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강) 유다서 1:24-25 하나님께 영광

<본문>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하실 자 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만고 전부터 이제와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유다서 1:24-25)

<설교>

성령의 오심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신자에게만 주어진 은총입니다. 즉 하나님이 택한 백성이라는 증거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와 신자 아닌 자의 구별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성령이 있음으로 있게 되는 현상이 무엇인가를 안다면 신자와 신자 아닌 자의 차이가 무엇인가는 자연히 알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성령이 오심으로 인한 현상이나 변화를 잘못 이해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을 보면 성령으로 난 것을 거듭남이라고 말합니다. 거듭남이란 육이 아니라 영이 새롭게 태어난 것을 의미하는 것인데 대개 보면 거듭났다는 것을 도덕적인 차원에서의 변화로 이해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행동의 변화를 거듭남의 현상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술고래이던 사람이 술을 끊었다거나 골초이던 사람이 담배를 끊고, 포악하던 사람이 온순해지는 등의 것을 성령이 그렇게 만든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앞서 말한 대로 성령은 택한 자에게만 주어진 은총임을 전제로 한다면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거듭남의 현상은 신자가 아닌 사람에게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신자가 아닌 사람, 즉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에게서도 도덕적인 변화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술고래가 술을 끊고 담배를 끊는 것 등은 우리 주변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러한 것을 두고 거듭남의 현상으로, 성령이 함께 하신 증거로 볼 수 있는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사람이 왜 이처럼 자기 변화에 신경을 쓰는 것입니까? 그것은 자신의 변화로 말미암아 인간적 가치의 향상을 꾀하고자 하는 욕망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인간으로 변모해 감으로써 더욱 인간다운 인간이 되어 자신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도덕적인 인간으로 바꾸어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게 하심으로 영광을 받고자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성령을 보내시는 것은, 성령이 아니면 결코 있을 수 없는 것을 자기 백성에게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로 믿는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예수 그리스도만을 자기 인생의 전부로 여기고 살아가는 특이한 인간을 만들기 위해 성령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오셨다는 것은 자신의 죄의 깊이를 보게 되고 애통하는 마음으로 주 예수님의 죽으심을 보게 됨으로 증거됩니다. 따라서 신자 됨은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 자신의 죄를 애통하며 보혈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또 다른 신자 됨의 증표를 첨가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종교적 욕망의 산물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즉 자신의 의를 통하여 신자 됨을 나타냄으로서 결국 자기 자신을 증거하고자 하는 욕망인 것입니다.

신자는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한 확실한 답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즉 신자로서의 정체성을 잃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신자로서의 정체성을 잃게 되면 결국 겉은 신자처럼 보이지만 그 속은 신자와 전혀 상관이 없는, 비신자와 똑같은 내용을 가지고 살아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보면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게 즐거움으로 서게 하실 자 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만고 전부터 이제와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내용은 서신서의 마지막을 보면 대개 등장하는 통상적인 내용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즉 별 뜻이 없이 하는 인사말 정도로 여겨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에 별 뜻이 없는 인사말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인사말 속에 뭔가를 전하고자 하는 내용이 담겨 있는 것이 성경입니다.

본문의 내용을 보면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는 오직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만 있어야 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우리가 차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를 자신이 누리고자 한다면 스스로 신의 위치에 있고자 하는 것과 다를 바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의 특징은 오직 자기에게 모든 관심이 집중되어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고, 권력과 권세를 가짐으로서 타인 위에 군림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살아갑니다. 자신을 그런 존재로 만들어 달라고 신을 찾아 구하기도 합니다. 세상 사람에게 신은 그런 존재가 아닙니까? 자신을 모든 사람보다 뛰어난 존재로 만들어 주기 위해 존재하는 신 말입니다.

그런데 이게 사실 코미디 같은 것인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합니다. 신을 찾는 모든 사람들이 서로 자신을 뛰어난 존재로 만들어 달라고 요구한다면 도대체 신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결국 ‘누구의 신이 더 센가?’를 경쟁하는 경쟁터가 되버리는 것입니까? 만약 이러한 코메디가 교회안에서 자행되고 있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자는 세상 사람과는 다릅니다. 나의 모든 죄를 덮으시고 심판을 받아야 할 자를 심판으로 대하지 않으시고 용서하신, 그리고 그 자리에 대신 하나님의 아들을 세우신 긍휼과 사랑으로 말미암아 새 생명을 주신 하나님을 알기에, 그것만으로 이미 모든 것을 받았음을 알기에 오직 감사함으로 충만한 사람이 신자입니다. 이미 되어졌음을 알기에 어떻게 되고자 하는 욕망자체가 악임을 아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자신이 어떻게 되어지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미 되어진 신자다운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기 위해 하나님을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22,23절을 보면 ‘긍휼히 여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것에 대해 이미 말씀을 드렸지만 사실 내가 누군가를 긍휼히 여긴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는 남을 긍휼히 여길만한 존재가 못된다는 것입니다. 긍휼히 여긴다는 것은 불쌍히 여겨 자비를 베푼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데, 과연 내가 남을 불쌍히 여길 자격이 있는 것입니까?

남을 불쌍히 여길려면 자신은 불쌍히 여김받는 사람과는 다른 처지에 있어야 합니다. 세상적인 기준으로 본다면 가지지 못한 자는 가진 자보다 더 불쌍한 처지에 있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진 자가 가지지 못한 자를 불쌍히 여겨 도와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가지지 못한 자가 자신을 불쌍한 자로 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보실 때 가진 자나 가지지 못한 자나 모두가 멸망의 대상일 뿐입니다. 불쌍한 존재입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 앞에서 불쌍한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에서도 그 누구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나에게 성령이 오심으로 신의 성품에 참여한 자가 되어 새생명에 속한 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긍휼은 내가 베풀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나에게서 나올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나에게 함께 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맺어지는 것이 긍휼입니다. 그러므로 긍휼이 여기라고 말씀할 때 먼저 알아야 할 것은 내가 곧 긍휼히 여김 받아야 할 불쌍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히 아니면 나 역시 멸망의 자식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임을 알고 멸망에 있는 자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저 사람을 긍휼히 여겨야지’라고 한다면, 그것은 성령이 있는 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불쌍한 나를 긍휼히 여기사 새생명에 속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저 사람에게 증거해야지’라고 하는 것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알게 된 신자에게서만 맺어지는 결과인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가 자기 영광을 위해 살고 권력과 권세가 자신의 것이 되기를 원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장차 새 나라에서 흠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된다면 그것은 그날까지 우리를 보호하시고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증거하고 살아가는 것이 신자다운 것이고 성령이 있는 자와 없는 자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령이 있는 자는 오직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증거하는 것에 모든 마음이 집중되기 때문입니다.

영광, 위엄, 권력, 귄세 이 모두는 하나님께만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누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리고 영광과 위엄, 권력과 권세 앞에 있어야 하는 것은 복종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누구든 하나님께 복종할 자로 만나는 것이지 누군가를 다스리는 자로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설사 거짓 선지자라 할지라도 그를 비판하고 욕하고 정죄할 권세는 우리에게 없습니다. 성령의 열매나 신의 성품에 심판, 정죄, 비판이 없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그것들은 하나님의 권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남을 비판하고 정죄할 권세를 신자에게 허락하신 적이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신자는 누구를 대하든 불쌍히 여김받아야 할 자신의 처지를 잊어서는 안됩니다. 십자가에 피흘려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 은혜에 감사하면서 자신의 불쌍한 처지를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은혜가 은혜로 다가오려면 필히 죄가운데서 죽어야 할 자신의 불쌍한 처지에 깊숙이 들어가야 합니다. 그럴 때 긍휼과 자비하심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불쌍함을 보게 된다면 내가 멸시하고 무시해도 될 사람은 아무도 없음을 알 것입니다. 그러므로 긍휼히 여기라는 것은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지키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 앞에 흠없고 즐거움으로 서게 될 자로서 이웃을 대하라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함으로서 ‘나는 맞고 너는 틀리다’ ‘나는 알고 너는 모른다’는 시각으로 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자신이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에서 벗어나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항상 신의 성품에 속한 자로서 어떤 모습이 열매로 맺어지는가를 살피기를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보지 말고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그리스도로 인해 우리가 어떤 복에 거하게 되었는가를 살피십시오. 멸망에 처할 자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되고, 구원의 기쁨을 노래하고 감사할 수 있게 된 그 중심에 누가 어떤 모습으로 서 계시는가를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바로 그 분을 서로에게 소개하고 나누고자 하는 마음으로 만나십시오. 이것이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고, 신의 성품에 참여한 신자에게 있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으로 영광 받으십니다. 주를 시인하고, 주가 나의 전부임을 고백하며 주로 감사하고 살아가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를 돌리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