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 1:16-21 붸아내지 못함

믿음에 대해서 잘못 오해하고 있는 것은 믿음을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들의 태도로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는가? 그리스도를 위해서 뭘 얼마나 잘하는가? 이런 것들을 따져서 믿음이 있다 없다로 판단하는 것, 이것이 바로 믿음에 대해서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이것이 믿음이라면 믿음은 전적으로 우리들의 태도에 달린 것이 됩니다. 분명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했으니까 구원도 우리들의 태도에 달린 것이라는 결론이 되는 것입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주님의 의 때문이라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리고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라면 믿음은 주님의 의 자체이지 우리들의 태도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주님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든 상관없이 주님의 십자가는 구원의 능력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에게나 주님의 십자가가 구원의 능력으로 다가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는 자녀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십자가의 능력인 것입니다.

따라서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하느냐 무엇을 믿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구원의 능력과 하나되는 마음인 것입니다. 십자가가 구원의 능력이라는 것은, 그리고 그 십자가에서 주님이 죽으심으로서 우리를 구원하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도록 의를 보이셨다는 것은,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가 더 보태야 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주 예수를 믿으라는 것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그것은 주님의 구원의 능력에 우리의 믿음을 보태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죽으시면서 까지 우리를 구원하시고자하는 주님의 그 마음과 하나되어 있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우리를 천국에 보내시고자 하는 그 마음과 하나 되어 있다면 그 사람은 세상에 자신의 마음을 남겨 두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나오게 하신 것은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을 주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이스라엘이 안다면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고 마실 물이 없었다고 해도 불평과 원망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신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목표가 어디에 있는가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가나안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된 것이 아니라 다만 자신을 향한 마음으로만 광야생활을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없으면 원망을 하게 된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가나안을 정복하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가나안 정복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있느냐 아니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있다면 이스라엘은 가나안 사람들을 모두 쫓아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가 되어 있지 못하다면 쫓아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1장에서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쫓아내지 못했다고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사람을 다 쫓아내라고 하신 것은 '오직 여호와만 사랑하라'는 뜻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만약 이스라엘이 여호와만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고, 또 가나안 사람을 다 쫓아내라고 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다면 그들은 가나안 사람을 쫓아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쫓아내지 못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여호와만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이 아니었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가나안 사람을 쫓아내시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굳이 이스라엘의 손을 빌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굳이 이스라엘더러 싸워서 쫓아내라고 하시는 것은 가나안 사람을 쫓아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마음이 어떤 것인가를 드러내시는 것이 목적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19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하신 고로 그가 산지 거민을 쫓아내었으나 골짜기의 거민들은 철병거가 있으므로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며"라고 말합니다. 유다가 시므온과 함께 가나안을 정복하러 갑니다. 유다는 산지에 거하는 거민들은 모두 정복하였으나 골짜기의 거민들은 철병거가 있기 때문에 쫓아내 못하였다고 합니다. 우린 이 말씀을 볼 때 '아하 유다 지파가 철병거 때문에 겁이 나서 그들을 정복하지 못했구나'라고 생각해 버립니다. 물론 그러한 생각을 충분히 해볼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유다가 철병거를 가진 골짜기 거민들이 두려워서 쫓아내지 못한 것이라면 다른 지파들은 왜 쫓아내지 못한 것입니까? 1장에 보면 유다만 아니라 다른 지파들도 가나안 거민을 쫓아내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들 역시 가나안 거민에 대해서 두려운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까? 그렇다면 누구는 두렵고 누구는 두렵지가 않은 것입니까?

28절에 보면 "이스라엘이 강성한 후에야 가나안 사람에게 사역을 시켰고 다 쫓아내지 아니하였더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에 보면 가나안 사람을 쫓아 내지 않은 이유가 사역을 시키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30절, 33절에서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들을 볼 때 유다지파가 철병거를 가졌기 때문에 쫓아내지 않은 것도 철병거가 두려워서 싸움을 못한 것이라기 보다는 문명과 문화의 증거라고 할 수 있는 철병거를 아까워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즉 앞으로 자신들이 가나안에서 살아갈 때 도움이 될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을 쫓아내지 못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쫓아내지 않았다'라는 말을 하지 않고 '쫓아내지 못했다'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까? 쫓아내지 않았다는 것은 쫓아낼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이라는 뜻이고, 쫓아내지 못했다는 것은 힘에 굴복 당한 모습을 말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하지만 쫓아내지 못했다는 것은 철병거라는 힘에 굴복 당했다는 것이 아니라 '가치있다'는 이 힘에 굴복 당한 것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쫓아내라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철병거'라고 하는 것에 더 가치를 둔 사고방식이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이것이 쫓아내라고 하신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되지 못한 것입니다.

가나안 거민을 쫓아내라고 하신 것은 '여호와만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만약 이스라엘이 이 뜻을 안다면 그리고 그 뜻에 그들의 마음이 있었다면 그들은 가나안 거민을 주저 없이 쫓아내었을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만 있으면 되기에 그 무엇도 아까워하지 않고 자신으로부터 쫓아낼 수 있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가나안에서 앞으로 살아갈 일을 생각을 한 것입니다. 앞으로 가나안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철병거는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철병거를 쫓아내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가나안에서 살 일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분명 여호수아에게 하나님만 섬기겠다고 다짐을 했습니다. 여기까지 자신을 인도해 오신 분이 여호와시니까 여호와만 섬기고 우상은 결코 섬기지 않겠다고 다짐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호수아가 죽자 다른 길로 가게 됩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을 향한 우리들의 태도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즉 지금까지 인도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앞으로 하나님을 위해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결심이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인도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에 의해서 가나안에 들어왔음을 안다면 하나님이 인도하실 것을 보며 사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실 것을 보며 산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그 어떤 것도 내가 살아가는데 도움이 될거라는 생각을 갖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 '저것은 내가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다'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면 그순간 도움이 된다고 여겨지는 것을 사랑하게 되고 소중하게 여기게 되고 가치있는 것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철병거가 있어서 쫓아내지 못했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철병거가 자신들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도움이 될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가나안을 모두 쫓아내라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너희들의 도움인 것을 잊지 말아라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하나님만이 우리들의 도움이시다.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 온다'는 것을 잊지 않았다면 철병거가 아니라 그 어떤 좋은 것이라고 해도 쫓아내지 못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철병거도 있으면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그냥 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곧 여호와만 사랑하지 않는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유다는 철병거에 마음이 사로잡혔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마음은 무엇에 사로잡혀 있습니까? 무엇이 여러분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라고 여기십니까?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는 것은 도움이 되는 것이라고 여겨지는 것들입니다. 반대로 살아가는데 별 도움이 안된다고 여겨지는 것은 쫓김을 당합니다.

하나님은 철병거를 쫓아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철병거는 그냥 두고 하나님을 쫓아내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의 현실입니다. 우리들에게서 쫓겨나야 할 것은 귀하게 여기고 귀하게 여겨야 할 것이 쫓겨남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여리고 성을 무너뜨린 뒤에 아간이란 사람이 여호와께 바친 물건을 훔친 사건이 발생합니다. 수 7:21절에 "내가 노략한 물건 중에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오십 세겔 중의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취하였나이다 보소서 이제 그 물건들을 내 장막 가운데 땅 속에 감추었는데 은은 그 밑에 있나이다"라는 말씀을 보면 아간은 자기가 보기에 좋은 것을 감추어 두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간의 이 행동은 여리고를 무너뜨리게 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여리고에 있던 것으로 살고자 하는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여리고를 무너뜨리게 하신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것인가를 전혀 마음에 두지 않은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리고를 무너뜨리는 일에 이스라엘을 참여하게 하심으로서 하나님의 능력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가나안에서의 이스라엘의 삶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만 귀한 것으로 여기고 살아가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만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간이 바친 물건을 훔친 것은 결국 여리고의 것에서 마음이 떠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고 그러한 마음을 하나님이 용납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아간을 죽인 것입니다.

신자란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다 함을 얻은 자입니다. 이것은 그냥 그렇게 알고 살아가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다 함을 얻었음을 안다면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뜻을 두고 살아가라는 것이 신자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인 것입니다. 문제는 과연 우리가 하나님의 이 사랑에 마음을 두고 사느냐는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뜻을 두고 살기를 원하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는가를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이 아니라면 우리들의 마음은 유다가 철병거에 마음이 사로잡히듯이 세상의 것들에 우리들 마음이 붙잡힌 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삶에 도움이 될만한 것을 쫓아갑니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찬송을 부르면서도 마음은 항상 세상을 향해 있습니다. 주님의 은혜가 날 살게 하신 것이 아니라 돈이 있었기 때문에 살았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돈이 없으면 안된다는 이 생각이 우리로 하여금 주님에게만 뜻을 두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나오게 하신 것은 가나안이 더 살기 좋아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쫓아내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과 더불어 살기보다는 가나안의 좋은 것들과 더불어 사는 것을 더 즐겨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이스라엘이라면 분명 하나님의 말씀을 높이기보다는 가나안의 것들을 높일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마음은 어디에 있습니까? 무엇에 붙들린 마음이고 무엇에 끌려가는 마음입니까? 여러분의 마음이 하나님의 사랑에 있고, 하나님의 사랑에 붙들려 있고, 하나님의 사랑에 끌려가는 마음이라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이시간 우린 다시 한번 하나님의 사랑에 깊이 잠겨야 할 줄로 압니다. 내 수중에 있는 돈 몇 푼보다도, 내가 가진 직장이나 집보다도 하나님의 사랑이 더 귀하다고 여기며 살아가고 있는지 우리 자신을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신자가 진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붙들려 살아간다면 그는 분명 자신의 마음에서 하나님의 사랑 외에 다른 것은 용납하지 않으려고 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만 사랑하느냐?'를 묻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사랑으로만 살고자 하느냐?'를 물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만 살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느냐?'를 묻는다는 것은 결국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는 격이 되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으로만 살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여러분에게서 여러분의 마음을 사로잡고 붙들고 있는 세상의 것들을 쫓아내기를 원하는 간절함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마음은 하나님의 사랑에 붙들려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돈이 큰소리칩니다. 힘있는 자가 행세를 합니다. 하지만 교회에서는 큰소리칠 자가 없습니다. 행세할 자가 없습니다. 만약 큰소리치며 살고 싶고 행세하고 자랑하며 살고 싶다면 교회로 오시면 안됩니다. 세상에서 살아가셔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큰소리치고자 하는 그 마음을 고스란히 교회로 가지고 오기 때문에 교회가 시끄러워지는 것입니다. 교회는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만 마음에 담고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는 돈많은 자 권력이 있는 자라는 말들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어차피 돈을 살지 않고 권력으로 살지 않는 자들의 모임이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은석교회가 쫓아내야 할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가나안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보다는 돈이 더 힘이 세다고 하는 그런 마음들이 은석교회에서 쫓겨나야 합니다.

무엇이 크게 보입니까? 세상입니까? 그리스도의 피흘리심입니까? 여러분의 마음이 무엇에 끌려갑니까? 세상입니까? 아니면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입니까? 세상에서 살고자 한다면 그리스도의 은혜와 은총은 전혀 가치 없는 것으로 보여질 것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천국에서 사는 자로 남는 것에 간절함이 있다면 그 마음에는 그리스도의 피보다 귀하고 가치있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사는 것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이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는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