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 7:9-23 여호와의 칼

지난 시간에 우리는 기드온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하나님의 법칙이 어떤 것인가를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으로 하여금 메뚜기 떼처럼 많은 수의 미디안 군사를 상대하게 하시면서도 상대적으로 적은 수에 지나지 않았던 32,000명의 기드온의 군사를 300명까지 줄여 버리셨습니다.

많은 수와 경쟁하고 싸울 때는 역시 많은 수가 나서야 한다는 것은 누구라도 부인할 수 없는 상식입니다. 설령 적은 수로 많은 수를 이긴다고 해도 그것은 적은 수의 힘이 뛰어날 때 해당되는 말입니다. 만약 서로 비슷한 힘이라면 적은 수로 많은 수를 이긴다는 것은 힘들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더군다나 힘이 뒤쳐지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적은 수로 많은 수를 상대하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 치기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300명의 군사로 메뚜기처럼 많은 미디안 군사를 상대한다는 것이 곧 '계란으로 바위 치기'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기드온을 이러한 상황으로 밀어 넣으심으로서 하나님의 법칙은 수와 수의 대결이 아님을 기드온에게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즉 힘과 힘의 대결이라는 체제 안에서 힘있는 자가 승리자이고 힘없는 약자는 항상 패자일 수밖에 없는 세상의 속성을 거부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항상 숫자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우리로서는 이러한 얘기가 허공을 울리는 공허한 말로만 들려질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껏 세상을 살아오시면서 숫자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세상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숫자의 경쟁이 없고 숫자가 많고 적음이 아무런 힘도 되지 않은 그런 나라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우리가 몸담고 사는 이 세상은 숫자의 질서 아래 살아가고 있습니다. 많은 수가 힘이 되고, 많은 수 앞에서는 적은 수는 상대적으로 약자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세상, 그래서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많은 수를 확보하기 위해서 애를 쓰고 살아가는 것이 이 세상입니다.

숫자의 경쟁을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곳이 교회이지 않습니까? 다른 교회보다 더 많은 수의 교인을 확보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일이며 예수님의 지상명령이라는 명목 아래 교인들로 하여금 사람을 데려오도록 다그치는 일들이 그쳐지지 않는 것이 바로 교회이지 않습니까?

'우리 교회는 500명 모인다'고 할 때 100명 모이는 교회의 목사는 기가 죽을 수밖에 없고 마치 자신의 능력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여겨지고 교인들 앞에서도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죄인이 되어 버리는 것이 오늘날 교회의 현실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 교회는 본당이 200평이다'고 자랑하는 목사 앞에서 50평짜리 예배당을 가지고 있는 목사는 '졌다'라는 패배감이 들어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 속에서, 아니 이러한 교회 안에서 과연 하나님의 나라는 환영을 받을 나라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수와 수의 싸움이 아니라는 말에 대해서 가슴 깊이 받아들이며 수에 민감하고 수의 경쟁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신의 허물에 대해서 회개가 되어지겠습니까?

세상 속에서 세상과 똑같이 숫자의 경쟁이라는 법칙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는 단지 교인 수를 많게 해주고 교회의 재정을 넉넉하게 늘려주는 것에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에게 메뚜기처럼 많은 수에 비해 300명이라는 적은 수를 주신 하나님의 깊으신 뜻과 은혜가 보일리가 만무한 것입니다.

숫자의 법칙 아래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는 우리를 하나님나라의 사람이 되게 할 뿐 세상에서의 숫자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은혜에만 마음을 두게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있는 것마저 잘라내실 수가 있기 때문에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은 숫자의 법칙 아래 매인 자들에게는 도저히 이해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나라는 숫자의 법칙에 매어있지 않음을 보여주는 말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기드온의 군사를 300명까지 줄여 버리신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미디안을 치라고 하십니다.

"이 밤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내려가서 적진을 치라 내가 그것을 네 손에 붙였느니라"(9절)는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전쟁의 승리의 법칙은 숫자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붙였느냐 붙이지 않았느냐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비록 힘이 없고 수가 적다고 해도 하나님이 이방 나라를 이스라엘에게 붙였다면 이스라엘은 승리하였습니다. 반면에 이스라엘이 힘이 있다고 해도 하나님이 붙이지 않으시면 그들은 약한 이방인에게 패배를 하였던 것입니다.

한 예로 이스라엘이 큰 여리고 성은 무너뜨렸지만 그보다 작은 아이 성에 대해서는 실패를 경험한 사건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승리와 실패는 하나님에게 달린 것이지 군사의 수나 힘에 달린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전쟁을 함에 있어서 승리의 법칙은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승리하게 하신다'는 이것이 이스라엘에게는 승리의 법칙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기드온에게도 미디안을 네 손에 붙였으니 나가서 그들을 치라고 하십니다. 승리와 패배는 300명이라는 숫자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달렸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이 그 말씀 하나만 믿고 선뜻 300명을 데리고 메뚜기처럼 많은 미디안을 치겠습니까? 물론 하나님만 바라본다면 미디안을 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군사들입니다. 그리고 말씀은 보이지 않습니다. 진심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의지하는 믿음이라면 얼마든지 말씀만 믿고 미디안을 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보이는 것에 마음이 간다면 섣불리 미디안을 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눈에 많은 수의 군사가 보인 이상 말씀에 대해서 의심이 가게 되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기드온에게도 그러한 의심이 있었나봅니다. 10-11절에 보면 "만일 네가 내려가기를 두려워하거든 네 부하 부라를 데리고 그 진으로 내려가서 그들의 하는 말을 들으라 그 후에 네 손이 강하여져서 능히 내려가서 그 진을 치리라 기드온이 이에 그 부하 부라를 데리고 군대가 있는 진 가에 내려간즉"라고 말씀을 합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아직까지 두려움이 남아 있음을 보셨습니다. 기드온의 두려움은 숫자에 대한 비교로 인해서 나온 결과입니다. 숫자에 대한 비교가 하나님이 붙였다는 말씀에 대해서 의심을 가지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기드온을 미디안의 진으로 내려가게 합니다. 그리고 그 진에서 그들이 하는 말을 듣게 함으로서 그 손을 강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드온이 미디안의 진에서 들은 말은 무엇입니까? 12-14절에 보면 그 내용이 나옵니다. 기드온이 미디안의 진에 이르렀을 때 어떤 사람이 자기 동료에게 꿈얘기 하는 것을 듣습니다. 꿈의 내용은 보리떡 한덩어리가 미디안 진으로 굴러 들어와서 장막에 이르러 그것을 쳐서 무너뜨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꿈 얘기를 들은 동료가 해몽을 하기를 "이는 다른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의 칼날이라 하나님이 미디안과 그 모든 군대를 그의 손에 붙이셨느니라 하더라"(14절)는 것입니다. 이 얘기를 들은 기드온은 하나님이 미디안 군대를 이스라엘의 손에 붙이신 것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고 300명으로 미디안을 치게 됩니다.

이 말씀을 들을 때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듭니까? 뭔가 우습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어떻게 이런 우연이 있을 수 있는가?'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마치 세상의 모든 일이 기드온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하필이면 기드온이 진에 이르렀을 때 꿈을 꾸게 되고 또 꿈 얘기를 하는 것입니까? 그리고 꿈에 대한 해몽도 어떻게 기드온과 연관지어 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우린 오늘 본문을 보면서 세상일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일이 인간의 생각대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힘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 하나하나 맞추어져 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기드온을 강하게 하기 위해서 미디안의 진으로 가라고 했을 때 마치 기드온을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미디안 군사가 꿈을 꾸고 또 꿈 얘기를 하고 더군다나 꿈에 대한 해몽을 기드온으로 연관지어 하는 것을 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의해서 차곡차곡 진행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의 연극이 각본대로 연출자에 의해서 전개되고 있는 느낌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세상의 실체입니다. 세상은 비록 보지 못하고 살아가지만 하나님이 세상을 통치하고 계심을 신자는 얼마든지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을 세상 중심으로 통치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드온을 미디안 진으로 보내고 때맞춰 꿈을 꾸게 하고 해몽하는 말을 듣게 하신 모든 것이 단지 기드온을 위해서, 그리고 이스라엘을 미디안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서이겠습니까?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모든 것이 하나님에 의해서 통치되고 있음을 보여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인간의 숫자와 힘에 의해서 가부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결정되어지고 있음을 가르치고자 하신 것입니다.

기드온은 꿈 얘기를 듣고 승리는 하나님에게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300명을 세대로 나누어서 각 손에 나팔과 빈 항아리를 들게 하고 항아리 안에 횃불을 감추게 합니다. 이것이 기드온이 300명을 데리고 미디안을 치기 위한 준비였습니다.

횃불과 항아리 그리고 나팔은 전투를 위한 무기가 전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기드온이 횃불과 항아리와 나팔을 준비한 것은 싸우기 위한 준비가 아니라 하나님의 싸움을 보기 위한 준비라고 볼 수 있습니다. 횃불은 밤중에 무엇인가를 보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항아리를 횃불을 감춰두기 위한 도구였습니다.

20-23절에 보면 이스라엘이 어떻게 승리하는가가 나옵니다. "세 대가 나팔을 불며 항아리를 부수고 좌수에 횃불을 들고 우수에 나팔을 들어 불며 외쳐 가로되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여 하고 각기 당처에 서서 그 진을 사면으로 에워싸매 그 온 적군이 달음질하고 부르짖으며 도망하였는데 삼백 명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와께서 그 온 적군으로 동무끼리 칼날로 치게 하시므로 적군이 도망하여 스레라의 벧 싯다에 이르고 또 답밧에 가까운 아벨므홀라의 경계에 이르렀으며 이스라엘 사람들은 납달리와 아셀과 므낫세에서부터 모여서 미디안 사람을 쫓았더라"

이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이 전투를 위해서 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단지 나팔을 불며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여'라고 외쳤을 뿐이고 항아리를 깨고 속의 횃불을 드러내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미디안은 도망을 치고 자기들끼리 서로 죽이게 됩니다.

그런데 한가지 생각할 것은 미디안 군사가 꿈을 해몽할 때 '기드온의 칼날'이란 말을 합니다. 그리고 미디안을 칠 때 이스라엘은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여'라고 외칩니다. 그러면 과연 기드온은 칼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이스라엘이 칼을 가졌습니까? 그들이 가진 것은 단지 나팔과 횃불과 항아리이지 칼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기드온의 칼이란 기드온이 가지고 있는 칼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기드온이 가지고 있는 칼이 아니라 여호와의 칼이었던 것입니다.

여호와의 칼이란 심판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심판하는 자들은 누구입니까? 미디안입니까? 그러면 그들은 무엇 때문에 하나님에게 심판을 받습니까? 이스라엘이 아니기 때문입니까?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아닌 우리도 하나님의 칼에 의해 심판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자들은 오직 한가지 기준으로 결정되어 집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담고 사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어린양의 피입니다. 출 12:13절에 보면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어린양의 피가 이스라엘의 표적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 피를 보고 이스라엘에게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고 이스라엘을 심판하지 않으신다는 것이 약속이었습니다. 따라서 피가 없는 이방인은 모두가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미디안이 심판을 받는 이유입니다.

미디안에게도 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칼은 결국 하나님에 의해서 서로를 죽이는 심판의 도구로 사용되었을 뿐입니다. 미디안이 가지고 있는 칼이 하나님의 심판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 장면을 횃불을 밝히고 환하게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미디안을 심판하는 광경을 낱낱이 보게 된 것입니다. 수많은 군사와 칼이 있어도 하나님의 심판을 막지 못하고 서로의 칼에 의해서 죽어 가는 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여호와의 칼은 하나님의 약속이 담겨 있지 않은 자를 치는 칼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칼이 미디안을 심판하는 장면을 보면서 자신들은 왜 여호와의 칼에 의해서 심판을 받지 않는지에 대해 분명히 알아야 했습니다. 메뚜기처럼 많은 수의 군사도 그리고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그 많은 칼도 여호와의 칼을 이길 수 없었음을 알아야 했습니다. 이것을 모른다면 이스라엘 역시 결국 여호와의 칼에 의해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무엇을 보십니까? 세상을 향해 있는 여호와의 칼을 보십니까? 아니면 미디안이 들고 있는 칼을 보십니까? 사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 때 주로 보는 것은 세상이 들고 있는 칼일 것입니다. 우리는 여호와의 칼보다는 세상이 들고 있는 칼에 더 매력을 느끼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미디안이 들고 있는 칼이지 여호와의 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칼을 보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는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단지 교회이기 때문에 내뱉는 그리스도일 뿐 나에게 소중하고 귀한 분으로서 그리스도는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많은 수가 힘이고 칼을 두려워하는 세상이기에 나 역시 칼을 손에 쥐고 싶어한다면 그에게 그리스도는 내 손에 칼을 쥐어주는 분으로서만 가치 있을 뿐입니다. 결국 그리스도의 피보다는 그리스도가 쥐어주는 것에 관심을 두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미디안이 받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신자에게 있어서 칼은 무엇입니까? 꿈을 해몽한 군사는 보리떡 한 덩어리가 진을 무너뜨리는 꿈을 기드온의 칼날이라고 말합니다. 즉 기드온의 칼날은 미디안과 그 모든 군대를 기드온의 손에 붙이신 하나님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약속대로 일하십니다. 약속대로 어린양의 피를 표적으로 삼아서 심판할 자를 심판하시고 건질 자를 건지십니다. 미디안을 기드온의 손에 붙이신 것도 기드온이 잘나서가 아니라 기드온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이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기드온에게 칼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며 그 약속대로 행하시는 하나님인 것입니다.

기드온의 칼과 미디안의 칼이 전혀 다릅니다. 기드온의 칼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반면에 미디안의 칼은 실제적이며 눈에 보이는 것이고 두려움이 되기에 충분한 힘을 가진 칼입니다. 세상은 과연 누구의 칼을 두려워하겠습니까? 분명 미디안의 칼입니다. 미디안의 칼을 두려워하고 굴복하는 것이 세상의 법칙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미디안의 칼을 손에 쥐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도 미디안의 칼을 손에 쥐고 싶어하는 간절한 욕망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우리들에 의해서 무시되는 것은 기드온의 칼입니다. 아무런 힘도 없고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줄 수도 없는 칼이기에 무시를 해버리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하나님에게는 기드온의 칼이 아닌 미디안의 칼을 달라고 애원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심판 받을 자의 모습임을 하나님은 미디안을 침으로서 보이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분명 믿음이 전혀 힘이 되지 못하는 세상을 살아갑니다. 많은 수가 힘이 되고 돈이 칼이 되는 세상에서 믿음을 말하고 오직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를 힘으로 삼고 살아가야 할 자로 부름을 입은 것입니다.

우리들의 손에 미디안의 칼이 없다는 것은 분명 괴로운 일일 것입니다. 힘을 가진 자로 살고 싶어하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미디안의 칼이 없다는 것은 삶에 있어서는 참으로 치명적인 약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하나님은 기드온의 싸움을 보이십니다. 칼을 가진 미디안의 군사가 하나님에 의해서 패배를 하고 항아리와 나팔과 횃불을 가진 이스라엘에 의해서 쫓김을 당하는 사건을 보이십니다. 우리에게 무엇이 참된 힘인가를 보이시기 위해서입니다.

많은 수와 많은 돈을 가진 자가 힘있게 보입니까? 그 힘앞에 두려움이 있습니까? 그리고 여러분도 그러한 힘을 가진 자로 살고자 하십니까? 그러나 그러한 힘이 여호와의 칼 아래서 어떤 운명을 맞이하는지 본문을 통해서 보시기 바랍니다. 비록 세상이 두려워하지 않고 눈에 보이지도 않는 칼이지만 분명 하나님은 약속하신 대로 여호와의 칼을 세상을 향해 휘두르실 것입니다. 그때 그 칼을 피할 자가 누구이겠습니까? 그들은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서 주어진 은혜에 감사하며 살았던 신자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