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 6:11-18 큰 용사

세상의 상식은 일을 하기 위해서는 '힘'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을 맡기는 사람은 일을 감당할 수 있을지 그 사람의 능력과 힘을 보고 맡기는 것이고 일을 맡은 자 역시 그 일을 제대로 감당할 수 있을지 자신의 능력과 힘을 보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이치는 초등학생이 대학 교수가 될 수 없는 것이고 자기 한몸 가누기조차 힘든 나약한 자를 군인으로 부르지 않는 것입니다. 대학 교수를 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지식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교수로서의 합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지 시험하게 되고, 군인으로 부르기 위해서는 건강에 이상이 없는지를 살피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일은 분명 능력과 힘이 필요합니다. 아무나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다릅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도 그만한 능력과 힘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어떤 일을 맡기면 '나는 너무 부족해서 이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라는 말을 하는 것을 많이 듣게 됩니다. 초등학교밖에 못나온 분에게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직을 맡겼을 때 대다수의 사람은 '나같이 못배운 사람이 무슨 교사를 하는가?'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상하게 사람들은 몸으로 때우는 일에는 겁을 내지 않으면서 남을 가르치는 일에 대해서는 뒤로 피하고 물러서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남들 앞에 서서 뭔가 가르친다는 것에 두려움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자신이 남들 앞에 서서 가르칠 때 자신의 무식이 폭로될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모세처럼 말주변이 없어서 인도자로서의 일을 피하려고 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이 그 사람의 재능과 능력을 따져가면 일을 맡기는 것을 본적이 없습니다. 오늘은 이점을 생각함으로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나 봉사하는 것에 대한 우리들의 잘못된 시각들이 수정될 수있기를 바랍니다.

본문은 이스라엘의 다섯 번째 사사로 부름 받은 기드온의 이야기입니다. 사사란 이스라엘의 재판장의 위치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지도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기에 남들과는 다른 특별한 능력과 재능을 가진 사람이 택함을 입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가 쉽습니다. 지도자란 남과 다른 재능과 능력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등장하는 기드온은 우리들의 상식과는 전혀 맞지 않는 예외의 인물입니다. 예외의 인물이 하나님의 택함을 입은 것이 기드온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인간의 상식을 깨뜨리는 하나님의 선택의 행위를 기드온에게서도 유감 없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12절에 보면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라고 말씀을 합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을 '큰 용사'라고 부릅니다. 이것을 보면 이미 기드온이 힘과 능력에 있어서 큰 용사이기 때문에 그를 불러서 이스라엘의 사사로 삼았다는 생각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주기도 하지만, 당시 기드온이 하고 있었던 일을 본다면 그러한 가능성도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11절에 보면 "여호와의 사자가 아비에셀 사람 요아스에게 속한 오브라에 이르러 상수리나무 아래 앉으니라 마침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에게 알리지 아니하려 하여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더니"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을 보면 기드온이 여호와의 사자를 만날 당시 밀을 타작을 하고 있었는데 포도주 틀에서 타작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을 하고 있었다는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기드온은 용사의 자질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 살펴본 대로 미디안 사람들은 곡식을 수확할 때가 되면 이스라엘을 찾아와서 수확한 것을 모두 탈취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기드온은 밀을 몰래 타작을 하기 위해서 포도주 틀을 이용해 타작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만 봐도 기드온에게는 용사로 불리고 사사로 세움을 받을만한 자질이 없었음을 능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을 향해서 큰 용사라고 부른 것에 대해서 우리는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용사란 우리들의 자질이나 능력 힘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의식은 항상 우리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는 자질을 생각하도록 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능력과 자질을 생각함으로서 내가 저 일을 감당할 수 있을지 없을지를 판단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분명 용사란 힘있는 자입니다. 그러나 그 힘은 우리가 생각하는 세상의 조건들이 가져다 준 힘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용사의 힘은 세상이 주는 것도 아니고 우리들이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힘은 여호와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서 용사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개의 경우 이 사실에 대해서는 부정을 하지 않지만 실제 삶에서는 부정을 해버립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 자체를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용사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에는 인정을 하면서도 용사로 살아가지 못한다면 분명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에 대해서 믿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기드온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에 대해서 부정을 합니다. 그 이유는 13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나의 주여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미쳤나이까 또 우리 열조가 일찍 우리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한 그 모든 이적이 어디 있나이까 이제 여호와께서 우리를 버리사" 이 말씀대로 기드온은 여호와께서 자신들과 함께 하셨다면 이러한 일, 즉 이스라엘이 미디안에게 압제를 당하고 고통을 겪으면서 몰래 밀을 타작해야 할 정도의 상황이 일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옛날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신 이적을 행하신 것처럼 자신들도 그러한 이적으로 미디안의 손에서 해방시키는 것이 당연한데 그러한 이적이 없는 것을 보니까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지도 않고 오히려 자신들을 버리신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결국 기드온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부터 인정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자신의 주변 환경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표적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기드온의 이런 모습이 바로 오늘 우리의 모습 그대로를 대신하고 있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기드온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함께 하심은 환경의 개선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신 분이라면 그것과 같은 이적이 우리들에게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가 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지금도 성경을 대하는 많은 사람들이 성경에 있었던 것과 같은 의미의 사건이나 이적이 자신에게서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셨다면 오늘 미디안에게 압제를 당하는 우리를 이끌어 내시는 것이 마땅하다는 기드온과 똑같은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역시 하나님이 함께 해주기를 기대하는 것은 있을지언정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살아가는 것은 없는지도 모릅니다.

많은 신자들의 기도를 들어보면 그러한 생각을 가지게 합니다. 언제나 하나님이 함께 해달라는 기도는 하는데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있는 기도는 듣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자신을 한번 돌아보십시오. 과연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사는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함께 해주시기를 기대하고 살아가는 것입니까? 우리가 기대하는 하나님이 함께 하심은 결국 기드온처럼 환경의 개선이 아닌지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분명 나를 좋은 환경으로 인도해 가는 것이 마땅하다는 생각을 포기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의 환경이 더 나아지고 나쁜 것이 사라지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확인하려는 것은 아닌지요? 그러나 그것은 결국 자신의 환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싶고 그 믿음으로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고 싶다는 의도이기보다는 좋은 환경에서 편안하게 살고 싶은 욕망이 아닌지요?

과연 여러분은 지금까지의 삶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을 수 있는 그 어떤 일도 없었다고 생각되십니까?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마치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넌 엄청난 이적을 체험함으로서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을 분명히 확인하였으면서도 불구하고 광야에서 겨우 먹을 것이 없는 것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홍해를 건넌 놀라운 체험도 결국 자신의 배가 고프고 목이 마르고 먹고 싶은 것을 제대로 먹지 못할 상황에 처하자 잊어버린 것입니다. 결국 인간이란 계속해서 자신의 편안함과 행복을 즐기고자 할 뿐 삶에서 하나님을 확인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자 하는 의도는 전혀 없는 존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드온의 모습에서 이러한 인간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에 대해서 믿지를 못하는 기드온은 결국 자신을 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는다면 그는 하나님의 전능하심, 하나님의 능력이 자신을 도우신다는 것을 믿는 신자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고 때문에 자신은 무능력하고 자질이 없고 힘이 없다고 해도 상관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그분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지 못하던 기드온은 힘과 능력을 자신에게서 찾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도우시지 않는다면 결국 자신의 힘으로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기드온은 15절과 같은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비 집에서 제일 작은 자니이다"

기드온의 이 말을 단지 불신앙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맙시다. 물론 불신앙이라는 말을 할 수도 있지만 불신앙이라고 압축해서 결론지어 버리면 기드온의 문제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넘어가 버릴 수 있습니다.

기드온의 문제는 앞에서 말씀을 드린 대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지 못함에 있었던 것입니다. 전능하신 분, 능력이 있으신 분을 의지하지 못함으로서 자신에게 있는 힘을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바로 그러한 문제를 가진 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드온이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지 못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기드온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표징을 자신의 환경에서 찾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자신들의 악한 환경이나 상황이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런 생각이었기 때문에 기드온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생각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함께 하심은 우리들의 환경이나 상황을 나쁜 것에서 좋은 것으로 바꾸어 주기 위함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신자로서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린 결국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전혀 믿지 못한 채 신앙의 껍데기만 둘러쓴 신자아닌 신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함께 하심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누군가를 택하시고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하십니다. 인간의 자질이나 능력으로는 되어질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기에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의 환경과 상황의 변화를 통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확인하려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기드온을 '큰 용사'라고 말씀하는 것에서 우린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분명 용사로서의 자질이 없는 기드온을 불러서 용사로 쓰신다면 드러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몰래 타작을 하는 기드온의 성품을 보면 기드온은 당시 주위 사람들에게도 용사의 자질을 보이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전혀 용사 같지도 않은 기드온이 용사로서 행한다면 사람들은 기드온을 통해서 무엇을 발견하겠습니까? 만약 평소 기드온이 용사처럼 행했다면 칭송되는 것은 기드온의 용사와 같은 자질일 것입니다. 기드온이 미디안을 물리친다고 해도 사람들은 그것을 기드온이 자기 힘으로 한 일로 여길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전혀 용사의 자질이 없는 사람이 용사의 모습을 보여준다면 사람들은 용사 되게 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기드온을 큰 용사라고 부른 것은 하나님이 용사 되게 하신다는 것을 전제한 말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결국 큰 용사로서 부름 받은 기드온에게 필요한 것은 힘이 아닙니다. 자질도 아니고 하나님의 일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한 것도 아닙니다. 기드온이 약자라면 그냥 약자로 있으면 됩니다. 약자로 있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돕는 것이 됩니다. 용사에게 필요한 힘은 하나님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용사란 우리 힘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용사입니까? 자기를 키우려고 하지 않고 약하면 약한 대로 못나면 못난 대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살아가는 신자입니다. 그가 큰 용사입니다. 따라서 기드온에게 큰 용사라고 부르신 것은 '너를 이러한 인간으로 만들겠다'는 하나님의 의지가 부여된 부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의지가 부여된 부름이라면 그것은 이미 되어진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의지는 어떠한 방해에도 불구하고 되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전지전능인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참으로 강한 믿음입니다.

자신을 보면서 힘이 있다고 생각되고 뭔가 일을 잘하고 있다고 여겨지면 힘이 나고 자신감이 생기는데, 자질이 없고 일도 잘 못하고 하는 일도 안된다고 여겨질 때 낙심해 버리고 포기해 버린다면 결국 자신의 힘으로 사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일이 안되고 막히고 자신이 무능하다는 것이 드러난다고 해도 낙심하지 않게 됩니다.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신자가 곧 큰 용사입니다. 자신의 무능과 연약함을 보지 않고 하나님만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무능과 연약함을 인정하면서도 낙심하지 않는다는 것은 참으로 강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자신감이 없으면 되어지지 않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자신감이 자신의 힘에서 나온 것이라면, 힘이 있다고 여겨지면 강하고 힘이 없다고 여겨지면 약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힘을 믿는 자는 용사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강함이 자신의 힘에서 나온 것이라면 그 힘만 꺾어 버리면 결국 강함도 꺾여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누구에게도 꺾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힘으로 삼는다면 그는 자신의 조건이나 자질과 상관없이 강한 자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용사란 자신의 강함을 증거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강하신 분임을 증거 하는 하나님의 사람을 말합니다. 분명 자신의 강함이 증거될 때 그에 따른 쾌감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입니다. 결국 나보다 강한 자를 만나면 자신의 약함을 실감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자신이 강해지는 것에 기쁨을 두려고 하기보다는 하나님이 강하신 분이라는 사실에 기쁨을 두고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그가 바로 큰 용사인 것입니다.

약한 자로 존재하는 것이 싫습니까? 힘으로서 많은 사람을 이기고 그들을 굴복시키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까? 내가 더 낫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 충동이 있습니까? 누구에게든 지기 싫고 꼭 이기고 싶은 유혹이 있습니까? 약자로 산다는 것이 죽기 보다 싫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합니까? 그렇다면 다시 한번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봅시다. 어리석은 우리들을 깨우치는 것은 주님의 십자가입니다. 우리들이 갖기 싫은 모든 것을 가지시고 스스로 약자의 자리에서 사신 주님의 십자가가 우리들에게 외치는 것은 무엇일까요? 오늘 그 음성을 듣고 돌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