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 6:14-24 표징

우리나라의 영어 교육에 많은 문제가 있다는 지적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있어왔던 일입니다. 중학교부터 대학까지 10년을 영어를 배웠으면서도 외국 사람을 만나면 말 한마디하지 못하고 쩔쩔 매는 것이 우리나라 영어 교육의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결과를 가져온 것이 학교에서의 영어 교육이 너무 문법에만 치우친 결과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실제 생활에서 활용할 수 있는 영어 교육이 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장을 분해하고 해석하는 것에는 능수 능란하지만 실제 대화는 전혀 하지 못하는 벙어리 영어라는 것입니다.

갑자기 영어 교육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우리나라 영어 교육의 현실을 비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영어 교육의 문제가 마치 오늘날 교회에서 성도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문제로 생각되어지기 때문입니다.

성경, 즉 하나님의 말씀은 천국을 가기 위해서 시험을 치기 위한 문제집이 아닙니다. 성경을 잘 공부하고 성경에 대해서 잘 알고만 있으면 신앙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들의 삶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단지 우리가 공부해야 할 과목으로 이 세상에 남겨진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 학교에 가면 '성경'이란 과목이 있고 주일에 교회를 가서도 목사에게 확인 도장을 찍어야 점수가 올라가게 되어 있는 것으로 기억을 합니다. 결국 아이들은 성경이나 교회출석을 점수를 얻기 위한 것으로만 생각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해서라도 성경을 가르치고 교회를 다니게 하겠다는 의도는 이해를 하지만 단지 교회를 나가게 하고 성경의 지식을 가르치는 것으로 끝난다면 결국 그들의 생활에서 과연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면 분명 깊이 생각해 봐야 할 문제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기독교 학교에만 국한된 문제라 할 수 없습니다. 교회의 문제이고 성도의 문제입니다. 제가 목사로서 답답한 것 중 하나는 제가 설교한 말씀이 여러분의 삶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제가 설교한 대로 살아가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아니라, 예배당에 앉아서 말씀을 듣는 것이 실제 삶으로 연결되어지는 것이 어느 정도인지 궁금한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여러분의 삶을 모르니 알 수 없는 것이 답답할 뿐입니다. 여러분과 함께 살수도 없는 것이고 그렇다고 여러분을 졸졸 따라다닐 수도 없는 것이 아닙니까?

결국 문제는 여러분 자신입니다. 예배당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맞아' '그렇게 살아야지'라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고 해서 신앙이 다된 것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맞다고 인정한 그 말씀 하나하나를 가지고 삶을 점검하고 두드려보고 생각하는 과정이 분명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과 삶이 연결되어 있어야 하고, 말씀이 여러분의 삶을 간섭하는 위치에 있어야 합니다. 삶을 간섭하지 못하고 다스리지 못하는 말씀은 말씀이라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여러분을 간섭하시고 함께 하고 계시는데 정작 신자가 삶에서 말씀을 벗어버린 채 살아간다면 그것은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는 삶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10년 동안 영어를 배웠으면서도 외국인과 대화 한마디하지 못하는 벙어리 영어처럼 수십 년을 성경을 보고 교회를 다니고 설교를 들었으면서도 불구하고 삶에서 다가오시고 만나고자 하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지나쳐 버리고 하나님과 대화할 수 없는 상태라면 그것이야말로 벙어리 신자가 아니겠습니까?

물론 실제로 하나님을 만나서 대화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가 어디에서 하나님을 만납니까? 예배당이니까? 성경책 속입니까? 아닙니다. 삶입니다. 여러분이 살아가는 모든 삶의 현장이 곧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는 현장입니다.

삶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삶의 질과 환경은 다양하지만 동일한 것은 어떤 삶이라고 해도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삶의 질이 좋든 나쁘든 상관없이 하나님은 동일하게 모든 삶에서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식적으로 영어를 배웠기 때문에 실제 대화를 하지 못하게 된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지식의 차원에서 가르치고 배운 것으로 인해서 하나님과 대화를 하는데는 무기력한 성경이 되버린 것이 오늘 우리들의 현실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배당에만 존재하고 실제 삶에서는 사라져 버린 하나님의 말씀, 참으로 안타까운 문제입니다.

여러분과 함께 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말씀입니다. 이상하게 들려질 수 있겠지만 눈에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을 추상적으로 상상하면서 막연하게 '나와 함께 하시겠지'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많은 신자들의 신앙이 힘이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나 함께 하심을 막연하게 상상만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확신이 없으면서 다만 교회를 다니고 복음을 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와 함께 하실 것이다'라는 추측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함께 하심은 무한한 능력과 힘으로 작용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무기력한 모습만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하는 것이 하나님이 아니라 말씀이라는 말의 뜻은, 말씀으로 오신 하나님이 말씀 안에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때문에 추상적으로 하나님을 생각하지 마시고 말씀에서 하나님을 만난다면 여러분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삶에서 얼마든지 만나고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능력은 말씀 안에 있는 것이지 하늘에서 기회를 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능력이 아닌 것입니다. 그렇다면 말씀과 함께 살아가는 신자는 곧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가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제가 여러분에게 간곡히 부탁을 드릴 것은 예배당의 설교로 그치는 말씀이 되지 않도록 하시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을 간섭하고 인도하고 가르치는 말씀이 되도록 하시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여러분은 분명 하나님의 능력이 어떤 것인가를 체험하게 될 것이고, 삶에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 이러한 삶이 아니라면 그분의 하나님은 머리에만 존재할 뿐입니다. 머리에만 존재하기 때문에 삶에서 어떤 문제가 발생하고 부딪힐 때 전혀 하나님과 대화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일하시고 있는 현장을 깨닫지도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흔히 신자가 어떤 문제가 있게 되면 '하나님 나와 함께 해주십시오'라는 기도를 하게 됩니다. 이것이 결국 문제 속에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문제 속에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한 신자라면 함께 해달라는 요구를 하기보다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를 묻게 될 것입니다.

문제를 가져오시고, 문제에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한 신자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능력은 문제가 해결되는 것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즉 물리적인 힘을 능력으로 이해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 속에서 하나님을 만난 신자는 문제 해결을 능력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 속에서 자신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고 불평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을 능력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만난 자와 만나지 못한 자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말이 길어 졌지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우리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지나쳐 버리는 문제점일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고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문제점은 우리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을 드린 대로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서 큰 용사라고 부릅니다. 도저히 용사로 불려질 수 없는 나약한 인간을 용사라 부른 것은 능력이 기드온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신다는 말을 한 것입니다. 결국 용사란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는 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는 믿음이 곧 용사로 불릴 수 있는 힘이라는 것입니다.

14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를 돌아보아 가라사대 너는 이 네 힘을 의지하고 가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고 말합니다. 네 힘을 의지하라는 것은 기드온에게 미디안을 물리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 곧 기드온에게 힘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기드온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에 대해서 믿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기드온이 살아오면서 하나님에게 제사를 드리고 제물을 바치기는 했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믿음이 없었음을 보여줍니다. 즉 반복되는 제사라는 의식 속에서 '나는 이스라엘 사람이다. 우린 하나님을 믿는다'는 생각은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을 만난 삶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들의 모습일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에서 수없이 반복되는 예배들, 귀찮을 정도로 주어지는 행사나 해야 할 교회 일들(물론 은석교회의 상황과는 거리가 먼 얘기지만 안한다고 해서 믿음이 좋아지는 것도 아님을 잊으면 안됩니다)을 성실히 실천하면서 '나는 신자다'는 생각은 있을 수 있지만 정작 삶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기드온처럼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말씀에 대해서 믿음 없음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17절에서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내가 주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와 말씀하신 이가 주 되시는 표징을 내게 보이소서"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답답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동안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표징이 없었습니까?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끊임없이 사라지지 않고 함께 한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그야말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증거 하는 실제적인 증거물이었으며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되어질 수 없는 사건들로 이어지는 역사이지 않습니까?

물론 표징을 보여달라는 기드온의 입장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기드온에게 나타난 여호와의 사자는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신기한 천사의 모습이 아니라 그냥 보통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즉 기드온은 사람을 만난 것입니다.

창세기 18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만난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나 그 때 하나님은 사람의 모습으로 아브라함을 만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롯을 구하기 위해서 나타났던 천사도 그냥 사람이었음을 볼 때 기드온에게 나타난 여호와의 사자가 보통 사람의 모습이었다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기드온이 믿을 수 없었던 것은 자신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사람이 자신을 큰 용사로 부르면서 하나님이 함께 하니까 미디안 사람을 치라고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여호와의 사자가 보통 사람이 우러러볼 수 없는 신기한 모습으로 다가왔다면 과연 기드온이 표징을 보여달라고 했겠습니까? 기드온은 여호와의 사자가 자신과 다를 바가 없는 보통 모습이었다는 것에 믿음이 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표징을 보여 달라고 요구를 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드온의 평소의 삶이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는 삶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평소의 삶에서, 즉 보통의 삶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대화하는 삶이 아니었기 때문에 보통 사람의 모습으로 다가오는 여호와의 사자에 대해서 믿음을 가지지 못했던 것입니다. 특이한 일이 있어야만 하나님의 일로 여기는 사고방식이었기 때문에 표징을 요구한 것입니다.

우리 역시 기드온과 같은 모습이 아닙니까? 평소 살아가는 보통의 삶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우리 역시 하나님이 함께 하심에 대해서 기드온과 같은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큰 문제가 터졌습니다. 목사가 찾아와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으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를 보여달라'고 말을 했다면 결국 그 사람은 지금까지의 평소의 삶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결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 밖에 안됩니다. 그냥 보통의 삶이었기 때문에, 남들도 똑같이 살아가는 삶이었기 때문에, 뭔가 특별한 것이 없다고 여겨지는 삶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삶이란 항상 특이하고 극적인 것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고칠 수 없는 병이 들었다가 나았다든지, 죽을 뻔한 상황에서 극적으로 살아났다든지, 망할 뻔한 회사가 다시 일어섰다든지, 이러한 극적인 상황들이 있을 때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통의 삶에서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드온이고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통의 삶에서 하나님이 다가올 때 '표징을 보여 달라'는 요구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생각하는 보통의 삶이란 결코 우리가 이해하는 보통의 삶이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고, 남들과 똑같은 삶인 것처럼 여겨질지 모르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의 결과인 것입니다. 그런데 날마다 반복되다 보니까 그저 보통의 것으로 여겨져 버린 것입니다. 중병이 들어서 나은 것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표징이라면 왜 날마다 건강하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이 함께 하신 표징임을 깨닫지 못합니까? 그렇기 때문에 기드온처럼 하나님이 함께 하심에도 불구하고 항상 표징을 구하고 하나님이 함께 해달라고 부탁을 하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시는데, 바로 여러분의 옆에 계시고 여러분의 가는 곳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데, 정작 여러분은 하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이 나에게 오셔서 함께 해달라고 부탁을 하고 있다면 하나님으로서는 참으로 답답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를 부탁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분을 만나고 그분과 대화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삶이 계속된다면 특별히 다른 표징을 구할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날마다 하나님을 만나고 대화하는 삶이라면, 설령 어떤 문제가 발생한다고 해도 하나님이 함께 해달라는 요구를 하기보다는 이미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는 믿음 안에서 그 문제를 바라보게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문제가 있다고 해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지 못해서 허둥대지도 않을 것이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지 안하시는지 몰라서 낙심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기드온이 날마다 하나님을 만나며 대화하는 삶이었다면 미디안에 의해서 고통을 받을 때 그 고통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함께 한다면 왜 이런 일이 우리에게 미쳤느냐는 항변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잘되든 못되든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하신 일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기드온의 문제는 날마다의 삶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하나님과 대화하며 살아가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가 아무리 제사를 드리고 제물을 드렸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통로가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는 자로서 드리는 제사가 되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단지 제사를 드린다고 해서 하나님이 함께 해주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우리들의 신앙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예배를 드리고 그 어떤 선한 행위를 한다고 해도, 그것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즉 예배를 드렸다고 해서 하나님이 여러분을 만나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그러나 만약 여러분이 기드온처럼 평소의 삶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분들이라면 이 말에 대해서 결코 믿음이 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기드온처럼 특이한 표징을 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표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표징이 너무 단조롭다는 것 때문에, 너무 일반적이라는 것 때문에 표징으로 여기지 않은 실수가 결국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인정하지 않도록 해버리는 것입니다.

15절의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비 집에서 제일 작은 자니이다"라는 말씀도 역시 기드온의 믿음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기드온은 극히 약하고 작은 자신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자신이 크게 되는 것으로 생각을 한 것입니다. 약한 모습은 하나님이 함께 한 것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사고방식과 일치하지 않습니까?

18절에 "내가 예물을 가지고 다시 주께로 와서 그것을 주 앞에 드리기까지 이 곳을 떠나지 마시기를 원하나이다 그가 가로되 내가 너 돌아오기를 기다리리라"는 말씀에서도 역시 하나님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고 있는 기드온을 볼 수 있습니다. 기드온은 자신이 요청하면 하나님이 떠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여긴 것입니다. 내가 다시 와서 예물을 드릴 테니까 이것을 떠나지 말아달라는 것은, 예물을 드리는 행위가 주를 떠나지 않게 붙들어 둘 수 있다는 생각이 아니겠습니까?

이것 역시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을 떠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위해 뭔가 하려고 하는 것과 일치하는 행위이지 않습니까? 결국 이것도 하나님은 스스로의 의지와 계획에 의해서 우리에게 찾아오시고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한 행동입니다. 우리와 함께 하신 하나님이 우리들의 선한 행동 때문에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 같습니까? 우리들의 종교적인 행동과 열심이 하나님을 우리에게 붙들어 둘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우리가 뭔가 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지 않을 것 같은 착각이 바로 날마다 하나님을 만나고 대화하면 살아가지 못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임을 알아야 합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기드온에게 예물이 여호와를 붙들어 놀 수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가져온 예물을 반석에서 불이 나오게 함으로 태워버립니다. 여호와는 인간의 예물에 붙들린 분이 아님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유로우신 분입니다. 우리들의 행위와 성의 때문에 할 일을 못하시는 나약한 분이 아님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반석에서 불이 나와서 제물을 태운 것을 보고 기드온은 비로소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것을 압니다. 그리고 22절에서 "기드온이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 알고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내가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나이다"라고 합니다.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면 죽는다는 것은 기드온이 알고 있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었습니다. 기드온의 지식은 기드온을 두렵게 만들었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죽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왜 죽지 않는다고 말씀한 것입니까? 하나님 스스로 기드온을 택하시고 찾아 오셨기 때문입니다. 결국 기드온은 '죽지 않을 것이다'는 말씀에서 하나님을 알게 되고 여호와를 위해서 단을 쌓게 된 것입니다.

우린 기드온에게서 우리들의 실체를 발견합니다. 기드온의 모습은 오늘날 머리에만 하나님을 담고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머리로만 생각한 하나님과, 실제 삶에서 날마다 만나고 대화하는 하나님은 너무나 다릅니다. 머리에 담고 있는 하나님은 여러분과의 만남이 없는 하나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낙심하고 허둥대며 하나님이 함께 해달라고 소리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날마다 삶에서 만나고 대화하는 하나님이라면 여러분이 어떤 상황에 처하든 그분은 떠나지 않으시고 함께 하심을 믿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약할 때도, 못날 때도, 죄악 가운데 있을 때도, 하나님은 변함 없이 여러분 곁에서 여러분을 도우시고 함께 하셨음을 안다면 여러분의 삶은 결코 나약할 수 없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새삼스럽게 표징을 구하거나 하나님이 함께 해달라고 소리치지도 않습니다. 다만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찾으며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에 순종하게 해달라고 기도할 뿐입니다.

신자는 말씀과 함께 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단지 말씀을 읽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과 함께 함으로서 항상 말씀의 간섭을 받고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말씀의 간섭을 받고 산다는 것은 특이한 삶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단조롭다고 생각하는 삶에서, 이런 것이 신앙생활이냐라고 생각할 수 있는 보통의 삶에서 날마다 그리스도로 인해서 감사하고, 기뻐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표징을 여러분 자신에게서, 그리고 평범한 삶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