니까? 요단강을 건너면서 '나는 똑똑하다 많이 배웠다 재산이 많다 자식이 성공했다'는 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언약궤 때문에 죽어야 할 인간이 요단강을 건너게 되었으면서 말입니다.
인간이 죽음을 잊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자기 잘남과 자기 영광을 드러내기에 바쁩니다. 누구 덕분에 살아가고 있는가를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부르지 않습니다. 자기 힘을 믿기 때문입니다. 약속 같은 것은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스스로 착하게 살면 하늘도 무심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전혀 모르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아는 자는 자기 죽음을 압니다. 이 죽음 안에서 능력이 되는 것은 희생의 피라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피를 의지하고 살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아니면 죽는다는 것을 가슴에 묻어두고 삽니다. 이스라엘이 언약궤 때문에 요단강을 빠져나왔듯이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 때문에 요단강을 빠져나왔습니다. 내가 죽어야 할 자리에 주님이 함께 하셨다는 것을 알 때 그가 바로 구원받은 자입니다. 자식에게도 세상에서 능력 있는 모습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아는 부모의 모습을 보여주도록 하십시오. 인간은 예수 없이는 저주받을 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자식에게 보여주도록 하십시오. 열 두 돌이 말하는 요단강과 언약궤의 의미를 자식에게 가르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