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강) 유다서 1:14-16 에녹의 예언

<본문>

아담의 칠 세 손 에녹이 사람들에게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치 않은 자의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일과 또 경건치 않은 죄인의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말을 인하여 저희를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이 사람들은 원망하는 자며 불만을 토하는 자며 그 정욕대로 행하는 자라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내며 이를 위하여 아첨하느니라(유다서 1:14-16)

<설교>

인생의 끝은 우리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 결정되어질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끝이라고 하실 때까지 우리의 인생에 끝은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비록 실패하여 모든 인생이 다 끝난 것처럼 여겨진다고 해도 하나님은 그 순간에도 여전히 일하고 계시기 때문에 끝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잊지 않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일하심이 한순간도 중지됨이 없음을 안다면 의심이나 흔들림에서도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일하심이 나에게서 떠난 적이 없음을 알 때 성경의 말씀 하나하나는 현실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11절에 나오는 가인, 발람, 고라의 길은 그 끝이 멸망이었습니다. 이들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여러분께 그들의 길의 끝이 무엇인가를 말씀하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살아 일하심을 믿으며, 성경 말씀을 현실로 받아들인다면 이들의 길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약 그들이 어떤 길로 가다가 어떤 끝을 맞이했든 나와는 상관이 없다는 식으로 대한다면 그것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신자의 모습은 아닐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이 끝내는 끝이 어떤 것인가를 외면해서는 안됩니다. 만약 끝을 외면하게 되면 결국 지금이라고 하는 현실이 관심의 전부가 될 것이고, 따라서 하나님을 찾는 것도 지금의 현실을 위한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지금의 현재를 위한 하나님, 이것이야 말로 인간이 원하는 하나님이고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 낸 우상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지금의 현재를 보장하시는 분으로 계시는 것이 아니라 끝 날에 우리의 끝을 보장하시는 분으로 계십니다. 그래서 신자는 끝을 바라보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누구의 끝이 어떠했는가를 살피면서 그 길에 대해 마음을 두게 되는 것입니다.

거짓 교사는 끝을 말하지 않고 현재를 말합니다. 끝이야 어찌 됐든 현재만 잘되면 되는 것으로 말합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끝이라는 것은, 멀리 있는 막연한 것일 뿐이고 아예 무시한 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가인과 발람과 고라의 끝에 대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길이 어떤 길이었는가에 대해서도 들었습니다. 따라서 신자라면 그들의 길이 어떤 것인가를 살피면서 그들의 길을 벗어나 예수님이 가신 길을 좇기를 소원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런 열망과 소원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의 형편은 가인이 나쁘다고 하면서 그 길을 가고 있고, 발람, 고라가 나쁘다고 하면서 그 길을 가고 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가룟유다가 나쁘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가룟유다의 길을 너무 쉽게 아무렇지 않게 가고 있는 것이 우리가 아닙니까?

물론 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알면서도 그 길을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본성에 이끌리는 것이 가룟유다의 길이고 가인, 발람, 고라의 길이고 악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의지와 열심, 각오를 가지고는 가기를 거부할 수 있는 길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의 능력으로 거부할 수 없는 길이라면, 가인과 발람, 고라의 길을 가지 말라고 말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아무리 말해봐야 실천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 끝이 멸망인 가인, 발람, 고라의 길을 말함으로써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그 끝이 멸망인 죄의 길에 있는 우리 자신을 보자는 것입니다. 가룟유다의 길에 있는 우리 자신을 보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의 길에 서 있는 자신을 보면서, 그 길에서 스스로 헤어날 수 없는 무능력한 처지를 깊이 통감하며 나를 건져줄 구원의 손길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이 신앙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는 길을 가고 있다고 여길 것입니다. 문제가 있다고 해봐야 소위 ‘게으름’이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비록 열심은 부족할지 몰라도 적어도 가인의 길, 발람의 길, 고라의 길은 가지 않는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끝이 멸망인 그들의 길을 가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 성경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앞서 말한 대로 내가 가고 있는 길의 실상을 깨닫고 멸망에서 나를 건져줄 구원의 손길을 소망하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멸망의 길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고백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자라면 분명 멸망의 길에 대해 선포해야 할 것이고, 멸망의 길에서 구세주를 바라보고 소망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멸망의 끝에 대해서는 회피한 채 다만 세상에서의 복과 그럴듯한 신자다운 삶에 대해서만 말한다면 그는 진리를 벗어난 거짓된 자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14절을 보면 “아담의 칠세 손 에녹이 사람들에게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라고 말합니다. 에녹이 사람들에 예언한 것을 말하는데, 예언의 내용은 주께서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다는 것입니다. 즉 에녹의 예언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경고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유다가 에녹의 예언을 인용하는 것은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음을 언급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왜 굳이 에녹의 예언을 인용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에녹의 예언이 사실이라는 것이 홍수 심판이라는 현실로 증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에녹의 예언을 인용하여 심판을 얘기하는 것은 세상을 향한 심판은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는 것이 아니라 분명 사실로 드러날 것임을 언급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즉 심판은 우리에게는 분명한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심판이 우리의 현실이라면 삶의 모든 것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기준이 되어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해석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15절을 보면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치 않은 자의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일과 또 경건치 않은 죄인의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말을 인하여 저희를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고 말합니다.

심판에 대한 예언은,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시니 정신 차려서 심판을 대비하고 살아가라는 의도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심판을 대비하여 심판에서 살아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심판에 대해 예언 하는 것을 세상을 정죄하여 누구도 심판에서 예외가 될 수 없으며 세상의 현실이 어떠한가를 바르게 인식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누구도 죄 없는 자는 없으며, 심판에서 제외될 사람도 없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결코 예외일 수 없습니다. 사람은 항상 자신에 대해 큰 착각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것은 ‘이만하면 별 문제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예수님을 믿으니 나는 심판과는 상관이 없다’는 착각을 가지고 삽니다. 과연 그럴까요?

유다는 경건치 않은 자가 행한 경건치 않은 일, 그리고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말을 인해 저희를 정죄하려 하심이라는 말을 합니다. 여러분은 과연 여기에 해당이 안된다고 생각합니까?

16절을 보겠습니다. “이 사람들은 원망하는 자며 불만을 토하는 자며 그 정욕대로 행하는 자라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내며 이를 위하여 아첨하느니라” 여기서 말한 이 사람들은 15절에서 말한 정죄함을 받은 경건치 않은 자들을 일컫습니다.

따라서 경건치 않은 자들의 경건치 않은 말이나 행위, 그리고 주께 거스려 한 강퍅한 말이라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원망하는 것이고, 불만을 토하고 정욕대로 행하고 자랑하는 말을 내고 아첨하는 것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가 이러한 경건치 않음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고 보십니까?

여러분에게 원망이 없고 불만이 없고, 정욕대로 행하는 것이 없고 자랑과 아첨이 없습니까? 이 모두는 너무 자연스럽게 우리에게서 터져 나오는 모습들이지 않습니까? 결국 에녹의 예언은 그 시대의 경건치 않은 사람들을 정죄할 뿐만 아니라 오늘 경건치 않은 우리 자신을 정죄하는 말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자들임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에녹의 예언은 분명 현실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남겨진 하나님의 심판 역시 때가 되면 현실로 이루질 것이 분명한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 앞에서 도대체 우린 무엇을 해야 하는 것입니까? 심판을 대비해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를 믿어야 합니까? 예수를 믿으면 심판을 받지 않고 구원을 받는다는 생각들을 많이 하지만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무작정 심판에서 제외되는 것이 아닙니다. 심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심판을 미리 받은 자가 있을 뿐입니다.

애굽의 장자 재앙에서 이스라엘이 살아난 것은, 어린양의 피가 그들에게 부적과 같은 효능을 발휘에서 죽음의 천사가 이스라엘의 장자를 죽이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죽음의 천사는 어린양의 피가 발린 것을 보고 그 집이 이미 죽은 것으로 간주하고 넘어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받으신 죄로 인한 심판 아래서 내가 죽어야 할 존재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살겠지’가 아니라 ‘내가 죽어야 할 죽음 예수님이 대신 하셨습니다’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받으신 심판을 자신의 심판으로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이스라엘이 어린양의 피를 바른 것과 같은 것이고,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에 이미 거한 것이기에 마지막 때의 심판에서 제외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심판의 말씀이 우리를 정죄하는 것은, 우리를 죄있다 선언하심으로써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고 예수님이 담당하신 심판이 바로 내가 받아야 할 몫임을 깊이 자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신자는 예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가를 알 수 있는 것이고,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하심이 얼마나 깊고 넓은 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짓 선지자는 하나님의 정죄를 무시해 버립니다. 그리고 열심히 하면 복을 받게 될 것만을 가르칠 뿐입니다. 복이 아니라 죄에 붙들려 있는 인간의 실상을 가려 버림으로써 십자가의 은혜조차 가려버리는 것이 거짓된 자들의 실체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정죄를 받을 수밖에 없는 악한 자입니다. 우리가 곧 경건치 않은 자이고 강퍅한 말을 하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우리를 죄에서 건져내실 분은 그리스도뿐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가 없는 자신의 실상과 그 끝이 어떠함을 아는 신자는 그 마음이 자연히 그리스도를 향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전부일 뿐입니다.

우리는 벌거벗은 자들입니다. 복음은 우리의 벌거벗음을 드러내는 기능이 있습니다. 그런데 거짓된 자들의 복음을 가장한 말은 벌거벗음을 오히려 가리는 말만 할 뿐입니다.

말씀으로 여러분의 실상에 대해 바로 파악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손길이 아니면 멸망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보시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소망하는 자로 살아가기 바랍니다. 이것이 최고의 인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