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 8:4-17 잘못된 판단

예수님은 분명 하나님을 사랑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자기를 버리시면서 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신 분이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흠하나 없이 완벽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분을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유대인들은 왜 배척을 하고 죽이기까지 했을까요? 단순히 예수님의 말씀이 듣기가 싫어서 였을까요? 예수님의 말씀이 자신들의 잘못을 지적하기 때문에 그것이 기분 나빠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고 죽인 것입니까?

그렇다면 만약 그들 앞에 구약 때처럼 번개와 뇌성이 울리면서 주의 사자가 영광스런 모습으로 나타나서 그들의 죄를 지적한다면 그들은 그래도 그 말을 노골적으로 거부하고 주의 사자를 잡아죽이려고 했을까요? 아마 두려워서 떨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거부하면서 배척을 한 이유는 예수님의 말씀을 무시해도 좋을만한 뭔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곧 외형적인 조건입니다. 외형적인 조건으로 따진다면 예수님의 말씀은 도저히 사람들에게 신빙성을 줄 수가 없습니다. 천한 마을에서 겨우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사람이기에 그 말에 공경하고 따를 사람들이 없었던 것입니다.

말의 권위는 말의 내용에 있습니다. 누군가가 복음을 말할 때 그 복음의 권위는 그 사람의 외형이나 신분이나 조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복음이 순전히 그리스도만을 높이고 십자가만을 전할 때 권위가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단지 말을 전달하는 전달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전달자이기 때문에 전달자가 부자여야 한다거나, 명문의 가문 출신이어야 한다거나, 권세가 있거나 지식이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조건은 필요치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사가 전하는 복음이든 평신도가 전하는 복음이든 그 내용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십자가만을 증거 하는 것이라면 그 사람이 누구든 상관없이 동일한 권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외형적인 조건을 보지 않고 그 말씀에만 귀를 기울였다면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서 진리를 발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눈이 가려져 있었습니다. '저런 자에게서 귀한 진리가 나올 수 없다'는 그들의 선입관이 그들을 소경 되게 한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실수이며 오늘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실수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과연 사람의 외형적인 조건을 보지 않고 순수하게 그 사람의 내면을 보려고 애를 쓰며 살아간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똑같은 목사가 말씀을 전한다고 해도 외국에 유학을 다녀오고 신학박사가 된 목사가 전하는 말과 그냥 보통 목사가 전하는 말을 아무런 구분 없이 단지 그 내용만을 보면서 진리의 여부를 판단하는 냉철함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무래도 유학을 다녀오고 박사인 목사의 말에 더 신빙성을 두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많이 배웠으니까 뭔가 다르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우리를 지배한다고 생각지 않습니까?

사실 사람을 외형적인 조건으로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주 힘든 일입니다. 이미 우리들은 외형적인 조건들을 통해서 사람과 사람을 구분하고 판단하는 틀을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가령 힘있는 자는 힘없는 자를 이긴다는 것은 이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틀입니다. 이 틀을 가지고 상황을 맞추어 가는 것입니다. 힘있는 자는 힘없는 자를 이기기 때문에 누가 힘이 있는가를 살피게 됩니다. 그리고 힘의 여부는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부나 권세를 가지고 결정하게 됩니다. 결국 돈이 있는 사람은 돈 없는 사람을 이긴다는 것이 세상의 법칙이고, 권세 있는 자는 없는 자를 이긴다는 것이 세상의 법칙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런 법칙에 순응하며 살아가기 때문에 사람을 볼 때 외형적인 조건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힘있게 보이는 자에게는 굽히고 힘이 없이 보이는 자에게는 무시하는 행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역시 이러한 세상의 판단구조 안에서 살아가는 한 족속을 볼 수 있습니다. 4절에 보면 "기드온과 그 좇은 자 삼백 명이 요단에 이르러 건너고 비록 피곤하나 따르며"라고 말합니다. 기드온과의 전투에서 미디안 사람들은 하나님이 서로 칼로 치게 하심으로서 큰 피해를 입게 됩니다. 그리고 도망을 칩니다. 이 미디안을 기드온과 300명의 군사들이 쉬지 않고 추격을 하는 와중에 매우 지친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기드온은 군사들을 위해서 숙곳 사람들에게 "그가 숙곳 사람들에게 이르되 나의 종자가 피곤하여 하니 청컨대 그들에게 떡덩이를 주라 나는 미디안 두 왕 세바와 살문나를 따르노라"고 부탁을 합니다. 즉 자신들은 지금 미디안의 왕인 세바와 살문나를 쫓고 있는데 나와 군사들이 심히 피곤하니 떡을 좀 달라는 부탁을 한 것입니다. 미디안의 두 왕이라고 한 것을 봐서 이 두 사람이 모두 미디안 왕이 아니라 미디안과 연합하여 기드온을 치는 이방 나라의 왕인 것 같습니다. 한나라에 왕이 둘 일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이러한 기드온의 요구에 대해서 숙곳 방백들이 거절을 합니다. 6절에 보면 "숙곳 방백들이 가로되 세바와 살문나의 손이 지금 어찌 네 손에 있관대 우리가 네 군대에게 떡을 주겠느냐"는 말씀에서 숙곳 방백들이 거절하는 분명한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기드온과 300명의 군사를 무시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미디안의 군사가 도망을 치고 있는 상황이기는 하지만 아직도 그들의 군사는 많은 숫자입니다. 10절에 "이 때에 세바와 살문나가 갈골에 있는데 동방 사람의 모든 군대 중에 칼 든 자 십이만 명이 죽었고 그 남은 일만 오천 명 가량은 그들을 좇아 거기 있더라"는 말씀을 보면 기드온이 쫓았던 군사들의 수는 일만 오천 명 가량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십이 만 명이 죽고 일만 오천 명 가량이 남았다면 이것은 대단한 전과입니다. 진실로 불가능한 것이 가능이라는 현실로 나타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일만 오천 명이라는 수도 300에 비하면 역시 엄청난 숫자임이 분명합니다.

숙곳 방백들은 바로 수의 비교를 한 것입니다. 미디안 군사가 비록 도망을 치기는 하지만 그들의 수는 일만 오천 명입니다. 그런데 미디안의 왕을 잡겠다고 추격을 하는 것이 그들의 눈에는 하룻강아지 범무서운 줄 모르는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숙곳 방백들이 기드온에게 '세바와 살문나의 손이 지금 어찌 네 손에 있관대 우리가 네 군대에게 떡을 주겠느냐'라는 말을 한 것입니다. 이것은 기드온의 군사들이 미디안 왕을 도저히 잡을 수 없다는 판단하에 한 말입니다.

일만 오천 명 대 삼백 명을 비교하면 도저히 수학적으로는 이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기드온 군사를 도왔다가 나중에 미디안 군사가 알기라도 한다면 큰일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계산하에 숙곳 방백들은 기드온의 도움 청함을 거절한 것입니다.

이러한 숙곳 방백들에게 기드온은 "그러면 여호와께서 세바와 살문나를 내 손에 붙이신 후에 내가 들가시와 찔레로 너희 살을 찢으리라"(7절)고 말합니다. 이것은 숙곳 방백들이 도움을 주지 않은 것에 대해 보복의 말을 하는 것으로 이해하기보다는 기드온과 숙곳 사람들의 생각의 차이가 어디에 있는가를 보여주는 말씀으로 볼 수 있습니다.

기드온은 여호와께서 세바와 살문나를 내 손에 붙이신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수를 보고 승리의 여부를 판단하는 숙곳 사람들은 군사의 수가 적은 기드온을 무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은 과연 세상이 신자의 믿음에 대해서 이해하고 인정을 할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세상의 시각은 숙곳 방백들과 같습니다. 수를 보고 승리의 여부를 판단하고 수가 적은 것에 대해서는 무시하는 숙곳 사람들의 태도는 세상이 가지고 있는 것과 동일합니다. 따라서 세상 역시 믿음에 대해서는 이러한 시각으로 판단하고 규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전하는 말씀이 복음인가 아닌가의 여부와는 전혀 상관없이 다만 시골에서 목회 하는 목사라는 이유로 무시를 받게 되고, 도시에서 성공한 목사라는 이유로 우대 받고 높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기드온은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는 자였습니다. 기드온은 300명이란 작은 수에 매이지 않고 수가 작다고 해서 낙심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미디안을 붙이셨기 때문에 승리한다는 사실을 믿는 자였습니다. 과연 하나님이 보실 때 누구를 높이겠습니까? 믿음으로 사는 신자입니까 아니면 수적 성공한 자입니까?

여러분이 진심으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는 믿음으로만 살겠다고 결심을 하셨다면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나 판단에 대해서 끌려가지 않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세상으로부터 무시를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외형적인 것으로 판단하고 구분하고 살아가는 세상에서 높임 받는 믿음이란 하나밖에 없습니다. 외형적으로 성공한 것입니다. 성공했을 때 그 믿음이 인정을 받는 것이지 외형적으로 내세울 것이 전혀 없는 사람이 복음을 말하고 믿음을 말해봐야 들어줄 자가 과연 누구겠습니까?

기드온을 무시한 것은 숙곳 사람들만이 아닙니다. 8절에 보면 "거기서 브누엘에 올라가서 그들에게도 그같이 구한즉 브누엘 사람들의 대답도 숙곳 사람들의 대답과 같은지라"고 말합니다. 기드온은 숙곳 사람들에게 도움을 거절당하자 브누엘로 가서 그들에게도 같은 요청을 했습니다. 그러나 대답은 숙곳 사람과 같았습니다. '적은 수로 뭘 하겠다는 것이냐?'라는 무시를 받았을 뿐입니다. 결국 이것을 통해서 믿음이 없는 자는 무엇을 보고 살아가는가가 드러난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보고 사는 자가 등장했을 때 믿음이 없는 자의 불의함이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믿음을 무시함으로서 믿음 없음이 드러난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은 믿음이 있는 기드온을 숙곳 사람들과 브누엘 사람들에게 보내심으로서 그들이 믿음 없음을 드러내고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 믿음이 있는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심으로서 세상 전체가 믿음이 없다는 것을 드러내신 것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외형적으로 볼 때 아무것도 아닌 예수님을 보내셔서 세상을 정죄하시는 것입니다.

분명 예수님은 믿음으로 사셨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으로 사셨습니다. 그런데 세상이 예수님을 무시하고 싫어합니다. 힘이 없는 분이었기에 그 말씀에 대해서까지 무시를 해버린 것입니다.

행여 오늘 우리가 이런 실수를 하는 것은 아닌지 깊이 생각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들 앞에 하나님이 외형적으로 볼 때 아무것도 아닌, 무시해도 좋을만한 사람을 세우셔서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사람이 별 것 아닌 조건을 가지고 있기에 그 말에 대해서 무시해 버렸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숙곳 사람들이나, 브누엘 사람들은 기드온의 수를 보고 기드온을 판단했지만 오늘 우리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 성도라면 여러분 앞에 선 자가 누구라 할지라도 그 외형을 보지 마시고 그가 하는 말이 과연 주님만 높이고 주님만 사랑하고자 하는 말인지에 귀 기울이셔야 합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주님만 높이고자 하는 말이라면 그 말에 복종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보고 살아가는 신자에게서 볼 수 있는 겸손이고 믿음의 태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자에게는 작은 자 큰 자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작은 자일뿐이고, 또한 동시에 하늘에서 큰 자로 여김 받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작은 자요 모두가 큰 자이기에 목사 장로라는 직책으로 큰 자 작은 자가 구분될 수 없는 것이고, 부자와 가난한 자라는 소유의 양으로 인해서 큰 자와 작은 자로 구분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무시하고 살아가는 세상의 판단 기준일 뿐입니다.

여러분은 과연 어떤 기준으로 살아가십니까? 기드온의 기준입니까 아니면 속곳사람들과 브누엘 사람들의 기준입니까? 만약 숙곳 사람과 브누엘 사람들의 기준이라면 장차 당할 일이 있습니다. 7절에 보면 "기드온이 가로되 그러면 여호와께서 세바와 살문나를 내 손에 붙이신 후에 내가 들가시와 찔레로 너희 살을 찢으리라 하고"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9절에서도 "기드온이 또 브누엘 사람들에게 일러 가로되 내가 평안이 돌아올 때에 이 망대를 헐리라 하니라"고 말합니다. 즉 그들의 판단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드러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그들은 살을 찢길 것이고 망대가 허물어 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힘이 없다고 무시했던 무시로 인해서 그들이 찔림을 당하고 허물어뜨림을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시를 당했던 기드온과 그의 군사들은 승리한 자로서 평안히 돌아올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이 있는 자아 믿음이 없는 자의 결말입니다.

지금 당장 우리들의 시각으로 현재를 바라볼 때는 적은 것은 실패고 많은 것이 성공으로 보여질 것입니다. 많은 것을 높이고 적은 것은 무시하는 세상의 모습들이 보여질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것을 추구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패와 성공은 많고 적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는 것과 믿지 않는 것으로 결정되어진다는 것을 잊으시면 안됩니다.

물론 참된 승리가 무엇인가가 드러날 때까지는 계속 무시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두려움은 세상에서 무시를 받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의 두려움은 그리스도로부터 '나는 널 모른다'는 부인함을 받게 되는 것에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는 부인한다면 그것은 영원한 어둠을 선포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잠시 세상으로부터 무시를 받는 것을 견디지 못해서 많은 수로 성공하고 높임 받으려는 세상의 판단을 따라가겠습니까? 결국 그것은 스스로 나를 찌르고 허물어뜨리는 길인데도 말입니다.

성경에서 주님이 오실 때까지 인내하고 기다리라는 말씀을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세상이 신자의 믿음을 이해하고 인정을 한다면 인내라는 것이 필요하겠습니까?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믿음이기에, 세상이 알아주고 높여주기를 바라는 기대를 버리고 살라는 것입니다. 세상이 알아주지 않고 이해하지 않는 길을 간다는 것은 참으로 외롭고 힘든 길입니다. 그러기에 인내하고 기다리라는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며 살아가는 것이 분명 성경적으로 볼 때 의로운 것이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당연한 것입니다. 믿는 자의 생각으로서는 이러한 믿음이라면 분명 같은 믿는자들로 부터 환영을 받고 높임을 받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하자고 할 때 부인되는 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외형적인 조건들입니다. 믿음이 없는 자들은 바로 이것을 거부합니다. 많은 것이 곧 축복이며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라고 생각하기에 십자가만이라는 말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또 아예 믿음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자랑하며 살아가는 삶에 대해서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있기 때문에 오직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고 믿음을 거부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드온과 300명의 군사들이 왜 무시를 받아야 합니까? 그것도 같은 형제로부터 말입니다. 숙곳 사람들이란 숙곳에 사는 가나안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숙곳은 요단 동편의 갓지파가 기업으로 차지한 땅입니다. 그리고 브누엘 역시 숙곳과 마찬가지로 갓 지파의 성읍이었습니다. 따라서 기드온은 같은 이스라엘, 즉 자기 형제들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입니다. 함께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는데 오히려 무시를 당합니다. 믿음이 믿는다는 사람들로 인해서 무시를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의 현실이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은 누군가를 쉽사리 판단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판단은 항상 세상이 기준일 때가 많습니다. 남을 판단하려고 하기 이전에 먼저 여러분 자신을 스스로 판단하십시오. 여러분이 자신에 대해서 과연 외형적인 조건을 전혀 보지 않고 있는지를 판단하십시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선물로 받았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있는지 판단하십시오. 만약 하나님의 선물만으로도 감사하고 사신다면 여러분은 외형적인 것으로 판단하지 않는 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시각이라면 형제를 대할 때도 외형적인 기준이 아니라 그가 과연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말하고 높이고 있는가를 볼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어떤 모습을 가지고 살고 있으며 어떤 조건으로 산다고 해도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믿음으로 산다는 것만으로 그를 공경하고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안에 만나는 형제가 아니겠습니까? 이런 믿음으로 산다면 믿음을 알지 못한 세상으로부터 무시를 당한다고 해도 괜찮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믿음이 자랑거리로 여겨지지 않는 세상이 나쁘고 악한 것이지 믿음으로 사는 신자가 잘못된 것은 아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힘을 보고 사는 세상의 판단 기준은 결국 힘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고, 이런 세상으로부터 믿음이 어떤 판단을 받을 것인지 여러분 스스로 답을 내리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