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 5:1-9 헌신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알지 못한 채 성경을 보게 되면 성경의 모든 내용에 대해서 전혀 엉뚱한 상상과 추리를 하게 됩니다. 이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모르기 때문이고, 그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하셨으며 세상의 피조물된 인간에게 무엇을 찾으시는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모른다는 것은 인간의 본질입니다. 만약 인간이 하나님을 안다면 그는 죄와는 상관이 없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죄 자체가 하나님과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죄란 인간과 하나님과의 연결 고리가 전혀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서 이해할 수 없는 상태이고,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도 역시 무지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란 자신에게 관심을 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죄가운데 있는 인간은 자신에게서도 어떤 선한 것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선한 행위를 포기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에 대해서 무지하고 인간의 본질이 어떤가에 대해서도 무지할 상태인 것입니다. 결국 오늘날 인간의 모습은 선한 행위의 껍데기에 둘러싸인 채 자신의 본질이 악이라는 것을 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끊임없이 선을 추구합니다. 하나님 역시 인간에게서 선한 행위를 기대하고, 실천을 원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러한 시각에서 성경을 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없는 이해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한 예로 오늘 본문을 말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흔히들 '드보라와 바락의 노래'라고 말합니다. 1절에서 "이 날에 드보라와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이 노래하여 가로되"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노래'라는 단어에 대한 이해입니다. 노래는 곧 찬송을 말합니다. 드보라와 바락이 하나님을 찬송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찬송이라면 곡조를 붙여서 하나님,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것으로 이해를 합니다. 그러나 찬송이 그러한 것이라면 다른 종교가 자기들의 신을 노래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찬송가는 기독교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이방종교에도 자기들의 신을 찬양하는 노래는 있습니다. 찬송이란 이방종교가 자기들의 신을 노래하는 차원이 아닙니다. 그러한 노래는 누구든 부를 수 있습니다. 교회만 나온다면 자연히 배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상관 없이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모른다고 해도 부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해하는 찬송은 자신의 입으로 곡조 붙여 부르는 것이 전부입니다. 입으로 부르지 않는 찬송에 대해서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자신의 행위가 포함되지 않은 것은 선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찬송만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린다든지, 회개를 한다거나 기도를 하고 예배를 드리는 모든 문제를 자신의 행위와 연결 지어서 생각합니다. 즉 자신의 행위가 없는 것은 신앙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 행위가 포함되어 있지 않는데 그것을 어떻게 믿음의 행위로 인정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입으로 '주님 내 죄를 용서 해주십시오'라고 고백하면서 기도하는 것만을 회개로 인정을 하고, 성도가 모여서 함께 찬송하고 기도하고 설교를 듣는 것만을 예배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만약 이런 생각으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에게 있어서 신앙의 기준과 근거는 자신의 행위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행위는 나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는 그리스도 개인의 행위로 여겨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으로 하나님을 찾기 때문에 노래 역시 자신의 입으로 직접 부르는 것으로 인식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노래하는 찬양이란 필히 하나님에 의해서 발생한 구원의 사건이 담겨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고 나서 하나님의 구원을 노래했습니다. 이 노래는 홍해를 건너기 전에는 부를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홍해에서의 구원 사건을 직접 체험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노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문의 드보라와 바락의 노래는 오늘날 교회에서 부르는 찬송과는 구별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부르는 찬송은 인간들이 스스로 하나님을 찬송하겠다고 지은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홍해에서의 이스라엘의 노래나 드보라와 바락의 노래는 그들 스스로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서 지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체험함으로서 부르게 된 노래였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알게 하시고 부르게 하신 노래인 것입니다. 결국 진정한 찬양이란 성령의 충만함에 의해서 나오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성령이 그리스도를 알게 하고 그리스도를 알게 됨으로서 하나님을 알게 되고 그로 인해서 자연히 하나님의 구속 사역에 대해서 노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드보라와 바락이 하나님을 노래한다면 그들에게도 그들이 체험한 하나님의 구원 사건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이 친히 용사가 되셔서 이스라엘의 대적인 가나안 왕 야빈을 물리치시고 승리한 것입니다. 출애굽기 15장에 등장하는 이스라엘의 찬양도 그 구절을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용사가 되어서 이스라엘을 구출하시고 애굽을 멸망하신 사건을 노래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용사 되셔서 승리케 하신 것이기 때문에 모든 영광과 찬송은 하나님이 받으심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의 찬양이었습니다.

드보라와 바락의 노래 역시 같습니다. 이들도 하나님이 친히 용사가 되셔서 이스라엘의 대적을 승리케 하신 것을 찬양을 합니다. 3절에 보면 "너희 왕들아 들으라 방백들아 귀를 기울이라 나 곧 내가 여호와를 노래할 것이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고 말씀을 하는데, 이 구절을 보면 이스라엘을 대적했던 열방에 대해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과 이방인에 대한 심판을 노래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3절에서 '너희 왕들아'라고 말씀을 하지만 드보라 당시 이스라엘에는 왕의 체계가 아니었음을 생각할 때 이방인을 향한 선포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4절부터 노래하는 구절 하나하나가 여호와가 누구시며 이스라엘을 향하여 어떻게 행하셨는가를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로 인해서 부르게 된 진정한 찬송인 것입니다. 따라서 여호와로 인해서 부르게 된 찬송은 누가 강요한다고 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고 누가 말린다고 해서 중지되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찬송이 우리의 의지나 입으로 불려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우리를 사용하심으로서 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누구의 요구에 의해서 움직이신다거나 또는 멈추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없이 부르는 것은 단지 종교적인 노래일 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령으로 부르는 노래를 어떤 분위기나 자기 도취에 의해서 열광적으로 불려지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성령에 의해서 불려지는 노래란 성령이 오시지 않았으면 도저히 알 수 없고 볼 수 없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해서 감사하고 고백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찬양은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선포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도구로 사용하신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 부른다는 내 행위가 포함되지 않는다고 해도 성령에 의해서 찬양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으로 인해서 감사하게 되어지고 모든 것이 여호와로 말미암았음을 깨달은 상태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성령에 의해서 하나님의 기쁨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어지는 것을 헌신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2절에 보면 "이스라엘의 두령이 그를 영솔하였고 백성이 즐거이 헌신하였으니 여호와를 찬송하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에서 말하는 헌신에 대한 이해는 앞서 말한 대로 성령에 의해서 사용되어지는 도구라는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해하는 헌신은 거의 모두가 인간의 열심과 노력이 포함된 봉사와 충성이라는 측면에서 이해합니다. 즉 인간으로부터 발생한 수고와 열심을 헌신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수고를 아끼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며 자신에게 있는 돈을 아끼지 않고 하나님에게 내어놓으며 교회의 일을 위해서 열심이 특이한 것을 '헌신'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본문에서 말하는 헌신에는 그러한 측면의 내용은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우선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위해서 한 것이 뭐가 있습니까? 그들은 사사가 죽고 없으면 이방신을 섬기고 여호와께 악을 행했던 사람들입니다. 드보라가 바락에게 시스라와 싸우라고 하자 드보라에게 함께 가지 않으면 싸우지 않겠노라고 하면서 나약함만 보였습니다. 물론 이스라엘 일만명이 뽑혀서 시스라의 군대와 싸우긴 했습니다. 어떤 신학자는 드보라와 바락이 노래한 백성들의 헌신이란 바로 하나님의 군대로 뽑혀서 시스라와 싸운 것을 의미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전쟁의 승리가 누구로 말미암은 것입니까? 이스라엘의 일만명 군사입니까? 아니면 드보라와 바락의 힘입니까? 그 누구도 아니라 여호와가 친히 이스라엘의 두령이 되셔서 싸우신 결과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두령이 그를 영솔하였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본문 어디에서도 이스라엘이 하나님에게 헌신했다는 의미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이스라엘이 헌신을 한 것이 사실이라면 헌신을 한 이스라엘을 칭송하고 높이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2절에서는 '백성이 즐거이 헌신하였으니 여호와를 찬송하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백성이 헌신하였으면 백성을 칭송하고 높이는 것이 당연한데 왜 여호와를 찬송하라는 것입니까? 이것은 마치 백성들의 헌신이 아니라 여호와의 헌신인 것처럼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싸우신 분은 여호와입니다. 헌신한 분은 여호와이시지 이스라엘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위해서 헌신을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여호와가 이스라엘의 승리를 위해서 헌신을 하신 것입니다. 헌신은 여호와께 있었던 것이지 이스라엘에게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의 헌신에 대한 큰 오해입니다. 많은 교회는 헌신을 마치 인간이 여호와를 위해서 행동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여호와를 위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과연 여호와께서 인간에게서 받으시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돈입니까? 예배당입니까? 많은 수의 교회당을 짓는 것이고 많은 사람이 교회를 다니도록 하는 것입니까? 기독교의 세력 확장입니까? 불교를 믿는 자가 1000만이고 기독교를 믿는 자가 500만이면 기독교가 불교에게 진 것이고, 이것은 곧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지 못하는 무능한 기독교가 되는 것입니까?

드보라와 바락의 노래에서는 여호와가 승리하게 하셨으니까 여호와를 위해서 헌신하자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백성이 즐거이 헌신하였으니' 즉 헌신한 것에 대해서 찬송할 뿐입니다. 그런데 앞서 말한 대로 이스라엘은 헌신을 한 것이 없습니다. 군사로 나가서 싸웠다고 해도 승리는 하나님이 친히 주신 것이지 이스라엘의 헌신으로 얻은 것이 아닙니다.

드보라와 바락은 바로 이것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승리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4절을 보면 "여호와여 주께서 세일에서부터 나오시고 에돔 들에서부터 진행하실 때에 땅이 진동하고 하늘도 새어서 구름이 물을 내렸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출애굽때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것을 회상하는 노래로 볼 수 있습니다. 신 33:2절에 보면 "일렀으되 여호와께서 시내에서 오시고 세일 산에서 일어나시고 바란 산에서 비취시고 일만 성도 가운데서 강림하셨고 그 오른손에는 불 같은 율법이 있도다"라고 말씀합니다. 모세의 이 말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인도하셨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드보라는 과거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인도하신 여호와가 야빈과의 전투에서도 함께 하셨음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또 6절을 보면 "아낫의 아들 삼갈의 날에 또는 야엘의 날에는 대로가 비었고 행인들은 소로로 다녔도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여호와 앞에 죄악을 행함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블레셋 사람들과 하솔 왕 야빈의 압제를 받아 고통 하게 하시던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삼갈을 세워 블레셋 사람 600명을 소모는 막대기로 죽여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고, 야빈의 압제를 받던 때는 그의 군대장관이던 시스라를 야엘이라는 여자를 들어서 죽이셨던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압제로 인해서 대로가 아닌 소로로 다녀야 할 정도로 고통스러운 상황이었지만 하나님이 친히 구원자를 세워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7절에서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어미가 되었다는 표현도 드보라가 잘났다거나 드보라 자신을 높이는 말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연약하며 무능한 상태에 있을 때마다 하나님은 구원자를 세워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셨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이 노래들은 한마디로 말해서 이스라엘은 여호와로 인해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가 승리하게 하셨고 여호와로 인해서 살고 여호와로 인해서 존재한 것이 이스라엘이었음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9절에서 다시금 이스라엘의 방백들의 즐거운 헌신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방백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보여주는 도구로 세워진 자들에 불과했습니다. 결국 그들의 헌신이란 하나님에 의해서 사용되어진 것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지 이스라엘 방백들의 수고와 노력을 헌신으로 말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헌신이란 인간의 수고와 노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수고한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드린 것은 또 무엇입니까? 십일조입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이 소유하고 있는 돈에 여러분의 것이 있다는 것입니까? 모든 것이 여호와의 것이라면 십일조는 내것을 여호와의 것으로 내어놓은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것을 여호와께 반납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돈은 내것이니까 나에게 내놔라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돈을 아무리 교회에 갖다 바친들 돈이 하늘로 올라가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은 우리들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죄악된 본래적인 마음이 아니라 새롭게 창조된 마음을 받으십니다. 새롭게 창조된 마음이란 우리의 수고와 노력과는 상관없이 성령으로 인해서 되어진 결과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성령을 보내셔서 자기 백성의 마음을 새롭게 창조하시고 그 마음을 받으시는 것이라면 그 어떤 것에도 우리의 수고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는 헌신이란 없는 것입니다.

건강으로 봉사한들 그 건강 역시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건강은 우리의 힘으로 지키고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주신 건강으로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것은 마땅합니다. 그것을 헌신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아는 마음이 바로 성령에 의해서 새롭게 창조된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이 마음을 기뻐 받으십니다. 하나님이 수고하신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안에서 완성된 사건들이 아닙니까?

우리가 하나님에게 헌신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하나님에게 헌신하신 것입니다. 그 헌신의 결과가 바로 신자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자는 누구입니까? 바로 그리스도의 헌신을 선포하고 나타내는 역할을 맡은 자들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헌신입니다.

드보라가 노래한 백성의 헌신이란 그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뭔가 했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에 사용되어지는 도구라는 뜻입니다. 일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그리고 부름 받은 자는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고 증거 하는 역할로 세움을 입은 것입니다. 이 일에 충성하는 것이 헌신입니다. 뭔가 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증거하고 나타내는 도구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헌신은 십자가에서 명백히 드러났습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삶을 오직 여호와의 말씀에 대한 순종으로만 사셨습니다. 자신의 포부와 꿈은 전혀 존재하지 않은 완벽한 헌신이었습니다. 이러한 헌신을 감히 누가 하겠다고 나서는 것입니까? 신자는 십자가 아래서 그리스도의 헌신을 바라보고 감사하며 찬송할 뿐입니다. 이것이 신자된 자의 헌신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을 이 땅에 남겨두신 것은 하나님을 위해서 위대한 일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일은 그리스도의 헌신으로 완벽하게 마무리되었기 때문에 남은 것은 그리스도의 헌신을 세상에 증거하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 일이 신자에게 주어진 것이고 그 일에 참여되어 살아가는 것을 헌신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헌신이란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세상에 세우신 도구답게 그리스도만을 증거 하는데 있습니다. 따라서 헌신은 특정 인물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서 그리스도를 알게 된 모든 자가 헌신하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교회의 헌신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살아서 계속 일하신다는 것을 증거 해야 할 단체가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지도자도 아니고 높임 받을 자도 아니며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총을 입고 살아가는 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증거 하는 증인의 임무를 수행할 자로 부름을 받은 자가 바로 신자입니다. 이 일에 참여된 것을 기쁘게 여기며 어디에서든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헌신으로 인해서 주어진 영원한 생명을 자랑하고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노래하고 영광을 드리는 것이 즐거이 헌신하는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