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 7:1-8 너무 많다

인간이 모여 사는 사회에는 여러 가지 사상과 이념들이 있습니다. 그중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대표적인 이념이라면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일 것입니다. 우린 이 두 이념들을 자유와 독재라는 말로 이해합니다. 즉 민주주의를 자유로, 공산주의를 독재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해하는 자유와 독재란 참으로 단순합니다. 자유를 몸이 남에게 억압당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즉 여행하고 싶으면 여행하고, 놀고 싶으면 놀면서 하고 싶은 대로하며 살아가는 것을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지금 대한민국이 바로 자유가 허용된 나라라고 말합니다. 반면에 독재는 인간이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에 의해 지배당한 채 인간이 하고 싶은 대로하며 살아갈 수 있는 자유가 박탈당한 것을 독재로 이해합니다.

사람들은 독재가 아닌 자유를 원합니다. 누군가에 의해 지배를 받기보다는 자신의 의도대로 자유롭게 살기를 추구합니다. 그래서 미국의 혁명지도자인 P.헨리라는 사람은 '나에게 자유를 다오. 그렇지 않으면 죽음을 다오'라는 말을 할 만큼 자유에 대한 의지가 강렬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자유롭게 살아가고 계십니까? 무엇에도 구속당하지 않은 채 자유를 누리는 삶을 살고 계십니까? 여러분 스스로 생각할 때는 자유롭게 산다고 생각이 되겠지만 사실 인간은 자유롭게 살아가지 못합니다. 여러분만이 아니라 그 어떤 인간도 자유로운 자는 없습니다. 비록 민주주의라는 체재 아래서 활동에 자유를 느끼고는 있지만 사실 자유자란 없습니다. 즉 민주주의라는 이념이 인간을 자유롭게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공산주의란 이념이 인간을 구속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민주주의 체제에서 살아가든 공산주의 체제에서 살아가든 인간은 자유를 박탈당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아마 여러분 가운데는 '내 마음대로 잘 살아가고 있는데 자유가 없다니 이게 무슨 말인가?'하고 의아해 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자유가 없다고 말씀드린 것은 이사도 여행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체재 아래 행동의 제약을 받는 의미로 한 말이 아닙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공산주의가 개인의 여행까지 간섭하는 체재라면, 그래서 타국이 아닌 국내를 여행하고 싶어도 국가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체재라면, 그래서 자유가 없는 독재 사회라고 한다면, 그렇다면 대한민국은 민주사회이기 때문에 여행을 하고 싶으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입니까?

물론 국가로부터 여행을 허락 받지는 않습니다. 가고 싶으면 마음대로 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행을 가고 싶다고 해서 마음대로 갈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습니까?

가고 싶지만 갈 수 없다면 그것은 무엇엔가 구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행동이 뭔가에 의해서 제재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가령 회사인의 경우 여행을 마음대로 갈 수 없습니다. 회사에 매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행은 회사라는 조직이 허락할 때 가능할 뿐입니다. 그 외의 모든 삶은 회사란 거대한 괴물에 붙들려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대가로 돈을 받습니다. 직장인이 여행을 하고 싶다면 회사를 그만두면 됩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돈 때문입니다. 결국 회사는 돈이라는 힘으로 사람을 구속합니다.

하지만 힘을 가진 자는 자유롭습니다. 회사에 구속받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따라 마음대로 움직입니다. 이렇게 볼 때 사람을 구속하는 것은 공산주의라는 이념이나 사상이 아니라 돈이라는 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공산주의는 인간의 행동을 제약하지만 돈은 인간의 정신자체를 지배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현대 사회는 자유가 없습니다. 모두가 힘에 의해서 굴복 당하고 지배를 받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자유란 곧 힘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힘을 포기하는 것 자체가 자유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유라는 말은 무엇엔가 붙들려 있는 상태에 있을 때 상대적으로 표현되는 말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고 하신 말씀은 인간이 무엇엔가 매어 살고 있음을 전제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 대해서 바리새인들은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고 답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유를 몸의 자유로운 활동으로 이해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시기에 바리새인들은 죄에 붙들려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모든 행동은 진정한 자유자의 행동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가령 여러분이 헌금을 할 때 진정한 자유자로 하십니까? 진정한 자유자로 헌금을 하는 것은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기쁨과 즐거움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에 하나 믿음이 없는 자로 보여질 것이 염려되어서 헌금을 한다든지, 헌금을 하지 않을 때 하나님이 재앙을 내리실 것이 염려되어서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죄에 매어 있는 상태라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힘의 체재 아래서는 힘에 의해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힘있는 자가 자유자이며 힘이 곧 진리로 통용되는 사회입니다. 힘이 곧 나를 자유케 한다고 외치는 세상에 대해서 예수님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과연 성도인 여러분은 예수님의 이 말씀에 대해서 어떤 마음을 가지십니까?

오늘날 교회가 과연 이 말씀 아래 살아간다고 여기십니까? 많은 교회가 마치 힘이 곧 자유를 가져다 주는 것처럼 힘을 구하며 살아가지 않습니까? 신자는 힘으로부터 자유로운 자입니다. 참으로 어려운 말이지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진리가 곧 신자에게는 힘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보고 사는 자가 이 말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를 하겠습니까? 그러나 천국을 보고 사는 자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 힘이 진리가 아니라 말씀이 진리이며 말씀이 우리를 자유케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깊이 이해할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도 힘을 추구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무엇이 참된 힘인가를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확인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시험한 기드온이 군사를 이끌고 미디안과 전쟁을 하기 위해 하롯샘 곁에 진을 칩니다. 전쟁의 목적은 승리에 있습니다. 그리고 승리의 힘은 군사력에 있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전쟁을 하기 위해서는 군사력을 길러야 하고, 군사력은 곧 군사의 숫자와도 연결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될수록 많은 군사를 모집해야 하는 것이 전쟁을 위한 준비작업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세상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일이 벌어집니다. 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좇은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붙이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스려 자긍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말씀하시기를 군사가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군사가 너무 많아서 미디안을 너희들의 손에 붙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군사가 많다면 승리를 주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신자에게 힘을 실어주는 분입니다. 힘을 주는 하나님인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의 하나님은 참으로 이상한 말씀을 하십니다. 군사가 많아서 승리를 주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교인 수가 많은 것이 힘이고 하나님은 교회를 부흥케 하신다는 것을 믿고 있는 교회가 군사가 많아서 승리를 주지 않겠다는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까?

사실 따지고 보면 이스라엘의 군사가 그리 많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3절을 보면 모집된 이스라엘 군사는 32,000명이었습니다. 반면에 미디안 군사는 메뚜기처럼 많은 수이고, 약대 또한 해변의 모래처럼 많은 수였습니다(12절). 그에 비하면 32,000명이란 수는 결코 많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군사가 많다고 하십니다.

군사가 많아서 승리를 주지 않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마음은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스려 자긍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는 말씀에서 잘 나타납니다. 이스라엘이 많은 군사로 전쟁에 참여했을 때 하나님이 주신 승리를 자신들의 힘으로 승리한 것으로 여기고 교만할 것을 염려하신 것입니다. 즉 우리 숫자가 많아서 이겼다는 착각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사람은 불행의 원인은 외부에서 찾으려고 하면서도 행복의 원인은 자기에게서 찾으려고 합니다. 일이 안되면 하나님에게 원망을 돌리면서 잘되면 자기에게 영광을 돌려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이기 때문에 군사가 많은 가운데 승리를 하면서 틀림없이 자신들의 힘으로 여기고 승리의 영광을 자기에게 돌려버릴 것입니다. 그래서 기드온에게 군사가 많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승리가 여호와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라면 애당초 군사의 숫자라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승리가 군사의 숫자라는 힘의 조건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승리의 조건은 하나님의 은총일 뿐입니다. 즉 인간에게 조건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세우시고 미디안의 손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것은 단지 미디안의 압제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미디안과의 전쟁을 통해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바르게 정립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삿 6:11-16절에 보면 당시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었는지를 기드온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으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증표로 삼았습니다. 때문에 미디안의 압제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생각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과연 어떤 환경과 상황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습니까? 평안하고 좋은 환경에서 겨우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을 흉내 낼 뿐,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살아갈 수 있습니까? 아무리 둘러봐도 평범한 삶일 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에 뭔가 미심쩍어 하지는 않습니까?

기드온이 바로 그런 믿음이었습니다. 미디안의 압제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에 대해서 믿음이 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네 힘을 의지하고 가서 미디안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라'(삿 6:14)고 하셨을 때 '내가 힘이 어디 있습니까?'(삿 6:15)라는 말을 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기드온, 즉 이스라엘과의 관계였습니다.

기드온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자신에게 힘을 실어주는 하나님이었습니다. 때문에 승리도 자신에게 힘이 있을 때 가능하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은 약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생각을 할 수 없었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미디안과 싸운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기드온의 생각은 '나를 미디안과 싸우게 하시려면 힘을 주셔야 할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지금 저에게 무슨 힘이 있습니까?'라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힘으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지 안하시는지 판단하려고 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기드온이 생각하는 하나님과의 관계는 힘입니다. 힘을 주시는 하나님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에게 힘이 있으면 하나님이 함께 하신 것이고 힘이 없으면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은 것으로 믿었던 것입니다. 마치 교회가 부흥되면 하나님이 함께 하신 것으로, 부흥되지 않으면 함께 하심을 믿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바르게 정립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는 힘을 소유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님을 가르치시기 위해 군사가 많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은 군사를 줄입니다. 3절에 보면 "이제 너는 백성의 귀에 고하여 이르기를 누구든지 두려워서 떠는 자여든 길르앗 산에서 떠나 돌아가라 하라 하시니 이에 돌아간 백성이 이만 이천 명이요 남은 자가 일만 명이었더라"고 말씀합니다. 군사를 줄이는 방법으로 두려워서 떠는 자는 다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22,000명이 돌아가고 10,000만 남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것도 많다 하십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군사를 물가를 데리고 내려가서 물을 혀로 핥는 자는 남기고 무릎을 꿇고 마시는 자는 돌려보내라고 하십니다. 이로 인해서 결국 300명이 남게 됩니다.

이러한 내용에 대해서 교회가 전통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여러분도 '기드온의 300용사'라는 제목의 설교를 들어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남은 300명에 대해서 교회는 용사라고 말합니다. 남들과 뭔가 다르기 때문에 남겼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돌려보낸 사람들은 전쟁에서 도움이 안되고 쓸모 없는 자들이기에 돌려보냈다고 말합니다.

교회가 이해하는 300명과 나머지 사람의 다른 점은 두려워 떨었다는 것과, 물을 무릎을 꿇고 마셨다는 것에 있습니다. 군사는 용감해야 하는데 두려워서 떨었다면 군사의 자격이 없는 것이고, 전쟁 중에는 항상 주위를 경계하면서 방심을 하면 안되는데 무릎을 꿇고 물을 마신 것은 경계에 소홀한 태도이기 때문에 군사로서 적합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300용사처럼 신자가 하나님의 용사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첫째 두려움이 없어야 하고 둘째 항상 마귀의 공격으로부터 경계를 늦추지 않고 방심하지 않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두려움이 없이 살아갈 수 있습니까? 생존에 위협이 올 때 사람은 누구나 두려움이 처합니다. 그리고 경계한다고 해서 사단을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단을 막고자 경계를 하는 것 자체가 이미 사단에게 미혹된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사단을 이기고자 하는 것이 바로 사단이 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쟁에서 두려움을 가지는 것은 인간의 자연스런 감정입니다. 또 당시 남은 10,000명이 모두 두려움이 없었다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체면 때문에 자존심 때문에 두렵지만 돌아가지 않고 남은 사람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물을 손으로 떠서 핥아먹는 것과 무릎을 꿇고 마시는 것이 용사와 용사 아닌 자를 구분하는 기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단지 자기 편한 대로 먹는 것이 아닙니까? 따라서 결국 300명이 남게 된 조건을 인간에게서 찾으려고 하면 안됩니다. 300명이 뭔가 다르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남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쨌든 32,000명의 수가 300으로 줄어버린 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세상에 흔히 생각하는 하나님이 아니심을 보여 줍니다. 많은 사람들은 수를 더하시는 하나님으로 인식합니다. 교인의 수를 더해주시는 하나님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하나님은 오히려 있는 수까지 줄여 버리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숫자에 연연하시거나 숫자로 일하시는 분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7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물을 핥아먹은 삼백 명으로 너희를 구원하며 미디안 사람을 네 손에 붙이리니 남은 백성은 각각 그 처소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300명으로 너희를 구원하신다는 것은 300명이 이스라엘을 구원할 힘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은 300이란 수를 가지고도 메뚜기 같은 군사와 모래알처럼 낳은 수의 약대를 소유한 힘있는 미디안을 이길 수가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결국 300명이란 수는 300명의 용사 됨과 위대함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기 위한 도구인 것입니다.

300명의 군사로 메뚜기처럼 많은 수의 군사를 이긴다는 것은 어찌 보면 기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32,000명의 수를 300명으로 줄이게 하심으로서 승리는 인간이 힘을 소유함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임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결국 기드온에게 힘은 여호와 자신이지 많은 군사력도 아니고 약대의 수도 아닌 것입니다. 여호와가 함께 하신다는 것 자체가 힘있는 자라는 뜻이고, 그런 이유로 기드온을 '큰 용사'(삿6:12)라고 부르셨던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 스스로 자신을 구원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힘입니다. 그리고 그 힘을 하나님에게 구합니다. 하나님이 곧 힘이라는 것을 거부합니다. 하나님이 힘이시라면 그 힘을 나에게 달라고 합니다. 결국 모든 인간은 힘을 소유한 자로 살아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힘만 있으면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대로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는 유혹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인간에게 하나님이 만약 힘을 부여한다면 어떤 속성을 드러내겠습니까? '하나님이 나에게 힘을 주셔서 승리했다'고 하겠습니까? 그런 인간이라면 뭐가 걱정이겠습니까? 인간이 드러낼 속성은 '역시 내가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누구든 나보다 힘있는 자 있으면 나와 보라'고 큰소리치게 됩니다. 마치 자신이 힘을 만들어낸 것으로 여겨버리는 것입니다.

300명만 남게 하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승리는 인간의 수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바르게 정립된 하나님과의 관계는 오직 하나님을 힘으로 삼고 살아가는 관계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에게 힘을 달라는 요구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만 신뢰하고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가 하나님과 이런 관계로 살아가는지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천국은 하나님이 힘이 되심을 의지하고 살았던 사람들만 모일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에서는 인간의 영광이 자랑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릴 뿐입니다.

교회의 타락은 힘을 추구하는데 있습니다. 많은 수를 원하는 것 자체가 이미 교회가 타락한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300명만 남기십니다. 의지할 대상이 되는 것은 모두 잘라 버리신 것입니다. 사람은 많은 것이 있을 때 그것을 의지하게 됩니다. 그리고 '내가 나를 구원하였다'고 큰소리치게 됩니다.

하나님이 기드온과 함께 하시고 기드온을 간섭하신 일은 기드온이 의지할 만한 것을 잘라 버리시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극히 작은 수인 300명만 남기신 것입니다. 더 많은 수를 주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게 만드셨다는 것에 대해서 마음 깊이 묵상하셔야 합니다.

기드온에게 함께 하신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함께 하신다면 하나님은 때로 여러분이 기댈만한 것을 잘라 버리시는 일을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함 없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살아간다면 그가 곧 기적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곧 저와 여러분의 힘입니다. 많은 수의 교인도 아니고 많은 돈도 아닙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서 일하시고, 신자인 저와 여러분이 그 약속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 바로 우리들의 힘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자유자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힘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습니다. 직장도 생존을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증거 하라고 하나님이 보내신 선교지로 본다면 직장에서도 참된 자유를 누릴 수가 있을 것입니다.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기에 신자된 자의 관심은 신앙의 삶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힘을 기대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자로 살아가기 위해서 힘쓰는 삶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신자는 구원에 있어서도 주님의 피의 공로임을 서슴없이 증거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