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아리 속에 벌레가 한 마리 있다고 할 때, 그 벌레는 항아리 속이 전부인줄 알고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항아리 밖에서 보면 자기의 갇혀 있는 실체를 알게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세상 안에서 세상을 바라보면 지금 눈에 보이는 세상을 전부로 알고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밖에서 세상 안을 들여다보면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세상은 항아리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속에 갇혀 사는 벌레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항아리 밖에서 지금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전혀 모른다는 것입니다. 만약 항아리 밖에서 거대한 망치가 항아리를 깨버릴 준비를 하고 있다면 무엇이 지혜이고 무엇이 어리석음이겠습니까? 물론 항아리 속을 전부로 알고 살아가는 모습이 참으로 어리석음이며, 지혜로움은 항아리 밖에서 일어나는 일을 바라보는 자입니다.
비록 몸은 항아리 속에 있다고 할지라도 항아리 밖에서 거대한 망치가 항아리를 깨버릴 준비태세를 갖추고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실체를 안다면 그가 추구할 것은 깨어지는 항아리 속에서 살아남는 길일 것입니다. 깨어지는 항아리와 함께 나도 같이 깨어지고 말겠다는 것이 아니라면 분명 깨어지는 항아리 속에서 무사할 수 있는 길을 바라볼 것입니다.
그런데 항아리 밖에서 거대한 망치가 항아리를 깨버릴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은 결코 만약이 아닙니다. 이것은 실제이며 현실입니다. 사도 요한은 마 3:10절에서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라는 말씀으로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을 항아리로 본다면 항아리를 깨버릴 망치가 이미 항아리 위에 놓여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항아리 속에서 좋은 것만 골라내고 몽땅 항아리와 함께 깨버리겠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현실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현실을 철저하게 무시하고 외면한 채 살아갑니다. 그 이유는 세상이 깨어진다는 소위 심판의 흔적을 눈으로 확인할 수 없다는 것 때문에 그렇습니다. 가령 아마겟돈이란 영화에서처럼 혜성 하나가 지구를 향해오고 있는데 얼마후면 지구와 부딪히게 되고 그렇게 되면 지구는 멸망한다는 것과 같이 인간의 눈과 과학으로 확인되고 검증할 수 있는 것만 믿으려는 것 때문에 종말이라는 현실을 무시해 버리는 것입니다.
마 24:6-8절에 보면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전쟁과 기근과 지진 등이 재난의 시작된 증거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인류 역사 이래로 지금까지 수많은 전쟁과 기근과 지진을 봐왔으면서도 그것을 절대로 재난의 시작으로 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쯤으로 세상이 망하지 않는다는 것 때문입니다. 어느 한 나라가 홍수가 나서 완전히 멸망했다고 해도 종말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나라가 멸망했다고 해서 지구가 망하지는 않는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한 나라가 지진으로 인해서 완전히 무너졌다고 해도 그것을 재난의 시작으로 보지 않습니다. 내 나라가 괜찮고 내 사는 곳이 무사하다면 종말이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어쨌든 나는 존재한다는 것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심판이 있다는 증거로서 지구가 멸망을 당할 만한 엄청난 재앙의 흔적을 찾고자 하지만, 그러나 세상 멸망의 증거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그것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것입니다(마 24:38). 즉 인간의 일상 생활이 멸망의 증거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노아 홍수 때도 그랬던 것과 같이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도 세상은 그런 모습으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일상 생활 자체가 멸망을 불러일으킨 원인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또한 일상 생활 자체가 달라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노아의 가족 역시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은 있었습니다. 여느 사람과 마찬가지로 동일한 삶이었지만, 한가지 다른 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심판을 마음에 두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 증거가 심판 때까지 방주를 만든 것이었습니다. 방주를 만든 노아의 행위야말로 하나님의 계시를 마음에 담고 살았다는 증표가 아니겠습니까?
노아는 홍수로서 세상을 멸하시겠다는 계시를 받았을 때 하늘을 바라본 것이 아닙니다. 즉 세상이 물로서 망할 만한 징조가 보이는지 보이지 않는지 스스로 확인하고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대로 순종한 것입니다. 그리고 노아의 이런 행위를 있게 한 것은 노아가 믿음이 좋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기 때문입니다(창 6:8). 결국 세상은 은혜를 입은 자와 입지 못한 자로 구별된 것입니다. 은혜를 입은 자는 하나님의 계시를 마음에 두고 방주를 만드는 생활이었고, 은혜를 입지 못한 자는 계시를 마음에 두고 사는 것이 아니라 단지 눈앞에 보이는 세상을 마음에 두고 산 것입니다. 이것을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갔다'는 말로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사는 신자의 눈에 세상은 멸망의 장소로 보여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소돔과 고모라로 보여져야 하고 노아 홍수의 심판의 장소로 보여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실 밖에 없는 이유는 지금의 세상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아는 자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아무나 은혜를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받은 자만 은혜를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택한 자만 천국 간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입고 은혜를 아는 자의 눈에는 절대로 세상을 정상적이라고 판단하지 않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으면서도, 은혜로 살아가는데도 불구하고 은혜를 무시한 채 인간의 힘과 과학과 문명을 내세우며 자기 이름을 높이기 위해서 살아가는 모습들이 죄로 보여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서도 자기를 벗어나지 못한 죄를 발견합니다. 결국 나 자신까지도 멸망에서 헤어날 수 없는 존재임을 알게됩니다. 이런 상태에서 그 사람을 가장 기쁘게 하는 소리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주 예수를 믿으라'는 소리일 것입니다. 그래서 그 소리를 '기쁜 소식'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세상은 멸망한다는 것을 믿고 사십니까? 마음으로만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실제 여러분의 삶에 심판을 믿는 모습이 담겨있는가를 확인해야 합니다. 노아가 심판을 머리로만 알았습니까? 심판을 믿는 노아에게는 방주를 만드는 행위가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노아에게는 심판 속에서 방주가 생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심판을 믿고 산다면 당연히 심판 속에서 생명이 되는 것을 위해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분이 바로 그리스도가 아닙니까?
여러분의 주위를 둘러보십시오. 모두가 철저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고 자신의 힘으로 살기에 발버둥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안되면 신을 원망하는 무리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과연 하나님이 이런 세상을 남겨두실 것이라고 여기십니까?
아무런 징조가 없다고 해서 안심하십니까? 그것이 바로 은혜를 모르는 증거임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은혜를 아는 자는 세상이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는 것에 대해서 분노를 느끼고 그것이 곧 멸망의 모습임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결코 세상의 삶의 방식에 타협하지도 않고 합류하지도 않고 오직 생명을 향해서 생명의 길로만 나아갈 뿐입니다. 세상과 똑같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지만 세상의 마지막을 알고 살기 때문에 세상에서 사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입니다.
그런데 입으로는 스스로를 신자라고 하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신자다운 모습이 없는 자가 많습니다. 자칭 신자라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은혜가 무시당하는 것에 분노는커녕 덤덤하기만 하고 오히려 한술 더 떠서 잘사는 모습들이 부럽게만 느껴집니다. 은혜를 아는가 모르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잘사는가 못사는가를 더 중요시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세상의 멸망을 생각하며 살아가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도 저와 여러분에게 은혜로 사는 것을 가르치시고자 '할례'를 말씀하십니다.
본문은 요단을 건넌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할례를 행하는 내용입니다. 할례란 남자의 생식기 끝을 자르는 것으로서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의미로서 행해졌던 것입니다.
9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날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굴러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애굽의 수치'란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에 있을 때 할례를 행하지 못했던 것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입니다. 이렇게 애굽화된 이스라엘인들의 수치를 제거하는 방식이 곧 할례였습니다.
골 2:11절에는 할례를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할례를 육적 몸을 벗는 것으로 말합니다. 그렇다면 손으로 행했던 구약에서의 할례도 역시 마찬가지로 육적 몸을 벗는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봐야 합니다. 즉 육신에 대해서 부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창 6:3절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는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인간을 어떻게 평가하는가는 '육체가 되었다'는 말을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육체가 없었는데 육체가 생겼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 있느냐 없느냐에 의해서 사람이냐 아니면 단순한 육체냐로 구분됩니다. 그런데 아담의 죄로 인해서 이미 형상을 잃어버린 인간은 결국 육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육체가 된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신이 영원히 함께 하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합니다. 결국 육체가 된 인간은 이미 하나님에게로부터 문제성이 있는 인간으로 평가된 것이고 '그들의 날은 일백이십 년이 되리라'고 한 말씀을 통해서 육체는 죽음을 통해서 흙으로 사라져야 할 존재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에게 할례라는 언약이 주어진 것은, 인간이 살 수 있는 것은 육적인 몸을 벗는 것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할례 언약은 아브라함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최초로 할례언약대로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행한 자는 이삭입니다. 이삭은 인간의 방식이 아닌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주어진 아들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에게는 자기의 방식으로 낳은 아들인 이스마엘이 있습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사라가 아이를 낳지 못하자 자기 스스로 약속을 이어가기 위해서 종인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낳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없는데서 있게 하시고 죽은데서 살리시는 방식입니다(롬 4:17). 이 방식이 보여진 것이 바로 이삭입니다. 결국 이삭은 아브라함의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의한 자식임을 보여주는 것이 할례였던 것입니다.
할례란 인간의 것은 차단되고 대신 하나님의 약속이 삽입되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할례를 받았다는 것은 육신은 잘라내고 대신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는 민족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할례란 육신의 죽음이며 부정을 말합니다. 그리고 육신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는 새로운 인간 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즉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할례를 행하라고 말씀하시는 것도 이러한 의미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즉 약속의 땅은 인간의 육신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약속만 의지하는 자에게만 해당된다는 것입니다. 자기 육신을 의지하고 자기 방식으로 세상에서 자기 이름을 내고 스스로 존재코자 하는 자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것이 바로 약속의 나라라는 것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에게 할례를 행하게 하신 것은 '우리는 인간의 육신을 따라 난 것이 아니라 약속을 따라난 자들이다'는 것을 깨우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도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났기 때문이지 절대로 우리들의 힘이나 재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님을 가르치기 위한 것입니다. 이 정신이 곧 약속을 따라난 이스라엘의 증표였던 것입니다.
노아 홍수 후에 인간은 바벨탑을 쌓음으로서 자기 이름을 내려고 했습니다. 그러한 세상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약속을 주신 것은, 자기 이름을 내고 자기 이름을 높이기 위해서 자기 육신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세상 속에 자기 이름이 아닌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서 살아가는 세상과 전혀 다른 나라를 만드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행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거부하시고 무엇을 용납하시는가를 할례가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릴 때마다 저에게 일어나는 의문은 '과연 사람들에게 천국에 가고자 원하는 마음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오지 않는 사람들이야 천국을 생각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지만, 소위 교회를 다니는 신자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과연 천국을 열망하는 마음이 있는지 많은 의문이 듭니다. 이런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은, 분명 일점일획도 어김이 없고 틀림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천국에 해당된 모습과 해당되지 못하는 모습을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천국에 해당되지 못하는 모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애씀이 전혀 보이지 않을 때 저로서는 과연 천국을 소망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중요한 것은 교회에 나왔다는 것도 아니고, 설교를 듣고 있다는 것도 아니고, 설교를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는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말씀이 나의 본질과 실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냄으로 인해서 말씀 앞에서 자신의 수치를 발견하고 나의 수치를 가림 받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아무리 여러분이 말씀을 이해한다고 해도 생명 안에 있다고 단정할 수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1절에 보면 "요단 서편의 아모리 사람의 모든 왕과 해변의 가나안 사람의 모든 왕이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말리시고 우리를 건네셨음을 듣고 마음이 녹았고 이스라엘 자손들의 연고로 정신을 잃었더라"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요단을 건넜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능력이 이스라엘을 인도하고 있음에 대해서 이스라엘의 적들은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나안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이고 적절한 것은 즉시 적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지금 적들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서 정신을 잃었다고 할 정도로 두려움에 빠져 있습니다. 사기가 땅에 떨어진 상태입니다. 적을 치기에는 이 때가 가장 적절할 것입니다. 적의 사기가 땅에 떨어지고 이스라엘에 대해서 두려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공격만 하면 손쉽게 적을 무너뜨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적을 공격하는 것보다는 할례를 행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결국 이것을 볼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단지 할례라는 의식을 행하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적이 두려움에 빠져 있고 손쉽게 이길 수 있는 상황에서 뭔가 교훈을 주시려는 의도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적을 공격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인간 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오늘날 교회들이 크게 실수하고 잘못하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인 것 같습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이 우리 자신에 대해서 오해를 낳게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즉 '나는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인간 되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인간 된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그것을 말씀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적을 공격하고 무너뜨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인간 되느냐가 더욱 중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적을 공격하기 이전에 할례를 행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만약 이스라엘이 할례를 행하지 않고, 즉 다시 말해서 '우리는 육신으로 난 자가 아니라 약속으로 난 자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적을 공격한다면 그들은 비록 승리를 얻었다고 해도 그것을 자신의 자랑으로 여길 것입니다.
가나안 전투는 적을 가나안에서 물리치고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전투를 위한 전투가 아니고 땅을 차지하기 위한 전투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미 승리를 약속했고 약속에 따라서 가나안 땅을 주실 것도 말씀했습니다. 그렇다면 굳이 전투는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전투를 하게 하신 것은, 전투를 통해서 '너희가 어떤 인간 되었는가'를 확인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이스라엘이 요단에서 가져온 열 두 돌로 기념비를 세우는 것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그런데 4:20절에 보면 기념비를 '길갈'에 세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 9절에 보면 할례 의식을 행한 곳도 역시 길갈 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열 두 돌로 기념비를 세운 것은 죽음을 통과한 것은 모두가 희생의 피가 뿌려진 언약궤 때문임을 자자손손 대대로 가르치라는 것 때문입니다. 즉 요단을 건넌 이스라엘은 죽고 다시 살아난 민족임을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같은 길갈에서 할례를 행한 것 역시 '우리 육신은 죽고 약속을 따라서 다시 살았다'는 것을 잊지 말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 정신이 살아있는 것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인간된 모습입니다. 인간의 힘도 재주도 방식도 경험도 그 무엇도 의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있게 된 것은 희생의 피 때문이고 약속 때문입니다. 이것을 잊지 않는 것이 이스라엘 된 모습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서 전투를 할 때 '내가 싸워서 이겼다'는 생각을 할 수 없습니다. 내가 싸우기 전에 이미 하나님의 약속이 그들을 약속의 땅에 있게 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신약시대의 신자 역시 동일합니다. 롬 8:1절에서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되는가를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되는 인간적인 방법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혹 누군가가 그리스도안에 있을 수 있는 인간적인 방법을 제시하거나 가르친다면 그는 거짓 사도이며 다른 복음을 전하는 악한 자입니다. 신자는 그러한 자에 대해서 분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신자 역시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 자입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완성된 자로 이 땅에 세워 놓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가 나를 구원하기에 인간의 것은 단절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의 할례의 의미이며 그리스도의 할례입니다. 육신이 아닌 그리스도의 피가 나를 구원하기에 '나는 육신이 아닌 주님만 의지하고 살겠습니다'라는 것이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은 자입니다. 그리고 우리 인생은 할례 받은 자로 사는가를 확인하고 시험하는 기회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도구로 삼아 일하십니다.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은 자가 곧 하나님이 쓰시는 도구입니다. 돈있고 지식 있고 권력 있는 자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일군이 아니라 '나는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았다'는 것을 아는 자가 일군입니다. 그리고 일군이 할 일은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살린다'는 것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인생을 그리스도의 피,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는 도구로 여기는 신자는 육신을 부정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살 용의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이 신자이며 하나님의 도구일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끊임없이 인간의 육신이 부정되어지고 있습니다. 육신을 내세워서 해야 할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없는 것이 그리스도 안입니다. 오직 주님의 은혜로만 살고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은혜 아래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인생이며 할례의 의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