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강) 유다서 1:22-23 긍휼히 여기라

<본문>

어떤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 또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 또 어떤 자를 그 육체로 더럽힌 옷이라도 싫어하여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유다서 1:22-23)

<설교>

본문에 보면 ‘긍휼히 여기라’는 말이 두 번 나옵니다. 이처럼 ‘~하라’라는 말이 있을 때 대개 사람들은 ‘신자가 실천해야 할 덕목’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즉 긍휼히 여기라고 말하니까 긍휼히 여기는 것을 실천해야 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하나의 모순을 안게 되는데 그것은 로마서 3:10-12절에서 선언하는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도 없다’는 말씀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긍휼히 여기라’는 말도 긍휼을 실천해야 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선을 행할 수 없다는 말씀을 먼저 제대로 해석을 한 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먼저 우리에게서 긍휼의 실천이 가능한가부터 생각해야 합니다. 긍휼이란 ‘불쌍히 여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베푸신 긍휼은 죄인된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독생자 예수님을 죽게 하시고 대신 우리를 살리신 것입니다. 아들을 내어 놓으신 긍휼입니다. 이 긍휼을 실천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21절을 보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고 말합니다. 긍휼을 기다리라는 것은 긍휼이 주어지기를 기다리라는 뜻이 아니라 영생에 이르도록 그리스도의 긍휼을 소망하며 살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즉 신자에게는 영원토록 그리스도의 긍휼이 소망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긍휼이 아니고서는 영생에 이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는 것이 됩니다.

긍휼을 소망하며 살아갈 사람은 그리스도의 긍휼만이 자신을 살린다는 것을 아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긍휼이 아니면 안되는 자신을 실체를 보게 될 것이고, 자신의 실체를 보게 되었다면 그리스도의 긍휼을 받을 자격도 없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긍휼에 여김을 받을 자격도 없는 우리에게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이 감히 측량할 수 없는 분량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긍휼로 말미암아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는 것이 됩니다.

긍휼히 여기라는 말은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그리스도의 긍휼을 소망하며 살아가는 신자를 향한 말씀입니다. 아무에게나 긍휼히 여기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긍휼의 관계에 있는 신자에게 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하지만 긍휼의 관계에 있으니까 긍휼을 실천하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긍휼의 관계있다는 것은 긍휼히 여김을 받는 자라는 것을 뜻하는 것이 긍휼히 여길 수 있는 사람이 되었음을 뜻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긍휼히 여기라’는 말씀을 통해서 내가 누구인가를 보게 하기 위함입니다. 내게 주어진 영생에 어떻게 주어진 것인가를 보게 하고 내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기에 생명에 거하게 되었는가를 보게 하는 것입니다.

유다서는 거짓 교사에 대해 말합니다. 그러면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합니까? 거짓교사이기에 원수로 여기고 비판하고 배척해야 합니까? 물론 그들의 생각과 말은 배척하고 받아들이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을 비판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비판의 권세가 우리에게는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비판과 심판은 오직 하나님의 권세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복음을 말하나 참 생명인 진리의 길에서 벗어난 자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거짓 진리에 빠져 잘못된 길을 갑니다. 유다서는 그들을 긍휼히 여기라고 말합니다. 그들을 비판하지 말고 정죄하지 말고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는 것이 유다서의 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그리스도의 긍휼을 소망하는 신자에게 마땅히 있어야 할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의 긍휼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거짓 교사나 우리나 다를 바가 없다는 뜻입니다. 거짓 교사들은 진리를 왜곡하고 다른 예수를 전하지만, 우리는 복음을 말하면서도 복음의 길로 가지를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긍휼로 인해서 영생에 이르는 신분인 것입니다.

이처럼 긍휼로 말미암아 살아간다면, 그에게서 나와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긍휼이라는 것입니다. 비판과 정죄가 아니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고자 하는 마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무조건 용납하고 넘어가고 받아들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23절을 보면 “또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 또 어떤 자를 그 육체로 더럽힌 옷이라도 싫어하여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고 말합니다.

그 육체로 더럽힌 옷이라도 싫어하라는 것은 그들의 악에 대해서는 싫어하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악에 대해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대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긍휼히 여기라는 것이 유다서가 말씀하는 것입니다.

내가 비록 진리를 알았고 복음을 이해한다고 해서 그 복음으로 남을 정죄하고 비판할 권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남을 비판하는 도구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 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의 긍휼이 나를 살렸음을 알게 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따라서 진심으로 복음을 알았고, 복음의 참된 의미를 깨달은 신자에게서는 거짓된 말에 빠진 이웃에 대해 긍휼이 나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들을 불에서 끌어내기 위해 다가가는 것이지 비판하기 위해 다가가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우리를 비판으로 대하셨다면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비판 아래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비판이 아니라 긍휼로 우리를 만나셨습니다. 긍휼이 우리를 영생에 있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긍휼을 아는 자에게서는 긍휼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긍휼이 아니라 비판과 정죄가 나온다면 다시 말하지만 그는 복음에 머무는 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복음을 말하되 예수님의 긍휼을 맛보지 못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긍휼을 맛보고 긍휼을 소망하며 산다면, 긍휼히 여기라는 말씀에 대해 기쁨으로 순종하게 됩니다. 성령이 함께 하심으로 말씀을 순종할 능력에 거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긍휼히 여기라는 말씀은 ‘그래 긍휼을 실천하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긍휼로 영생에 있게 된 내가 이웃을 비판하고 정죄할 자격이 있는가?’를 생각하면서 이웃을 대할 때 긍휼은 자연히 맺어진다는 것입니다.

나와 맞지 않는다고 해서 배척하고 정죄하고 비판하는 것이야 말로 그리스도의 긍휼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우리 역시 악함에서 제외되지 못할 존재가 아니겠습니까? 그런 우리가 지금도 긍휼 때문에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긍휼히 여기지 못하는 자신을 두고 애통해 하면서 이웃을 긍휼히 여기는 자로 살게 해달라는 소원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긍휼이 아니면 안되는 나의 모습에서 이웃을 바라보십시오. 그럴 때 긍휼이 여기라는 말씀이 여러분께 맺어지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