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 4:1-10 나약한 바락

믿음이란 우리를 천국으로 보내주기 위해서 세상에 던져 주신 징검다리가 아닙니다. 믿음이란 세상이 예수님을 왜 죽였는지에 대해서 심판하는 기능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고 있듯이 '내가 예수님을 믿어서 천국 간다'는 용도로 존재하는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선물이라고 말을 합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이며 또 교회도 인정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믿음은 선물이며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점에는 잘못됨이 없지만, 나를 구원하시고 천국 보내시기 위해서 그 도구로 믿음을 선물로 주셨다라고 이해해버리는 것은 하나님의 일보다는 자신의 구원에 초점을 두고 있는 결과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을 자기 구원을 위한 수단으로만 받아들이면 곤란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믿음을 택한 자기 백성에게 선물로 주신 것은 자기 백성을 도구로 삼아서 세상의 죄악을 드러내고 정죄하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즉 믿음을 주심으로서 누가 택한 자이고 누가 택하지 않은 자인가를 보여주기 위함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믿음을 선물로 주셨다면 그 선물을 받은 자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믿음이 주어진 자와 믿음이 없는 자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만약 믿음이 주어졌다면 그는 하나님의 택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택한 자이기 때문에 믿음을 주신 것이지 인간의 의를 보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믿음이 주어진 자는 철저하게 자신을 부인하는 쪽으로 나가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의를 내세우고 자신의 힘을 의지하고 산다는 것 자체를 죄악으로 인정을 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택한 자의 모습이고 믿음이 있는 자입니다.

앞서 말씀드리기를 믿음에는 심판의 기능이 있다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세상에 믿음이 주어졌다고 할 때 믿음은 세상의 무엇에 대해서 심판을 하겠습니까? 이것을 알려면 새언약이 주어지기 옛언약 즉 구약에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보면 됩니다.

구약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은 '인간은 결코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인간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구원에 실패한 존재가 곧 인간임을 적나라하게 증명하는 것이 구약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주어졌다는 것은 인간의 노력이나 힘으로 구원받을 수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인간으로는 안된다는 것이 성경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능력 자체가 믿음으로 세상에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택함 받지 않은 자는 오직 자신의 힘과 재능을 의지하고 살아갈 뿐입니다. 이것이 죄이고, 심판 받을 세상이 살아가는 사고방식인 것입니다.

믿음이 있다는 것을 예배당과 연관지어 생각하면 안됩니다. 믿음을 예배당과 연관지어 생각하는 것 때문에 교회의 타락을 가져왔음을 알아야 합니다. 예배당에서의 부지런한 종교적 행동을 믿음의 표준으로 강조한 것으로 인해서 많은 교인들이 참된 믿음과 전혀 상관없는 종교적인 방향으로 흘러간 것입니다.

믿음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삶 자체가 곧 하나님의 능력으로 유지되고 있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내 삶은 하나님의 기적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가 곧 믿음이 있는 자입니다.

믿음은 언제나 우리의 믿음 없음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이 택한 자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셨다고 해서 앞으로 신자는 믿음으로 잘 살아간다는 뜻이 아닙니다. 때문에 '나는 항상 세상을 의지하려고 하는 것을 보니까 믿음이 없는 것 같다'라는 생각에 자포자기한다면 그것은 믿음이 무엇인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린 애당초 믿음이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려고 하기보다는 세상에 존재하는 힘을 더 미더워 하며 살아가던 우리들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믿음이 주어졌다고 해서 믿음 없던 본질이 사라지고 오직 믿음이 우리를 다스리게 된다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자에게서 보여지는 것은 자신의 믿음 없음에 대한 고백입니다. 그리고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인해서 자신의 부끄러움이 무엇인가를 발견하게 되고 자신의 무능함과 연약함에 대해서 철저하게 인식하게 됩니다. 그 결과 자신을 의지하고 산다는 것은 어리석음이며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만이 생명이며 가장 지혜 있는 것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이 있는 신자의 삶입니다.

과연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총을 믿고 살아가십니까? 그렇다면 믿음이 있는 자답게 살아가셔야 합니다. 믿는다하면서 믿음이 있는 자다운 삶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면 믿음이 있는 자다운 삶은 어떤 것인가를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절에 보면 "에훗의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매"라고 말씀합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말씀에서 계속 반복되는 것은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세운 사사가 죽은 후에 또 다시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했다는 내용입니다. 실수도 한두번이지 계속 반복되는 이스라엘의 죄에 대해서 우리는 답답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기도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끊이지 않고 반복되는 악은 본문으로 그치는 것도 아니고 앞으로도 계속 이어지는 악입니다. 아무리 사사가 등장을 해서 이스라엘을 고난에서 구원하였다고 해도 이스라엘의 악에 대해서만큼은 해결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악은 이스라엘의 실수가 아니라 인간의 본질에서 도촐되는 자연스런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없는 듯 하다가도 기회가 되면 정체를 드러내는 것이 악입니다. 다 잘라내었다고 했는데 다시금 싹을 보이는 것이 악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이스라엘의 죄악을 대하면서 한가지 알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죄는 죽어야 그친다는 것입니다. 이점에 대해서 여러분은 마음 깊이 자각을 하셔야 합니다. 죄는 내가 죽어야 그칩니다. 내가 숨을 쉬고 살아있는 동안은 설사 수족을 못쓰고 자리에 누워있는 상태라고 해도 죄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이러한 세상에 예수님이 오신 것은 죄가 무엇인가를 보이시고자 함이지 죄를 없애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죄가 어떤 것임을 보이시고 그 죄에 대해서 스스로 인정을 하도록 하시고 모든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예수님을 믿게 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죄란 죄가 무엇인가를 모르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죄가 무엇인가를 모르기 때문에 죄를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 해결하려고 하게 됩니다. 이것이 곧 죄를 담당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죄가 얼마나 강한가를 모르고 스스로의 노력으로 죄를 이겨보려고 하는 것이 참으로 어리석은 인간의 모습입니다.

이스라엘의 반복되는 악은 오늘 우리들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들 중 누가 반복되어지는 악으로 살아가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죄를 해결한 채 그리스도를 찾는 신자가 누구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죄를 해결하지 못함으로 인해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는 탄식을 내뱉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더한다는 말씀처럼 죄로 인해서 자신의 곤고함을 고백할 수밖에 없는 현장에서 그리스도의 은혜는 한층 더 깊은 감사와 기쁨으로 몰려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죄악으로 인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파셨는데 그 군대 장관은 '시스라'라고 하는 사람이고 야빈왕에게는 철병거 구백승이 있어서 강대한 힘으로 이스라엘을 20년 동안 지배하면서 심히 학대를 함으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에게 부르짖었더라고 합니다.

그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할 사사로서 여선지 드보라를 세우십니다. 왼손잡이 에훗을 세우셔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소 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군대를 죽이신 하나님이 이번에는 이스라엘 앞에 여자를 사사로 세우신 것입니다.

요즘처럼 여권신장을 떠들면서 남녀평등을 주장하는 시대라 할지라도 여자가 대통령이 되었다면 큰 뉴스 거리일 수밖에 없습니다. 요즘도 남자들만 차지하던 분야에 여자가 처음으로 뛰어들었다면 뉴스에 나올 정도로 대단한 일입니다. 하물며 당시 이스라엘에 있어서 여자란 남자의 지배와 도움을 받고 살아가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전적으로 남자를 의지하고 살아가는 역할이 여자에게 주어진 것이 하나님의 창조 원칙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이스라엘에 여자가 사사로 세움을 입었다면 그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남자가 변변치 못했다는 증거가 됩니다. 남자가 변변치 못하고 신앙에 있어서 중심적인 역할을 행하지 못했다는 것을 여자를 세우심으로서 책망을 하시는 것입니다.

6,7절에 보면 드보라가 바락에게 명령을 합니다. "드보라가 보내어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을 납달리 게데스에서 불러다가 그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하지 아니하셨느냐 이르시기를 너는 납달리 자손과 스불론 자손 일만 명을 거느리고 다볼 산으로 가라 내가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와 그 병거들과 그 무리를 기손 강으로 이끌어 네게 이르게 하고 그를 네 손에 붙이리라 하셨느니라" 드보라가 바락에게 명령한 것은 군대 일만명을 거느리고 다볼 산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즉 야빈의 군대 장관과 싸우라는 것입니다. 비록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에게 구백승이라고 하는 철병거가 있고 강한 군대가 있다고 해도 하나님이 그들을 네 손에 붙였으니까 두려워 말고 가라는 것이 드보라의 말이었습니다.

드보라는 하나님이 시스라를 네게 붙였다는 말씀을 믿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락에게 가라는 말을 주저하지 않고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락은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8절에 보면 "바락이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나와 함께 가면 내가 가려니와 당신이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나는 가지 않겠노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당시 이스라엘의 남자들이 얼마나 나약했는가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바락은 혼자 가기를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사사인 드보라와 함께 가기를 청했던 것입니다. 결국 바락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은 보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바락이 홀로 가기를 거부한 것은 시스라에게는 철병거 구백승이라는 강력한 무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철병거 구백승을 볼 때 도저히 싸우러 갈 용기가 생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락은 여자인 드보라에게 같이 가 줄 것을 요청을 한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이스라엘에 있어서 남자와 여자란 그 역할이 분명했습니다. 여자와 아이들은 남자를 의지하고 살아갑니다. 남자의 다스림을 받고 살도록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남자가 여자와 아이들에게 있어서 왕처럼 군림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남자는 또 다시 의지해야 할 분이 있습니다. 그분이 하나님입니다.

고전 11:3절에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함으로써 남자의 위에는 그리스도가 계시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고전 11:7-9절까지 보면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에 마땅히 쓰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니"라고 말씀을 하는 것을 봐도 이스라엘에 있어서 신앙의 중심적 역할은 남자에게 부여된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출 34:23에서 "너희 모든 남자는 매년 세번씩 주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앞에 보일찌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내년 세 번씩 하나님 앞에 보이라는 것은 이스라엘의 삼대 절기, 즉 맥추절 추수절 유월절에 하나님께 나와서 신앙에 대해서 교육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받은 바 말씀을 따라서 가정에서 아이들과 아내를 여호와의 중심으로 신앙으로 가르쳐야 할 역할이 주어진 것입니다.

남자와 하나님께 나와서 가르침을 받고 남자는 집에서 아이들과 여자를 가르침 받은 말씀을 그대로 전함으로서 다함께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남자가 이 역할에 충실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가정의 구원이 위태로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여준 것이 본문에 등장하는 바락인 것입니다. 바락은 남자로서 여호와를 의지하는 신앙을 보여주어야 할 위치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자가 오히려 여자를 의지합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이스라엘의 신앙이 얼마나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는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바락의 나약한 신앙은 무엇입니까? 바락이 약한 여자라 할지라도 함께 해주기를 원했던 나약함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바락이 철병거 구백승을 의식했기 때문입니다. 철병거 구백승과 자신의 힘을 비교를 했습니다. 그리고 도저히 승산이 없다고 생각을 한 바락은 여자인 드보라라도 의지하고자 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컴컴한 밤길을 걸어갈 때 아무도 없이 홀로 간다면 아주 두렵습니다. 그러나 비록 연약한 아이라 할지라도 내 옆에 누군가가 있어 준다면 한결 두려움이 덜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바락이 바로 이런 마음이 아니었겠습니까? 홀로 군대 일만명을 이끌고 시스라와 싸운다는 것이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여자라도 나와 함께 해주기를 바란 것입니다.

바락은 무엇을 몰랐습니까? 바락은 삶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기적이고 능력임을 몰랐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적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철병거를 바라보았고 사람을 바라보았습니다. 이것이 나약한 남자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신앙의 중심적인 역할을 감당해야 할 사람이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을 책망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드보라를 세우시고 바락이 두려워 한 시스라를 드보라의 손에 붙이신 것입니다.

신앙의 나약함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망각한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모든 삶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어진 결과이고 또 앞으로 자신의 모든 미래가 하나님의 능력에 달렸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서 못미더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자신을 지키고 보호하는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실패하지 않고 망하지 않도록 지켜주는 것을 능력으로 이해합니다. 그런데 평탄할 때는 자신의 능력으로 인정을 하고, 힘들 때는 '하나님은 뭐하시는가?'라고 불평을 해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은 어떤 환경과 상황에서도 택한 자를 신자로 살아가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적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기적이 무엇임을 아는 신자는 자신이 지금 그리스도의 은혜를 감사하고 산다는 것에서 이미 기적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기적이 무엇인가를 알고 기적을 맛본 자로 살아가기 때문에 철병거 구백승에 의해서 마음이 흔들리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남자의 모습입니다.

바락은 하나님의 기적을 외면하고 살았습니다. 기적을 외면할 때 바락의 눈에는 철병거만 보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 철병거로 인해서 근심하게 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세상사람처럼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는 남자의 변변치 못한 실체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도와주시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도와주십니다. 삶을 지키시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지키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 능력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삶으로 인해서 흔들리는 모습은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은 철병거로 가득차 있습니다. 세상은 철병거를 가진 자로 인해서 두려움을 가집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철병거가 없음에 대해서 불만을 가집니다. 이 불만을 해소하는 것은 철병거를 가지기 위해서 열심히 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덧붙여서 하나님에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과연 여러분은 신앙의 중심적인 위치에서 살아가십니까? 신자의 구실을 제대로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부모가 자녀에게 보여줄 모습은 교회에 출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고 산다는 것이 참으로 위대한 일이며 기적임을 가르칠 수 있어야 합니다.

신자답게 살아가십시오. 다른 눈치 보지 마시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열심히 살피십시오. 쓸데없는 것에 마음 빼앗기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담당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것으로 기뻐하며 살아가시면 됩니다. 그것이 신자 구실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는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