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강) 유다서 1:17-19 분별

<본문>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의 미리 한 말을 기억하라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마지막 때에 자기의 경건치 않은 정욕대로 행하며 기롱하는 자들이 있으리라 하였나니 이 사람들은 당을 짓는 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은 없는 자니라(유다서 1:17-19)

<설교>

흔히 얘기하는 것처럼 교회가 잘 되지 않을 때 사람이 애타할까요 하나님이 애타할까요? 성경을 보면 교회가 잘 되지 않아서 하나님이 애타하신다는 내용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로 인해서 사람이 애타하는 것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교회를 향한 인간의 욕망이 그 이유라고 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신자가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산다면 문제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어떤 환경이든 되어지는 일에서 예수님으로 감사하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보지 않기에 자신의 소원이 피어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원대로 되어지지 않은 환경으로 인해 애타하고 근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종교는 인간의 근심과 걱정을 신의 힘을 빌어 해결해주는 기능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 종교를 믿으라 그러면 편안하고 행복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는 것이 종교가 추구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교회는 인간이 세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것이라고들 말합니다. 하나님이 세우셨다면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있기에 교회를 세우셨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러면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교회의 부흥 발전이 포함되어 있을까요? 교회가 부흥 발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계획이라면 모든 교회는 필연코 부흥하고 발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며 계획인데 성취되어지는 것이 옳지 않습니까?

혹 인간이 무능하여 교회를 부흥시키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능력을 동원해서라도 교회를 잘되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뜻이 드러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아실 것입니다. 결론은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의 뜻에는 교회의 부흥과 발전이라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욕망일 뿐이고, 인간의 욕망을 옳은 것으로 정당화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용한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교회의 중요성은 진리에 있습니다. 진리를 증거 하는 것, 이것이야 말로 교회의 전부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리가 교회의 전부가 아닐 때 결국 진리 아닌 것에 관심을 두게 되는 것이고, 따라서 교회는 진리가 아닌 것을 진리로 위장하여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거짓된 것으로 말합니다.

18-19절을 보면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마지막 때에 자기의 경건치 않은 정욕대로 행하며 기롱하는 자들이 있으리라 하였나니 이 사람들은 당을 짓는 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은 없는 자니라”고 말합니다.

사도가 말하는 마지막 때의 모습이란 자기의 경건치 않은 정욕대로 행하며 기롱하는 자들이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 어떤 놀라운 재앙이 발생하는 것이 마지막 때의 모습이 아니라 자기 정욕대로 살고 기롱하는 것이 마지막 때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세대가 곧 마지막 때가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마지막 때가 오늘에 이르러 비로소 도달한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 때란 시간적 의미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상태를 뜻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마지막 때는 사도가 말 한 그 때도 마지막 때고 지금도 마지막 때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늘로 가시고 세상은 이미 마지막이라는 상태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마지막 때는 우리에게 왜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안되는가에 대한 근거를 제시해줍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마지막 때에서 살아날 수가 없기 때문에 우리를 죄에서 건지시기 위해 오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않을 수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는 우리로 하여금 마지막 때라는 세상의 상태를 보게 하고, 예수님만이 희망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마지막 때에 서서 세상을 바라볼 때, 그리고 교회를 바라볼 때, 세상에서 잘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임을 알게 되는 것이고 또한 교회를 키우기 위해 노심초사하며 교인들을 다그친 것들이 결국 자기 정욕대로 행한 것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큰 교회라는 것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때에 신자는 무엇이 진리며 무엇이 거짓인가를 바르게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 분별이 없다면 진리와 거짓 사이에서 옳고 그름을 판별하지 못한 채 자신의 경험과 상식에 일치된 것을 따름으로서 거짓된 것도 옳은 것으로 보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본문에서는 ‘성령이 없다’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없는 자라면, 그가 행하는 것이 아무리 착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결국 거짓일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이 없다고 해서 착함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없어도 양심이 있고, 도덕과 윤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착하게 살고 착한 일을 하기 때문에 성령이 있고 믿음이 있다고 여긴다면 그것은 인간의 착함에 속는 것일 뿐입니다.

분문은 성령이 없는 자들에게서 나오는 것은 당을 짓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당을 짓는 것, 육에 속한 것, 성령이 없는 것은 각기 다른 세 종류의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상태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없기에 육에 속한 모습을 보일 것이고, 육에 속했기에 당을 짓게 되는 것입니다.

당을 짓는 것은 교회 내에 내 편을 들어주는 자기 세력을 구축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과연 교회에 ‘내 세력’이라는 것이 필요할까요? 교회 내에 내 편을 드는 사람, 자신의 세력을 구축하고자 하는 것은 뭔가 달리 노리는 것이 있음을 뜻합니다. 교회를 자기 의도대로 이끌어 가기 위해서라든지, 아니면 자신과 대립되어 있는 누군가를 견제하기 위해서라든지, 이처럼 뭔가 힘이 필요하기에 당을 짓게 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교회는 그리스도만을 힘으로 삼고 살아가는 특이한 무리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 자기 세력은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존재한다면 오직 그리스도의 세력만이 존재할 뿐이죠. 그러므로 교회 내에 자신의 세력을 구축하고자 하는 것이야 말로 그리스도의 몸을 분열하는 것이고, 이것이 육에 속한 것이고 성령이 없는 자인 것입니다.

신자가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그리스도로 기뻐한다면 무엇 때문에 자기편을 들어줄 자기 세력을 필요로 하겠습니까? 결국 교회를 주님의 교회, 그리스도의 몸으로 보지 않기에 자신의 교회로 만들고자 하게 되는 것이고 이것이 당을 짓는 성령이 없는 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목사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보지 않을 때 가장 먼저 나타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교인을 자기편의 사람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나를 좋아하는가 싫어하는가에 신경을 쓰게 됩니다. 그리고 교인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서 교회 안에 자기 힘을 구축하고자 하게 됩니다. 이것으로 자신의 자리를 탄탄하게 만들고자 하는 것이지요. 이것이 거짓 선지자이며 이런 자가 마지막 때에 있을 것을 사도가 경고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피로 사신 교회로 말하는데, 십자가의 피로 사신 교회가 과연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겠는가를 피흘려 죽으신 예수님의 마음에서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은석교회라는 이름으로 모이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무엇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을 위해 모이는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모여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기뻐하며 은혜를 증거하는 것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내가 속한 교회, 내가 담임하고 목회하는 교회를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가에 골몰한다면 거듭 말하지만 그것은 성령이 없는 자들의 모임에 불과할 뿐입니다. 즉 종교 수준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마지막 때를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세대를 잘 분별하여 믿음의 도를 위한 싸움이 있는 길을 가야 할 것입니다. 이 세대를 분별하지 못하면 결국 우리는 이 세상에 관심을 두게 되고, 교회에 관심을 둘 것입니다. 마지막 때란 긴박감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기 정욕대로 행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로 모이는 것은 은석교회를 어떻게 만들어 보자는 의도가 아니라 오직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주님의 영광을 위해 뜻있는 일을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영광은 우리의 일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한 고백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외면하고 눈에 보이는 거창한 일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고 교회를 드러내고자 하기에 뜻있고 의미 있는 일을 해야 한다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관심을 다른데 두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와 예수님을 연결시키지 말고 예수님만 남기고 나머지는 가지 치듯 모두 잘라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의만 고스란히 남아서 예수님의 의로움에 감사하는 것이 예수님이 피로 사신 참된 교회인 것입니다. 이것을 잘 분멸하여 참된 진리의 길을 가기를 촉구하는 것이 사도의 심정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여러분의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 한분만 남겨둘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때에 여러분을 살릴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시고 그것만 남고 나머지 모든 것은 버리십시오. 실제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생명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임을 분명히 하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생명에 쓸모없는 것이 있든 없든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 문제로 다가오지는 않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도 내일도 날마다 그렇게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십자가의 피를 믿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이처럼 십자가만 남아 있는 그 마음이 진리와 진리 아닌 것을 분별하는 지혜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