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 6:1-10 살아계신 하나님

본문을 보면 이스라엘이 또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다시 이스라엘을 7년 동안 미디안의 손에 붙이십니다. 이로 인해서 미디안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게 됩니다. 2절에 보면 이스라엘이 미디안으로 인해서 산에서 구멍과 굴과 산성을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즉 미디안을 피해서 산에 피난처를 만들어서 생활을 했다는 뜻입니다. 또 3절,4절에 보면 이스라엘이 파종한 때면 그들이 몰려와서 식물을 노략함으로 인해서 이스라엘의 생계에 큰 위협과 고통을 당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생활이 반복되는 가운데 이스라엘은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여호와께 부르짖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보고 있노라면 우린 금방 이스라엘의 죄와 하나님의 징계를 떠올리게 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징계로 인해서 하나님에게 부르짖고 회개를 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징계에서 구해주시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순서이고 짜여진 각본이기도 할 것입니다.

흔히 사람들이 어떤 어려움을 당하면 가장 먼저 생각하게 되는 것은 '혹시 이것이 하나님의 징계가 아닌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단 하나님의 징계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재빠르게 후속 조치를 취하게 됩니다. 그것은 빨리 하나님의 징계를 종결시킬 수 있는 행위를 내쪽에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죄가 무엇인가를 빨리 찾아내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회개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인해서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는 효력을 봤으니까 이제 그만 중지해도 괜찮다는 인상을 하나님에게 심어주고자 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과정 속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죄를 알게 된 자로서의 회개가 아니라 회개를 위한 회개, 즉 자신에게 일어난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조치와 수단으로서 하는 회개라는 점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유익과 편함을 염두에 두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징계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차원에서 하시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히 12:8절의 '징계가 없으면 사생자'라는 말씀도 단지 징계를 받았다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거가 된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징계를 통해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가르치신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 본문도 단순히 죄에 대한 징계로 이해하고 넘어갈 문제는 아닙니다. 하나님을 단지 죄를 지으면 벌주시는 선생님 같은 분으로 인식하고 지나친다면 그것은 성경을 크게 오해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사기에서 이스라엘이 악을 행하고 이스라엘의 악에 대해서 하나님이 징계하시는 것은 계속 이어지고 있는 내용입니다. 이러한 내용에서 우리는 무엇을 발견해야 합니까? 하나님은 죄를 용납하지 않고 벌주시는 분이니까 죄짓지 말자는 교훈으로 끝낼 문제들입니까?

저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징계하시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살아 계신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살아 계신 분으로 대하라는 것이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미디안으로 인한 고통을 견디다 못해 하나님을 찾아서 부르짖습니다. 어찌 보면 자연스런 현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도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울 때 하나님을 찾아서 부르짖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입니다.

교인의 상식으로는 어려움에 빠졌을 때 하나님을 찾아서 열심히 부르짖으면 하나님이 어려움에서 벗어날 해결의 길을 열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에 대해서 하나님은 우리들의 상식대로 행동하지 않으셨습니다. 즉 미디안을 물리쳐서 이스라엘을 다시 평안한 삶을 살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이스라엘의 죄를 책망을 합니다.

그 책망이 8-10절의 내용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한 선지자를 보내사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며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나오게 하여 애굽 사람의 손과 너희를 학대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너희를 건져내고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었으며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기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 너희의 거하는 아모리 사람의 땅의 신들을 두려워 말라 하였으나 너희가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느니라 하셨다 하니라"는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과거에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구출하신 사건을 언급하시면서 이스라엘의 죄가 무엇인가를 책망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이스라엘의 잘못된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여 내시고 이스라엘을 학대하는 모든 자들의 손에서 건져내시고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시고 아모리 사람의 땅의 신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목소리를 청종치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소리를 청종치 않았다는 것은 하나님을 살아 계신 분으로 대접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약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살아 계신 분으로 대접을 했다면 과연 어떤 태도의 삶을 보이게 되었을까요? 과거 자신들의 조상을 애굽에서 구출하여 내시고 가나안 땅의 거민들을 쫓아내시고 그 땅을 자기들의 것으로 주신 하나님이 지금도 살아 계셔서 우리들과 함께 동행하신다는 것을 알았다면 과연 이스라엘은 미디안의 압제에 대해서 두려워하고 단지 자신들의 고통만을 생각하였을까요?

하나님의 징계는 이스라엘에게 고통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부르짖습니다. 이스라엘은 징계 속에서 자신들의 고통만을 생각합니다. 자신들을 고통스럽게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루속히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수준이었다면 오늘 우리는 과연 어떠합니까? 이스라엘보다 낫다고 할 수 있습니까? 어쩌면 우리는 고통 속에서조차 하나님을 찾을 줄 모르는 이스라엘보다 더 못한 자들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죄지으면 징계하신다는 경고의 말씀이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현재 처한 어려운 상황이나 고통을 하나님의 징계로 생각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이 징계하셔서 되어진 결과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징계이든 징계가 아니든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처한 상황이 징계면 어떻고 징계가 아니면 어떻습니까? 징계가 아니면 마음이 좀 편합니까? 하나님에게 벌받은 것이 아니어서 고통에 대해 떳떳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까? 결국 이 모두가 자신의 체면과 신앙의 자존심을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까? 다른 사람이 자신의 어려움을 가지고 '하나님의 징계다'라고 할 때 발끈하는 이유가 바로 자기 자존심 아닙니까?

사실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의 징계 속에서 살아가야 마땅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뭐 하나 잘한 것이 없는 우리들입니다. 큰소리칠 것도 없고 자존심 상해할 것도 없습니다. 그냥 우리들의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서면됩니다. 징계 받아 마땅한 자로 서시고, 온갖 창피는 다 당해도 마땅한 자로 서십시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접하는 신자의 태도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징계 속에서 자신의 고통에만 염두를 둡니다. 미디안의 압제를 받아 마땅한 악한 자임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직 자신들이 믿는 하나님이 고통에서 건져주실 것만을 기대하고 부르짖은 것입니다. 자신들이 여호와 앞에서 악을 행한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고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들이 여호와 앞에서 어떻게 살았는가는 생각하지 않고 조금만 힘들어도 힘들다고 아우성입니다. 왜 이렇게 고통스럽게 하느냐고 원망을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접하지 않는 모습입니다.

여호와께 부르짖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구출하신 이야기를 하시면서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다고 책망을 하십니다. 목소리를 청종치 않았다는 것은 단지 하나님의 말을 듣지 않았다는 의미로 해석을 하기보다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접을 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해석을 해야 합니다.

자식이 부모를 부모로 공경을 하는 것은 부모의 말에 대해 청종을 하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부모에게 용돈을 주고 좋은 집에서 살게 한다고 해서 부모 공경이 아닙니다. 부모의 말씀에 대해서 청종을 한다는 것은 아직 자신을 부모의 간섭 아래 있는 존재로 인식을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부모의 간섭을 벗어난 자식은 부모의 말을 청종하지 않습니다. 이제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하겠노라고 선언하면서 부모로부터 독립을 해버립니다.

마찬가지로 신자가 하나님의 말씀에 청종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간섭에서 벗어나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바로 그런 상태였습니다. 하나님의 간섭에서 벗어나 제멋대로 살아가는 삶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자신들의 힘으로도 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그들을 미디안의 손에 붙이신 것이 과연 단지 벌을 주기 위한 것이었을까요? 아닙니다. 자신들의 힘을 믿으면서 하나님의 간섭에서 벗어나 홀로 살아가고자 하는 이스라엘을 미디안에 붙여서 7년 간 고생을 하게 하신 것은, '너희들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아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삶이 누구의 간섭 아래 있는가를 깨달아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로 하여금 미디안의 압제를 받게도 하시고, 그 압제에서 벗어나게도 하시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미디안의 압제를 통해서 세상은 자신들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또한 인생이란 하나님의 간섭 아래 있음을 발견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럴 때 그들이 하나님을 찾고 부르짖는 것도 바뀌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은 인생이 하나님의 간섭 아래 있음을 발견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만약 인생이 하나님의 간섭 아래 있음을 안다면 자신들의 고통을 해결해달라는 기도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간섭하시는 인생이라면 하나님의 뜻대로 하실 것이고, 우리가 기도한다고 해서 마음을 바꾸시거나 뜻을 달리 하실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기도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간섭하시는 인생임을 잊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아가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면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은 신자로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믿습니까? 믿으신다면 과연 여러분의 삶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증거 하는 삶입니까? 사실 우리는 삶에서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확인하고 그 하나님을 증거하며 살아가려고 하기보다는 내 자신이 살아있음을 증거하기 위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믿는 신자라면 어떤 힘에 대해서도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어떤 힘도 하나님의 능력을 초월하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미디안에 대한 두려움이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보지 못한 결과이듯이 오늘 우리들의 두려움 역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보지 못한 결과임을 알아야 합니다.

6절에 보면 이스라엘이 미디안을 인하여 미약함이 심하다고 말합니다. 미디안은 이스라엘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강한 힘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들을 보면서 스스로 미약하다는 것을 느낀 것입니다. 그들의 부르짖음은 아마 자신들의 미약함에 대한 한탄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미디안을 이길 수 있도록 힘을 달라는 부르짖음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자신들을 압제하는 미디안에 대해서 하나님이 원수를 갚아달라는 호소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부르짖음이든 그 시작은 자기 자신일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이 중요하고 자신이 중심인 이상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들려질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해도 귀에 들어오지 않을 것입니다. 관심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스라엘의 나약함은 결코 미디안에 비해 소유한 것이 적은 것에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소유로 인한 힘을 준다고 해도 결국 그들은 자기보다 더 힘이 센 다른 민족을 대할 때 다시금 나약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나약함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징계 속에서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그분이 자신들을 간섭하고 있음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두려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신자의 강함은 힘의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간섭하시는 인생임을 잊지 않는다면 신자는 어떤 힘 앞에서도 자신이 미약하다는 좌절을 갖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가 진실로 강한 자입니다.

이런 이유로 신자는 하나님의 징계를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신자가 징계를 두려워한다면 그것은 징계로 인해서 주어지는 고통을 피하고 싶은 욕망에서일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에게 있어서 징계는 하나님이 살아 계신 증거입니다. 내 인생이 하나님의 손에 의해 간섭받고 있는 증거입니다. 다만 주어지는 고통에 몰두하다 보니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길을 걸어가다가 넘어지는 것 하나에서까지 살아 계신 하나님이 간섭하고 계심을 배우십시오. 억지로 그렇게 인정하려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분명 삶의 구석구석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이 여러분을 간섭하는 이상 여러분은 그 무엇에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돈이 생명이 아닌 이상 돈을 부러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의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한 우리 스스로의 모습이 발견될 때 하나님 앞에서 할말이 없는 자로 설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그러한 우리가 이만큼 살고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 깨달아지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행복입니다. 이러한 행복으로 살아가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