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 8:1-3 에브라임의 항변

본문의 내용은 마치 우리들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거울과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행동하는 것들, 그리고 이웃을 대하는 태도들이 적나라하게 폭로되고 있는 말씀입니다. 에브라임과 기드온의 대화에서 우리가 과연 무엇에 관심을 두고 무엇과 싸우면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지를 살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아시다시피 기드온은 하나님이 미디안을 붙여주심으로 인해서 승리를 거둡니다. 그런데 에브라임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와서 말하기를 "네가 미디안과 싸우러 갈 때에 우리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우리를 이같이 대접함은 어찜이뇨"(1절)라고 말하면서 크게 다툽니다.

여러분은 에브라임의 이러한 항변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에브라임은 기드온이 미디안과의 싸움에 자신들을 부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항변을 합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기드온이 전쟁터로 부르지 않은 것이 어마나 다행스런 일이겠습니까? 전쟁터란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위험스런 곳입니다. 그런 곳으로 부름을 잊지 않은 것은 다행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문제는 기드온이 승리를 했다는데 있습니다. 만약 싸우기 전에 에브라임을 불렀다면 과연 그들은 어떤 식으로 대답했을까요?

물론 에브라임 사람들이 아예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7:24절에 보면 기드온이 사자를 보내서 에브라임더러 미디안 사람을 치라고 합니다. 그리고 에브라임이 전쟁에 참여를 해서 미디안 두 방백 오렙과 스엡을 죽이게 됩니다.

이렇게 그들도 분명 싸움에 참여를 했는데 어째서 미디안과 싸우러 갈 때 자기들을 부르지 않았다고 항변을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자기들이 한 일이 기드온이 한 일에 비해서 너무 작은 일로 보여졌기 때문입니다. 기드온은 300명의 군사를 가지고 미디안을 쳐부쉈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은 전쟁이 끝날 무렵에 참여해서 오렙과 스엡을 죽였을 뿐입니다.

여러분 같으면 누구의 공로가 더 크다고 생각되겠습니까? 당연히 기드온이 아니겠습니까? 300명의 적은 숫자로 메뚜기 같은 미디안을 쳐서 승리했는데, 겨우 전쟁의 말미에 끼어 들어서 오렙과 스엡을 죽인 공적과 비교가 되겠습니까? 저 같아도 겨우 두사람 죽인 것을 가지고 기드온이 한 일과 같이 여길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에브라임 사람들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기드온의 공적에 비해서 자신들이 한 일은 아주 적은 것으로 여겨진 것입니다. 그러자 싸움의 처음부터 자신들을 부르지 않은 기드온에 대해서 항변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에브라임의 항변은 자존심 싸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기드온의 공적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보잘 것 없는 자신들의 공적이 비교된 것입니다. 그리고 기드온에 비해서 너무 보잘 것 없는 일을 했다는 것이 그들로 하여금 항변을 하게 한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교회에서도 많이 볼 수 있는 모습들입니다. 오늘날 교회 역시 공적을 비교하면서 자존심 싸움을 하는 모습들을 많이 봅니다. 나보다 더 많은 일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자신이 한 일이 초라하게 여겨집니다. 그리고 '나도 당신과 같은 조건이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가령 부자가 헌금을 천만원 했습니다. 그리고 돈 없는 자는 만원 밖에 못했습니다. 그럴 때 다른 사람들은 가만히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기 스스로 '나도 돈만 있으면 당신처럼 헌금을 많이 할 수 있다'라는 생각을 가진다면 그것이 곧 자존심 싸움인 것입니다.

또 이런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양로원을 도와주기 위해서 헌금을 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교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부담이 될 것을 염려해서 그 사람을 제외시켰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가난한 교인이 그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경우 여러분이 만약 가난한 사람의 입장이라면 어떤 반응을 보이겠습니까? 혹시 '내가 가난하다고 해서 무시하는 것 아니냐?'라는 항변을 하지 않겠습니까? 충분히 할 수 있는 항변입니다. '나도 얼마든지 헌금할 수 있는데 왜 나를 빼놨느냐?'라고 항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항변은 결국 자존심과 연결되어서 나온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 처음부터 양로원을 돕는 일에 가난한 사람을 포함시켰다면 부담을 가졌을지 모릅니다. '나는 돈도 없는데 왜 나를 그런 일에 포함을 시키느냐. 내가 당신들처럼 생활이 넉넉한 줄 아느냐?'라고 하면서 자신을 포함시킨 것에 불만을 가졌을지도 모릅니다. 돈을 내자니 아깝고, 빠지자니 자존심이 상하는, 이렇게 할 수도 없고 저렇게 할 수도 없는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에브라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싸움의 초기에 불렀다면 300명밖에 안되는 군사를 보고 미리 겁을 먹고 거부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왜 부르지 않았느냐고 큰소리를 치는 것입니다.

이러한 에브라임 사람들의 항변에 대해서 기드온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2-3절에 보면 "기드온이 그들에게 이르되 나의 이제 행한 일이 너희의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보다 낫지 아니하냐 하나님이 미디안 방백 오렙과 스엡을 너희 손에 붙이셨으니 나의 한 일이 어찌 능히 너희의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 기드온이 이 말을 하매 그들의 노가 풀리니라"고 말합니다.

기드온의 대답은 내가 한 일이 너희들이 한 일과 비교가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내가 한 일이란 미디안을 쳐부순 일입니다. 그리고 너희, 즉 에브라임 사람들이 한 일은 싸움의 말미에 개입해서 오렙과 스엡을 죽인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기드온은 300명의 군사로 미디안을 쳐부순 것보다 에브라임 사람들이 오렙과 스엡을 죽인 것을 더 크게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입니다.

물론 기드온이 에브라임 사람들의 항변을 무마시키기 위해서 그들을 기분 좋게 해주려고 듣기 좋은 말을 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미디안 방백 오렙과 스엡을 너희 손에 붙이셨으니'라는 말씀을 보면 단지 에브라임을 무마시키기 위해서 듣기 좋은 말을 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기드온이 에브라임 사람들이 한 일을 자신의 일보다 더 크게 보는 것은, 모든 일을 하나님이 하셨다는 믿음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기드온은 미디안과 전투를 하기 전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미디안을 이스라엘의 손에 붙이셨다는 증거를 여러번 확인하였습니다. 때문에 미디안에 승리를 한다고 해도 자신의 힘으로 얻은 승리가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증거가 항아리와 나팔과 횃불을 들고 전투에 참여한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을 드린 대로 전쟁에서 없어서는 안되는 칼을 버리고 대신 나팔과 항아리와 횃불을 잡았다는 것은 우리는 칼로 이기는 사람들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미 승리는 여호와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말씀을 믿는 것이지 칼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았기에 칼이 아니라 전혀 무기라 할 수 없는 항아리와 횃불과 나팔을 잡은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아니면 얻을 수 없는 승리였기에 기드온은 미디안과의 전투를 자신의 공적으로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공로가 단 1%도 포함되지 않은 승리, 이것이 미디안과의 전투에서 얻은 승리에 대한 기드온의 시각입니다. 이런 이유로 기드온은 에브라임에 대해서 '너희가 한 일은 내가 한 일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다'라는 말을 하게 된 것입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항변을 한 것은 서로의 공적을 비교한 결과입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은 기드온이 미디안을 쳐부순 것이나 자신들이 오렙과 스엡을 죽인 것을 자신들의 힘으로 한 것으로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싸움에 처음부터 참여를 했더라면 자신들의 공적도 기드온처럼 클 수가 있었는데 늦게 참여를 했기 때문에 기드온에 비해서 보잘 것 없는 공적을 올렸다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이러한 에브라임 사람들의 항변에 대해서 기드온은 '나의 이제 행한 일이 너희의 한 것에 비해서 비교가 되겠느냐?'라는 말을 한 것입니다. 기드온은 에브라임 사람들이 단지 자신들을 싸움에 부르지 않은 것을 가지고 시비를 거는 것이 아니라 공적에 대해서 시비를 걸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한 일이 너희들이 한 일에 비해서 비교가 되겠느냐는 말을 한 것입니다.

여기서 기드온과 에브라임 사람들의 차이는, 기드온은 하나님이 붙이신 결과라고 믿는 것이고 에브라임 사람들은 자기들이 한 일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때문에 기드온에게 있어서는 공적을 가지고 비교하거나 싸움을 할 이유가 없는 것이고, 에브라임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2절에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보다 낫지 아니하냐"라고 말씀합니다. 끝물 포도란 맏물 포도를 수확하고 난 뒤에 남은 포도 찌꺼기를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상 포도의 질이나 맛을 따진다면 끝물 포도가 맏물 포도보다 나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기드온은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 즉 자신의 아비 집에서 생산된 맏물 포도보다 더 낫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전투에 처음부터 참여한 기드온의 사람들보다 끝에 참여해서 전투를 한 에브라임이 더 낫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풍자한 것입니다.

어쨌든 이처럼 기드온이 자신이 한 일보다 에브라임 사람들이 한 일을 더 크게 보고 있는 것은, 일의 경중을 보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즉 기드온은 에브라임이 보기에는 아주 큰 일을 했지만 하나님이 에브라임을 통해서 하신 그 일이 더 크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일의 경중을 따져 가면서 어떤 일은 귀한 일이고 어떤 일은 보잘 것 없는 일로 여깁니다. 어떤 것은 하나님의 상을 많이 받을 일이고, 어떤 것은 부끄러움을 당할 만큼 별 것 아닌 일로 여기기도 합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일을 맡겼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일을 맡기셨기 때문에 큰 일을 해야 상을 많이 받는다고 믿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에브라임의 시각입니다.

그러나 에브라임의 시각에서 나올 것은 비교와 경쟁 밖에 없습니다. 누가 한 일이 더 크나를 따지면서 우월을 판가름하는 모습만 보여질 뿐입니다. 나보다 더 큰 일을 한 것으로 여겨지는 사람 앞에서 자존심을 상해하거나 괜히 그에게 시비를 걸기도 합니다. 이것이 에브라임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들이 세상을 살아갈 때 흔히 나타나는 허물이기도 합니다.

모든 일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기드온이 승리한 것이나 에브라임 사람들이 전투의 끝에 참여해서 오렙과 스엡을 죽인 것이나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 편에서 볼 때는 두 일이 결코 경쟁이나 비교의 상대가 될 수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이 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의 일에서 하나님을 제외 시켜 버립니다. 내가 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일을 통해서 영광을 받고자 하는 욕심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그 결과 하나님이 하신 일을 들고서 서로 싸우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한 일을 가지고 자신의 일을 평가하지 마십시오. 그 사람이나 여러분 자신이나 똑같이 하나님이 일하신 덕분에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만원 헌금하는데, 어떤 사람은 천만원 헌금했다면 그것도 역시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하나님이 천만원 헌금하도록 하셨기 때문에 하게 되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만원 헌금할 형편이라면 그것도 역시 하나님이 그만큼 하도록 만드셨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감사하면 되는 것이지 남이 한 일을 비교하면서 자존심 상하고 '나도 저런 환경이라면 얼마든지 저 사람보다 더 많이 할 수 있다'라는 싸움을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을 전혀 마음에 두지 않고 살아가는 결과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남이 하고 있는 큰 일을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남이 큰 일을 할 때 부러움이 생기거든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을 다시금 생각하십시오. 큰 일도 작은 일도 사람의 능력으로 되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게 하신 결과임을 생각하십시오. 그럴 때 큰 일이나 작은 일이나 동일하게 하나님의 은혜이고 감사할 수밖에 없는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헛된 싸움에 힘을 낭비하고 살아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물론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는 중요한 일이고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싸움일 수도 있습니다. 내 명예와 관계된 일이기에 포기할 수 없는 싸움도 있을 것이고, 내 자존심과 연관된 싸움이기에 뒤로 물러서지 않는 것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가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이 나 자신의 명예나 이름이나 자존심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단지 우리를 이용해서 세상에 하나님의 뜻을 전파하고 그리스도를 증거 하고자 하실 뿐입니다. 그 일에 우리 자신과 우리의 삶의 모든 것이 동원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신 이유일진대 과연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의 이름이나 명예나 자존심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까?

우리들의 이름이 무시를 받는들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이름만 높여지면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다른 사람보다 적은 영광을 받거나 아예 영광을 받는 자리에 끼이지 못한다고 해도 그것이 싸울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나는 영광을 받지 못해도 하나님에게 영광이 되면 그것으로 족한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들의 자존심이 무너진들 그것 역시 하나님 편에서는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증거 되는 것에 우리가 걸림돌이라는 사실입니다.

남이 한 큰 일을 보지말고 나에게 일어난 조그만 일을 보고 사십시오. 누군가가 병이 들었다가 나았다고 해도 그것을 마치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확실한 표적으로 여기고 부러워 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병이 나은 것도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면 병이 들지 않고 건강하게 사는 것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누군가는 병이 들었다가 낫게 하셔서 하나님을 증거 하는 도구로 삼으시고 누군가는 건강하게 하셔서 하나님을 증거 하라는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을 바라보려고 하십시오. 내가 하는 일로 여기지 마시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로 여기십시오. 돈을 벌었다면 하나님이 붙여준 것으로 여기십시오. 직장도 하나님이 붙여준 것으로 여기십시오. 그러한 믿음으로 사신다면 남이 가진 것을 부러워 할 필요도 없을 것이고 남이 가진 것 때문에 자존심 상해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한 일을 남의 일보다 더 크게 여기거나 자랑하는 것도 없을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이 하셨음을 생각한다면 기드온처럼 '하나님이 하셨는데 나의 한 일이 어떻게 당신이 한 일에 비교되겠습니까?'라는 말을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자존심은 하나님이 일하심을 보지 않는 결과입니다. 자존심은 우리의 마음을 불편하게 할 뿐입니다. 항상 내것보다는 남의 것을 보게 할 뿐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것에 대해서 감사하기보다는 남에게 주어진 것을 보며 비교하고 시기할 뿐입니다. 이러한 마음은 천국이라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진심으로 육의 편함이 아니라 마음의 편안함, 즉 마음의 안식을 누리고 싶거든 하나님을 보고 살아가십시오. 여러분에게 주어진 모든 것에서 하나님을 보십시오. 그럴 때 여러분은 작은 것이든 큰 것이든 상관없이 여러분의 삶에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흔적들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 에브라임 사람들처럼 기드온의 공적을 보면서 시비를 거는 일은 없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16:24-25)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삶이란 내 자존심을 세우지 않는 삶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자존심을 포기했다는 것은 곧 나를 포기했다는 것과 같은 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장로들과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날 것에 대해서 말씀을 하자 베드로는 그리하지 말라고 말립니다. 베드로는 평소 예수님과 시비하며 살았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대제사장의 손에 의해서 예수님이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하자 그것을 지는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제자로 살던 자신의 자존심과도 연결된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말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일은 자기의 자존심을 세우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위한 도구로 부름을 입었지 우리의 자존심을 위해서 성도로 부름을 입은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자신을 세우려고 하지말고 언제나 하나님의 이름을 세우시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세워야 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살아가십시오. 이 시대에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증인으로 살아가도록 부름 받은 사람은 성도입니다. 나 개인을 위한 삶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한 삶으로 생각하십시오. 그럴 때 조그만 것 하나하나에까지 담겨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조그만 것에까지 담겨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살아갈 때 그 삶은 재물의 여부와 상관없이 풍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남들은 보잘 것 없는 것으로 치부하고 업신여긴다고 해도 나에게는 참으로 귀하고 중요한 하나님의 일이며 은혜로 여겨질 때 산다는 것은 즐거움입니다.

여러분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여러분의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찾으십시오. 여러분에게 주어진 작은 것이 남에게 있는 큰 것보다 귀한 것입니다. 남의 것으로 부러워하며 사는 삶이 아니라 나에게 주어진 작은 것으로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이 믿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