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 6:36-40 기적

성경에는 기적이라고 말하는 신기한 사건들이 수없이 등장합니다. 홍해가 갈라진 것이나, 여호수아가 전쟁을 할 때 태양과 달이 멈춘 사건 등등 현대 사회에서는 체험할 수도 없고 볼 수도 없고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도 없는 일들이 마치 아무것도 아닌 일처럼 기록되어 있는 것이 성경입니다. 그런데 단 하나의 사건만으로도 현대 사회를 놀라게 할 수 있는 신기한 이적들이 수없이 많이 등장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성경의 기적들에 대해서 무관심한 것이 보통입니다. 어쩌면 현대 사회에서는 실현 불가능한 일이기에 무관심할 수 있을 것이고, 성경의 기적이란 하나님이 직접 이스라엘을 다스리시던 그때나 있을 법한 일로 여겨버리고 지나칠 수도 있습니다. 즉 성경이니까 그런 사건들이 있을 수 있겠지라는 생각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신기한 이적에 대해서는 미련을 버리지 못합니다. 구약에 나타난 이적은 그렇다해도 신약의 이적은 예수님의 시대에 있었던 일이고, 또 사도들이 행했던 이적이니 만큼 예수님의 시대를 살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시각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예수님과 사도들이 행했던 귀신을 쫓아낸다거나 불치병을 고치는 소위 권능에 대해서 많은 관심과 호기심을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물론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성경에 나타난 이적은 성경으로 끝났음을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일하신다면 아직도 그러한 이적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기적에 대해서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까? 기적은 성경에나 기록되고 나올 신비한 사건들이지 지금 이 시대에서는 있을 필요가 없고 있을 수도 없다는 생각은 아닙니까? 소위 보수라고 주장하는 교단들의 기적에 대한 입장은 거의 이런 쪽입니다. 기적에 대해서 관심을 두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분위기에서 혹 기적에 관심을 두게 된다면 신비사상에 빠졌다는 오해를 받기 십상일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기적이나 신비한 현상에 대해서 관심을 두지 않는다고 해도 만약 자신이 직접 기적을 체험한다면 기적에 대한 견해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평소 '기적은 없다'는 입장이었다고 해서 직접 체험을 한 후에도 '기적은 없다'는 입장을 고수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체험은 어쩌면 성경보다 더 확실하고 실제적인 증거로 자리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이것을 체험했다'는 것은 체험한 그에게 있어서는 확고한 신앙과 진리로 자리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적에 대한 신자의 입장은 어떤 것이 바르다고 할 수 있습니까? 성경에 나타난 기적이나 신비한 현상을 인간에게 직접 보여주신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옳습니까?

본문에도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신비한 현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은 미디안 사람과 아말렉 사람과 동방 사람들과의 전투를 앞둔 기드온이 하나님께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표적을 구하는 내용입니다.

기드온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하시려고 하는 것이 틀림없다면 그것을 믿을 수 있는 표적을 보여달라고 합니다. 37절에 보면 기드온은 "보소서 내가 양털 한 뭉치를 타작마당에 두리니 이슬이 양털에만 있고 사면 땅은 마르면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줄 내가 알겠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이슬이란 자연현상입니다. 그러나 이슬이 어느 특정 지역에만 내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기드온은 타작 마당에 둔 양털에만 이슬이 내리기를 요구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자신의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고 하신다는 것을 믿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의 요구를 들어 주십니다. 그러자 기드온은 다시 한번 하나님을 시험합니다. 이번에는 양털만 마르고 사면 땅은 다 이슬이 있게 해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기드온의 요구대로 그대로 행하십니다.

아마 기드온은 처음에 시험만으로는 믿을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양털에만 이슬이 내리고 주변에는 내리지 않는 것은 우연히 그렇게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재차 확인하기 위해서 두 번째는 반대로 양털만 마르게 해달라고 한 것입니다. 두 번 모두 기드온의 요구대로 하나님이 행하셨을 때 비로소 기드온은 하나님이 자신의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려 하신다는 사실에 대해서 믿게 된 것입니다.

우린 이러한 내용을 대할 때 가장 먼저 생각되는 것은 기드온의 불신앙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시험을 하는 기드온의 불신앙을 언급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하나님이 기드온의 불신앙에 대해서 책망하지 않고 기드온의 요구대로 행하셨다는 사실입니다. 표적을 봐야 믿을 수 있다는 기드온의 요구를 들어주심으로서 기드온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입장이 되어야 합니까?

양털에만 이슬이 내린다거나 양털만 마른다는 것은 분명 신기한 현상입니다. 더군다나 어느 날 아침에 우연이 일어난 일이 아니라 기드온의 요구대로 두 번이나 반복해서 나타난 현상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기드온의 입장이라고 할 때 여러분이 요구한대로 하나님께서 두 번이나 반복하여 신기한 기적과 같은 현상을 일으키셨다면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하시겠습니까? 분명 하나님은 내편이라는 생각에 빠지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러한 사실에 대해서 간증이라는 명목으로 자신의 자랑거리로 삼지 않겠습니까?

분명 기적과 같은 일을 요구함으로서 하나님을 확인하려고 한 것은 기드온의 교만이며 불신앙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기드온의 불신앙과 교만을 책망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 요구대로 행하시는 것입니까? 이점이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차라리 당시 기드온이 믿음이 좋았다면 '믿음이 좋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드온의 요구대로 행하셨다'라고 생각하면 현대인의 사고에 맞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 기드온의 믿음이 좋은 것도 아니고 또 선한 의도로 요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시험하기 위한 좋지 못한 의도였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그 요구대로 행하신 것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 볼 문제라고 여겨집니다.

우린 기적 그 자체에 매달립니다. 기적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에 대해서는 도외시 해버리고 기적을 받은 사람 자체에 의미를 둬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생각이 항상 하나님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쪽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린 기드온을 보면서 마치 기드온이 능력이 있어서 마음대로 기적을 일으킨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성도란 하나님이 주신 기적을 증거 하는 증인의 위치에 있는 것이지 기적을 행하는 위치에 있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그 어떤 기적이 주어졌다고 해도 사람에게 관심을 두는 것은 잘못입니다. 기적은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기드온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고자 하고 기적에 대한 체험이 마치 구원의 증표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기적과 기적을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무지로 인한 결과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은 기적은 믿음의 증거도 아니고 구원의 조건도 아니며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증거로 활용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즉 기적이 일어난 사람이기 때문에 분명 하나님의 백성일 것이라는 생각 자체가 기적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의도에 대해서는 전혀 무시하고 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기적에 관심을 두지 말고 기적을 받은 사람에게도 관심을 두지 말고 기적을 주신 하나님에게 관심을 두신다면 기적에 대해서 이해하기가 쉬울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기적을 체험한 자체에 의미를 두게 되고 기적을 체험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사람들이 기적을 좋아하는 이유는 기적에 대해서 환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적을 체험하면 체험한 자신에게 영광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우러러볼 것이라는 환상을 가집니다. 그래서 기적 같은 놀라운 일이 설마 자신에게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는 가지지 않는다고 해도 기적에 대한 환상은 포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기드온의 요구대로 신비한 일을 행하신 하나님의 의도를 생각해 보고 기적에 대해서 어떤 입장을 가지는 것이 바른 것이며, 또 오늘날 참된 기적은 과연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기드온이 신비한 현상을 요구한 것은 불신앙이고 하나님을 시험하고자 하는 좋지 못한 의도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드온의 요구대로 행하신 것은 분명 하나님에게 다른 의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기드온은 하나님이 함께 하고 계심을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확인의 수단으로 신비한 현상을 일으켜 달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드온은 하나님이 행하신 신비한 현상을 봄으로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확인하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신비한 일을 행하신 것은 하나님이 기드온과 함께 하심을 가르치기 위해서 하신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행하신 기적은 기드온이 하나님에게 선택된 사람이란 것을 보여주기 위한 도구로 쓰여진 것뿐입니다.

기적이란 하나님이 성도를 다루시는 도구일 뿐 어떤 능력도 아니고 계시도 아닙니다. 기적이라고 말하는 현상에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기적을 보여주시면서 까지 일하시는 하나님에게 능력이 있으신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기적에 대한 입장은 각각입니다. 기적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기적을 원하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기적은 없다고 말하는가 하면 기적은 있을 수 있다는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 말씀드릴 것은 구약에 있었던 홍해사건도 하나님이 하시고자 한다면 현대에도 얼마든지 그런 기적은 있을 수 있습니다. 38년된 병자가 예수님의 권능으로 나았다면 오늘날에도 예수님이 하시고자 하신다면 그 어떤 병자라 할지라도 낳을 수가 있고 나사로처럼 죽은 자가 살아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기적을 기대하고 살아가는 것은 분명 잘못입니다. 왜냐하면 구약에서 하나님이 기적을 행하시고, 신약에서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신 것 모두는 기적을 도구로 삼아서 계시하고자 하시는 것이 따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홍해 사건을 통해서는 죽어야 할 인간이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로 인해서 살아나게 됨을 가르치시고 구원의 손길이 간섭되는 사람은 어린양의 피로 인해서 살아난 자들이었음을 계시하는 사건입니다. 때문에 홍해사건이 현대에 있어야 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오시고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심으로서 죄로 인해 죽어야 할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공로는 오직 그리스도의 피에 있음을 계시하셨기 때문입니다. 즉 홍해사건을 보고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보고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을 수 없는 병자가 낫게 된 것도 역시 같습니다. 마 8:17절에 보면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고 말씀하신 대로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시고 병자를 고치신 것은 우리들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기 위해서 오신 그리스도임을 계시하시기 위해서 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병고치시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병고침을 도구로 삼아서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계시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병을 짊어지신다는 것은 예수님이 대신 우리 병을 앓아준다는 것이 아닙니다. 질병은 인간은 죽어야 할 죄인임을 알려주는 증거물입니다. 인간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자가 되지 못하며 연약한 자로서 흙으로 돌아가야 할 자임을 보여주는 증거물일 뿐입니다. 따라서 병을 짊어지신 것은 인간의 연약함과 죽음과 죄를 짊어지신 것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불치의 병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났다고 해도 그것은 결국 인간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수단이고 도구일 뿐, 병이 나았다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 의미로 남는 것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분명 하나님이 하시고자 한다면 죽을 병에 걸린 사람이 낳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기적이라고 하면서 좋아하고 그런 기적이 자신에게 일어나기를 원하지만, 그것은 결국 기적을 일으키시는 하나님보다는 기적 자체에 매료된 결과임을 알아야 합니다.

제아무리 기적을 서너번, 아니 수십 번을 체험했다고 해도 그것으로 천국 갈 수는 없습니다. 천국은 오직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로 갈 뿐입니다. 그렇다면 귀신을 쫓아내고, 병이 낫고, 양털에 이슬이 내리고 내리지 않는 신비한 현상을 수백번 체험했다고 해도 결국 그리스도의 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를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그리스도의 피보다 더 기적적인 사건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시대에 있어서 최고의 기적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며, 이 최고의 기적을 계시하기 위해서 성경에 기적들이 등장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결국 기적은 참된 기적이 무엇임을 가르치시기 위한 수단이며 도구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신기한 현상에 매료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라는 참된 기적에 매료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일 수밖에 없습니다.

설사 여러분이 말할 수 없는 신기한 기적을 직접 체험을 했다고 해도 결국 바라보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여야 합니다. 그러나 대개의 사람들은 기적 자체에 빠져들게 되고 기적을 체험한 것이 마치 자신의 믿음의 증표인양 여겨버립니다. 기적을 체험한 것으로 인해서 그리스도에게 관심을 두지 않고 있음이 증거 되는 것입니다.

기드온에게 신비한 일을 행하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하나님을 의지한 자로 살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드온을 다스리시는 방법으로 기드온이 요구한 신비한 일을 행하신 것입니다. 아무나 기드온과 같은 요구를 한다고 해서 그대로 행하시지 않습니다. 기드온에게만 특별히 행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기드온을 선택하시고 기드온을 다른 사람과 다르게 다스리시겠다는 하나님의 의도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도 하나님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확인하기 위해서 신비한 일을 요구한다면 하나님이 그대로 행하실까?'라는 생각을 하지는 마십시오. 그런 생각을 하지 말라고 해도 어쩌면 이미 그런 생각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기드온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신비한 현상을 원했다면 나도 신비한 현상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확인하기 위해서 신비한 현상을 원한다면 하나님이 들어주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은 그 속 내면을 보면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확인하고자 하는 열망보다는 결국 신비한 일에 마음이 끌려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비한 일을 보고 싶은 마음을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확인하고 싶다는 것으로 가리고 있을 뿐입니다.

기드온은 하나님이 선택하신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이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사람으로 만드시기 위해서 신기한 일을 행하신 것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만약 기드온처럼 신기한 일을 체험을 했다면 어떤 생각을 가지는 것이 옳습니까? '내 인생은 하나님에게 붙들린 인생이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기적을 체험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기적을 보이시면서 까지 나를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일에 마음을 두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너무 믿음이 없으니까 기적을 보이시면서 까지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사랑하며 사는 사람으로 만드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오히려 부끄러워하고 감사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기한 일을 체험해야 하나님을 믿는 것보다는 비록 신기한 일을 체험하지 못했다고 해도 하나님이 육신으로 세상에 오시고 십자가에 달려서 죄인인 사람들의 손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신 것을 놀라운 기적의 사건으로 볼 수 있으며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로 죄인된 인간이 천국에 가게 된다는 사실에 대해서 감사할 수 있다면 그가 바로 기적을 체험한 기적의 사람인 것입니다.

기드온에게 신기한 일을 행하신 것이 기드온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이신 것이라면, 하나님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죽게 하신 것은 바로 하나님이 세상이 어떻게 다루실 것인가를 계시하신 것입니다.

그 어떤 기적도, 신기한 현상도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알게 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우리들로 하여금 죄를 알게 합니다. 하지만 십자가를 통해서 죄를 알게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바로 기적의 사람이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간섭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를 알았다는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죄를 알았다면 죄를 해결하시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라는 사실까지 마음에 두셔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는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죄를 알게 하시는 것은 왜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가를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아들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적의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며 살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간섭하실 것입니다. 병고침으로 간섭하실 수도 있고, 아니면 환난과 망함으로 간섭하실 수도 있습니다. 신기한 일을 체험했기 때문에 기적의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간섭이 함께 사람으로 산다는 것이 이미 기적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해서 감사하고 살아간다는 것이 이미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이 임한 사람입니다.

진짜 기적은 신기하고 놀라운 현상을 체험하지 않고서도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리스도만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사람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간섭하신다는 것, 이것보다 감사할 일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간섭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인 선택한 사람이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살아가도록 놔두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며 살아가는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보다 안심되고 든든한 것이 또 뭐가 있겠습니까?

신비한 체험이 우리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간섭이 우리를 보장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간섭이 때로는 괴로움과 환난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잠시 받는 환난과 괴로움보다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 거한다는 것이 더 중하지 않겠습니까? 다른 것보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 개입하셔서 우리를 간섭하시고 다스리시면서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만드시겠다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기쁘게 받아들이며 살아가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