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 4:11-24 야엘

인간은 말씀에 의해서 지음 받은 피조물입니다. 즉 말씀의 피조물이라는 것입니다. 말씀에 종속된 자이고 말씀에 의해서 존재하고 말씀에 의해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말씀을 지킨다거나 인간으로 인해서 말씀이 유지된다는 말은 잘못된 것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인간에 의해서 말씀이 유지된다면 최초의 인간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은 순간 말씀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야 합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가 인간에 의해서 손상을 입지 않고 하나님이 지은 그대로 존재하는 것만이 말씀이 유지되고 있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지 말라는 것은 인간에게 '너희는 말씀에 종속된 자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말씀에 종속된 자로 사는 것만이 생명 안에 있게 되는 길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지 않았을 때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었던 것이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음으로서 생명나무는 인간에게서 멀어지고 감추어졌던 것입니다. 즉 말씀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자체가 죽음이라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생명을 잃어버린 사건이었습니다.

이러한 인간이 말씀을 스스로 지킬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의 실체가 어떤 것인가를 전혀 깨닫지 못한 어리석음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단이 예수님을 시험할 때 돌을 떡으로 만들라고 합니다. 그때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즉 떡이 생명이 아니라 말씀이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말씀을 떠나서는 도저히 생명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말씀에 의해서 사는 것이 인간이지 인간이 말씀을 지킨다거나 말씀을 실현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말씀이 나를 이끌어 갑니다. 내가 말씀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의해서 말씀을 보여주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말씀을 지켜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의 힘으로 말씀을 실현하자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말씀의 능력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운동력이 있고 생명력이 있어서 스스로 활동하신다는 것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말씀의 실현자는 우리가 아니라 말씀 자체입니다. 우린 다만 말씀이 실현됨을 보여주는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자라면 '나는 말씀에 의해서 사용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삶이란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삶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고 자기의 꿈과 소망과 환상을 집어넣습니다. 많은 꿈과 소망과 헛된 환상을 가지며 살아가다가 실망하고 낙심하고 무너지고 그래도 어떻게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보려고 애를 쓰지만 다시금 절망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이 삶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말씀에 의해서 사용되어지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나를 위한 삶이 아니라 말씀을 위해서 존재한 삶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자신이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가를 명확히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말씀이 어떻게 실현되는가를 증거하기 위해서 사용되어지고 있는 존재임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를 들어서 전도를 말할 때 교회가 전통적으로 가르쳐 온 것은 '전도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을 인간의 힘으로 실현하는 차원의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이 나를 사용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전도하자'가 아니라 말씀이 나를 전도하도록 만드신다는 것을 압니다. 말씀에 사로잡힌 자는 전도하게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신자가 말씀을 이해하는 차원이 아니라 말씀에 사로잡힌 상태로 살아간다면 말씀에 사용되고 있다는 그 증거가 삶을 통해서 분명 증거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진정 신자라면 우리들의 삶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말씀이 나를 사용하고 있는 삶인지 아니면 말씀과 상관없이 나를 위한 삶으로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인지의 여부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한 여인에게서 일어난 사건을 통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여사사인 드보라는 바락을 불러서 시스라를 공격을 할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바락은 시스라의 철병거를 두려워함으로 드보라에게 같이 가줄 것을 요청을 합니다. 그래서 드보라는 바락과 함께 전투에 동행을 하게 되고 바락은 14절에서 "드보라가 바락에게 이르되 일어나라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네 손에 붙이신 날이라 여호와께서 너의 앞서 행하지 아니하시느냐 이에 바락이 일만 명을 거느리고 다볼 산에서 내려가니"라는 말씀대로 시스라를 치기 위해서 다볼 산으로 갑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시스라를 바락의 손에 붙였다는 말씀대로 시스라는 바락에게 패하여 도망을 치게 되었습니다.

시스라가 먼저 도망을 친 곳은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의 장막이었습니다. 헤벨이 남자로서 가장인데도 불구하고 헤벨의 장막이 아니라 여자인 야엘의 장막이라고 일컫는 것은 스스로 강한 자라고 주장하는 남자의 무능력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11절의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11절에 보면 "모세의 장인 호밥의 자손 중 겐 사람 헤벨이 자기 족속을 떠나 게데스에 가까운 사아난님 상수리나무 곁에 이르러 장막을 쳤더라"고 말합니다. 드보라와 바락이 시스라와 전투를 하는 이야기를 하면서 갑자기 모세의 장인 호밥의 자손인 겐 사람 헤벨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어찌 보면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나 사실은 헤벨의 아내인 야벨이 시스라를 죽인 사건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말하기 위해서 헤벨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이해하고 넘어갈 것은 출 3:1절에 보면 모세의 장인의 이름이 이드로로 나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호밥'이라고 말합니다. 신학자들은 '이드로'와 '호밥'이 같은 사람이 아니라 호밥은 모세의 처남을 가리켜서 하는 말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장인과 처남을 의미하는 히브리어가 똑같이 호텐이란 단어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어쨌든 이것은 본문의 이해와는 상관이 없는 이야기인 만큼 참고하시면 될 것입니다.

모세의 장인이든 처남이든 모세의 처가는 겐족 출신입니다. 겐족은 원래 가나안 족속이 아니라 이스라엘과 함께 가나안에 들어온 미디안 족속에 속한 자손입니다. 그렇다면 겐족속은 하나님을 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겐 사람 헤벨은 자기 족속을 떠나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헤벨은 이스라엘을 압제한 야빈과 화평을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17절에서 "시스라가 도보로 도망하여 겐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의 장막에 이르렀으니 하솔 왕 야빈은 겐 사람 헤벨의 집과 화평이 있음이라"고 말씀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시스라가 헤벨의 집으로 도망을 친 것은 평소 헤벨이 자기 왕인 야빈과 친분이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추측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헤벨의 장막이 아니라 헤벨의 아내 야엘의 장막이라고 말한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즉 남자라고 해서 가정의 중심이 아니라 누구든 하나님을 아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그가 바로 그 가정의 중심이라는 것입니다. 남자라고 해서 무조건 가장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가는 그가 가장입니다. 말씀에 의해서 사용되어지는 삶을 증거 하는 그가 하나님이 그 가정에 세우신 가장임을 알아야 합니다. 가장이란 돈을 벌어서 그 가정의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말씀에 굳게 서서 말씀에 의해서 살아가면서 그리스도의 정신을 증거 하는 사람이 하나님이 가정에 세우신 구원자이며 가장인 것입니다.

교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서 목사란 누구입니까? 교회에서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노회에서 목사로 안수를 받은 사람을 '목사'로 인정을 합니다. 하지만 노회에서 목사로 안수 받고 목사로 칭함을 받는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목사의 위치에서 살아가느냐는 것이 중요합니다. 목사의 위치란 하나님이 목사를 세우신 진정한 뜻 위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나를 목사 되게 하신 이유는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하나님에게 사용되어지는 목사로 살아가고자 하는 그가 바로 목사의 위치에 있는 목사인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에서 진정한 목사는 노회에서 안수 받은 사람이 아니라 누구든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형제들을 그리스도께서 가신 길로만 인도하고자 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목사를 세우신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일에 사용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누구든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가면서 주님이 지신 십자가를 보여주는 일에 사용된다면 그가 바로 목사의 위치에서 살아가는 목사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당회장이라고 이름하는 목사가 교회의 중심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신자가 교회의 중심인 것입니다.

그러면 야엘이 시스라를 죽인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본문을 읽어보면 시스라는 야엘에 의해서 참으로 잔인하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처참한 죽음을 당했습니다. 이러한 사건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야엘에게 있어서 시스라가 도피하기 위해 자기 집을 찾아온 것은 야엘이 계획을 했거나 원했던 일이 아니었습니다. 야엘이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일이고 야엘로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는 갑작스런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와중에서 야엘은 시스라를 죽이게 된 것입니다.

야엘이 시스라를 죽인 것은 야엘의 개인적인 원한이 아닙니다. 야엘 개인으로서는 시스라에게 전혀 원한이 없습니다. 더군다나 자기 남편인 헤벨은 시스라의 왕인 야빈과 친하게 지내는 입장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야엘이 자기 남편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시스라를 보호하고 도와주어서 야빈에게로 돌아가도록 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야엘이 시스라를 죽인 것은 남편의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야엘이 생각한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이스라엘을 압제하고 대적하는 무리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대적하는 하나님의 적이라는 시각으로 시스라를 대했던 것입니다. 인간적인 시각이나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단지 하나님의 대적이라는 차원에서만 대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스라를 죽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야엘이 시스라를 환대한 것처럼 속여서 죽인 것은 악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사단의 일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윤리적인 차원에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야엘이 이스라엘을 위해서 시스라를 죽인 것이라고 해서 모든 행동이 용납되어 버린다면 결국 좋은 일을 위해서는 어떤 행동을 해도 상관이 없다는 것이 되기 때문에 야엘의 거짓된 행동은 용납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야엘이 거짓으로 시스라를 환대한 척 한 것은 단지 시스라를 죽이기 위한 방법이었을 뿐입니다. 약한 여자로서 군대 장관인 시스라를 죽이기 위해서 안심을 시키고 잠을 재워서 몰래 죽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야엘이 무엇을 생각하였느냐는 것이지 어떻게 죽였느냐가 아닙니다. 야엘에게는 다만 하나님의 적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생각만 있었을 뿐입니다.

물론 이것은 좋은 목적을 위해서는 어떤 방법도 괜찮다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목적이란 착한 일의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는 것에 마음에 두는 것이 좋은 목적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그 일을 하나님이 이루어 가실 때 이웃에게 해를 끼치고 피해를 입히는 방법이 동원될 리가 없습니다. 오히려 신자로 하여금 양보하고 손해보는 쪽으로 밀어붙일 것입니다. 때문에 중요한 것은 어떤 방법으로 했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위해서 했느냐에 있음을 알아야합니다.

따라서 야엘의 행동에는 관심을 둘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야엘이 무엇을 위해서 시스라를 죽였느냐에 관심을 두면 됩니다. 야엘의 행동은 하나님의 대적을 용납하지 않는 사고방식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대적과는 화친할 수 없고 함께 할 수 없다는 사고방식입니다. 그래서 야빈과 친한 남편의 입장도 고려하지 않은 채 시스라를 죽이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야엘의 이야기를 통해서 생각할 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위해서 살아갑니까? 우리의 삶에 대해서 과연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신다는 시각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사용하시는 것이 삶이라면 우리의 삶은 내 입장이나 내 처지를 고려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일을 고려하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물론 내 인생은 내것이라는 생각이라면 철저하게 우리 자신의 입장을 고려하며 살아가는 것이 정상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신자로서 하나님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인간적인 내 입장보다는 하나님의 입장이 우선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럴 때 우리가 얼마나 내 입장에서 살아가고, 그럼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일이 우리에 의해 방해받고 있는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야엘의 장막에 시스라가 도망을 친 것은 야엘의 계획에 없던 일입니다. 야엘이 시스라가 도망올 것을 예상하고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고 기다린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스라를 안심시킨 후에 주저하지 않고 죽인 것은 평소 야엘의 삶이 어떠했는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야엘의 평소의 삶이 자기를 위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을 마음에 두고 살아가는 삶이었기 때문에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도 말씀을 믿고 말씀에 의지한 자의 모습이 어떠한가를 증거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이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들의 삶에는 항상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사건이 일어나고 상황들이 벌어집니다. 그 삶에서 평소에 어떻게 살았는가가 증거되는 것입니다. 평소의 삶이 말씀에 종속된 자로서 말씀에 의지하고 산 사람이라면 어떤 상황이나 사건에서도 그리스도를 믿는자로서의 모습을 증거하게 될 것입니다. 말씀이 그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어떤 상황 속에서 갈등을 가진다면 그것은 자기 입장이 포기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시각에서만 생각하면 되는데 항상 자기 입장이 포기되지 않기 때문에 갈등을 가지게 되고 고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자기 입장을 포기한 채 오직 하나님의 입장에서만 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믿음으로 사는 것은 우리들의 힘이 아니라 말씀의 능력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수많은 갈등과 고민 속에서 결국 자기 입장보다는 하나님이 말씀이 실현되는 쪽으로 자신을 맡기게 된다면 그것이 바로 말씀에 사로 잡혀 살아가는 삶입니다. 말씀의 능력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입장을 포기하고 말씀이 증거 되는 쪽으로 밀어붙인 것입니다.

바락은 시스라의 군대를 두려워했습니다. 철병거 900승이라는 힘이 바락에게 두려움을 준 것입니다. 이것은 바락이 평소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삶이 아니었음이 드러난 것입니다. 헤벨은 자기 족속을 떠나 살면서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야빈과 화친을 했습니다. 이것 역시 하나님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자기 입장만 생각한 삶입니다. 이러한 남자들 가운데 야엘은 남편의 입장도 고려하지 않고 자기 입장도 고려하지 않은 채 다만 하나님의 적이라는 차원에서만 시스라를 대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의 사고방식이어야 할 것입니다.

내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산다는 것이 참으로 힘든 일이고 우리로서는 할 수 없는 것이지만 이것조차 말씀의 능력에 맡겨야 할 것입니다. 말씀이 나를 사로잡아서 말씀이 실현되는 것을 보여주는 일에 사용하시기를 원하고, 내 입장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일에 나를 밀어붙이고 또 끌어가 주시기를 간절히 원하며 살아간다면 분명 여러분은 주어진 모든 상황과 사건에서 내 입장이 아닌 하나님의 입장에서 행동하게 되어질 것입니다. 그 결과가 비록 나에게 능욕으로 고난으로 다가온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야엘이 만약 자기 입장을 고려했다면 시스라가 하필이면 자기의 집으로 도망을 친 것에 대해서 불만을 가졌을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많은 불만이 바로 그런 것이지 않습니까? '왜 하필이면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이것은 사람들의 공통적인 불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용하신다고 할 때 '왜 하필이면 나를 이런 식으로 사용하시는가?'라는 불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자기 입장을 포기하지 못한 생각입니다. 인간이 가지는 자기 입장은 언제나 편하고 좋은 길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가신 길은 고난의 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즉 자기 입장을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야엘은 시스라가 자신의 집에 온 것에 대해서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시스라가 도망온 상황에서 하나님을 아는 신자로서의 모습만 보였을 뿐입니다.

여러분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든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원망도 불평도 하지 마십시오. 일어난 일에 대해 원망을 하고 불평을 한들 그것은 헛된 것입니다. 취소되지 않을 일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나에게 일어난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보여주는 것인가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말씀으로 살아가는 신자의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