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 8:22-28 무엇을 믿는가?

신자는 하나님의 다스림이란 말을 많이 합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살자'는 말을 수없이 하면서도 정작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많은 오해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일단 하나님의 다스림이란 말을 할 때 다스림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이해를 해야 할 것입니다. 다스림이란 다스리는 자와 다스림을 받는 자의 관계가 있을 때 해당되는 말입니다. 다스림을 받는 자가 없는데 다스림이라는 말이 성립될 수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다스린다'라고 할 때 먼저 생각할 것은 다스림을 받는 자가 있는가? 또는 다스림을 받고 있는가를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다스린다고 할 때 먼저 물어야 할 것은 '과연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살아가십니까?' 이런 질문을 하면 쉽게 '예'라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사십니까?'라고 물으면 대답은 궁색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것에 대해서 구체적인 생각을 해보지도 않은 채, 다만 목사의 말에 순종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사는 줄 착각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평소 목사가 가르쳤던 대로 순종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다스림에 순종하는 것인 줄로 착각을 한 것입니다.

왜 교인들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목사의 가르침에 순종하는 것으로 대체하게 될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신다는 것 때문입니다. 다스림을 받는다면 다스리는 자가 분명해야 합니다. 직접 지시하는 것이 있어야 하고 명령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다스리고 있다는 실감을 하게 될 것이고, 그 다스림에 순종함으로서 다스림을 받으며 산다고 믿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교인들이 이처럼 목사의 가르침에 비중을 두게 되는 이유는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신 신이라는 것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지금의 시대에서는 직접 말씀하시는 것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인정하는 성경이라는 책이 눈앞에 놓여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성경책에 있는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서 목사를 세웠다고 믿는 것입니다. 즉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대리자로 세움을 입었기 때문에 목사에게 순종하는 것이 곧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것으로 인식이 된 것입니다.

물론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대리자를 내세워서 말씀을 전달하는 내용들이 많이 나옵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직접 말씀을 하시기도 하셨지만 항상 중간에는 대리자가 있었습니다. 즉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직접 상대한 것이 아니라 대리자를 중간에 내세워서 말씀을 전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도록 한 것입니다.

애굽에 있던 이스라엘에게 모세를 보내신 것이며, 모세의 후에 여호수아를 세우시고, 또 사사 시대에서는 사사들을 세워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이스라엘의 신앙이 엉망이 되었을 때는 선지자를 세워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상대하심에 있어서 항상 대리자가 등장을 했고, 그 대리자를 통해서 말씀을 전달하신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직접 상대하지 않으신 것입니까? 대리자 없이 말씀하시고 책망하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수는 없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에서도 기드온이 등장합니다. 이스라엘이 범죄 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미디안의 손에 붙여서 고생을 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부르짖을 때 기드온을 세워서 미디안을 이기게 하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일하시는 것입니까? 번거롭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분명히 하나님은 기드온이 없이도 얼마든지 미디안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또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기드온의 군사를 300명으로 줄여 버리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기드온의 힘이나 군사의 수가 하나님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라면 아예 기드온을 세울 필요 없이 하나님이 미디안을 이기면 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왜 힘도 없고 하나님께 도움이 되지도 못하는 기드온을 세워서 미디안을 이기게 하십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대리자를 세웠을 때 확인되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스스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외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만 섬긴다고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는지, 진심으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살아가는지 무엇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도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산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과연 무엇으로 증거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의 믿음이 세상에 대해서 무엇으로 증거 되어지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대리자로 인해서 증거 되는 것입니다.

대리자가 누구라 할지라도 대리자를 보지 않고 대리자를 세우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한다면 그것이 곧 진심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증거될 것입니다. 보이는 것에 의존하지 않고 보이는 것을 있게 하신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이 곧 믿음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들의 믿음에 있어서 최대의 걸림돌은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든 돈이든 나를 복되게 할 수 있다고 믿어지는 것을 의존하려는 습성이 우리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롬 8:24-25절에 보면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이 보이지 않는 것을 소망으로 삼고 산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보이는 것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고후 4:18절에서는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보이는 것'의 역할입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는 말씀은 보이는 것이 나쁜 것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다만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더욱 소망하고 바라보게 하기 위한 도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이는 것은 잠깐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으신 하나님은 우리 앞에 보이는 것을 세워서 일하십니다. 그리고 보이는 것을 통해서 보이지 않으신 하나님을 알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 역시 보이지 않으신 하나님이 보이는 분으로 오신 것입니다. 보이는 하나님으로 인해서 보이지 않으신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이는 것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바라보지 못하고 보이는 것 자체만 바라볼 때 사람은 자기들 상식대로 판단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처럼 보이는 모습이 초라하고 약한 자일 때 무시를 해버립니다. 반대로 본문에 등장하는 기드온처럼 미디안을 쳐부순 영웅의 모습으로 등장할 때 보이는 사람을 높이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이 곧 이러한 인간의 악함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이란 사람을 세워서 미디안을 물리치십니다. 말씀드린 대로 기드온이 아예 없다 해도 미디안을 물리치는 일에는 전혀 지장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기드온과 300명이라는 군사를 세워서 일하십니다. 그 이유는 앞서 말한 대로 이스라엘이 무엇을 의지하는가를 확인하시기 위함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하나님은 32,000명이라는 군사를 300명으로 줄였습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이 승리했을 때 혹 우리들의 힘으로 이겼다고 스스로 자긍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300명이란 적은 수의 군사는 결국 기드온 한 사람을 영웅으로 만드는 결과가 되버렸습니다. 만약 기드온이 32,000명의 수로 전쟁을 했다면 기드온의 전공은 상대적으로 낮아질 것입니다. 군사의 수가 많았기 때문에 이긴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300명의 수로 십수만명 되는 미디안을 이겼다면 그것은 기드온 한 사람을 영웅으로 만들기에 충분합니다.

이렇게 볼 때 이스라엘이 자긍할까 해서 군사의 수를 줄인 하나님의 의도는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기드온을 영웅으로 여기는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군사의 수를 줄이게 하신 것이 잘못이라는 것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항상 선에 속해있습니다. 롬 8:28절에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는 말씀대로 하나님의 일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입니다. 다만 인간이 선하지 못하고 악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자신의 악을 기준으로 해서 하나님의 일을 바라보기 때문에 자신들에게 편한대로 해석을 하고 자신들에게 유익이 되는 쪽으로 이해를 해버리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이 선으로 드러나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본문의 이스라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군사의 수를 줄이신 하나님의 선한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의 힘으로 이겼다'고 스스로 자긍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조치임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적은 수로 승리한 기드온을 볼 때 기드온에게 함께 하신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기드온의 영웅과도 같은 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드온에게 왕이 되어 달라고 요구를 합니다. 22절에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 당신과 당신의 아들과 당신의 손자가 우리를 다스리소서"라는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은 기드온뿐만이 아니라 아예 기드온의 가문이 자자손손 대대로 자신들을 다스려줄 것을 요구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이 요구는 한마디로 눈에 보이는 것을 자기들의 힘으로 삼고자 하는 속셈입니다. 그들이 진심으로 기드온이 좋아서 기드온의 다스림을 받겠다고 하겠습니까? 이스라엘은 단지 기드온과 같은 사람이 자기들을 다스리면 미디안과 같은 이방나라의 압제를 받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진 것입니다. 자기 생존에 필요하고 도움이 되기 때문에 기드온을 자기들에게 붙들어 놓으려고 한 것입니다. 결국 기드온의 다스림을 받겠다는 것은 기드온을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들의 생존 문제를 귀하게 여기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기드온에게 '우리를 다스려 달라'는 요구를 하는 것으로 인해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지 않고 있으며 또 하나님을 신뢰하지도 않는다는 것이 증명된 것입니다. 미디안의 많은 군사, 기드온과 기드온의 300명 군사, 이런 모든 것이 합력해서 이스라엘이 무엇을 믿고 사는가가 드러난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요구에 대해서 기드온은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나의 아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23절)고 말합니다. 기드온은 승리가 하나님이 함께 하신 결과임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다스린 결과임을 알기에 자신이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사는 자와 받지 않는 자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사는 자는 그 어떤 것도 의지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힘까지도 의지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이 함께 하신 결과임을 알기에 눈에 보인 것을 의지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지 않고 사는 자는 자연히 눈에 보이는 것을 신뢰할 수밖에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하나님이 내 앞에 있게 하신 것임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보이는 것을 소유하려고 하고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살아가신다면, 그 증거는 눈에 보이는 것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여러분 앞에 그 무엇이 있다고 해도, 설사 그것이 있음으로 해서 여러분이 세상에서 높임 받고 대접을 받게 되는 것이라고 해도 보이는 것을 있게 하신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지 보이는 것을 신뢰하고 그것을 소망으로 삼지는 않을 것입니다.

교회가 목사의 다스림을 받지 않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만약 목사가 기드온의 위치에 있다면 교회에서 어떤 말을 해야 합니까? 교회가 목사를 의지하고 목사의 다스림을 받으려고 할 때 단호하게 '내가 여러분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여러분을 다스린다'는 말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인간의 악함은 그러한 말까지 이용을 해버립니다. 즉 목사가 '하나님이 여러분을 다스린다'고 할 때 더욱 더 목사를 신뢰해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 목사는 참으로 겸손한 사람이다'고 하면서 목사를 의지해 버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악함은 끝까지 인간을 보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에는 사건이 또 하나 등장합니다. 24절부터 보면 기드온이 이스라엘에게 탈취한 귀고리를 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사람들이 즐거이 탈취한 귀고리를 내놓습니다. 이미 기드온이 자기들의 영웅으로 등장한 이상, 또 스스로 기드온의 다스림을 받겠다고 나선 이상 아까울게 없는 것입니다. 아마 진심으로 하나님의 다스림을 기뻐하는 신자라면 역시 이런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그 무엇에도 아까울 것이 없는 것 말입니다.

어쨌든 이스라엘은 귀고리를 즐겁게 내어놓고 기드온은 그것으로 에봇을 만듭니다. 27절에 보면 "기드온이 그 금으로 에봇 하나를 만들어서 자기의 성읍 오브라에 두었더니 온 이스라엘이 그것을 음란하게 위하므로 그것이 기드온과 그 집에 올무가 되니라"고 말합니다. 즉 기드온이 탈취한 귀고리를 내놓게 해서 그것으로 에봇을 만들자 온 이스라엘이 그것을 음란하게 위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기드온과 그 집에 올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음란이란 남녀 사이에 있는 부정을 의미하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을 숭배할 때 그것을 음란이 행했다는 말로 표현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에봇을 음란하게 위했다는 것은 에봇을 우상을 섬기듯 섬겼다는 말로 이해해야 합니다.

에봇이란 본래 출 28:6-30절에 나오는 대로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서 만들어진 제사장이 입는 옷입니다. 제사장은 하나님의 뜻을 묻고자 할 때 이 옷을 입고 우림과 둠밈으로 하나님의 판결을 구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에봇은 이스라엘은 오직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에봇을 볼 때 에봇 자체를 신비한 물건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우리 뜻대로 사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살아간다'는 것을 되새기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에봇의 역할이었던 것입니다.

에봇만이 아니라 당시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날에 대한 규례나 의식이나 절기 등등 모든 것은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고 하나님이 보내실 메시야를 기다리게 하는 의미로 주어진 것들이었습니다. 보이는 것을 세우심으로 인해서 보이지 않는 것을 소망하고 살아가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선한 조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보이는 것에 의미를 둬버립니다. 보이지 않는 분을 보이는 것에 가둬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보이는 것을 붙듬으로서 마치 보이지 않는 것을 소유한 것같은 착각을 가진 것입니다.

가령 날을 지킴으로 인해서 복을 소유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들이 그런 것입니다. 복을 거룩한 날이라고 하는 것 속에 가둬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거룩한 날을 내것으로 만들면 자연히 복도 내것이 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에봇을 음란하게 섬긴 것 역시 그러한 의도에서 였습니다. 즉 에봇 때문에 이스라엘이 실로에 있는 성막의 제사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에봇이 있는 오브라에서 제사를 드리면서 하나님의 뜻을 구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보이는 것을 중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인간의 악함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에봇을 만든 기드온이 잘못한 것입니까? 27절에서 에봇이 기드온과 그 집에 올무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볼 때 에봇을 만든 기드온의 행위는 스스로 올무에 걸리는 행위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린 왜 기드온이 에봇을 만들었는가에 대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마 기드온은 에봇의 역할이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에게 에봇을 볼 때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살아가고 있음을 잊지 말라고 에봇을 만들었을 수가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잊지 않도록 도움을 주기 위해서 에봇을 만든 것입니다. 뭔가 눈에 보인 것을 만들어 놓으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살아가지 않겠느냐는 생각일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기드온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하나님을 섬기게 되는 것조차 까지도 하나님의 손에 달렸음을 생각하지 못하고 자기 스스로 에봇을 만들어서 이스라엘의 신앙을 도우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결국 기드온과 그 집안에 올무가 된 것입니다.

에봇을 만든 기드온의 의도는 선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 때는 하나님이 일하시고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일을 인간이 염려한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인 것을 세워서 신앙을 도우려고 한 것 자체가 이미 하나님이 다스린다는 것을 떠난 생각인 것입니다.

일하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우린 다만 하나님이 일에 대해서 순종하며 살아갈 뿐입니다. 우리가 의도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을 보내심으로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보이셨습니다. 그런데 세상이 눈에 보인 예수님을 그 모습 그대로 판단을 해버린 것입니다. 결국 눈에 보인 예수님이 세상에 대해서는 걸림돌이었던 것입니다. 보이는 것을 믿고 살아가는 세상이기에 천한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은 도저히 신뢰의 대상이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천한 예수님의 모습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천한 모습에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 수 있는 사람은 누구겠습니까? 그들은 곧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은혜를 입은 자들입니다. 보이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 분을 알고 신뢰하게 되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은 신뢰의 대상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수단이며 방법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보이는 것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다스리고 계심을 알아가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보이는 것이 힘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힘이시고 피난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우리의 모든 것을 맡기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살아가는 신자의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