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에서의 신의 개념은 인간의 사고의 활동 안에서 존재할 뿐입니다. 즉 종교에서 말하는 신은 인간의 사고를 벗어나서는 생각할 수도 없고 생각되어지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사고를 통해서 규정되어지는 신은 신이 아닙니다. 단지 인간의 사고에서 창출되어진 환상일 뿐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미 인간의 사고로 신을 규정해 놓고는 신이 무엇인가를 찾아갑니다. 이런 일에 열심인 사람들이 '철학자'입니다. 철학자들이 생각하는 신은 인간 사고의 외부에 존재하는 분이 아니라 사고의 활동 안에 존재합니다. 결국 이러한 철학자들이 생각하는 신이란 '나 자신의 본질'에 지나지 않습니다.
쉽게 예를 들면, 인간이 생각하는 신은 인간을 사랑한다는 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신은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이 과연 어디에서 나온 생각이겠습니까? 인간의 욕망에서 나온 생각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사랑을 받기를 원합니다. 이웃으로부터, 친구로부터, 가족으로부터, 자신이 관계된 집단이라면 그 속에서 사랑을 받고자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이런 인간의 사고에서 자신을 미워하고 죽이는 신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습니다. 나를 사랑해야 신다운 모습이고 신으로서의 자격이 있다고 여깁니다. 결국 인간을 사랑하는 신은 인간의 욕망에서 나온 환상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을 사랑하는 신이란 개념은 사랑 받기를 원하는 나 자신의 본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은 인간의 사고 안에서 활동하시는 분이 아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활동과 생각은 언제나 인간의 사고를 초월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생각할 때 인간의 사고를 동원해서 추적하려고 한다면 필시 거대한 오류를 낳을 수밖에 없고, 결국 하나님이 아닌 하나님을 만들어 내게 될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의 변질은 인간 사고와 의식을 통해서 하나님이 해석되어지는 것에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오늘날 교회의 오류는 인간의 사고에서 창출되고 규정된 것을 신으로 인정함으로서 발생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편에서 볼 때는 극히 어처구니없는 일로 보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자기 생각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사고 밖에 존재하는 한 분을 의지하고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은 인간의 사고와는 철저한 대립 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사고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이고 신앙이며, 신앙 또한 인간의 사고에 의해서 이해되어지는 것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인간의 사고를 가지고 신앙에 접근을 한다면 그것은 결국 하나님을 포기하고 기독교란 종교로 남겠다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신앙이란 인간의 사고가 중지되고 부정되는 거기서 비로소 시작됩니다. 이와 같이 인간의 사고와 신앙의 대립적인 관계를 우리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창12:2)는 약속 하나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본토 아비 집을 떠났습니다. 우린 이것을 신앙이라는 말로 쉽게 생각하지만, 만약 이런 일이 여러분 자신에게 발생했다면 과연 어떤 행동을 취했겠습니까?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은 그 성취의 징조를 미리 보여준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닌 말로 밑도 끝도 없이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 이름을 창대케 할테니까 네 아비 집을 떠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인간의 사고에 대치되는 말씀입니다.
인간은 자기 사고에 대치되는 것에 대해서는 스스로 거부 반응을 보이게 됩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도 보편적인 인간 사고로 반응한다면 하나님으로부터 좀더 구체적인 약속의 내용을 듣게 될 때까지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단지 떠나라는 말 한마디에 지금껏 살아온 삶의 터전을 떠난다는 것은 분명 미련한 짓이고 무모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누구라도 아브라함의 행동을 만류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무모함으로 나아갑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그래서 신앙과 인간의 사고는 절대적으로 건널 수 없는 큰 고랑을 사이에 두고 서로 대치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의 사고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떠난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신앙이란 자기 사고를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 것입니다. 자기의 사고로서 말씀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말씀이기 때문에 따른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여러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신앙하시겠다면 절대로 여러분의 사고로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일을 이해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일이나 생각이나 활동은 여러분의 사고로 이해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활동하십니다. 하나님의 활동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만이 여러분의 할 일이며 그것이 곧 신앙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그리스도는 결코 인간의 사고의 대상이 아니라 신앙의 대상입니다. 이것을 저와 여러분에게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인간의 사고로 이해하려고 한다면 결국 이해할 수 없는 한계에 부딪히고 맙니다. 그럴 때 여러분에게 남는 것은 혼란이며 낙심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혼란스럽다는 것은 자신의 사고로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으로서의 행복은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이성과 부딪혀서 내 이성이 굴복을 당할 때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여러분께 드리는 것은, 설교란 철저히 내 이성, 나의 사고가 말씀 앞에 굴복 당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이 말씀을 이해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제가 믿고 의지하는 것은 성령입니다. 오직 성령에 의해서만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에 박히고 이해되어질 수 있기 때문에 오늘도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에서 성령에 의해 힘있게 활동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성령에 의해서 여러분의 사고와 이성이 철저하게 말씀 앞에 굴복되어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인간의 사고로서는 단념할 수 없는 것을 단념하게 되고, 선택할 수 없는 것을 선택하게 되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할례가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인간의 사고와 이성이 하나님 앞에 철저히 굴복 당하는 것이 할례입니다. 할례란 육신을 의지하지 않고 약속을 따라 났다는 표시라고 했습니다. 육신이 아닌 약속을 따라 났다는 것은 인간의 사고와 이성이 부정되어진 자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물이 없고 양식이 없어서 원망하게 되고 근심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인간이 사고와 이성에 의해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사고와 이성은 마실 물이 없고 먹을 양식이 없으면 죽는다는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인간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요구합니다. 분명히 말씀은 우리의 배를 부르게 하는 것도 아니고 마른 목을 시원하게 해주는 것도 아닙니다. 아무리 말씀이 있다고 할지라도 배고픔과 목마름을 해결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사고와 이성으로서는 말씀보다는 물과 떡이 앞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광야에서의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산다'는 말씀이 이해되어집니까? 이해되어진다면 그것은 기적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이성과 사고가 말씀 앞에 굴복되어진 기적입니다. 인간의 이성과 사고는 거대한 철벽과도 같습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무너졌다는 것은 하나님이 개입하셨다는 증거이고, 그것으로 이미 여러분은 하나님의 능력을 입은 자입니다.
사람은 분명 떡으로 삽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육신을 포기하지 않은 사고와 이성입니다. 그러나 육신이 포기되면 더 이상 떡은 의미가 없습니다. 대신 자신을 영원히 살리는 말씀이 가장 귀한 떡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성과 사고를 초월한 신앙입니다. 할례란 이스라엘이 이런 자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약속의 땅인 가나안은 인간의 이성과 사고를 용납하지 않은 축복의 땅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요단강을 건넘과 동시에 육신이 죽고 다시 산 자들입니다. 언약궤에 의해서 새로운 생명을 얻은 자입니다. 육신은 분명 숨을 쉬고 존재하지만 육신이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언약궤에 뿌려진 피가 더 의미 있는 백성이 된 것입니다. 이런 자가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언제나 자신의 이성과 사고로서 하나님을 대항하는 존재입니다. 홍해 앞에서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이성과 사고로 현실을 파악할 때 죽음 그 자체였습니다.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고 있고 뒤에서는 애굽 군대가 쫓아옵니다. 이젠 죽을 수밖에 없다는 판단이 내려졌습니다. 그러자 비록 종으로 살면서 고생은 하더라도 죽음의 위협은 없었던 애굽에서의 생활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그러자 모세가 그토록 원망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대항하는 인간입니다.
하나님은 홍해를 열어서 인간의 이성과 사고를 초월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줍니다. 요단강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요단강 물을 그치게 해서 이스라엘을 건너게 했다는 것 역시 인간의 이성과 사고를 초월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인간은 언제나 자신의 이성과 사고라는 한계 안에서 하나님을 인식하고 이해하려고만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와 자비하심을 모두 자신의 이성으로 해석하고 이해하려고 하다 보니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묵살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10절에 보면 이스라엘은 할례 후에 유월절을 지킵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나올 때 유월절을 지켰고 시내산에서도 유월절을 한번 지킨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후로는 유월절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이유는 할례를 하지 않은 자는 유월절을 지킬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할례란 육신이 아닌 약속을 따라난 자라는 표시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리고 유월절은 어린양의 피로 살아났다는 것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결국 할례와 유월절은 이스라엘은 육신으로 살아가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으로 사는 존재인데 그 약속은 곧 어린양의 피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할례 받지 아니한 자, 즉 육신이 단절되지 않는 자는 아무리 유월절을 지킨다고 해도 의미가 없었던 것입니다. 유월절 역시 육신을 부인하고 오직 어린양의 피만 높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예배는 어떻게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 이 시간 우리가 드리는 이 예배가 과연 무엇입니까? 신자의 의무이기 때문에 드리는 예배입니까? 하나님은 그 예배를 받지 않으실 것입니다. 복을 위한 통로로서 예배를 드립니까? 하나님은 오히려 그 예배를 진노의 통로로 삼으실 것입니다. 이유는 그러한 예배에는 할례의 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즉 육신이 부인되지 않는 예배는 예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롬 12:1절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가 어떤 것인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영적 예배인데, 영적 예배는 우리 몸이 산 제사로 드려지는 것을 말합니다. 내 몸이 산 제사로 드려진다는 것은 결국 내 몸이 제물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내 몸이 제물이 된다는 것은 육신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인데 육신의 죽음이란 육신이 부인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육신의 부인은 자기 이성과 사고로 판단하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생각과 판단에 자기를 맡기고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모든 것이 우리의 힘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영적 예배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예배란 내 육신이 부인되는 삶 자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말해주는 것이 바로 할례를 해야 유월절을 지킬 수 있다는 하나님의 규례입니다.
신자가 영적 예배를 드릴 수가 있다는 것은 성령 안에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령 안에서 가능한 것이 영적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령 안이라는 것이 구약식으로 말하면 축복의 땅이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할례를 하고 유월절을 지킬 수 있는 땅으로 들어 왔습니다. 그 증거가 가나안 땅의 소산을 먹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이상 만나가 필요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만나는 '너희는 육신의 배부름을 위해서 사는 존재가 아니라 축복의 땅에 들어가기 위해서 사는 존재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내려진 하늘 음식이었기 때문에 축복의 땅에 들어온 이상 만나는 필요치 않았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너서 할례를 하고 유월절을 지키는 행위는 이미 가나안 땅을 얻은 자로서의 행위입니다. 가나안을 얻기 위한 준비 운동도 아니고 싸움을 앞둔 자로서 승리하기 위한 의식도 아닙니다. 이미 가나안을 얻은 자로서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 자인가?'를 새롭게 인식하는 할례이고 유월절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치러야 할 전투는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다운 모습으로 존재하는지를 확인하기 위한 하나님의 일인 것입니다. 과연 인간이 이성과 사고, 즉 육신이 부인되고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를 따라 사는지를 전투를 통해서 확인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투에서 요구되는 것은 이스라엘의 힘이 아니라 순종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말해주는 것이 13-15절의 말씀입니다. 여호수아는 이미 여리고 성을 정탐을 했습니다. 아마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기 위한 궁리를 했을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과 사고가 부지런히 활동을 하면서 현실을 파악하고 승리를 위한 방법을 모색했을 것입니다. 이런 여호수아 앞에 '여호와의 군대장관'이란 분이 나타납니다.
13절에 보면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왔을 때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 섰는지라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그에게 묻되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대적을 위하느냐"고 합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이 왔다는 것은 전투를 앞둔 긴장감으로 가득찬 순간을 의미합니다. 그 순간 한 사람이 칼을 빼어 들고 여호수아의 가는 길을 막아섭니다. 그럴 때 여호수아에게 떠오른 생각은 '이 사람이 누구편이냐?'는 것입니다. 우리편이냐 적의 편이냐는 것이 여호수아의 물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칼을 들고 서있는 분의 입에서는 전혀 엉뚱한 답이 나옵니다. 나는 누구 편이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군대 장관으로 왔다는 것입니다. 즉 여호와의 군대장관으로 오신 분은 여호수아의 편도 아니고 가나안 족속의 편도 아니고 단지 여호와의 군대장관이라는 신분으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역시 인간의 이성과 사고를 초월해 버린 답이었습니다.
인간관계에서 적과 아군은 '나'를 중심으로 구분됩니다. 나를 위한 자는 아군이고 나를 해롭게 하는 자는 적군이 됩니다. 나를 해롭게 하는 자를 돕는 자까지도 적군으로 여겨버립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하나님을 생각할 때도 언제나 나를 돕는 하나님으로 생각을 합니다. 내 일을 도와주는 하나님, 잘되게 해주는 하나님, 이것이 인간의 이성과 사고에서 만들어진 하나님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생각으로 여호수아도 칼을 들고 선 사람을 봤을 때 '누구를 위한 자냐?'는 것이 맨 처음의 관심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대답은 '나는 여호와의 군대장관으로 왔다'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 편도 아니다는 것입니다. 누구를 위해서 온 것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다만 여호와의 군대장관으로 왔다고 말합니다. 여호와의 군대장관이란 여호와의 군대를 지휘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즉 군대의 최고권자로 온 것이지 누구를 돕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린 이 말씀 한마디를 가지고도 오늘날 교회인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얼마나 큰 오류를 범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신을 찾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일을 위해서 신을 찾습니다. 자기를 돕는 역할자로서 신을 찾는 것입니다. 나를 위한 신을 찾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종교의 모습이며 인간의 이성과 사고에서 나온 신의 개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 '나를 도와 달라'는 말을 얼마나 많이 합니까? 마치 하나님을 나를 도와주기 위해서 대기하고 있는 신으로 여기고 있지 않습니까? 같은 교회에서 같은 사업을 하는 교인이 있다고 할 때 우린 그를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형제관계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경쟁관계로 인식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저 사람보다는 나를 더 도와줄 것이라고 기대를 합니다. 내 신앙이 더 좋기 때문에 나를 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나의 일을 도와주시는 하나님을 기대하고 바라지만, 정작 하나님 편에서는 '나는 누구를 위해서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스스로 계신 하나님은 오직 스스로를 위해서 존재하시고 일하실 뿐입니다. 그것을 '여호와의 군대장관으로 왔다'는 말씀으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여호수아는 더 이상 다른 말이 필요 없이 땅에 엎드려 절하고 '나의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려나이까'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신자의 관계입니다. 나를 위한 하나님은 없습니다. 단지 하나님을 위한 종이 있을 뿐입니다. 이점을 항상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여호와의 종이다는 것만 생각하십시오. 주인이 종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종이 주인을 위해서 존재할 뿐입니다. 그래서 15절에서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는 말씀을 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불붙은 떨기나무에서 모세를 만나는 상황과 동일합니다. 그때도 하나님은 모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보내면서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는 말씀을 했습니다. 이것은 '모세 네가 일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일한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수아도 마찬가집니다. 여호수아가 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싸우십니다. 여호수아는 단지 여호와의 종으로서 살아가면 되었던 것입니다.
여호수아에게는 여리고 성과의 전투에서 승리할 방법을 모색하고 전투를 걱정하는 권리가 없습니다. 싸우라고 할 때 나가서 싸우면 되는 것이 여호수아입니다.
여호와의 군대는 오직 여호와의 싸움에 동원된 군사입니다. 우리의 싸움에 군대장관으로 오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싸움에 군대장관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의 싸움에 하나님이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이것을 잘 구분해야 합니다. 나의 싸움에 몰두하고 있는지 아니면 하나님의 싸움에 몰두한 삶인지를 살펴야 합니다. 교회가 서로 부흥하기 위해서 경쟁하고 싸우는 것이 과연 하나님의 싸움입니까? 어떻게 그러한 싸움에 하나님이 도와주기를 바라는 것입니까? 내 자식이 남보다 잘되기를 바라는 것이 하나님의 싸움입니까? 그런데 우리는 아무 거리낌없이 서슴없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악하고 더러운 땅에서 벌어지는 인간의 싸움에 동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유사시에 여러분을 지키기 위한 '동원 예비군'이 아님을 다시 한번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칼을 빼어든 여호와의 군대장관은 여호수아와 마주서 있습니다. 칼을 빼어 들었다는 것은 전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호와의 군대장관 앞에 누가 대적자로 서 있는 것이 됩니까? 바로 여호수아입니다. 여호와의 군대 장관이 싸울 대상은 여호수아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의 이성과 사고가 부정되지 않는 존재, 육신이 부인되지 않는 존재가 바로 여호와의 적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앞에서 종으로서 굴복했다는 것은 여호수아에게 여호와가 승리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이스라엘입니다.
여러분, 육신의 싸움을 위해서 하나님을 부르고 도우심을 기다립니까? 하나님은 바로 그런 여러분을 대적으로 삼으십니다. 포기되어지지 않은 나의 이성과 사고, 육신의 모습, 그것이 바로 여호와의 대적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지금 여호와의 군대장관으로 우리에게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굴복하십시오. 예수님은 우리에게 나의 종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성령 안에 사는 것은 모두가 주님의 은혜이지 않습니까?
육신의 싸움은 우리를 피곤하게 할뿐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종으로서 주님만 따라가는 삶은 평안입니다. 여러분이 이기는 삶을 살려고 하지 말고 이미 이기신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이 인도하신 대로 안심하고 따라가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