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강) 유다서 1:5-8 멸망의 모습

<본문>

너희가 본래 범사를 알았으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고자 하노라 주께서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시고 후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멸하셨으며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 그러한데 꿈꾸는 이 사람들도 그와 같이 육체를 더럽히며 권위를 업신여기며 영광을 훼방하는도다(유 1:5-8)

<설교>

신자라면 그 속에 예수님을 두고 살아갈 것입니다. 예수님을 두고 산다는 것은, 예수님이 베푸신 은혜와 사랑을 속에 두고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아무리 겉을 신자답게 포장을 해도 그 속에 담겨 있는 것이 십자가의 은혜가 아니라면 신자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치 소금의 가치는 하얀색의 결정체, 즉 겉모습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짠 맛에 있는 것과 같은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금이 짠 맛을 잃어버리면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없는 것처럼 신자가 주님의 은혜를 그 속에 두고 살아가지 않는다면 신자의 가치는 상실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신자를 부르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선포하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과연 내가 나의 속에 무엇을 담고 살아가고 있는가를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의 은혜를 알고 있다는 것으로 지나치지 않고 진심으로 은혜를 아는 자로 살아가는가를 살펴야 한다는 것입니다.

5절에 보면 “너희가 본래 범사를 알았으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고자 하노라 주께서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시고 후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멸하셨으며”라고 말합니다.

사도의 서신을 받는 사람들은 믿음의 도에 대해 무지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생각나게 하고자 하노라’는 내용을 보면 이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믿음의 내용대로 살아가지 못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알고 있는 내용을 다시 생각나게 하기 위해 이 서신을 쓴다는 것입니다.

사도가 다시 생각나게 하고자 하는 것은 세가지입니다. 그것이 5,6,7절에 언급되고 있습니다. 5절은 “주께서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시고 후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멸하셨으며”라는 것이고, 6절은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라는 것이고, 7절은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는 것입니다.

이 세가지의 공통점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는 것에 있습니다. 그리고 7절의 마지막에 ‘거울이 되었느니라’는 말을 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심판을 말함으로써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사도는 심판을 받은 이들을 말함으로써 ‘너희는 어떠하냐?“라는 물음을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누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느냐는 것은 우리 멋대로 상상할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자를 보면서 그들이 무엇 때문에 심판을 받았는가를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심판을 받은 그 모습 그대로 우리가 머문다면 우리 역시 심판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잊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들은 우리로 하여금 믿음의 도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시고 항상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는 자가 되게 하기 위해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먼저 애굽에서 구원하시고 후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멸하셨다고 하는데, 과연 무엇을 믿지 않았다는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이 믿지 않았다는 것은 가나안 땅 입구인 가데스바네아에서 가나안 땅을 정탐한 사람들의 말을 믿고 가나안에 들어가기를 두려워한 사건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온 것은 하나님의 능력의 결과이며 은혜였습니다. 또한 홍해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직접 체험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을 가나안 거민과 비교를 한 것입니다. 자신들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하심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힘이 그들에게 미치지 못한다는 생각에 빠진 것입니다. 애굽에서 인도하신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모든 것을 성취하실 것임을 믿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이 심판의 이유입니다.

두 번째는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를 흑암에 가둔 것입니다. 천사의 지위는 하나님을 수종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처소는 하나님이 계신 하늘나라입니다. 그런 그들이 지위를 지키지 않고 처소를 떠났다는 것은 하나님께 복종하며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사는 것에서 벗어난 것을 뜻합니다. 즉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삶으로 나아갔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결국 흑암에 갇힐 자의 모습은 내가 나의 왕이 되어 살아가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 뜻에 복종하기를 원하며 사는 것을 말합니다.

세 번째는 소돔과 고모라가 간음을 행하고 다른 색을 따라가다가 멸망을 당한 얘기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간음이란 도덕적으로 문란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사랑해야 할 남편을 두고 다른 남자를 사랑한 것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즉 사랑해야 할 한분,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랑의 대상을 속에 두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믿음은 예수님만 의지하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예수님 외에 사랑의 대상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과연 이러한 믿음의 길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 외에 다른 길에는 심판이 있을 뿐입니다. 우린 이것을 잘 안다고 하면서도 정작 삶은 항상 다른 길을 부지런히 걸어가는 것일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 하기 위해 성경이 있는 것입니다. 잘 안다고 여겼던 우리가 정작 다른 길을 걸어가는 것이 아닌가를 살피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신자는 끊임없이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내가 고백하는 말하는 그 내용들이 나의 삶에서 나타나고 있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8절을 보면 “그러한데 꿈꾸는 이 사람들도 그와 같이 육체를 더럽히며 권위를 업신여기며 영광을 훼방하는도다”라고 말합니다. 이 사람들은 가만히 들어온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삶이나 말하는 것은 앞에서 언급한 멸망당한 자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신자의 속에 예수님의 은혜가 있다면 그에게서는 다만 은혜가 나오게 될 것입니다. 은혜를 자랑하고 높이는 자로 사는 것이야 말로 은혜로 사는 몸을 더럽히지 않는 것이고 권위에 복종하는 것이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없이는 안된다는 사람들은 다른 것은 의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알기에 세상의 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는 자로 살아가게 됩니다. 때문에 신자에게는 ‘기도 응답 받는 비결’ 따위의 것이 필요치 않습니다. 날마다 은혜 안에 있는데 무슨 비결이 필요하겠습니까? 이것이 생명이 있는 신자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