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 5:23-31 복과 저주

인간의 욕심이란 삶의 구석구석에 자리하고 있음을 느낍니다. 단지 우리들이 욕심이 욕심임을 의식하지 못하고 욕심에 이끌려서 자연스럽게 살아왔을 뿐이지 자신을 포기하지 못한 우리로서는 삶 자체가 이미 욕심이었으며, 욕심 안에서 허덕이고 욕심 안에서 힘들게 살아왔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눈으로 보고 듣고 행동하는 모든 것에 대해서 욕심이 발동하는 존재인가 봅니다. 그러한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고 있으니 믿음조차도 우리의 욕심이 담겨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욕심을 포기하지 못한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다니 지나가는 개가 웃을 일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표현이 너무 지나쳤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여러분에게 하고 싶은 말이 아니라 바로 제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입니다.

제가 16줄의 이 글을 쓰기까지는 무려 3시간 20분이 걸렸습니다. 한 페이지를 쓰고 지워버리고, 또 한 페이지를 쓰고 다시 지워버리고, 다시 또 한 페이지 반을 쓰고 또 다시 지워버리기를 반복을 하면서 3시간 20분이 흘렀습니다. 왜 지워버렸느냐고요? 물론 글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입니다. 그러면서 이번주 주보는 포기할까를 거듭 생각을 하면서 많은 생각을 해봅니다. 힘들다고 느끼면서 왜 하는지, 과연 누구를 위해서 설교를 쓰고 있는 것인지, 말은 성도를 위해서라고 하지만 혹시 나 자신을 위해서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많은 생각을 거듭하면서 결국 글에 매어 있는 제 자신을 발견합니다. 설교를 포기하지 못한 채 설교를 쓰고 있으니 마음에 안들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결국 저는 그리스도를 마음에 두고 설교를 쓰는 것이 아니라 저를 마음에 두고 설교를 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제 마음에 드는지 안드는지가 기준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설교에 대한 욕심인 것 같습니다.

멋있는 글, 제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글, 복음을 전하는 목사다움을 나타낼 수 있는 글을 의식했던 것은 아닌지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된 것입니다. 아무리 멋있는 단어를 사용을 하고, 문장을 멋있게 만들어 낸다고 해도 그것으로 여러분에게 생명을 줄 수 없음을 생각하지 못한 것입니다. 무익한 인간의 무익한 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설교를 통해서 복음을 남기고 그리스도를 남기고자 한 것이 아니라 멋있는 설교문을 남기고 빛나는 문장을 남기고자 하는 욕심이 담긴 것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이러한 글 역시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이 아닌지 조심스럽게 저를 살피게 됩니다.

이러한 제 자신을 살피면서 인간은 욕심에서 떠날 수 없는 존재임이 실감이 됩니다. 어떤 일을 하게 되면 아무리 그 시작은 선한 동기였다고 해도 결국은 자신의 만족으로 결론짓게 되는 것이 인간임을 다시금 깨닫습니다. 설교를 통해서 자기 만족을 느끼고, 글을 통해서도 자기 만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인간인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생명과 은혜는 설교로 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다시금 자각하며 설교를 쓰게 됩니다. 감사한 것은 설교로 생명과 은혜를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설교를 하지 말자는 생각으로 굳어진 것이 아니라 설교로 생명과 은혜를 줄 수 없음을 설교하자는 생각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무익한 자이기에 선한 것이 나올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 제가 해야 할 말인 것 같습니다. 고급스러운 말을 할 필요도 없고 단지 무익한 자로서 알게 된 그리스도만을 말하는 것이 제가 여러분에게 할 일임을 다시금 깨닫게 된 것에 대해서 참으로 감사함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는 무익한 자들입니다. 우리 중에 어느 분이 과연 하나님에 대해서 유익한 자로 살아갈 수 있습니까? 사사건건 자기 욕심을 발동하고 무엇을 해도 자신을 위해서 하게 되는 우리가 입으로 그리스도를 위한다는 말을 한다고 해서 과연 그리스도를 위한 자로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그리스도에게 도움이 되는 자로 살아가겠다는 발상 자체부터가 이미 자신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성경에서는 여호와를 돕는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23절에 보면 "여호와의 사자의 말씀에 메로스를 저주하라 너희가 거듭거듭 그 거민을 저주할 것은 그들이 와서 여호와를 돕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도와 용사를 치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도다"라고 말씀합니다. 메로스라는 거민이 어떤 거민인가는 알 수 없습니다. 메로스 거민은 이 본문에서만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메로스 거민이 어떤 거민이냐가 아니라 그들이 여호와로부터 왜 저주를 받았느냐 입니다.

여호와는 메로스를 저주하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메로스 거민이 여호와를 돕지 아니했다는 것 때문입니다. 여호와를 돕지 않았다는 것은 '여호와를 도와 용사를 치지 아니함이니라'는 말씀을 볼 때 이스라엘을 도와서 야빈의 군대를 치지 아니한 것을 의미한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성경에서는 메로스 거민이 여호와를 돕지 않았다는 이유로 저주를 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여호와를 돕는다는 것은 신자에게 있어서 아주 중대한 일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앞에서 제가 말씀드린 것과는 반대가 됩니다. 저는 앞에서 말씀드리기를 인간은 무익한 존재이기 때문에 여호와를 도울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지금의 우리가 여호와를 도울 수 있는 존재가 못된다면 과거 그 누구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지금의 우리나 메로스 거민이나 같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메로스 거민도 무익한 인간이기에 하나님께 도움이 안되는 존재임이 분명한데, 여호와는 그들이 여호와를 돕지 않았다는 이유로 저주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본문을 대하면서 참으로 무익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 우리들이 과연 여호와를 도울 수 있는지, 그리고 여호와를 도울 수가 있다면 과연 어떤 것이 도움이 되는 것인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분명히 우리는 무익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고, 어떤 일을 한다고 해도 결국 자신을 위해서 그 일을 하게 되는 것이 바로 욕심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의 실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도움이 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상식적인 차원의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여호와께 도움이 되는 것을 구제하고 헌금하고 봉사하는 차원으로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먼저 14절부터 보면 드보라는 이스라엘의 각 지파를 언급하면서 야빈과의 전투에 참여한 지파와 그렇지 않은 지파를 구분하고 있습니다. 가령 14절에서 "에브라임에게서 나온 자는 아말렉에 뿌리 박힌 자요 그 다음에 베냐민은 너희 백성 중에 섞였으며 마길에게서는 다스리는 자들이 내려왔고 스불론에게서는 대장군의 지팡이를 잡은 자가 내려왔도다"라고 말씀합니다. 마치 암호를 말하고 있는 것처럼 알 수 없는 말 같지만 사실은 전투에 참여한 지파를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브라임에게서 나온 자는 아말렉에 뿌리 박힌 자요'라는 구절은 에브라임 지파에서 이번 전투에 참여한 사람들은 아멜렉이 거주하던 땅에 정착한 사람들이었다는 뜻입니다. '베냐민은 너희 백성 중에 섞였으며'라는 말도 역시 베냐민 지파 중에서도 전투에 참여한 자들이 있다는 의미의 말입니다. 그리고 '마길에서는 다스리는 자들이 내려 왔고'라는 말도 역시 전투에 참여했다는 것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마길은 므낫세의 독자였습니다. 따라서 마길에서는 다스리는 자들이 내려 왔다는 것은 므낫세 지파에서도 군대의 지도자들이 전투에 참여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므낫세라고 말하지 않고 마길이라고 말하는 것은, 므낫세 지파는 반으로 나뉘어져서 요단의 동편과 서편에 거하게 되었기 때문에 므낫세라고 말하지 않고 요단 서편에 거하게 된 마길을 언급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므낫세라고 말하면 요단 동편과 서편을 모두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여러분의 성경 이해를 위해서 간단하게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이렇게 전투에 참여한 지파가 있는가 하면 17절에서와 같이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자기들의 편안함을 추구한 지파도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메로스 거민이 여호와를 돕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들을 저주하라고 하시는 것은 다만 메로스 거민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 이스라엘 모두, 그리고 오늘 우리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메로스 거민을 행한 저주가 아니라 누구든 여호와를 돕지 않은 자에 대한 저주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신자로서 여호와를 도우며 산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 되었습니다. 여호와를 돕지 않으면 저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여호와를 돕는 것입니까? 본문의 내용대로 한다면 드보라와 바락이 야빈 왕을 칠 때 함께 참여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근거는 24절부터 나오는 야엘의 이야기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메로스 거민은 저주를 받지만 야엘은 다른 여인보다 더 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25절부터 야엘이 시스라에게 우유를 대접하고 안심을 시킨 뒤에 말뚝을 박아서 죽인 것에 대해서 노래를 하고 있습니다. 물론 야엘이 공식적으로 군사로서 전투에 참여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야빈의 군대 장관인 시스라를 죽였다는 것은 이미 그 전쟁에 참여한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다.

이렇게 본문에서 나타난 복과 저주는 전투에 참여한 것과 참여하지 않은 것으로 구분이 됩니다. 전투에 참여한 것은 여호와를 도운 것으로 여겨져서 다른 사람보다 더 복을 누리게 되고, 참요하지 않은 사람은 여호와를 돕지 않은 것으로 인정돼서 저주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익한 종으로서 여호와를 돕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본문에서 말하는 전투에 참여함이 복이고 참여하지 않음이 저주라는 말씀에서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의 말씀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 보면 여호와는 단지 야빈 왕을 치기 위해서 강림하신 것이 아니라 용사를 치시려고 강림하셨음을 말씀드렸습니다(삿 5:13절). 용사를 치신다는 것은 여호와의 대적이 야빈에게 국한 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여호와의 대적은 용사이지 야빈 한 개인이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의 대적은 바로 우리 자신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욕망에는 용사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용사가 되고 싶고 용사로 살고 싶은 우리들의 욕망, 그것만으로도 우리 자신이 곧 여호와의 공격을 받아야 할 대적임이 증명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보지말고 바로 나 자신을 보자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서 욕심을 찾아볼 수 없다면, 힘있는 존재가 되어서 타인을 굴복시키기를 원하는 욕망이 없는 존재라면, 진심으로 여러분 자신에게 있는 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한분을 의지하고 살아간다면 여러분은 분명 여호와의 대적이 아닙니다. 그러나 반대라면 아무리 우리가 거부하고 부인한다고 해도 우린 틀림없이 여호와를 대적하는 원수들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의지한다' 나는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을 내세워서 끝까지 여호와의 대적이 아님을 주장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에 대해 결코 포기하지 않으려는 그 모습에서 결국 욕심만이 보여질 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포기하지 못하면 우린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를 믿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긴 제가 믿지 말라고 부추겨도 우린 이미 믿지 않는 자이기 때문에 그런 말도 의미가 없지만 말입니다. 제가 믿음을 포기하라고 말씀을 드리는 것은, 믿음을 자기 소유로 삼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믿으려고 할 때는 자신의 행함과 정성을 의식할 수밖에 없고 자신의 행함과 정성을 의식한 이상 그것은 이미 믿음을 자기 소유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론은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에 우린 그저 받게 된 것이지 우리가 믿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린 다만 여호와를 대적하는 원수였을 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용사를 치기 위해서 강림하셨고, 그리고 하나님이 치시는 용사가 곧 우리 자신을 의미한다면 결국 하나님의 전쟁에 참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이스라엘은 야빈을 치면서 하나님은 용사를 치신다는 것을 알아야 했고, 결국 이스라엘 자신이 하나님의 공격을 받아야 할 위치에 있음을 발견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야빈을 자기 자신으로 여기고 자신을 공격하는 마음이 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 전쟁의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용사를 치시는 여호와의 전쟁에 참여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그 의미가 명확해집니다. 내가 나를 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어떠함을 알게 된 자로서 세상을 힘으로 살고 자신을 미워하고 싫어하는 것이 곧 여호와의 전쟁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용사란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을 필요로 하며 살아가십니까? 이것은 지난주에 물었던 질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은 용사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그리스도가 필요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믿음에 대해서는 그들은 용사였습니다. 자신들의 열정과 부지런함으로 얼마든지 믿음을 지킬 수 있고 천국을 소유할 수 있는 힘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만약 여러분도 말로만이 아닌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고 사는 분들이라면 여러분은 그 무엇도 믿으면 안됩니다. 여러분의 기도도 헌금도 그 무엇도 의지하지 마십시오. 그 모든 것이 다 무익한 것으로 보여져야 합니다. 만약 여러분의 기도나 헌금이나 예배를 무익한 것으로 여긴다는 것에 대해서 반발이 된다면 그 이유는 기도 헌금 등의 행위를 여러분의 소유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행위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 자신을 치는 것이 여호와의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고 여호와를 돕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돕는다고 해서 우리들의 행위로 하나님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을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말씀드린 대로 무익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돕는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야빈을 치는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 하나님을 돕는 일이 되는 것은 전쟁은 승리는 여호와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전쟁에 참여해서 열심히 싸워서 여호와를 도와주라는 것이 아니라 승리는 여호와로 되어진 것임을 노래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를 돕는 것입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무익한 자임을 노래하라는 것입니다. 승리는 그리스도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 저주가 되는 것입니다.

전쟁에서 승리를 한다고 해도 그것이 다른 지파에게 득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것은 여호와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득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득이 되는 쪽으로 행동을 하는 것이 전쟁에 참여하지 않게 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의 삶은 어떻습니까? 우리들의 득을 생각합니까 아니면 여호와의 일을 생각합니까? 여호와의 이름이 드러나지는 것보다는 내 이름이 드러나고 자랑되어지는 것에 더 관심을 두고 살아가지는 않습니까? 이것이 여호와의 전쟁에서 멀어지는 모습임을 알아야 합니다.

야엘이 복을 받은 것은 여호와의 일을 도왔기 때문입니다. 자기 남편이 야빈과 친분이 있다는 것도 무시한 채 단지 하나님만 생각을 하고 행동을 하였습니다. 이것이 복있는 자의 행동인 것입니다.

용사를 치신 하나님이 실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우리보다 낮은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돕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이 살아가신 그 삶을 사는 것입니다. 가난해져라는 것이 아니라 낮은 자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편에 서서 힘을 가진 것, 위대한 용사된 것이 헛된 것임을 증거 하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자신부터 전쟁이 일어나야 합니다. 힘을 선호하고 나의 이름이 세상에 기록되기를 꿈꾸는 욕심이 곧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죄악임을 깨닫고 내가 바로 주님을 대적하는 무익한 자임을 가슴 깊이 깨닫는 것입니다. 그럴 때 세상 모두가 낮아지신 그리스도를 외면한다고 해도 자신의 무익함을 발견한 성도는 그리스도에게서 자신의 참된 가치와 생명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의 전쟁은 힘으로 사는 자를 치는 것입니다. 그 전쟁에 참여하고 하나님의 전쟁을 돕는 신자라면 여호와 편에 서서 힘을 치는 삶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힘을 포기하지 못하는 자신을 미워하게 되고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욕심이 어떤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자기 욕심 안에서 참으로 무익한 우리들의 실체가 보여질 것입니다. 스스로의 무익함을 알기 때문에 무엇을 해도 의로 여기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다만 낮아지신 그리스의 자리에서 세상의 헛됨과 영원한 생명의 소중함을 다시금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돕는 자의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