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펼칠 때 때때로 전혀 하나님답지 않은 말씀에 대해서 당혹감과 난처함을 느끼게 됩니다. 자비와 사랑으로 세상을 다스리시고 돌보신다고 생각되는 하나님이 자비와 사랑과는 전혀 거리가 멀고 오히려 악랄한 폭군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날 때 이런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에 대해서 난처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한 예가 오늘 본문과 같은 경우입니다. 21절에 보면 "성중에 있는 것을 다 멸하되 남녀 노유와 우양과 나귀를 칼날로 멸하니라"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이 여리고를 점령했을 때 여리고에 대한 행동은 남녀노유를 막론하고 우양과 나귀까지 남김이 없이 멸해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독자적인 행동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가나안을 정복했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규례대로 따른 것입니다. 그 규례가 바로 남김없이 진멸하라는 것입니다(신7:2 ; 20:16,17). 이러한 하나님에게서 과연 세상이 생각하는 자비와 사랑의 하나님의 모습이 나타납니까? 오히려 반대로 폭군의 모습이 아닙니까?
아무리 가나안이 우상을 섬기는 나라라고 할지라도 어린애까지 남김없이 진멸하라는 명령을 하실 수가 있습니까? 이것은 잔악무도한 정복자의 횡포로 비쳐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구절을 대할 때마다 어떻게 이해해야할지 참으로 난처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인간의 기준과 상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으로 말씀을 대하고 세상을 대하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가를 알면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에 대해서 '당연하다'는 반응을 보일 수가 있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오직 그리스도입니다.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고전 16:22)는 말씀대로 하나님의 기준은 주를 사랑하느냐이지 절대로 인간의 행위나 도덕과 윤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권운동가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주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모두가 저주의 대상입니다. 그렇다면 신자 역시 이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하나님의 기준으로 세상을 살아가게 되면 언제나 '나는 주님을 사랑하는가?'가 심각한 자기 문제로 등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은 기도와 성경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기도를 많이 하는가?' '나는 성경을 몇 번이나 봤는가?'가 자기 삶의 문제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또 '공부를 잘하는가 못하는가?'가 자식에 대한 문제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오직 '주님을 사랑하는가?' 이것만이 자기 문제로 등장할 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기준은 무시한 채 세상이 기준으로 삼고 있는 것을 기준으로 여기고 살아가기 때문에 언제나 세상이 요구하는 기준에 미달되는 것을 자기 문제로 삼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이 요구하는 기준은 남보다 잘하는 것이고 뛰어나는 것이고 많이 하는 것입니다. 기준이 되는 분량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제일 뛰어난 자가 자동적으로 기준 되는 자리에 위치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그보다 더 뛰어난 자가 개입되면 자동적으로 기준은 더 뛰어난 자에게로 옮겨지게 됩니다. 그래서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대로 세상은 기준이 없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리고를 무엇을 기준으로 해서 무너뜨리는 것입니까? 기도를 안했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율법을 모르기 때문입니까? 여리고를 무너뜨리시는 기준은 어린양의 피입니다. 남녀노유를 막론하고 우양까지 다 멸하시는 것은 오직 어린양의 피라는 기준에 의해서입니다.
이스라엘은 여리고를 무너뜨리는 일에 개입을 했습니다. 자신들의 손으로 어린애까지 멸하면서 그들은 무엇을 생각해야 하겠습니까? 여리고를 멸하시는 하나님의 기준은 무엇이며, 그 기준은 전혀 융통성이 없이 기준에서 벗어난 존재는 누구를 막론하고 멸망을 받게 된다는 것을 자신들의 손으로 어린애까지 죽이면서 철저하게 인식을 해야 했던 것입니다.
무너진 여리고를 옛날 일로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리고는 하나님이 세상에 대해서 어떻게 결말지을 것인가에 대해서 미리 보여주신 예고편입니다. 그리고 무너진 여리고를 차지하는 이스라엘을 통해서 어떤 자가 세상의 멸망 속에서 굳건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일을 이해하는 시각에서 세상을 바라보게 되면 사람들의 모든 꿈과 소망이 담겨있는 세상은 결국 모래 위에 세워진 집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여리고 성의 남녀노유를 멸하라는 것은 결코 우리에게 당혹감과 난처함을 안겨주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기준에 벗어난 것은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 다는 하나님의 의지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기준에서 벗어나 있을 때는 멸망의 대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우리에게 시급한 일은 하나님의 기준에 자신을 세워보는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의 기준에 맞게 살아가는지 아니면 기준에 벗어난 채 살아가는지 자신을 점검하는 것이 신자의 중요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사랑으로만 인간과 관계하고자 하십니다. 신 10:12절에 보면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의 요구를 충족할 수 있는 사랑이 없었습니다. 그 증거는 이스라엘의 소유가 증가할 때 마음이 교만해지는 것을 통해서 드러났습니다.
신 8:12-14절을 보면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대로 이스라엘은 소유가 증가할 때 마음이 교만해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없이도 얼마든지 우리 힘으로도 살아갈 수 있다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신 8:17).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사랑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는 소유가 증가되는 것을 더 중요하고 급한 일로 여겨버리는 것입니다. 소유가 증가하고 마음에 여유가 생기면 그때 하나님을 마음껏 사랑하겠노라는 생각을 합니다. 이것이 바로 교만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인간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러한 인간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을 여리고를 멸하심으로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신 8:20절에서도 "여호와께서 너희의 앞에서 멸망시키신 민족들같이 너희도 멸망하리니 이는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소리를 청종치 아니함이니라"고 말씀하지 않습니까?
자신의 소유가 증가하는 것에 더 관심을 가지는 것은 결국 사랑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목사도 역시 교회에 관심을 가지고 교인의 수가 증거 하는 것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사랑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버리고 자신의 소유가 증가되는 것에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랑이 있는 자의 모습은 어떻습니다. 우린 이것을 예수님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오직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예수님의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죽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따르는 신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이 있는 신자는 소유의 증가가 관심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사는 것에 관심을 두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증인되는 것이 자신의 존재이유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곧 주와 함께 하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관심의 대상이 하나님 한 분에게 집중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관심의 분산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즉 세상에 대한 관심을 조금 나누어서 하나님에게도 관심을 두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만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의 대상을 하나님 한분으로 확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은 벗어나야 할 장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멸망하는 여리고 속에서 라합과 그 가족은 살아납니다. 라합과 그 가족이 살아날 수 있는 것은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숨겨 줬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정탐꾼과 안면이 있기 때문도 아니고 그들이 불쌍해서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듣고 오직 하나님만이 내 생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리고가 나를 살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살린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여리고를 포기하고 하나님을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라합을 통해서 증거 하시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만이 멸망 속에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근거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어떤 믿음과 사랑으로 세상을 살고 있습니까? 인간의 믿음과 인간의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믿음, 하나님이 주신 사랑이 여러분의 인생을 간섭하며 인도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사랑은 여러분을 세상을 포기하는 쪽으로 끌어갈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생명임을 깨닫게 하고 하나님만 사랑의 대상으로 확정하고 하나님께만 관심 두며 사는 사람으로 만들어 갈 것입니다. 이러한 흔적이 여러분에게 있는가를 살펴보십시오.
이 흔적이 있다면 여러분은 분명히 자기 소유가 증가하는 것에 대한 관심을 벗어나지 못한 자신에 대해서 미워하며 오직 하나님만 사랑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모습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흔적이 없는 분이라면 보다 나은 삶을 살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고 교회를 찾았을 뿐입니다. 생명도 관심거리가 아니고, 천국도 마음에 있지 않고, 오직 있다면 좀 더 많은 재산을 가지고 더 나은 생활을 누리는 것만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국 멸망으로 끝나게 된다는 것이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래의 지옥이나 천국에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다만 현재의 풍요에 눈을 돌리고 살아갈 뿐입니다. 교회는 교인들이 무엇을 선호하는가를 알고 있기 때문에 사랑보다는 믿음보다는 그리스도의 피보다는 소유가 증가하는 복을 더욱 외치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것이 무너진 여리고를 다시 쌓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저주로 끝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26절에 보면 "여호수아가 그 때에 맹세로 무리를 경계하여 가로되 이 여리고 성을 누구든지 일어나서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 기초를 쌓을 때에 장자를 잃을 것이요 문을 세울 때에 계자를 잃으리라 하였더라"고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여리고 성을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확고한 의지입니다. 여리고를 세우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은혜의 땅은 여리고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여리고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백성들입니다. 믿는 것과 믿지 않는 것의 차이는 언약궤를 앞세워서 요단강을 건너게 한 것에 있습니다. 즉 믿음은 죽었어야 할 우리가 어린양의 피로 인해서 살았다는 것을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여리고는 어린양의 피로 살았다는 것이 없이 자신의 힘으로 사는 세력을 의미합니다. 약속의 땅은 이러한 세력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이러한 세력을 다시 세우는 자는 저주하신다는 것이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을 너무 단편적으로만 생각해 버립니다. 즉 교회와 연관된 종교 행위를 기준으로 해서 자신의 믿음을 확증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잘 믿느냐 못 믿느냐의 차이는 있지만 신자로서 가장 최소한의 행위, 즉 주일 예배라는 의식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예수를 믿는 증거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다니는 사람치고 '나는 예수를 안믿는다'고 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스라엘 쪽이지 여리고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즉 어린양의 피를 믿는 믿음은 필히 자기에 대한 포기로 나타납니다. 나에게 가치 있는 것은 나를 살리신 예수님의 피이지 내가 아니라는 것을 항상 고백하면서 살게 됩니다. 이것이 참된 이스라엘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살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피 외에는 그 어떤 것에도 가치를 두지 않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런 말에 대해서 사람들은 노골적으로 불편한 감정을 드러냅니다. 예수님만 사랑하자, 세상에 가치를 두지 말고 오직 예수님의 피에만 가치를 두고 살자는 이 말에 대해서 불편해 하는 것입니다.
인터넷에 올려져 있는 제 설교를 보고 어떤 목사님이 "목사님의 설교를 보니까 너무 한쪽으로 치우쳐 있습니다"라는 말씀을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답장을 했습니다. "목사님은 저의 글이 너무 한쪽으로 치우친 것 같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말씀하신 그 한쪽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요. 저는 신자에게는 그리스도와 세상, 이 둘의 관계 밖에 없다고 봅니다. 그리스도냐 아니면 세상이냐 이것을 성경이 묻고 있다고 봅니다. 이런 면에서 저는 오직 세상을 벗어나고 그리스도만을 향한 글을 썼다고 생각하는데, 목사님이 너무 한쪽으로 치우친 것 같다는 말씀을 하시니 그 한쪽과 또 다른 한쪽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매우 궁금합니다." 그 목사님은 이러한 저의 물음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아직까지 그 목사님이 말씀한 한쪽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한 것인지 궁금하기만 합니다. 그리스도만 섬기고 그리스도만 사랑하고 그리스도만 높이고 그리스도에게만 가치를 두자는 것이 한쪽으로 치우친 것이라면, 그리스도말고 지향해야 할 또 다른 한쪽이 있다는 것인지 의문스럽기만 합니다.
사실 '한쪽으로 치우쳤다'는 말은 그분에게서만 들은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만 말할 때 많은 분들은 '너무 한쪽에만 치우쳤다'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사실 여러분에게도 이런 불편함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신자가 예수님을 높이고 사랑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예수님을 높이고 사랑하는 삶에 대해서도 얘기해야 할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선교도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구제도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헌금도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주일 성수도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니까 선교하라는 말도 하고, 구제하라, 봉사하라, 전도하라, 헌금하라, 주일을 지켜라는 말도 해야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생각하기로는 한쪽으로 치우쳤다는 것이 믿음만 말하고 행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는 의미인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행위로 증거 되지 않습니다. 여리고가 기독교적인 행위가 없어서 멸망당한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선교, 헌금, 구제, 이러한 행위들이 사랑을 증거 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행위가 사랑을 증거하지 못합니다. 로마서에서 분명히 말하기를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다(롬 3:12)고 선언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행위가 어떻게 사랑을 증거할 수 있습니까? 행위의 여부를 가지고 사랑을 평가해서는 안됩니다. 사랑이 행동하게 하는 것이지 행동이 사랑을 드러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라는 말입니까? 걱정 없이 살아가십시오. 이것이 위를 보고 사는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며 살아가십시오. 내일 죽어도 오늘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것이 세상의 실체를 알고 살아가는 신자입니다.
눅 2장에 보면 시므온이란 사람이 나옵니다. 시므온이 성령에 의해서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 하리라'는 지시를 받습니다. 그렇다면 시므온은 그리스도를 보기를 원했겠습니까 아니면 보기를 두려워했겠습니까? 만약 시므온이 죽는 것을 두려워했다면 그리스도를 보지 않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보지 않는 동안은 자신은 죽지 않는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므온은 성전에서 아기 예수를 만나게 되었을 때 예수를 안고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눅 2:29-32)라고 찬송을 합니다. 아기 예수를 안고 '주여 이제야 평안히 나를 놓아주십니다'라고 말합니다.
시므온은 하나님이 예수님 중심으로 일하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가를 알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다 소용없고 오직 그리스도만 나에게 가장 소용되는 분으로 알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예수를 보게 되자 '이제야 평안히 나를 놓아주신다'는 말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를 사랑하는 자는 걱정 없이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를 사랑함이 선교나 봉사나 구제나 헌금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라'는 말을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간다면 사랑이 여러분을 스스로 움직이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리고가 무너지는 것은 약속의 땅은 언약궤 중심으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아는 사람은 세상이 예수님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 중심으로 세상을 생각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과 여리고의 차이입니다. 그리고 서로 투쟁하게 됩니다. 예수님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상에 동참을 하면 되는데, 자기 중심으로 살아가려고 합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제 갈 길로 갔다'고 합니다.
여리고를 세우지 말라는 것은 내 중심의 세계를 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저주입니다. 신자는 내 중심의 어둠의 생활을 벗어나야 합니다. 행위를 바꾸라는 것이 아니라 내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은 어둠이고 그리스도의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이 빛이며, 이것이 원래 창조한 인간의 모습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원래 창조한 인간의 자리에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사는 것을 증거 하는 증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뭘 어떻게 할까를 생각하지 말고 주님의 나라에 가고 싶다는 소망으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을 벗어난 자의 삶입니다.
라합은 하나님이 다스리는 세계가 곧 생명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지금껏 자신이 몸담고 왔던 삶의 터전까지 포기했던 것입니다. 라합이 하나님을 알게 된 시각으로 바라본 여리고는 죽음이고 멸망이었습니다. 그래서 망설임 없이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숨겨준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라합과 그 가족은 멸망 속에서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여리고를 통해서 세상의 운명을 볼 수 있기 바랍니다. 세상은 남녀노유를 막론하고 우양 하나에 이르기까지 저주와 멸망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에 지나지 않습니다. 세상은 우리가 소망 둘 곳이 아닙니다. 우리의 소망은 오직 그리스도의 피에 있습니다. 무엇이 여러분을 살릴 수 있는 생명이 되는 것인지 다시 한번 깊이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