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 1:1-7 붙였노라

여호수아가 죽고 사사기가 시작되는 과정에서 한가지 특이한 것은 하나님이 여호수아를 대신할 지도자를 남겨 두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널 때 하나님은 모세의 후계자로 여호수아를 세워서 이스라엘을 지도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여호수아가 죽을 때는 지도자를 남겨 두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이것은 모세의 후계자로 여호수아를 세운 이유를 생각하면 알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를 후계자로 세운 것은 모세 대신에 다른 지도자를 세워서 이스라엘을 이끌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세보다 여호수아가 더 낫기 때문에 모세는 요단강을 건너지 못하게 하고 여호수아를 대신 내세운 것이 아닌 것입니다. 만약 여호수아를 모세와 상관없이 단지 또 다른 인물로서 세워진 지도자로 이해를 한다면 분명 모세는 여호수아보다 못한 자로 인식되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가 부족했기 때문에 요단강을 건너지 못하게 하신 것도 아니고, 대신 여호수아를 세운 것도 아니었습니다. 신 34장을 보면 하나님이 모세에게 약속의 땅을 눈으로 보게 합니다. 눈으로 보게는 하셨지만 그 땅에 들어가지는 못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모세 개인에 대한 신앙의 문제로 인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신 34:10절에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라고 하는 말씀을 봐도 하나님은 모세를 누군가보다 부족한 자로 보시는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일을 계속 이어가도록 하기 위해 세워진 후계자입니다. 따라서 여호수아가 했던 일은 모두가 모세에게 부여된 일이었던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모세의 일을 이어가는 역할을 했다는 것은 신명기에서 모세가 이스라엘에게 강조하고 있는 것과, 여호수아서에서 여호수아가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신30:16절을 보면 "곧 내가 오늘날 너를 명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얻을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만이 아니라 신명기에서 모세가 강조하고 있는 것은 여호와를 사랑하고 여호와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 역시 죽기 전에 이스라엘에게 강조했던 말이 여호와만 사랑하고 이방신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수아가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한 것은 모세의 실패 속에서 깨닫게 된 사랑이었습니다. 즉 모세가 자신의 실패 속에서 깨닫게 된 사랑을 여호수아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광야에서 발견하게 된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실패하고 모세 자신 역시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언약은 포기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세는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40년 간 고생을 하게 된 것도 이스라엘에 대한 버림이 아니라 오직 여호와는 하나님이시고 그 외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알게 하시고 이스라엘을 교훈 하시기 위해서이고 그들을 낮추시기 위해서 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모세가 실패 속에서 비로소 발견하게 된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여호와만 섬기고 규례와 법도를 순종하라는 말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수아 역시 모세의 이런 의도를 알았기에 모세의 말을 그대로 이스라엘에게 전하면서 죽는 것입니다.

지금껏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분이 여호와셨기 때문에 앞으로 너희가 섬길 분은 오직 여호와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포기되지 않았고 그 사랑으로 약속의 땅에 오게 된 것이지 만큼 앞으로 어떤 일이 있다고 할지라도, 어떤 고난과 어려움에 있다고 해도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이방신의 이름을 부르지 말고 하나님의 인도하심만 의지하고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신명기와 여호수아서가 있기 때문에 여호수아가 죽은 뒤에 새로운 지도자가 있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모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운 것은 모세가 능력이 많았거나, 지도자로서 역량이 좋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애당초 하나님이 모세를 이스라엘에게 보내고자 하실 때 모세는 발뺌을 했습니다. 말도 못한다는 핑계를 대면서 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모세를 보내십니다. 모세를 지도자라고 한 것은 현대인의 시각에서 이해하는 것처럼, 능력이 있고 통솔력이 있어서 국가를 번영시킬 수 있는 위대한 인물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지도자란 백성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모세의 지도자 역할은 자신의 실패와 이스라엘의 실패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그 사랑으로 인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지도자입니다.

여호수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 땅을 차지한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사랑의 결과임을 알게 하는 것이 여호수아의 역할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새로운 지도자가 필요치가 않았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지도자들이 세워지고 그들의 역량과 능력으로 보존되고 살아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인도하심으로 살아온 것이었기 때문에 앞으로 이스라엘은 하나님만 섬기면 되었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참된 지도자시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그 어떤 지도자도 구할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스라엘이 지도자를 따로 구한다면 그것은 결국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가나안 땅에서의 전쟁 역시 여호수아가 싸움을 잘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가나안을 이스라엘에게 붙이셨기 때문에 승리하게 된 것입니다. 때문에 여호수아가 죽고 없다고 해도 가나안의 싸움은 전혀 걱정할 문제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존재하시는 이상 가나안에서의 삶은 결코 이방신을 불러서는 안되고 오직 여호와만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사기의 주제입니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 이제 이스라엘은 직접 하나님께 묻습니다. 1절에 보면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우리 중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과 싸우리이까"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보면 물을 필요도 없는 것을 묻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누가 먼저 싸울 것인가 하는 문제는 굳이 하나님께 묻지 않아도 자기들끼리 의논해서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스라엘은 누가 먼저 올라가 싸울까라는 문제까지 하나님께 묻습니다. 이것이 세상적인 시각으로는 거부감이 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현대인에게 있어서 사람다운 사람은 스스로 자족하고 자율하며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일을 자신이 책임지는 사람이 똑똑한 사람이고 사람다운 것이고 능력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이 필요치 않은 것입니다. 스스로 자율하며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자신을 자신이 책임질 수 있는데, 하나님을 불러서 나를 책임져 달라고 부탁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현대인은 모두가 성인으로 살아가려고 합니다. 성인이란 스스로를 책임질 수 있음을 전제하는 말입니다. 자율할 수 있는 사람이란 의미로 성인이라는 말을 합니다. 그래서 성인된 인간에게 하나님은 필요치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18:3-4)고 말씀하신 것도 천국은 성인은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육체의 성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성인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스스로 자신을 책임지고 자율적으로 살려고 하는 정신적으로 자립해 있는 성인이라면 하나님이 필요치 않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자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어린아이란, 스스로 자신을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책임지신다는 것을 믿고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하나를 하나님께 물으면서 살아가는 사람, 그가 바로 어린아이이며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에게 '우리 중 누가 먼저 올라가 가나안 사람과 싸우리이까'라고 묻는 것은, 적어도 그 순간만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어린아이 상태로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자로 가나안에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책임지려고 하지말고 하나님의 책임에 자신을 맡기고 살아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말했던 대로 이스라엘은 아브라함 때부터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을 차지하게된 모든 세월이 하나님이 책임진 것이었음을 말합니다. 더군다나 모세는 이스라엘과 자신의 실패 속에서도 하나님의 책임지심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인도하시고 하나님이 책임지시는 삶안에서 인간은 항상 낮아진 모습으로 나와야 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스스로를 책임지려고 하지 않은 모습입니다. 이렇게 살아갈 때 이스라엘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인간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사랑만 의지하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을 인도하시고 책임지신 하나님이 오늘 저와 여러분을 인도하시고 책임지십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자로 남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책임지고 계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이 책임지시는 사랑만 바라보고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우리 자신을 책임지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유다가 올라갈지니라 보라 내가 이 땅을 그 손에 붙였노라 하시니라"고 말합니다. '붙였다'는 말은 많이 들어왔던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붙였다'는 이 한마디의 의미를 너무 소홀히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붙였다'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이 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저 땅을 저에게 주십시오'라고 기도했을 때 '그래 그 땅을 네게 붙였노라'는 식으로 내가 원하는 것을 나에게 붙이신 것으로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붙였다는 것이 '너희들에게 줬다'는 의미로 하신 말이라면 굳이 이스라엘이 싸우기 위해서 올라갈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이스라엘은 가만히 있고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서 가나안 사람을 쫓아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가 올라가라'고 하시고 '붙였다'는 말씀을 하신 것은, 싸움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세상과 어떻게 다른가를 보여주고 또 이스라엘 스스로도 깨달아라는 의미에서 올라가 싸우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붙였다'는 것은 이스라엘과 세상 나라가 어떻게 다른가를 보여줍니다. 앞서 말한 대로 세상 나라, 즉 현대인은 스스로를 책임지는 자율적인 삶을 삽니다. 남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율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일수록 능력 있는 자로 대우받는 것이 현대 사회입니다. 스스로를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경쟁해야 하고, 스스로 목표를 정해야 하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스스로 일하고 열심을 내야 합니다. 이런 세상에 신자의 세계가 존재합니다. 그 세계가 이스라엘이고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자율적인 삶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타율적인 삶을 보여야 하는 곳입니다. 스스로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책임지고 계신 삶을 보여야 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이것을 세상은 나약하다고 말합니다. 맞습니다. 인간은 철저히 하나님 앞에서는 나약해져야 합니다. 스스로를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살아가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되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 어떻게 할까요'라는 물음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실패란 실패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성공을 위한 통로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의 성공은 출세하는 것이지만, 하나님 앞에서의 성공은 하나님을 알고 인간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공한 인생입니다. 모세가 실패했습니다. 반석을 두 번 침으로서 요단강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반석을 두 번 쳤다는 것이 뭐 그리 큰 일이라고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합니까? 이스라엘 앞에서 얼마나 창피한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모세는 이 일에 순종했습니다. 자신의 실패로 인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실패를 극복하고 존재하는 것이 사랑이기에 모세는 기꺼이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을 포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수아에게 하나님만 섬기라는 말을 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실패한 모세로 하여금 요단강을 건너지 못하게 함으로서 이스라엘에게 '너희가 요단강을 건너는 것은 너희가 잘나서가 아니라 너희의 실패를 극복하고 너희를 인도하는 나의 긍휼과 은혜 때문이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때문에 실패란 실패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인간을 알게 되는 성공으로 나아가는 통로라는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5-7절을 보면 전쟁을 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한 이야기를 말하고 있습니다. "또 베섹에서 아도니 베섹을 만나서 그와 싸워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을 죽이니 아도니 베섹이 도망하는지라 그를 쫓아가서 잡아 그 수족의 엄지가락을 끊으매 아도니 베섹이 가로되 옛적에 칠십 왕이 그 수족의 엄지가락을 찍히고 내 상 아래서 먹을 것을 줍더니 하나님이 나의 행한 대로 내게 갚으심이로다 하니라 무리가 그를 끌고 예루살렘에 이르렀더니 그가 거기서 죽었더라"

이 말씀에 보면 유다가 베섹이라는 종족과 싸우면서 아도니 베섹의 수족의 엄지가락을 끊어버립니다. 즉 손과 발의 엄지가락을 모두 끊어 버린 것입니다. 당시 전쟁에서 포로된 자의 엄지가락을 끊어버리는 일들이 종종 있었는데, 이것은 그로 하여금 수치를 느끼게 하고 또 도망을 치지 못하게 하기 위한 방편이었다고 합니다.

어쨌든 아도니 베섹은 자신의 수족의 엄지가락이 끊기자 자신이 옛날에 칠십 왕의 수족의 엄지가락을 끊고 자기 상아래서 먹을 것을 줍도록 했는데 이제 하나님이 내가 행한 대로 갚으신다는 말을 합니다. 즉 아도니 베섹의 엄지가락을 끊은 것은 그가 행한 대로 갚으시기 위한 것이었는데, 이것은 단지 아도니 베섹의 행위를 갚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로 하여금 아도니 베섹의 엄지가락을 끊게 하심으로서 뭔가 가르치시고자 하신 것이 있으신 것입니다. 그것은 아도니 베섹이 비록 인간에 대해서는 강한 자였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그 앞에 나타나셨을 때 그는 수치를 당할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임을 보여주심으로서 이스라엘 역시 하나님 앞에서는 항상 수치를 당할 수밖에 없는 나약한 자임을 알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수치를 당할 수밖에 없는 자임을 발견할 때 그 수치를 극복하고 이스라엘에 함께 하는 하나님의 사랑에 마음을 두고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과연 하나님께 물으면서 살아가십니까? 스스로 책임지기 힘든 일이 있을 때 '하나님 어떻게 할까요'라고 묻느냐는 것을 질문한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삶에 대해서 하나님께 묻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세토록 하나하나 물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학교에 갈 때 '하나님 학교에 갈까요 말까요'라고 묻고 가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물음은 아무리 해도 대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대답은 이미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그것은 스스로 인생을 책임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과 싸우는 것은 이스라엘이 책임질 문제가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이 붙이셨습니다. 즉 하나님이 책임지는 것입니다. 인생 역시 하나님이 책임지는 삶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안되는 일이 있을 때 '왜 안됩니까?'라고 원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책임지시는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책임지니까 잘 해결하시겠지'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는 것은, 여러분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천국으로 집어넣으시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일을 이루시기 위해서 여러분을 실패하게 하시고 넘어지게 하시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우리에게는 인생에 대해서 우리가 책임져야 할 권한도 능력도 없습니다. 인생이 우리의 의도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도대로 살아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인생이 주어진 이유도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이지 우리를 위해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태어나는 것도 우리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되어지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신자는 단지 세상 속에서 자신이 자신을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책임지신 인생을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는 것을 현대인들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스스로를 책임지는 인생을 열심히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능히 책임질 수 있기 때문에 굳이 하나님이 필요치 않은 것입니다. 이것이 성인이며 천국가지 못할 자의 모습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신자는 하나님께 물으면서 하나님이 붙이시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무엇을 붙여 주시든 우리는 그것에 순종해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붙여달라고 고집부리는 것은 결국 내 인생을 내가 책임지겠다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공하고자 하는 욕심이 하나님이 책임지시는 삶을 살아가는데 방해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성공을 꺾기 위해서 넘어지게 하시고, 실패하게도 하시고, 수치를 당하게도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안에서는 실패도 수치도 부끄럽지가 않습니다. 실패를 수치를 부끄러워한다는 것은 자신이 자신을 책임지지 못한 것에 대한, 즉 자신의 나약함에 대한 부끄러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존심이 상한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정신이 아닙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책임아래 살아간다는 것을 잊지 마시고, 스스로 성공하려고 하지말고 하나님께 물으시면서 하나님이 붙이시는 것을 여러분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