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 6:25-32 우상

구약에서의 하나님은 언제나 우상과 싸우신 하나님입니다. 스스로를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소개하시면서 하나님 외에 다른 형상을 만들고 절하고 섬기는 것에 대해서 결코 용납하지 않으시겠다고 계명으로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출 20:4-6절에 보면 십계명 중 제 2계명에서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고 말씀을 합니다.

우상이란 형상을 만들고 거기에 절을 하느냐 안하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만약 우상이 형상의 문제로 국한된다면 결국 불상이나 단군 신상 등을 섬기지 않는 것으로 우상과 상관이 없는 것이 되버립니다. 하지만 우상이란 그처럼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진노를 받고 징계를 받았던 것은, 그리고 그 일이 한번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반복되며 나타난 것은 우상은 인간의 본질 속에 깊이 감추어져 있는 문제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상의 문제는 형상에게 절을 했느냐를 생각할 것이 아니라 왜 형상을 원하느냐의 문제부터 생각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은 이스라엘은 섬겨야 할 형상이 필요 없는 존재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을 애굽 땅 종되었던 집에서 인도해 낸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즉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인도로 살아가는 사람들이지 다른 형상의 인도를 받는 자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상의 문제가 맨 처음 부각된 것은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러 산으로 올라가서 소식이 없을 때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가 없다는 불안감에 금송아지, 즉 형상을 만듭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죄가 금송아지를 만들고 거기에 절을 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문제는 왜 그들이 형상을 필요로 했느냐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없었습니다. 그동안 자기들을 인도하는 모세를 의지했고 그렇기 때문에 모세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자신들의 인도자가 사라졌다는 불안감에 싸이게 된 것입니다. 결국 모세를 보내신 하나님을 인도자로 섬기며 의지하는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형상을 만들게 된 동기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아닌 모세를 의지한 것 자체부터 이미 그들은 우상을 섬기고 그것에 절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모세가 그들에게 우상이 되버린 것입니다. 모세라는 인간 자체가 우상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모세를 의지하는 것이 곧 모세를 우상화 해버린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도구로서 하나님에 의해서 세워진 자라는 사실을 망각한 채 사람 자체를 섬겨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대리자라는 명목을 내세워서 목사가 섬김의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 이미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 안에서 그 어떤 것도 경배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이든 바위든 나무든 경배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된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경배할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그 이유는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고 죄에서 건져내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이지 않으신다고 해서 보이는 것을 의지할 대상으로 삼아 버리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것으로 대체해 버린다면 그것이 곧 우상인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드리면 아마 대부분의 교인들은 '나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고 있다'라고 생각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의지한다면 눈에 보이는 것은 그 어떤 것이라도 의지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심지어는 잘 지은 예배당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문제는 극히 기독교적인 것이 우상으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는 절대로 그것을 의식하지 못합니다. 다만 메시아로서의 그리스도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제대로 섬긴 신자들만이 우상의 정체를 파악할 뿐입니다. 지극히 기독교적인 것이 우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없이도 기독교적인 것만 있으면 얼마든지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믿는 것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종교적인 자신들의 행위를 믿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다만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수단일 뿐이지 결코 믿음의 대상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가 말하는 하나님, 그리스도도 단지 명목상 불러 대는 것일 뿐, 사실 믿고 의지하는 것은 자신들의 기독교적인 행위와 문화일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 그런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으로 족한 줄 아는 모습이 보여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면 예배당은 없어도 상관없고, 메시아로 오신 그리스도가 나의 구세주시라면 돈 없어도 괜찮고 심지어는 나라는 존재가 어떤 식으로 부인되어져도 괜찮다는 이것이야말로 보이지 않는 분을 보이는 것처럼 섬기고 의지하고 있는 신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흔히 우상을 섬긴다는 것을 형상을 만들고 거기에 절을 하는 것으로 이해를 하기 때문에 교회는 우상과 완전히 결별된 단체로 인식을 해버리는 것입니다. 즉 불상이나 단군 신상에게 절을 안하기 때문에 교회는 절대로 우상을 섬기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려 버리는 것입니다.

얼마전 단군 신상의 목을 자른 목사가 구속이 되었다는 뉴스가 있었지만, 단군 신상의 목을 자른다고 해서 우상이 단절되는 것은 아님을 그 목사는 몰랐던 모양입니다. 단군 신상이 우상 자체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목사는 단군 신상과 싸우고 단군 신상을 세운 사람들과 싸운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싸움을 통해서 자신은 우상과 싸우는 정의의 용사 편에 서 있는 사람으로 착각을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우상에 대해서 이러한 오해를 하기 쉽게 하는 내용입니다. 본문은 하나님이 기드온에게 아비에게 있는 바알의 단을 헐고 단 곁의 아세라 상을 찍고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으라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기드온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아비 집의 바알의 단을 훼파하고 아세라 상을 찍어버립니다. 이러한 내용들이 오늘날 교회에 어떻게 비춰질 수 있습니까? 앞에서 말한 대로 단군 신상을 훼파하고 찍어 버리는 것이 곧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으로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내용은 단지 집안의 우상을 무너뜨리라는 것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 구원하기 위해서 기드온을 보내실 때 그냥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집안의 우상을 무너뜨리게 하고 보내시는 것에서 그 의미를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드온에게 아비 집의 바알의 단을 훼파하고 아세라 상을 찍어 버리라고 하셨을 때 기드온은 이 일을 감히 백주에 행하지 못하고 밤에 행했다고 합니다(27절). 기드온이 백주에 하지 못하고 몰래 한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아비의 가족과 성읍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드온이 아비의 가족과 성읍 사람들을 두려워 한 것은 바알의 단과 아세라 상이 자기 집안과 그 성의 사람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는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알은 농작물 수확에 도움을 두는 신으로 섬기던 우상입니다. 결국 바알을 훼파해 버린다면 성읍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의 농작물 수확에 나쁜 영향이 오게 된다는 믿음을 주게 됨으로 그들에게 반감을 받게 될 것이 뻔합니다. 기드온은 이것을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아비 집의 바알의 단을 훼파한 것으로 인해서 성읍의 사람들이 반발을 하고 나선 것을 볼 때 기드온 아비 집의 바알의 단은 단지 그 집안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온 성읍의 사람들과도 연관이 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기드온이 무너뜨린 우상은 온 성읍의 반발을 사게 되는 것이었고 기드온은 이것을 알았기에 백주에 행하지 못하고 밤에 몰래 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기드온에게 아비 집의 바알의 단을 무너뜨리라고 하셨겠습니까? 기드온 아비 집이 섬기는 바알의 단과 아세라 상이 보기 싫어서이겠습니까? 그렇다면 기드온 아비 집의 단만 무너뜨릴 것이 아니라 이방인에게 있는 단까지 모두 무너뜨리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지금 이 시대에 있어서도 전국의 절에 있는 불상은 다 무너져야 하고 그 어떤 신상이라고 할지라도 용납될 수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앙에는 단절과 사귐이 함께 존재합니다. 하나님은 아비 집의 바알의 단을 무너뜨리게 하심으로서 기드온에게 이것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기드온이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사사로 등장하기 위해서 그는 하나님과 사귀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귐에 있어서는 필히 단절이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어느쪽 편도 아닌 중간 지대에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우상을 섬기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도 아니었다가 하나님이 부르실 때 하나님과 사귀게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 인간이 우상도 아니고 하나님도 아닌 중간지대에서 아무것도 섬기지 않는 존재라면 단절이라는 것이 필요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인간이 필히 하나님이 아닌 다른 쪽에 매어 있던 존재라면 하나님과의 사귐이 있기 위해서는 자신을 붙들고 있던 세력과의 단절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에게 매인 자로 살기 위해서는 자신이 매어있던 것에서 자유함을 얻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우상에도 매어 있고 하나님에게도 매인 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말이 안되기 때문입니다.

눅 16:13절에 보면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사람은 어느 한쪽에 매인 자로 살아간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중간지대에 있다가 내가 원하는 것을 쫓아가는 것이 아니라 날 때부터 사단에 매이고 우상에 매인 자로 살아가다가 자유함을 얻고 그리스도에 매인 자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때문에 기드온에게 아비 집의 바알의 단을 무너뜨리게 하는 것은, 기드온으로 하여금 단절과 사귐을 깨닫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드온이 이 일에 있어서 아비와 성읍의 사람을 두려워했습니다. 우린 이것을 '기드온이 믿음이 약했다'라고 이해하기보다는 '하나님과 사귐이 있기 위한 단절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로 이해하는 것이 옳습니다. 아비 집의 바알의 단을 무너뜨린다는 것은, 아비 집의 사고방식과 단절함을 뜻합니다. 즉 아비의 사고방식과 함께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아비 집만 아니라 온 성읍 사람들의 사고방식과도 함께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단절입니다.

아비 집 그리고 온 성읍과 단절된다는 것은 삶의 기반이 모두 무너지는 것을 뜻합니다. 자식에게 있어서 아비란 힘입니다. 그래서 고아가 천대받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힘이 되어주는 아비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람으로서 함께 어울리고 살아가는 이웃과 단절한 채 살아갈 수 있습니까? 단지 옆집과 어울리는 문제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사람은 사람을 떠나 살 수 없습니다. 언제나 다른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따라서 세상으로부터 반발을 받는다면 그것은 삶의 기반 자체가 흔들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기드온이 바알의 단을 무너뜨린다는 것은 자신의 모든 인생을 포기해 버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새로운 인생을 가르치십니다. 즉 아비를 의지하고 성읍 사람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사귐에서 살아가는 새로운 인생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의 힘되는 것으로부터의 단절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창 12:1절에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말씀을 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지시할 땅은 친척 아비 집의 힘으로 사는 땅이 아니라 하나님이 도우심과 인도하심으로 살아가는 땅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할 사사도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힘되시는 분임을 가르쳐 줘야 할 사람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드온부터 먼저 힘되는 것으로부터의 단절을 경험해야 했던 것입니다.

단절이 없는 사귐은 있을 수 없습니다. 사귐이 없는 단절 또한 있을 수 없습니다. 과연 우리는 무엇으로부터 단절되고자 애를 씁니까? 또 무엇과 사귀고자 소망하고 있습니까? 세상 것이 우리를 복되게 한다는 사고방식과 단절이 없이 하나님을 찾는 것은 우상일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주여주여'한다고 해서 메시아로서의 주를 부른 것이 아닙니다. 먼저 우리들 속에서부터 우상으로 세워진 것과의 단절이 있어야 비로소 제대로 주님을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기드온이 바알의 단을 무너뜨리자 성읍 사람들이 그 소행이 기드온의 짓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기드온의 아비인 요아스에게 찾아가서 기드온을 내놔라고 합니다. 그가 바알의 단을 훼파하였으니 죽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28-30).

그러자 성읍 사람들에게 기드온의 아비인 요아스가 "너희가 바알을 위하여 쟁론하느냐 너희가 바알을 구원하겠느냐 그를 위하여 쟁론하는 자는 이 아침에 죽음을 당하리라 바알이 과연 신일진대 그 단을 훼파하였은즉 스스로 쟁론할 것이니라 하니라"고 외칩니다. 이 말은 바알이 진실로 신이라면 성읍 사람들이 바알의 편을 들어 주지 않아도 바알 스스로 자신을 위해서 쟁론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바알이 신이라면 자신의 단을 훼파한 자를 그냥 두겠느냐는 것입니다.

이 말을 보면 요아스가 바알의 단이 무너짐으로 인해서 하나님을 믿게 된 것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요아스가 하나님을 믿게되었느냐 아니냐에 대해서는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요아스를 통해서 외치고 있는 말입니다. '바알이 신이라면 스스로 쟁론한다'는 것입니다. 즉 반대로 생각한다면 우상은 자신을 위해서 스스로 쟁론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 교회가 하나님을 우상으로 만들고 있음을 분명히 할 수 있습니다. 많은 현대 교회가 하나님을 인간의 도움이 없으면 아무 일도 못하시는 분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도와줘야 하고, 인간이 나서서 하나님을 위해 쟁론해야 되는 것으로 여겨버립니다.

예를 들어서 누군가가 하나님을 욕을 할 때 많은 신자들이 화를 벌컥 냅니다. 성읍 사람들이 화를 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내가 믿는 신에 대해서 모독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독당한 신을 위해서 내 쪽에서 어떤 조치를 취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우상이 되어버린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를 위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무능한 존재로 여겨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자신을 훼방하는 존재에 대해서 스스로 쟁론하실 것임을 생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싸움의 대상은 불상이나 단군 신상이 아닙니다. 단군 신상의 목을 자르고 전국의 불상의 목을 잘랐다고 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참된 신으로 증거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싸움의 대상은 교회입니디. 신자의 싸움의 대상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교회가 우상이며 내가 우상으로 존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바알의 단을 무너뜨리고 새로 단을 쌓고 칠년된 둘째 수소를 드리라고 말합니다. 즉 우상을 무너뜨린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새로운 단을 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새로운 단은 칠년된 수소를 드리는 단입니다. 칠년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의미로 쓰여진 말입니다. 7이란 숫자는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이루어진 일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이 천지를 6일 동안 창조하시고 7일째 안식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안식하셨다는 것은 천지 창조는 하나님이 하신 일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6은 하나님의 안식을 빼버린 것이기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에게 돌아가야 할 영광을 가로채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 6은 인간의 수, 또는 짐승의 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이렇게 볼 때 7년된 수소를 번제로 드리라는 것은, 인간의 죄용서는 오직 하나님이 개입하셔야 해결될 일이지 인간이 나선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님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결국 기드온이 바알의 단을 무너뜨리고 그 자리에 새로운 단을 쌓는 것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지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 속에 있는 바알의 단은 우리 힘으로 뭔가 해보려는 의도입니다. 즉 인간의 힘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종교 행위를 의지하는 것들입니다. '내가 기도를 열심히 했으니까 하나님이 내 정성을 보시고 응답하시겠지'라는 생각이 곧 스스로 일하시는 하나님을 자신의 행위에 가둬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우상으로 섬기는 행위입니다. 그 우상이 무너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스스로 일하시는 분이시고, 하나님이 스스로 제물 되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신다는 것을 깨닫고 감사하는 새로운 단이 세워져야 합니다.

여러분의 하나님은 우상입니까 아니면 메시아로 오신 그리스도입니까? 진심으로 그리스도와의 사귐에 있다면 여러분에게는 단절이라는 경험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경험이 여러분에게 있는지 살펴보십시오. 세상에서 힘을 얻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세워진 자로서 하나님이 하게 하신 일을 하면서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한 일을 하며 살아가는가를 보십시오.

여러분의 할 일은 이 땅에 오셔서 제물 되신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 보다 더 가치있는 것은 없음을 알고 그 앎이 삶에서 묻어 나오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보다 더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은 모두 우상임을 알고 살아가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