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강) 유다서 1:11 진리의 길

<본문>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좇아 멸망을 받았도다(유다서 1:11)

<설교>

종교와 기독교의 다른 점은, 종교는 인간 스스로의 노력과 의지로 신을 향해 나아가고 진리를 실천함으로 구원에 이르는 것이지만 기독교는 반대로 진리를 향한 인간의 노력과 힘씀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를 종교와 같이 인간이 힘쓰고 노력하여 진리를 실천함으로써 복을 받고 구원에 이른다고 여김으로써 종교와의 차이가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는 같다’라는 말이 끊임없이 나도는 것입니다.

종교는 인간이 신을 찾아가지만 기독교는 신이 인간을 찾아오심을 말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시작인데 시작부터가 종교와 비슷하지도 않고 전혀 다른 것입니다.

기독교의 진리의 중심 사상을 다시 말씀 드리자면, 기독교는 인간이 하나님을 찾고 진리를 깨닫기 위해 도를 닦고 노력을 하고, 신비한 경험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죄악의 길에서 하나님을 부인하며 내 힘만 믿고 살면서 멸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고난 받으시는 종으로 모습으로 죄인인 우리를 찾아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란 내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아시고 나를 찾아오셨음을 믿는 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교인과 다른 것입니다.

종교인은 자신의 정성과 노력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들어야 하고 하나님을 붙들어야 하지만, 신자는 내가 하나님을 찾지도 않았는데 하나님이 나를 찾아오시고 나를 부르셨으며 그분께서 어떤 순간에도 나를 놓지 않고 붙들고 계시며 그 능력으로 인하여 내가 예수님에게로 나아갈 수 있으며 이것이야 말로 절대 불변의 영원한 진리임을 확고하게 믿는 사람인 것입니다.

여러분께 필요한 것은 기독교가 무엇이고 신자가 어떤 사람인가를 성경을 근거하여 제대로 아는 것입니다. 세상이 신자에 대해 착각하는 것처럼 신자를 진리를 실천하고 양심 바르고 착하게 살아가야 할 사람으로 여긴다면 진리의 참된 길을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보면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좇아 멸망을 받았도다”(11절)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가인과 발람과 고라가 간 길의 공통점은 화가 있을 길이라는 것입니다. 즉 그 길의 마지막은 멸망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세 사람의 길이 어떤 것인가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먼저 가인의 길이 어떤 길인가를 살펴보겠습니다. 가인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이 살인입니다. 그러면 가인의 길은 살인자의 길이고, 그 길을 가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살인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이것은 드러난 행위만을 보고 판단하는 단편적 시각일 뿐입니다.

가인이 살인을 한 것은 죄의 열매입니다. 즉 살인이 죄가 아니라 살인을 하게 한 죄가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가인의 죄는 자신의 행위를 바라본 것입니다. 아벨과 똑같이 제사를 드렸는데 아벨의 것만 받으시는 것에서 자신의 행위가 무시됨을 생각하고 분노한 것입니다.

가인은 제사하고 바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자신의 행위를 의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가인의 길은 자신의 행위를 바라보고 살아가는 길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행위를 가치 있는 것으로 높이는 길입니다. 행위 자체를 신앙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런 길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행위를 근거로 해서 복을 받고자 합니다. 이것이 가인의 길입니다.

두 번째로 발람의 길이 어떤 것이지 살펴보겠습니다. 모압 왕 발락이 발람에게 재물을 주며 이스라엘을 저주해 달라고 요청한 일에 대해서는 다 아실 것입니다. 발람은 이방 선지자인데 하나님을 알고 있던 자로서 발락의 요구에 대해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그때 여호와께서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이스라엘은 복 받은 자니 저주하지 말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발락이 포기하지 않고 많은 재물을 안기며 이스라엘을 저주해 줄 것을 계속 요청합니다. 그런데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발람이 또 다시 하나님께 묻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할까요? 하나님의 말씀은 불변입니다. 그런데도 또 다시 묻는다는 것은 결국 이스라엘을 저주하라는 말씀을 기대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즉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눈앞의 재물이 더 크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떡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발람의 어그러진 길입니다.

세 번째로 고라의 패역한 길은 무엇일까요? 고라는 지도자의 위치에 있던 모세에게 반기를 든 사람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당을 지어 모세를 비방했던 것입니다. 고라의 이같은 행위를 패역이라고 하는 것은 모세 위에 계신 하나님을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즉 모세를 세워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권세를 보지 않고 모세만을 바라보기에 ‘나도 너보다 못한 것이 없는데 너만 지도자 노릇을 하느냐?’라는 불만이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고 사람만이 보이는 이것이 패역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멸망의 길인 이들의 길을 가지 말아야 할까요? 그러면 여러분은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 이들의 길을 가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까? 가인의 길을 가지 않는 것이 단순히 살인을 하지 않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아니 지금 그 길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발람의 길이 뇌물을 받고 남을 저주하는 것이라면 역시 우리들의 의지와 노력으로 그 길을 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고라의 길이 지도자에게 반기를 든 것이라면 그 또한 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행위를 바라보는 결과입니다. 그래서 그들처럼 행동하지 않는 것이 그들의 길을 가지 않은 것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길은 행위 문제가 아니라 죄 아래 있게 된 인간의 본성 문제입니다. 본성의 문제는 우리들의 의지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지 않습니까?

결론은 가인과 발람과 고라의 길은 우리의 힘으로 피하거나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아니란 것입니다. 우리 역시 그들이 갔던 그 길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말하기 위해 본문이 있는 것입니까? 그들처럼 행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마지막이었던 멸망에서 우리의 마지막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지막 역시 그들과 다를 바 없음을 알 때 나에게는 구원의 희망이라고는 존재하지 않음을 발견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멸망에서 나를 건져주시는 구원의 손길을 바라보게 됩니다. 나의 마지막이 멸망일 수밖에 없음을 알게 될 때 예수님이 나를 멸망의 자리에서 건지시기 위해 오셨다는 소식이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 참으로 기이한 일임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인의 길, 발람의 길, 고라의 길을 가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의 멸망의 원인은 아벨을 죽인 것이 아니고, 발락의 재물을 탐낸 것도 아니고, 모세에게 불평을 했다는 것도 아닙니다. 그들의 멸망은 자신의 멸망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보지 않은 것에 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가인과 발람과 고라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가인과 발람과 고라의 길을 가지 않는다는 것은, 그들처럼 행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내가 곧 멸망의 길을 간 그들과 다를 바 없는 길에 있으며 이 길에서 나를 구원하실 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음을 깊이 깨닫고 예수님의 오심에 감사하는 자로 살아가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종교가 다른 점은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의 종교는 열심히 수양을 쌓아서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는 것이 멸망의 길을 가지 않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진리는 인간이 달려가고 있는 멸망의 길을 바라보게 함으로써 생명에 이를 수 없는 멸망의 자식에 불과한 내가 어떻게 생명에 이르게 되었는가를 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종교와 기독교의 다른 점입니다.

진리의 길은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신앙을 인정받는 길이 아니라 멸망의 자리에 있던 악한 나를 찾아오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격하고 감사하는 길입니다.

신자는 이 길을 함께 걸어가는 형제이기 때문에 자연 형제가 모인 자리에서는 ‘했다 안했다’라는 말이 나오지 않게 되는 것이고, 자랑과 비교도 보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모습입니다. 신자는 다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너무 놀랍지 않은가?’라는 마음으로 서로 교통하는 관계인 것입니다.

가인과 발람과 고라의 길에 있는 여러분의 본질을 바라보시고 피흘리심으로 우리를 건져주신 예수님의 은혜만을 마음껏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은혜가 너무 크고 귀해서 세상에서 힘든 환경에 있다든가 눈물이 흐를 수밖에 없는 형편에 처해진다고 해도 감사가 있게 되는 참으로 기이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