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 5:10-13 용사를 치심

인간은 어떤 형태든 전쟁을 하며 살아갑니다. 총 칼을 들고 상대방을 죽이지 않는다고 해도 사람은 누구를 만나든 상대방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상대방이 자기보다 한 수 아래라는 것을 확인함으로서 만족과 행복을 느끼기도 합니다. 이웃의 집을 방문했을 때도 자신이 소유한 가구과 그 집의 가구를 비교합니다. 그리고 내가 소유한 것보다 더 못하다는 판단이 내려질 때 자신이 더 위라는 것을 확인하고 승리감을 만끽합니다. 하지만 반면에 상대방이 자신의 것보다도 더 많은 것, 더 나은 것을 소유하고 있을 때는 패배감과 불행을 느끼면서 상대방이 소유한 것을 자신도 소유하고자 애를 쓰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현대인의 전쟁에서 무기는 모든 것입니다. 자신의 미모, 돈, 지식, 재능, 자식, 남편, 아내, 모든 것을 상대방을 누르고 자신보다 한 수 아래임을 증명하는 도구로 이용을 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 경쟁 상대를 염두에 두고 행동을 하게 되고 자신이 최고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살아갑니다.

전쟁에서의 승리는 용사의 몫입니다. 힘있는 자들만이 승리를 쟁취할 수 있고 힘이 없는 자는 항상 억압받고 눌리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전쟁에 참여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 스스로 용사이기를 바라고 또 용사 되기 위해서 부단한 노력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승리하기 위해서 살고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행복으로 살아갑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으로부터 출발하는 인간의 삶의 현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삶을 그리스도로부터 출발시킨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리스도에게 과연 전쟁이 있었습니까? 물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전쟁은 자신을 위한 전쟁이 아니고 타인과 삶의 질을 비교하는 전쟁도 아니며 힘을 소유하는 전쟁도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전쟁은 오직 세상의 죄를 드러내는 것에 있었습니다.

용사란 자신의 힘을 믿는 자를 말합니다. 힘이 있기에 자신의 힘을 믿고 스스로 신과 같은 존재로서 군림하고자 합니다. 이러한 힘 앞에 예수님은 힘없는 자로 등장해서 전쟁을 하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승리는 죽으심이었습니다. 힘에 굴복하지 아니하고, 힘을 이기기 위해서 스스로 힘있는 자되는 것도 추구하지 않고 다만 오신 그 모습 그대로 살아다가 죽으신 것이 그리스도의 승리입니다.

힘을 추구하지 않은 그리스도의 삶은 우리에게 힘이 곧 힘이 아님을 가르쳐줍니다. 힘이 힘이 아니라는 것은, 우리를 살리는 힘은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진정한 힘은 땅에 있지 않습니다. 사람들을 억누르고 굴복하게 하는 힘이 진정한 힘이 아닙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그리스도로부터 출발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이 힘을 인정하신다면 마음껏 소유하십시오. 여러분의 일생을 힘을 소유하기 위해서 소비한다고 해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힘을 거부하신다면 신자는 힘을 추구하는 삶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힘을 소유하기 위한 삶이 하나님이 거부하시는 삶이라면 아무리 힘을 소유한 용사가 되었다고 해도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자로 끝나는 인생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서 보이셨습니다. 용사가 아니고 영웅이 아니라 연약한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보내심으로서 하나님은 힘과는 전혀 연관이 없는 분이심을 증거 하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복음을 말한다는 교회가 힘이 있는 교회가 되기 위해 사람을 모으고 돈을 모으기에 급급하다면 그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모르는 교회를 교회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신을 찾아서 돈을 원하고 출세를 원하는 모든 것이 자신을 용사로 만들어 달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용사를 거부하시고 오히려 용사와 더불어 싸우시는 분이라는 것을 안다면 그래도 하나님 앞에서 용사 되기를 소원하겠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이 용사를 거부하신다는 그 증거를 본문을 통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지난주의 말씀에 이어서 본문도 드보라와 바락의 노래입니다. 드보라와 바락의 노래는 하나님의 승리로 인한 구원에 대해서 노래하는 것임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노래한다는 것은 그냥 입을 벌린다고 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승리, 즉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진심으로 체험한 자들이 부를 수 있는 노래인 것입니다.

물론 누구라도 하나님의 구원을 언급할 수 있고,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했노라고 장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심으로 하나님의 승리와 구원을 체험한 신자라면 분명히 나타나는 증거가 있습니다. 이것 역시 오늘 본문을 통해서 확인해야 할 내용입니다.

먼저 본문의 내용이 쉽게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용에 대해서 간단하게 설명을 하겠습니다. 10절에 보면 "흰 나귀를 탄 자들, 귀한 화문석에 앉은 자들, 길에 행하는 자들아 선파할지어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흰 나귀 탄 자들, 귀한 화문석에 앉은 자들은 이스라엘 안에서 상위 계층의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길에 행하는 자들이란 그들보다 아래에 있는 하위 계층의 사람을 의미합니다. 결국 이스라엘의 모든 계층의 사람들을 의미하면서 그들에게 선파할지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선파하라는 것입니까? 11절에 "활 쏘는 자의 지꺼림에서, 멀리 떨어진 물 긷는 곳에서도 여호와의 의로우신 일을 칭술하라 그의 이스라엘을 다스리시는 의로우신 일을 칭술하라 그 때에 여호와의 백성이 성문에 내려갔도다"라는 말씀을 보면 무엇을 선파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의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의로우신 일을 칭술하라는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을 다스리신 하나님의 의로우신 일을 노래하는 것이 곧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선파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활쏘는 자의 지꺼림이란 말에서 활쏘는 자는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야빈 왕의 군대를 의미합니다. 그들이 이스라엘을 모독하는 말을 지꺼림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즉 이방 군대가 이스라엘을 모독하는 말 앞에서 여호와의 의로우신 일을 칭술한다는 것은 이방 군대를 물리쳤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방 군대를 물리 쳤기 때문에 그들 앞에서 마음놓고 하나님의 의로우신 일을 칭송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멀리 떨어진 물긷는 곳이란 말도 같은 의미입니다. 물을 긷는 것은 여인들의 일입니다. 그런데 약한 여인이 멀리 물을 길으러 간다는 것은 이방인의 압제 아래 있는 상황에서는 매우 위험한 일이었을 것이며 따라서 야빈 왕의 압제에 있을 때는 물을 긷는 것조차도 마음대로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멀리 떨어진 우물에까지 간다는 것은 결국 이방인의 압제에서 해방되어서 평화로운 삶을 산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의로우신 일을 칭송할 수 있게 된 것은 어떤 이유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이방군대의 압제에서 해방시켜준 덕분입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신 일이란 이방인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해방시켜주신 구원의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이스라엘의 해방이라는 차원에서만 생각을 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해서 야빈 왕을 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대적이 누구인가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야빈 왕을 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본문에서 하나님이 전쟁을 일으키시는 대적이 누구인가를 아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에 무지하다면 결국 하나님을 위해서 산다는 신자가 오히려 하나님의 대적으로 존재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12절에 보면 "깰지어다 깰지어다 드보라여 깰지어다 깰지어다 너는 노래할지어다 일어날지어다 바락이여 아비노암의 아들이여 네 사로잡은 자를 끌고 갈지어다"라고 노래합니다. 드보라는 스스로 '깰지어다 깰지어다'라고 노래합니다. 깰지어다라고 노래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로우신 일을 깨달아 알 수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누구시며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밝히 아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것이 깨어 있는 것입니다. 깨어있을 때 하나님의 의로우신 일을 선파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무지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무지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도 알지를 못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단지 자신을 보호하고 지켜주시는 것으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에 대해서 깨어있지 못한 상태입니다. 깨어있는 신자는 분명히 한가지 보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용사를 치신다는 사실입니다.

13절에 보면 "그 때에 남은 귀인과 백성이 내려왔고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용사를 치시려고 강림하셨도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강림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용사를 치시는 것입니다. 야빈 왕을 치는 것이 아니라 용사를 치기 위해서 강림하셨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대적은 야빈 왕이 아니라 용사였던 것입니다. 이것을 볼 수 있는 자가 곧 깨어 있는 자라는 것입니다.

신자라면 누구나 하나님의 대적으로 존재하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대적이라면 하나님에 의해서 멸망을 당할 존재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데 그런데 누가 과연 하나님의 대적으로 존재하려고 하겠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이 누구를 치시는가에 대해서 귀를 기울어야 할 것입니다. 용사를 치기 위해서 강림하셨다는 말씀에서 '용사'란 결국 우리가 추구해야 할 모습이 아니라 오히려 버리고 벗어나야 할 것으로 인식이 되어져야 합니다. 이것이 깨어 있는 신자입니다.

용사는 자신의 힘을 믿는 자입니다. 하나님이 없이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여러분은 자신에 대해서 용사라는 생각은 들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부족한 것이 많고 나보다 잘나고 힘있는 사람이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용사가 아니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 여러분은 용사입니다. 하나님이 없이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사는 것 같습니다. 돈만 있으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고, 자식만 잘되면 나의 미래도 탄탄하다고 굳게 믿고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연약한 성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없어도 살아갈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강한 성도들로만 보여집니다. 하나님의 대적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용사가 아닌 힘없는 자로 존재하는 것에 대해 더 큰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깨어있지 못한 것입니다.

드보라는 깰지어다라고 노래합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신 일에 대해서 무지하지 않고 그 의로운 일을 깨닫고 선파하며 살아가는 자 되기를 노래합니다.

드보라는 연약한 여자입니다. 연약한 여자로서 이스라엘의 사사의 일을 하려면 힘이 필요하다는 것은 상식입니다. 남자들을 다스리고 이스라엘을 지도하기 위해서는 강한 리더십과 용사와 같은 면모가 필요한 것은 기정사실입니다. 그래야 백성들로 하여금 자신의 말에 복종하고 자신을 의지하도록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드보라는 하나님에게 힘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연약한 여자이기에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없다는 말을 하지도 않습니다. 드보라는 단지 연약한 여자로서 하나님을 의지했을 뿐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힘으로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려고 하셨다면 드보라가 아닌 드보라보다 더 힘이 있는 사람을 사사로 세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드보라를 사사로 세우신 것은 하나님의 일은 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 있음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깨어 있는 신자인 것입니다. 즉 신자는 힘으로 사는 자가 아니라 믿음으로 사는 자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는 힘있는 용사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힘없는 자로 만듭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곧 능력이고 힘이기 때문에 우리가 용사로 살아가야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강하신 분이시고 하나님이 용사시기 때문에 신자가 용사가 되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신자는 다만 하나님이 강하시고 능력이 있으심을 의지하고 살면 됩니다. 그런데도 내가 용사가 되겠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이 없이 자기 힘으로 살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이 하나님의 대적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용사를 치신 것은 하나님의 나라는 힘으로 사는 자를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힘있는 자되기를 소원하고 살아간다면 그것은 곧 깨어있지 못한 무지의 상태라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상태이기에 하나님이 왜 강림하셨는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강림하심은 옛날 이스라엘에만 있었던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강림하심은 육신으로 오신 그리스도로 명백하게 증거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그리스도로 증거된 것입니다. 그리고 용사를 치기 위해서 강림하셨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그리스도가 힘에 의해서 죽으심으로 드러났습니다. 결국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용사를 치심으로서 용사를 용납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보이셨지만 지금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해서 힘을 추구하는 사고방식이 곧 죄악이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단의 세력임을 뚜렷하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라면 힘을 추구하고 용사 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곧 죄악이며 그러한 자신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존재였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죄악의 세력에서 건지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힘을 원하는 자 힘으로 망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신자라고 자처하는 많은 사람들이 왜 그토록 힘을 원하며 그리스도를 찾습니까? 왜 힘을 사모합니까? 왜 남보다 뛰어난 용사가 되어서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려고 합니까? 다른 교회는 다 망해도 내 교회는 잘되야 한다는 사고방식은 어디에서 출발한 것입니까? 과연 그것이 예수님에게서 출발한 사고방식이겠습니까? 힘으로 망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들의 눈앞에 버젓이 살아있음에도 불구하고 힘을 추구하는 자신의 죄악을 깨닫지 못하는 이것이 깨어있지 못하는 무지이고 소경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에게 힘을 버리라는 요구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떻게 힘을 포기한 자로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기회만 있으면 힘되는 것을 붙들려고 하는 우리들이 아닙니까? 다만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힘을 추구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임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힘을 추구하는 여러분의 모습에서 멸망의 비참함을 발견하시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해서 자신을 멸망과 상관이 없는 사람으로만 생각하지 마시고, 용사를 선호하고 힘을 추구하는 여러분의 본질 속에서 멸망의 자식일 수밖에 없는 여러분의 실체를 발견하실 때 비로소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우리의 힘에 의해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의 희생의 피가 남다르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힘을 추구하고 힘을 포기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서 회개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깨어있는 신자이며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겟세마네라는 곳에 기도하러 가실 때 제자들을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무엇을 했습니까? 자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은 기도하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예수님과 함께 깨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육신의 잠을 자지 않은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실 때 예수님의 마음은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될 지경이었습니다.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는 것은 예수님의 이 마음에 함께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잠을 잔 것은 예수님의 마음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죄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죄를 모르기에 그들의 죄를 지고 죽으시는 예수님의 마음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잠자는 상태입니다.

깨어있지 않는 신자는 예수님을 모릅니다. 예수님을 모르기에 하나님 역시 알 수 없습니다. 결국 자신의 생각으로 하나님과 예수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나에게 힘을 실어주고 나를 영웅으로 만들어 주는 우상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예수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용사를 치기 위해서 강림하셨는데, 그 앞에서 나를 위대한 사람으로 힘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달라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에 대해서는 전혀 의식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예 하나님에게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 전혀 없는 분인 것으로 인식을 해버리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중요하고 내 뜻이 소중한 것이지 하나님의 뜻은 전혀 가치 없는 것으로 여겨버리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을 본다고 해도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발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잠자는 상태입니다. 그러기에 힘에 의해서 죽으신 예수님께 나와서 자신의 죄에 대해서 눈물을 흘리고 애통하는 것이 아니라 힘이 없는 자기 인생에 대해서 애통해하고 원망을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대체 약자로 오신 예수님의 마음을 생각하는 것이겠습니까? 십자가 앞에서 조금이라도 예수님의 마음을 생각한다면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안다면 힘을 원하는 자신의 죄의 모습만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용사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힘을 거부하는 나라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로 인해서 세워진 나라임을 알기에 여러분에게 힘을 추구하는 것이 죄임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의 구원과 승리를 체험한 신자라면 힘을 추구하고 용사 되고자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게 하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힘을 포기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서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깨어 있는 신자의 증거물입니다. 이러한 증거물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서 의를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가 무엇인가를 보이셨습니다. 승리란 힘으로 살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자유입니다.

용사를 치시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자가 깨어 있는 신자입니다. 용사를 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안다면 그도 역시 하나님과 함께 용사를 치는 싸움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누구를 치는 것입니까? 성령으로 인해서 새롭게 된 내가 힘을 추구하고 용사 되기를 소원하는 옛사람을 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에게서만 보여지는 선한 싸움입니다. 여러분의 뜻보다는 여러분의 마음보다는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마음을 소중히 여기십시오. 그럴 때 여러분은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 될 것이고 깨어있는 신자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