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6:1-11 무너진 여리고

태초에 에덴동산에는 기준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무엇을 해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선악과는 먹어서는 안됩니다. 이것이 하나님 편에서 인간에게 제시하신 선악기준입니다.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에덴동산에 세워진 기준은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선입니다. 말씀에 의해서 창조된 세계이기 때문에 말씀 아래 있어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분명한 기준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 기준을 벗어납니다. 그리고 스스로 새로운 기준을 세웁니다. 그것은 말씀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자기를 기준으로 해서 행동하게 됩니다. 이것이 죄입니다. 하나님도 자기를 기준으로 해서 해석을 합니다. 그래서 자기의 소원대로 이루어주는 하나님을 최고로 여깁니다.

현대 사회 역시 자기가 기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기준이 없이 살아가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현대 사회는 기준이 없습니다. 기준이 있다면 '실용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용주의란 나에게 도움이 되는 쪽으로 편리하게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는 선이 되는 것이 상대방에게는 악이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요즘 대기업의 구조조정으로 사회가 시끄럽습니다. 또 며칠 전에는 농·축협 통합을 반대하던 축협 회장이 국회에서 할복을 했다는 소식도 있었습니다. 대기업의 구조조정이나 농·축협의 통합이나 이 모든 것은 정부에서 이렇게 하는 것이 실용적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강제적으로라도 실행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실제 구조조정을 당하는 입장이나 통합을 당하는 입장에서는 결코 실용적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자신에게는 피해가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대(大)를 위해서 소(小)가 희생되어야 한다'는 말도 있지만 이것이 바로 실용주의입니다. 한사람이 죽고 열 사람이 산다면 그것이 바로 실용적이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결국 열 사람이 힘을 합해서 자신들을 위해 한 사람을 죽게 합니다. 이것은 다수의 힘이 제일이라는 논리밖에 되지 않습니다. 때문에 대(大)를 위해서 소(小)가 희생되어야 한다는 것이 비록 세상 기준으로 내세워진다고 해도 결국 소(小)의 입장에서는 그것을 선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구조조정을 하지 않으려는 기업이나 통합을 한다고 할복을 하는 사람이나 그들 역시 자기 가치 판단이 기준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에게 해가 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이 실용주의라는 기준으로 움직이고 있는 듯 하지만 그것도 역시 기준이라고 할 수 없고, 상황과 환경에 의해서 얼마든지 변할 수 있으며 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이라는 기준에서 벗어난 현대 사회의 모습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기준으로 살아가십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는 신자입니다. 그렇다면 신자로서 무엇을 기준으로 하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공부할 때 그 기준이 무엇입니까? 결혼을 한다면 무엇을 기준으로 결혼을 합니까? 직장을 다닌다면 무엇을 기준으로 직장을 다닙니까?

TV에 보면 연예인들이 나와서 얘기를 할 때 사회자가 어떤 남자, 어떤 여자를 원하느냐고 묻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기준으로 남자를 고르고 여자를 고르느냐는 얘기입니다. 그럴 때 사람들은 각기 자기의 기준을 말합니다. '나를 편하게 해주는 사람' '이해심이 많은 사람' 등등 여러 가지를 얘기하지만 결국 기준은 '나의 행복'입니다. 내 행복을 위해서 실용적인 사람을 고르겠다는 것입니다. 직장을 고를 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은 골라서 가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있으면 가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하지만 그래도 역시 빠지지 않는 것은 이 직장이 내 인생에 힘을 실어줄 것인가를 따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역시 기준은 '내 인생'입니다. 내 인생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실용적인 직장인가를 살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근심을 하고 고민을 하고 초조감에 빠지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열심히 키웠습니다. 모든 정성을 다해서 공부를 시켰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사업고시에 합격을 해서 검사가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부모는 그 자식을 인해서 주어질 혜택을 생각하면서 행복감을 느낍니다. 떵떵거리는 집안과 사돈을 맺을 생각도 합니다. 그런데 자식이 가난한 집 여자를 데리고 와서 결혼을 하겠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부모의 초조함과 근심이 시작됩니다. 결국 부모의 초조는 자식은 내 마음대로 안된다는 것을 모르는데서 온 것입니다. 부모 자신이 기준이 되어 있기 때문에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 자식 때문에 초조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것은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을 모른 채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입니다. 제가 무엇을 기준으로 살아가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물음은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을 기준으로 하고 사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을 확실한 기준으로 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에게는 근심하고 고민할 권리가 없는 것입니다. 내 스스로 계획대로 이루며 살아가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사용되는 인생이기 때문에 고민하고 근심할 권리가 인간에게 부여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일하신다가 아니라 모든 것은 나 하기 나름이라는 생각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근심하게 되고 고민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전 16:22절에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신명기 28장에서는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고 하는데, 여기서는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이 보실 때 주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저주를 받는 최고의 높은 기준이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현대 사회의 실용주의와 자기 행복을 위한 가치 판단, 근심과 불안과 초조함을 다 부숴 버리는 절대적인 기준입니다. 이 기준에 의해서 '누구든지 처나 자식이나 아비나 남편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다'고 하신 것입니다.

신자의 기준은 40일 금식기도하고 성경을 백번 천번을 보고 주일 성수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을 기준으로 해서 여러분의 삶의 하나하나를 점검해 보십시오. 참으로 하나님은 인간이 알 수 없고 감히 판단할 수 없는 높은 차원에서 일하시고 계셨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을 모르고 초조해 하고 근심하고 고민하며 살았던 자신의 어리석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 중심으로 일하십니다. 우리에게 실용적인 방향으로 일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택한 자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쪽으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방식으로 일하십니다. 하나님이 일하시고 계시는데 왜 우리가 걱정을 합니까? 실용주의가 기준으로 되어 있다면 아무리 하나님이 일한다는 것을 안다고 해도 여전히 걱정을 떨쳐버릴 수가 없지만, 그리스도를 알고 사랑하는 것을 기준으로 여긴다면 걱정할 이유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준으로 살지 않는 세상은 어둠입니다. 이 어두움의 세상에 예수님이 빛으로 오셨습니다. 마지막 유월절로 인간이 되어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 빛되신 예수님이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시는 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계획입니다. 세상은 이런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서 움직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예수님 중심으로 되어갑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꾸 내 중심으로 세상이 움직여 주기를 기대합니다. 모든 것이 자신에게 도움이 되어지는 쪽으로 움직여지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둠이며 하나님의 일하심을 알지 못한 어리석음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다시금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에 철저한 기준을 두어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일이 내 중심이 아니라 예수님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것에 대해서도 철저한 기준을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을 돕는 계획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속에 예수님이 들어오시는 계획으로 일하신다는 것도 분명한 기준으로 세워져야 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의도를 오늘 본문을 통해서 다시금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본문은 여리고 성이 함락된 내용입니다. 사람들은 여리고 성이 함락된 내용을 읽으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편에 서서 강한 적도 이기게 해주신다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신자가 원하는 것은 기도만 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신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이스라엘이 여리고 성을 빙글빙글 돌았을 때 무너진 것처럼 가지고 싶은 땅이 있으면 그 땅을 이스라엘처럼 돌면 하나님이 주신다는 사기를 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리고 성의 함락 이야기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여리고 성을 주셨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여리고 성을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치고자 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점을 배워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해야하는 일은 싸움입니다. 가나안 땅은 곧 천국을 의미합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는 하나의 의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과연 천국이 싸우는 곳인가?'라는 생각입니다. 우린 보통 '천국'이라고 하면 편안하고 즐겁게 아무런 고생도 없이 사는 것으로 연상합니다. 물론 그러한 천국에 싸움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천국에 싸움에 있다고 할 때 의문이 들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고 해서 이제 그들은 놀고먹으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싸우는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날 신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은 싸움입니다. 싸우며 살아가는 이것이 곧 천국입니다.

어떤 싸움입니까? 언약궤, 즉 어린양의 피가 우리를 죽음에서 건져내었다는 이 정신에 위배된 사고방식과 싸우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 안에서 사는 신자에게는 필연코 싸움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싸움이 없다는 것은 결국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에 위배된 사고방식에 합류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현대 사회에는 싸움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분명히 싸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싸움은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어린양의 피의 정신을 세우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지키고 보호하고 세우기 위한 싸움입니다. 학생들은 오직 성적을 올리기 위한 싸움에 몰두합니다. 자신의 인생에 도움이 되는 것은 성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내 인생에 아무런 도움이 안된다고 여기기 때문에 예수의 피보다는 성적에 매어서 살아갑니다. 가정주부는 이웃과 또는 친구와 경쟁하고 싸웁니다. 암암리에 불꽃튀기는 전쟁이 벌어집니다. 누구 남편이 더 능력이 있는가를 경쟁하고, 누구 남편이 더 자상하고 잘해주는가를 비교하면서 우쭐해하며 살아갑니다. 직장인 역시 피곤한 싸움이 끊이지 않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속성이 교회 안에서도 계속되어집니다. 말은 형제, 자매라고 하고 한 지체라고 하면서도 결국 서로 비교하고 경쟁하는 적으로 만나고 헤어집니다. 희생과 섬김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피가 무색할 정도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준이 아니라 자기가 기준 되어서 살아가기 때문에 발생하는 싸움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싸움에 하나님이 내편 되어주기를 원합니다. 내 앞에 있는 강한 자를 여리고로 간주해버립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내 편 되어서 저 여리고 같은 존재를 이길 수 있도록 해달라고 합니다. 옆 사람과, 옆 교회와, 다른 교단과, 다른 종교와 경쟁하는 이 사고방식이 바로 하나님의 대적이라는 것을 미처 생각지를 못합니다.

나는 교회를 다니니까 하나님은 교회를 안 다니는 저 사람보다는 내 편을 더 들어줄 것이라는 생각은 하나님을 몰라도 너무 모른 엄청난 착각입니다. 지금 현대교회가 이 착각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태라고 봅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다니는 사람을 중심으로 일하시지 않습니다. 흔히 성직자라고 하는 목사를 중심으로 하지도 않고, 장로님을 중심으로 일하시지도 않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기도를 더 많이 하고 헌금을 더 많이 했다고 해서 그를 중심으로 일하시지 않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하나님은 오직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일하십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어둠의 나라는 버리시고 빛으로 오신 예수님의 나라를 새롭게 창조하시는 목적과 계획으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택하심으로 부름 받은 신자는 오직 예수님 나라의 백성으로 예수님의 주되심과 예수님의 피만을 증거하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즉 모든 기준이 예수님만을 중심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들은 실패로 보는 상황 속에서도 실패에 낙심하는 것이 아니라 실패를 통해서 더욱 더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삶은 우리 속의 여리고를 하나님이 무너뜨림으로서 되어지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과연 나에게 이러한 싸움이 있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지금껏 무엇과 싸우며 살았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천국이란 그리스도안에서 사는 것을 말합니다. 가나안이 이것을 의미합니다. 때문에 '천국인데 무슨 싸움이 있는가?'하고 이상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천국이기 때문에 싸움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이것은 세상에서 천국으로 살아갈 때를 의미합니다. 세상이 심판을 당하고 완성된 천국으로 들어가게 되면 모든 싸움이 그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천국이 미완성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은 미완성의 나라이지만 그리스도안이라는 천국은 완성된 나라입니다. 완성된 나라에서 살지만 아직 죄가 있는 세상이기 때문에 싸우면서 장차 주어질 죄 없는 나라를 소망하며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앞에 적은 여리고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과 여리고가 구분되는 것은 무엇을 기준으로 해서입니까? 유월절이란 의식이 기준입니까? 아니면 할례라는 표가 기준입니까? 그것도 아니면 제사를 드리는 것이 기준입니까? 만약 이러한 것들이 기준이라면 여리고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이스라엘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의식이라는 것은 인간 스스로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과 여리고의 구분은 언약궤에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언약궤에 의해서 요단강을 건넌 자들입니다. 즉 죽어야 할 자가 어린양의 피에 의해서 다시 산자가 되었다는 흔적이 있는 것입니다. 그 증표로 할례를 행하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리고는 어린양의 피의 흔적이 없습니다. 즉 죽어야 할 인간이 어린양의 피로서 다시 살아났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한 자들입니다. 가나안 땅은 이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가나안에서 여리고는 무너져야 했던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어린양의 피의 흔적이 없는 자를 공격하시는 것이지, 혈통을 보고 이스라엘로 구분하시면서 이스라엘이 아닌 자를 공격하시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언약궤로 인해서 자신들이 요단강을 건넌 것을 목격을 했고, 다시 언약궤에 의해서 여리고가 무너짐을 목격을 합니다.

여리고가 무너지는 광경은 참으로 희한하기 짝이 없습니다. 3절에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더러 성 주위를 매일 한번씩 6일 동안 돌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7일 째는 성을 일곱 번을 돌라고 합니다. 그 말씀대로 했더니 여리고가 무너집니다. 이것을 보면서 우리는 이스라엘이 총 몇 바퀴를 돌았는가를 계산하기도 합니다. 보통 성경퀴즈라는 것을 할 때도 보면 이스라엘이 여리고를 총 몇 바퀴를 돌았는가를 묻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여리고를 총 몇 바퀴를 돌았는가에는 전혀 관심 둘 필요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6일 동안 한 바퀴씩 돈 것과 칠 일째 일곱 바퀴 돈 것에 대한 구별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을 때 6일 동안 창조하시고 7일 째는 복을 주사 안식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이 복을 주시고 안식할 수 있는 완전한 나라라는 증표가 7일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죄로 인해서 하나님이 안식하실 수 있는 나라가 깨어져 버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시 완전한 새로운 나라를 창조하시겠다는 것이고, 그 나라를 주시겠다는 것을 7일째 일곱 바퀴를 돌 때 여리고가 무너지게 함으로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6일 동안 한바퀴씩 돈 것은 인간의 일입니다. 그러나 7일째 일곱 바퀴를 돈 것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7일은 하나님의 날이며 일곱 바퀴는 하나님이 하신다는 증표입니다. 6일 동안 여섯 바퀴를 돈 것은 인간의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모든 인간의 노력을 묵살하고 오직 하나님이 홀로 하신다는 것을 칠일 째 일곱 바퀴를 돌게 함으로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7이란 숫자는 이것만이 아닙니다. 일곱 제사장, 일곱 양각 나팔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일곱을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내가 일한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더러 안식일을 지켜라고 하셨던 이유입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사는 나라를 포기하고 하나님이 들어가게 하시는 새 나라를 바라보고 살아라는 의미가 안식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주일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신자가 자신의 노력과 힘으로 산다는 것을 포기하고 그리스도의 공로와 피를 의지하고 산다면 그것이 바로 안식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여리고를 돌라고 하실 때 그 앞에 언약궤를 앞세우게 하신 것입니다. 6,7절을 보면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제사장들을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언약궤를 메고 일곱 제사장은 일곱 양각나팔을 잡고 여호와의 궤 앞에서 행하라 하고 또 백성에게 이르되 나아가서 성을 돌되 무장한 자들이 여호와의 궤 앞에 행할지니라"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은 여전히 언약궤 뒤를 따릅니다. 언약궤가 그들의 중심입니다. 어린양의 피가 묻어 있는 궤가 이스라엘의 중심이라는 것은, 인간의 나라가 무너지고 그 자리에 어린양의 피를 기초로 한 새로운 나라를 세우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일하시고자하는 계획입니다.

언약궤를 앞세우고 그 뒤를 따라서 여리고를 도는 이스라엘은 '우리는 인간의 힘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나라를 세우지 않고 오직 어린양의 피를 중심으로 한 하나님의 나라만 세워지기를 바랍니다'는 마음으로 돌아야 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의 신자들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내 속에 내 힘과 내 중심으로 내 기준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나라, 여리고성은 다 무너지고 오직 그리스도의 피를 기초로 한 하나님의 집만 세워지기를 바랍니다'라는 정신이 살아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기준으로 살아가는 신자인 것입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만이 이루어질 뿐입니다. 예수님은 주기도문에서 '하늘에서 뜻이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땅에서 이루기 위해 신자가 힘써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은 오직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쪽으로 결말이 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내 뜻이 기준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과 계획만을 기준으로 삼아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자기 일이 잘 될 때 내 뜻대로 되어진다고 좋아들 하지만 그것은 결국 하나님에 의해서 무너질 여리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의 싸움에 휩쓸리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싸워야 할 싸움은 하나님의 싸움입니다. 세상은 아무 것도 아니며 무너져야 할 성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줘야 할 하나님의 군사들입니다. 이미 승리한 싸움입니다. 다만 여러분은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만 보여주십시오. 세상 나라를 무너뜨리고 예수님의 피로 사는 새로운 나라로 우리를 집어 넣으셨다는 것만 보여주십시오. 세상을 향해서 '너희들은 돈 번 것을 좋아하고 좋은 집에 살게 된 것을 복으로 여기지만 우리는 그리스도를 알게 된 것이 감사하고 그것이 귀할 뿐이다'는 것을 보여주십시오. 오직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을 기준으로 삼고 인간의 싸움이 아닌 하나님의 싸움을 하면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바라보고 살면서 마지막 때 영광의 나라에서 영원히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