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강) 유다서 1:12-13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것

<본문>

저희는 기탄 없이 너희와 함께 먹으니 너희 애찬의 암초요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요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이요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요 자기의 수치의 거품을 뿜는 바다의 거친 물결이요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에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이라(유다서 1:12-13)

<설교>

히브리서 11:1절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말씀한 대로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고 신뢰하는 자로 살게 하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결국 믿음이 아니라면 우린 모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신뢰하지 않을 사람들이고 오직 보이는 것만을 신뢰하며 확신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보지도 못하고 보이지도 않는 것을 신뢰할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신비스런 것입니다. 이상한 기적을 일으키는 것이 신비스런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이성이나 상식, 그리고 과학적으로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것들이 믿어지기에 참으로 신비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다만 예수님을 증거 하면 되는 것입니다. 즉 뭔가 달리 보여줘야 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믿으면 되는 것이지 뭔가 보여줘서 예수를 믿게 하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믿지 않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은 뭔가를 보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까? 물론 어떤 일을 체험하거나 도덕적으로 훌륭한 누군가 때문에 교회를 찾게 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십자가의 피의 은혜를 믿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피의 은혜를 믿게 되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자신이 부족하다고 해서 낙심할 이유가 없습니다. 내가 부족하든 잘났든 상관없이 믿음이 하나님의 백성을 붙들어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보여줌으로써 예수를 믿게 하려고 애를 쓴다면 다시 말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지 않는 것이고, 믿음의 역사 또한 믿지 않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진리는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보이는 것을 신뢰하고 의지하게 하는 것이야 말로 거짓된 것이고 사단의 활동임을 부인할 수 없지 않습니까?

십계명에서 2계명을 보면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형상을 만들고 거기에 절하고 섬기는 것이 곧 우상이라는 것입니다. 형상을 말하면 쉽게 부처나 마리아 상, 단군 신상을 떠올리겠지만 그런 것만이 형상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하는 그 모든 것이 우상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믿음을 보이는 것을 얻기 위한 것으로 전락시키는 것이야 말로 거짓 교사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진리는 신자를 보이지 않는 세계로 인도함에도 불구하고 진리가 마치 보이는 세계의 것을 약속하고 보장하고 있는 것처럼 선전하는 것이야 말로 거짓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거짓된 말을 진리인 것처럼 말한다면 그들이 곧 거짓 교사인 것입니다.

본문은 이러한 거짓교사를 표현하여 말하는 내용입니다. 12-13절을 보면 “저희는 기탄없이 너희와 함께 먹으니 너희 애찬의 암초요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요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이요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요 자기의 수치의 거품을 뿜는 바다의 거친 물결이요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에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이라”고 말합니다.

믿음을 보이는 것으로 증거하고자 하는 그들은 애찬의 암초입니다. 애찬이란 성만찬을 말하는 것인데 즉 거짓교사들은 성만찬의 참된 의미를 무너뜨리는 암초와 같다는 뜻입니다. 성만찬의 의미는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의 은혜 안에서 모두가 형제라는 것입니다. 은혜 안에서라는 것은 구별과 비교가 없는 세계를 뜻합니다. 아무리 잘난 사람이라 할지라도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는 존재이기에 은혜 안에서는 자신의 잘남을 드러내 수 없는 것입니다. 죄인이라는 동일한 신분으로 만나는 것이 은혜 안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보이지 않는 것을 신뢰하는 믿음의 세계입니다.

그런데 보이는 것을 신뢰하는 세계는 보이는 것으로 사람을 차별하게 됩니다. 성경을 많이 읽고 적게 읽은 것으로 믿음을 차별하고, 헌금을 많이 하고 적게 하는 것으로 차별하고, 봉사로 차별합니다. 이것이 한 몸의 관계를 무너뜨리는 암초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한 몸의 관계를 무너뜨리는 암초를 제거하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보이는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 보이지 않는 새로운 세계로 인도하시기 위해 오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피 흘리심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계만을 높여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믿음 앞에서는 예배당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봉사나 수고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다만 예수님의 피만 귀할 뿐입니다. 이것을 믿는 믿음의 세계가 곧 교회입니다.

또한 거짓 교사는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입니다. 참된 목자라면 양에게 모든 관심을 둔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양을 위해서는 자기 목숨도 버리는 것이 목자입니다. 그런데 거짓 목자는 자신의 몸을 위해 양을 이용합니다. 그러면 참된 목사가 누구이겠습니까? 복음만 전하는 목사일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목사가 복음만 전한다고 해서 양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릴 인간이 못됩니다.

참된 목자는 예수님뿐입니다. 따라서 진리를 아는 목사라면 목사도 바라보지 말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고 믿으라고 전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 앞에 서 있는 목사가 할 말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거짓 교사는 교인들로 하여금 목사를 바라보고 목사를 높일 것을 말합니다. 목사를 예수님의 대리인인 것처럼 선전하며 목사에게 잘하는 것이 예수님께 잘하는 것이고 복 받는 길이라는 사기를 거리낌 없이 행하는 것입니다.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이라는 것은, 물이 귀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구름을 볼 때 기대하는 것은 물인데 정작 기대하는 물을 주지 못하고 지나가 버리는 구름과 같다는 것입니다. 즉 헛된 소망만 가지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보이는 것을 소망으로 약속으로 복으로 선전하는 거짓 교사들의 말은, 사람들로 하여금 헛된 소망을 가지게 할 뿐입니다. 죄인된 인간을 살리는 참된 진리를 담은 듯 보이지만 사실 진리가 없는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 같은 것입니다. 오직 진리만이 생명을 담아 공급할 뿐입니다.

거짓 교사들은 인간의 행함을 복과 연결하여 말하지만 사실 복은 인간의 행함과 연결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의에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행함이 선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의의 행함만이 선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행함을 믿는 것이 곧 복에 거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행하면 복을 받는다고 말하는 것이야 말로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 같은 것입니다.

열매 없는 가을나무라고 말하는 것은, 가을 나무의 가치는 열매에 있는데 열매가 없다면 아무 쓸모없는 나무일뿐이라는 것입니다. 열매가 없는 이유는 뿌리까지 뽑혀 죽은 나무이기 때문입니다. 죽은 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죽은 나무를 향해서 열매를 맺으라고 소리치는 것이 거짓 교사들입니다.

거짓 교사들은 죽음의 의미를 모릅니다. 뿌리까지 뽑혀 죽어있는 자신의 본질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죽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아무런 열매를 맺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다그치는 것입니다. 인간의 열심이 얼마든지 열매를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열매는 예수 안에 있음으로 자연히 맺어지는 것입니다. 그것도 우리의 수고와 노력이 아니라 믿음에 의해 맺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예수님이 나의 생명이며, 예수님 없이는 나는 죽은 존재일 뿐임을 깊이 자각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것을 행하면 예수님이 기뻐하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은 예수님에게서 떨어져 나온 독립된 객체로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수고와 열심을 바라보는 것이야 말로 열매 없는 가을나무일 뿐입니다.

그리고 바다의 거친 물결이라는 것은, 거짓 교사에게서 나올 것은 쓰레기와 같은 더러움뿐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다의 거친 물결은 진흙과 더러운 것만을 몰고 다닙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아닌 인간을 바라보고 있는 거짓된 자에게서 나올 것은, 그 말이 아무리 그럴듯해 보인다고 해도 결국 더러운 것이고 쓰레기 같은 것일 뿐입니다. 믿음 없는 인간에게서 나올 것이 모두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 있는 신자에게서 나올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나에게서 나올 것은 모두 악한 것뿐이라는 고백입니다. 그런데 믿음 없는 사람에게서는 자신의 악함을 고백하는 말이 아니라, 반대로 자기 의로움을 자랑하는 말만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캄캄한 흑암에 돌아갈 별이라는 것은, 결국 심판으로 끝나는 것이 그들의 운명임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진리는 우리에게 눈에 보이는 것을 약속한 적이 없습니다. 또한 눈에 보이는 것으로 역사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 이유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눈에 보이는 것들의 형통에 두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베푸시는 사랑과 은총과 권능의 목표는 바로 하늘의 생명에 있는 것이지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을 풍요롭게 해주는데 있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채우시고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시키기를 원하십니다. 그리스도안의 인간으로 살아가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이에 비해 사단은 거짓의 아비이기에 눈에 보이는 현실이 삶의 전부인양 착각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만 치우쳐 살게 하는 것입니다.

거짓교사는 힘들고 어려울 때 믿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해결해 주신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믿음을 눈에 보이는 것을 위한 것으로 전락시키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은 병이 나고, 사업이 실패 하고, 설사 사고로 죽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완전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은 결코 손상당하지 않음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 상관없이 하나님의 선하심만 의지하고 날마다 어떤 환경에서든 그 선하심에 반응하며 살아가는 이것이 진리 아래 있는 자로서 보이지 않는 것을 소망하며 사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