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우리의 일반으로 얻은 구원을 들어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뜻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저희는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치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유 1:3-4)
<설교>
신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거절 할 수 없는 분명한 삶의 원칙으로 주어지고 있습니다. 즉 신자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말씀 하나하나를 실천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원칙을 따라 살아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이 원칙을 따라 살아감으로 신자다움이 증거되는 것이고 교회다움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삶의 원칙은 무엇이겠습니까? 세상은 테레사 수녀 같은 사람을 칭송합니다. 테레사 수녀가 진정한 신자라고 인정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기준은 세상이 착하다고 여기는 행함에 있습니다. 이것이 곧 복음과 상관이 없는 기준인 것입니다.
복음을 안다 모른다의 기준은 착한 일을 한 것에 있지 않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아는가 모르는가에 그 기준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테레사 수녀 역시 그가 행한 것과는 상관없이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구원받음을 믿는 믿음으로 살았다면 복음을 알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판단하시는 원칙인 것입니다. 이러한 원칙을 세상은 전혀 알 수 없기에 세상이 선한 것으로 인정하는 착함과 선한 양심 등이 기준이 되어서 신자답다, 교회답다는 판단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세상은 하나님의 원칙을 모르기 때문에 세상이 칭송하고 인정한다고 해서 신자다운 것은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원칙에 대해 무지함으로 인해 세상과 같은 기준과 시각을 가지고 교회를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교회가 굳게 지켜야 할 것에 대해서는 소홀히 하면서 예배당이 있고, 많은 교인이 있고, 사회적으로 착하다고 인정하는 많은 일을 하는 것으로 만족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현대 교회의 형편을 돌아보면 많은 교회가 이런 방향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노숙자들에게 밥을 제공하고, 환경운동을 하고, 문화 사업이라는 것에 관심을 둡니다. 자구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기 위해 애쓰는 모습만 보여집니다.
그런 일들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들을 이용하여 교회다움을 증거하려고 하는 것이 잘못임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원칙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생각하는 원칙 아래 들어간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도대체 신자가 무엇과 싸워야 하는 가에 대해서도 모호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3절을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우리의 일반으로 얻은 구원을 들어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뜻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라고 말합니다.
여기 보면 ‘힘써 싸우라’는 말이 있습니다. 제가 자주 말씀을 드렸지만 신자는 싸우는 자입니다. 만약 싸움이 없는 삶이라면 자신의 믿음에 대해 깊이 살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싸움을 위해 필요한 것은 적에 대해 아는 것입니다. 적에 대해 모르면서 ‘싸우자’라는 말은 공허한 말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신자의 적이 누구겠습니까? 부처입니까? 아니면 단군신상입니까? 아니면 사이비 종교의 교주입니까? 이것은 기독교라는 종교가 싸움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지 사실 신자가 싸워야 할 대상은 아닌 것입니다.
4절을 보면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저희는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치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는 말을 합니다.
사도가 힘써 싸우라는 권면을 했던 것은 교회에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어떤 사람인가 하면 경건치 아니한 자고, 하나님의 은혜를 색욕거리로 바꾸고,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가만히 들어왔다는 것은, 누구나 쉽게 적으로 간파할 수 있는 존재로 들어온 것이 아니라 반대로 적이 아닌 모습으로 가장하여 들어왔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결국 신자가 경계해야 할 싸움의 대상은 부처나 단군신상 사이비 종교가 아니라 신자가 미처 싸움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 것에 있음을 주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3절을 보면 ‘일반으로 얻은 구원을 들어 너희에게 편지 하려는 뜻이 간절하던 차에’라는 말을 합니다. 일반으로 얻은 구원은 역시 3절에서 언급하는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와 무관하지 않는 말입니다.
일반으로 얻은 구원은 누구나 다 얻는 구원이라는 말이 아니라 차별이 없는 구원을 뜻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지위, 신분, 행함, 열심 등과 연관이 없는 구원이라는 뜻입니다.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단번에 주셨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말미암아 완벽하게 성취된 구원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피로써 성취된 구원에 다른 것을 개입시킨다면 그것은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라고 말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에 차별을 두는 것, 믿음에 행함을 더하고자 하는 것, 행한 것만큼 상을 받는다는 것, 하나님은 신자의 착한 행실을 보시고 기뻐하신다는 것, 이 모두가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과연 이러한 가르침을 싸움의 대상으로, 즉 적으로 여기고 있습니까? 오히려 지극히 당연한 복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가만히 들어온 사람들로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는 신자가 구원의 진리를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구원의 진리를 아십니까? 아신다면 여러분의 심령에는 믿음의 도가 굳게 세워져 있어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리고 그 도는 여러분으로 하여금 예수님의 피흘림으로 인해서 감사하게 할 것입니다. 믿음의 도는 우리의 행위를 보는 것을 거부합니다. 우리의 행위를 의로 여기는 것을 거부합니다. 이것이 신자에게 세워진 삶의 원칙입니다.
믿음의 도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만 의지하게 할 뿐이지 나를 바라보며 ‘이것을 안하는데 과연 신자인가?’라는 생각에 머물게 하지 않습니다. 신자가 이러한 생각에 빠진다면 그것은 결국 믿음의 도에서 멀어진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의 도를 말한다고 해서 행함은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는 생각 또한 믿음의 도에 있지 않는 생각일 뿐입니다. 믿음의 도를 말하는 것은 행함이 신앙을 판단하는 기준이 아니라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어떤 행함이 보인다 할지라도 그것을 의로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도를 굳게 세우는 것입니다.
4절을 보면 가만히 들어온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로 바꾸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욕심을 채우는 도구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들은 은혜를 자신의 욕심을 위한 것으로 바꾸어 버린 것입니다. 즉 내가 원하는 세상의 것이 풍족히 채워지고, 모든 일이 잘되는 것을 은혜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확연하게 드러나지 않았습니까? 신자는 십자가로 말미암아 이미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를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은혜 타령이나 하고 있다면, 그 사람에게는 십자가가 관심이 아니라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결론은 신자가 힘써 싸워야 하는 것은 교회 밖의 기독교의 적이 아니라 바로 믿음의 도에 바로 서 있지 못하는 여러분 자신인 것입니다. 기쁨과 은혜와 감사의 조건을 세상에서 찾으려고 하는 여러분 자신이 바로 여러분의 적입니다. 자신의 행동을 보며 자신을 판단하는 여러분이 바로 적입니다.
이러한 자신에 대해 힘써 싸우는 것은, 스스로의 악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결단코 구원에 이를 수 없음을 다시 확고히 하시고 예수님의 피흘리심에 감사하는 것이 신자의 싸움입니다. 날마다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는 것, 이것이 싸움인 것입니다. 세상은 교회를 지키고, 교단을 지키고, 자신의 지위를 지키기 위한 싸움에 열중하고 있지만, 이러한 현실에서 여러분은 여러분이 알고 있는 구원의 도리, 믿음의 도를 위해 힘써 싸우며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이 싸움을 위해 날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기를 쉬지 않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