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강) 유다서 1:1-2 부르심을 입은 자

<본문>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는 부르심을 입은 자 곧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라 긍휼과 평강과 사랑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유다서 1:1-2)

<설교>

진리는 무엇이고 비진리는 무엇입니까? 비진리는 진리의 모양은 갖추고 있으나 진리가 아닌 것을 말합니다. 이처럼 비진리가 진리의 모양을 갖추고 있음으로 말미암아 비진리를 진리로 착각하여 속는 자들이 많음을 생각한다면 오늘 이 시대에 진리가 무엇인가를 바르게 증거하는 것이야 말로 진리를 아는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주어진 사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비진리에 대해 자신감을 갖고 삽니다. 자신은 비진리에 절대 속아 넘어가지 않을 자신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비진리를 너무 쉽게 보는 것입니다. 비진리는 인간의 상식과 생각에 맞는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지극히 타당하고 상식에 맞는 말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반면에 진리는 인간의 상식과 생각에 어긋납니다. 그러므로 항상 비진리로 생각이 기울 수밖에 없는 위험속에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위험 속에서 신자에게 있어야 하는 것은 끊임없이 ‘진리란 무엇인가?’를 물으며 진리를 알아가기를 힘쓰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리가 아닌 것에 대해서는 타협하지 않고 진리만을 말하고자 해야 합니다. 이것이 진리로 부르심을 입은 자의 사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1절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는 부르심을 입은 자 곧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부르심을 입었다는 말을 많이 들으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부르심을 입었다는 것을 사명으로 이해를 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일을 시키시기 위해 부르신 것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러나 부르심을 입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으로 선택한 자를 죄에서 건지심을 의미합니다.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을 찾아 나올 수도 없고, 스스로 죄에서 헤어날 수도 없는 존재이기에 선택과 부르심이라는 하나님의 방법이 동원된 것입니다.

이처럼 진리는 처음부터 인간의 공로와 힘, 능력, 가능성 등등 모든 인간의 것을 차단하고 출발합니다. 즉 진리는 인간에게서 나오는 그 어떤 것도 인정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께 나와서 자신의 것, 즉 성경 읽고, 기도하고, 주일 지키고 헌금하고 수고하고 헌신한 모든 것을 인정해 주시기를 원하지만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보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것을 인정하지 않는 진리를 안다면 그에게는 무엇이 비진리로 보이겠습니까? 당연히 인간의 행위, 공로를 높이는 것입니다. 착한 행동이나 종교적인 열심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복을 받고 상을 받게 된다는 모든 말들이 비진리였음을 분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비진리를 왜 진리로 착각을 할까요? 앞서 말한대로 상식에 맞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착한 사람, 교회일에 열심인 사람이 복을 받고 천국가는 것이 옳다는 것이 상식이기에 이러한 상식과 일치된 비진리가 진리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열심, 행위가 공로가 될 수 있다면 그 열심과 행위로 하나님을 찾고 믿을 수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하나님의 부르심이 필요하단 말입니까? 처음에 하나님을 찾을 때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어야 하고, 다음부터는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입니까? 이처럼 비진리는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 덩어리를 안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 인간은 응답할 수도 없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이 부르심에 응답하게 하시기 위해 믿음을 주신 것이고, 신자는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나오게 되었다는 것이 진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심으로 믿음에 거한 자는 자신의 열심이나 공로 따위에는 눈을 돌리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인간의 공로를 비교하며 하늘의 상급을 말하는 것은 거짓말이며 비진리일 뿐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믿음을 교회 다니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런데 교회 다니는 것이야 우리의 의지로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천국 또한 내 하기에 달렸다는 생각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교회 다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공로를 부인하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공로만을 바라보고 높이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가능성이 부인되는 것이 믿음입니다. 나로서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으며, 내 의지에서는 죄 밖에 나올 것이 없음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만 된다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이 믿음입니다.

유다는 부르심을 입은 자를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입은 자로 설명합니다. 즉 신자는 부르심을 입었다는 것으로 이미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은 자라는 것입니다. 아버지 안에서 사랑은 아버지의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부르심을 입었다는 것만으로 이미 아버지의 충만한 사랑에 있게 된 것입니다. 잘살고 못살고와 상관없이 충족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상식은 하나님을 믿는다면 좀 더 잘살게 되어야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열심히 믿었으면 복을 받아야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야 말로 부르심에 주어진 사랑 자체를 묵살하는 비진리인 것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십자가로 확증되었기에 세상에서의 환경과 형편이 사랑을 판가름하는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랑은 버림받아 마땅한 나를 죄에서 건지셨다는 것으로 충만히 넘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라는 존재가 얼마나 복된 자리로 부름 받은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으면 힘든 형편을 생각하며 사랑을 입었다는 것이 크게 마음에 와닿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부르심을 입은 것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입은 것으로 말합니다. 즉 부르심은 날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일의 중심에는 내가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계실 뿐입니다. 우리는 부르심에서 나의 구원을 생각하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생각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우리의 생각 차이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생각의 차이가 메워진다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고 살아감을 뜻할 것입니다.

왜 그리스도를 위한 부르심입니까? 우리를 천국 보내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증거하는 자로 부르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낮아지심과 죽으심의 은혜를 하나님의 백성을 부르셔서 세상에 증거하고자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르심을 입은 신자답게 산다는 것은 어디서든 어떤 형편에서든 무엇을 하든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하신 은혜를 증거하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무엇을 해야 할까요?’라고 물어야 할 것이 아니라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까요?’라고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신자의 관심은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만을 향해야 합니다. 교회도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럴 때 진리가 무엇인가가 증거될 것입니다. 신자나 신자 아닌 자나 사는 것은 같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무엇을 위해 사느냐는 것입니다. 내 삶이 무엇 때문에 연장되고 있는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왜 날 부르셨는가를 생각하십시오. 위대한 일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리스도의 은혜를 가슴에 두고 살아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