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 8:29-35 기드온이 죽으매

인간의 삶은 사건과 사건의 연속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건 없는 삶이란 없으며 삶 역시 사건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삶에서의 사건이라는 것은 우리가 의도한다고 해서 그대로 발생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의도하지 않는 방향과 방법으로 언제 어디에서 어떤 식으로 발생할지 전혀 알 수 없는 것이 사건이며 삶인 것입니다.

사건이라고 해서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특이한 일로 여겨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삶은 사건과 사건이 아닌 것으로 구분되어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린 것이라면, 그리고 삶의 모두라는 것이 숨쉬고 밥먹고 걸어다니는 우리가 일상생활이라고 여기는 모든 것이 포함된 것이라면 삶의 모두가 곧 하나님이 일으키신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건들이 우리들의 의도대로 되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숨쉬고 밥먹는 것 하나에까지 하나님이 개입하신 결과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특이한 사건에서만 하나님을 기억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사건에 대한 기억이 사라지면 자연히 하나님에 대한 기억도 사라져 버립니다. 그리고 다시 일어난 특이한 사건에서 하나님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역시 사건이 기억에서 희미해지면 또 다시 하나님에 대한 기억도 희미해져 버리는 일이 반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삶을 하나님이 일으키신 사건으로 본다면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 내 주위에 일어난 사소한 일 모든 것에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고, 그 연결이 끊어지지 않음으로서 항상 하나님을 발견하고 하나님에 의해서 살아가지는 삶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성경에 등장하는 사건들과 계시가 완성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일어나는 사건들과는 의미가 다릅니다. 성경에서의 사건은 하나님을 계시하는 수단으로서 하나님이 일으키신 것들이고, 오늘 우리들에게 일어나는 사건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계시 안에서 제대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자로서의 삶에 충실하고 있는지를 묻고 확인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일으키신 사건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 등장하는 사건과 같은 맥락의 사건을 요구하거나 기대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심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제대로 이해하는 신자는 비록 특이하고 희한한 사건을 체험한다고 해도 그 사건 자체를 믿는 것이 아니라 사건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계시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가령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나오게 하셔서 험난한 광야로 인도하셨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견딜 수 없는 사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광야로 인도하신 것은 하나님 나름대로 목적하는 바가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과연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에 상관없이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존재인가를 계시하시기 위함입니다. 이 의도대로 인간은 광야에서 실패하는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신자는 내가 바로 이스라엘과 같은 존재임을 현재 자신에게 발생하는 사건들을 통해서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려운 사건이 없을 때는 스스로의 믿음에 대해서 자부심을 가졌지만 어려운 사건이 발생함으로서 결국 자신의 삶에 주어진 환경을 스스로 이길 수 없는 나약한 존재임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민수기 21장에 보면 이러한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불뱀으로 징계를 합니다. 불뱀으로 인해서 고통을 받을 때 이스라엘은 무엇을 위해서 부르짖습니까? 7절에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하므로 범죄 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라는 말씀을 보면 불뱀으로 인해서 이들의 관심은 먹을 것에 대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고통이 사라지는 것에 있게 됩니다. 더 큰 고통이 주어질 때 상대적으로 적은 고통에 대해서는 잊어버리게 되는 인간의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그때 이스라엘의 심정은 불뱀의 고통에서만 해방된다면 좋겠다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못 먹어도 괜찮고, 못살아도 괜찮다는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에 대해서 놋뱀을 장대에 달고 바라보는 자는 살리라는 사건을 일으키십니다. 불뱀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인간이 할 것은 아무것도 없고 다만 높이 달린 놋뱀을 바라보는 것으로 족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해서 인간의 구원은 위에 계신 분으로 인해서 주어진다는 것을 계시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이 계시를 제대로 이해한 자는 위에 계신 분을 바라보는 것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불뱀의 고통에서 벗어나서 몸이 편해졌을 때 다시금 죄를 행하게 됩니다. 모압의 여인들과 음행을 하면서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린 것은 성경의 한 부분에서 나타난 사건일 뿐입니다. 사실 성경 전체가 이러한 구도로 진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사건을 일으키시고 뭔가를 계시하시고 보여주시지만, 정작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이스라엘은 눈에 본 것이 있을 때만 잠시 하나님을 믿게 되었을 뿐 보이는 것이 사라지면 다시 자기들 좋을 대로 행하게 악함이 끊이지 않고 나옵니다.

이러한 성경을 보면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우리 역시 그들의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수준이 곧 우리의 수준임을 마음속 깊이 자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계속 사건을 일으키심으로서 우리가 과연 무엇을 의지하고 믿고 살아가는지를 확인하십니다. 그러나 정작 사람들은 하나님의 의도를 전혀 알지 못합니다. 다만 눈에 보이는 사건에 붙들려서 이리저리 흔들리는 나약함만 보일 뿐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삶에 발생하는 사건들에 대해서 어떤 시각을 가져야 하는지, 그리고 그러한 사건들로 인해서 우리에게 어떤 열매가 있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알아보고자 합니다.

본문의 내용은 지난 시간에 잠깐 언급한대로 기드온이 미디안에게서 탈취한 귀고리 등 금을 모아서 에봇을 만들었는데, 이스라엘이 그 에봇을 음란하게 섬긴 것과 기드온이 나이가 많이 들어서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돌이켜 바알들을 음란하게 위하고 바알브릿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고 여호와 자기들의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고 기드온이 이스라엘에게 베푼 은혜를 따라 그의 집을 후대치도 안했더라는 것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기드온이 에봇을 만든 것은 지난 시간에 말씀을 드린 대로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보지 않는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즉 에봇을 만들어 둠으로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다스림으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에봇을 볼 때마다 상기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에봇은 제사장이 하나님의 뜻을 묻기 위해서 나올 때 입는 옷이고, 그 옷을 미디안에게서 탈취한 것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에봇을 볼 때마다 그 에봇이 무엇으로 만든 것인가를 보라는 것입니다. 미디안의 탈취물로 만든 에봇을 볼 때마다 미디안을 이긴 것은 자기들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이 붙여주신 결과임을 잊지 말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에봇에는 기드온의 선한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기드온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아는 사람입니다. 미디안의 승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결과임을 마음 깊이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기드온이었기에 에봇을 만들어 이스라엘 앞에 둠으로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잊지 않도록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수준은 보이는 것을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에봇에서 의미를 찾으려고 했습니다. 보이는 에봇을 하나님 대신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에봇을 음란하게 섬긴 것입니다. 즉 에봇을 앞에 두고 소원을 빈다든지 에봇을 소중히 여김으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처럼 여겨버린 것입니다.

이처럼 눈에 보인 것이 이스라엘의 믿음을 도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올무로 남게 됩니다. 눈에 보인 것을 의지하고 섬기는 모습은 또 있습니다. 28절에 보면 "미디안이 이스라엘 자손 앞에 복종하여 다시는 그 머리를 들지 못하였으므로 기드온의 사는 날 동안 사십 년에 그 땅이 태평하였더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기드온이 생존해 있는 동안에는 미디안의 불안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태평한 세월을 보냈던 것입니다. 이것은 기드온의 힘이 아니라 기드온에게 함께 하신 하나님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이 사실을 제대로 알았다면 기드온에 의한 다스림을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지 않고 기드온의 다스림을 받고 산 것으로 인한 문제는 기드온이 죽음으로서 나타나게 됩니다. 32절에 보면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나이 많아 죽으매 아비에셀 사람의 오브라에 있는 그의 아비 요아스의 묘실에 장사하였더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눈에 보이는 사람의 다스림을 받고 살아가는 것의 한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생명이 영원하다면 믿을만한 사람의 다스림을 받는 것도 괜찮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죽어야 할 존재입니다. 따라서 사람의 다스림을 받고 살아감으로 인한 문제는 그 사람이 죽었을 때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면 기드온이 죽은 후에 이스라엘에게서 나타난 문제는 무엇입니까? 33-35절에 그것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기드온이 이미 죽으매 이스라엘 자손이 돌이켜 바알들을 음란하게 위하고 또 바알브릿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고 사면 모든 대적의 손에서 자기들을 건져내신 여호와 자기들의 하나님을 기억지 아니하며 또 여룹바알이라 하는 기드온의 이스라엘에게 베푼 모든 은혜를 따라서 그의 집을 후대치도 아니하였더라"

기드온이 죽자 이스라엘이 행한 것은 우상을 섬긴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을 사면 모든 대적의 손에서 건져내신 여호와 자기들의 하나님을 기억치 않습니다. 또 기드온의 집을 후대치도 않습니다. 결국 이것은 이스라엘이 그동안 보이지 않으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산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인 기드온의 다스림을 받고 살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기드온의 다스림을 받았고 기드온을 보고 살았기 때문에 기드온이 살아있을 때는 기드온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는 것 같은 흉내라도 낼 수 있었겠지만 기드온이 죽고 사라지자 자신을 다스리는 존재가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그나마 그들을 통제했던 힘이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로 인해서 자기들 마음대로 행동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곧 삿 17:6절의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는 말씀이나 삿 21:25절의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는 말씀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왕이 없다는 것은 국가의 제도적인 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서 나를 다스리는 분이 없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나를 다스리는 분이 없기 때문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곧 진리가 되고 하나님의 뜻이 되버렸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이런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은 눈에 보인 것을 의지하고 섬겼기 때문입니다.

에봇을 음란하게 섬긴 것이나 기드온이 살아있을 때는 우상을 섬기지 않다가 기드온이 죽고 사라지자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을 기억하지도 않고 기드온의 집을 후대하지도 않은 모든 이유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산 것이 아니라 기드온의 다스림을 받았다는 증거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린 분명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삽니다. 보이는 것은 사람입니다. 또는 신비한 사건입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사람이나 사건의 다스림을 받게 되는 경우가 참으로 많음을 알아야 합니다. 즉 보이는 것이 우리들의 올무가 되버리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사건들 하나하나는 성경에서 계시하신 하나님을 우리에게 확인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일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어떤 사건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개입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들이 죄악을 범한 것까지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러한 생각은 우리의 허물에 대한 책임을 피해가려는 의도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탄의 유혹에 빠져서 불신앙으로 갈 때 하나님의 개입은 그냥 두고 보시는 것으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그냥 두고 보셨다가 성령을 통해서 그 죄를 책망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 앞에 있는 사건들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을 기억하고 마음에 두기 위한 도구이며 수단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를 다스리시는 것은 우리들 곁에 사건과 사건이 이어지게 하심으로서 끝없이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음을 상기시킴으로서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이 일으키신 수많은 사건들이 있습니다. 우리들의 생각으로는 그 중에 단 하나의 사건만으로도 얼마든지 평생토록 하나님만 기억하고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할 수 있는 신비한 것도 있습니다. 홍해가 갈라진 것이나, 요단강 물이 마른 것, 여호수아가 전쟁을 할 때 해와 달이 멈춘 것 등등 수많은 사건들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로서는 꿈도 꾸지 못할 만큼 신비스러운 이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놀라운 사건들도 이스라엘의 마음을 하나님에게 붙들어 놓지를 못했습니다. 이적이 있는 잠시동안 하나님을 기억했을 때 그 사건이 사라지고 다시 현실이 그들의 눈에 보일 때 이스라엘은 여지없이 현실을 따라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이 실제로 홍해 사건을 체험했다고 합시다. 그것 하나만이 아니라 여러분이 기도해서 해와 달리 멈추는 사건까지 체험했다고 합시다. 과연 여러분은 그 사건들을 보면서 사건에 매이지 않고 그 사건을 일으키신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사건은 하나님을 계시해주는 도구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놀라운 사건을 보면서 사건 자체는 걸러내 버리고 순수하게 하나님만 여러분의 마음에 남게 하실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인간은 그러한 수준이 아닙니다. 보이는 사건 자체에 매료되어서 보이지 않는 분은 순식간에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놀라운 사건을 체험했으면서도 뒤에 괴로운 일이 발생하면 앞에 있었던 놀라운 사건을 잊어버리고 괴로움에 빠져서 원망을 하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 앞에 기드온을 세우신 것은 기드온을 믿거나 기드온의 다스림을 받아라는 것이 아니라 기드온을 다스리고 있는 하나님을 믿으라는 의도였습니다. 그래서 기드온에게 먼저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확인시키시는 것입니다. 기드온이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의 은혜로 승리했다는 것을 가르침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순종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 하나님의 의도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러한 하나님의 의도를 벗어난 채 사람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기드온의 죽음은 이스라엘이 눈치보는 대상이 사라진 것이고 자기들을 다스리는 존재가 사라진 것이기 때문에 그때부터 왕이 없는 상태가 되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고 우상을 섬기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성령을 보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인간은 안되기 때문에, 인간의 수준이나 능력으로는 보이는 것에서 벗어나는 것이 안되기 때문에 성령을 보내신 것입니다. 보이는 것을 의지하고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는 것이 인간의 수준이기에 성령을 보내셔서 보이지 않으신 분을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한 자는 어떤 사건이 있다고 해도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어떤 위대한 인간이 있다고 해도 인간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게 되지 결코 인간을 보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교인이 목사의 다스림을 받는다는 것을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간증이라는 것을 하면서 자기가 체험한 사건을 증거 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사건을 증거 하거나 인간을 다스리는 자로 세우시지 않았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시기에 보이는 것을 세우셔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가르치시고자 하신 것뿐입니다.

보이는 것은 우리에게 올무가 될 뿐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아서 우리의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하게 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어느 한 사람의 다스림을 받는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만약 사람의 다스림을 받고 살아간다면 필연코 그 사람으로 인해서 마음이 흔들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신자는 어떤 경우에서도 보이지 않으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분의 은혜를 마음에 담고 그분의 다스림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사건도 인간도 여러분의 마음에 담아두지 마시고 하나님만 담아두십시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이라는 놀라운 기적으로 인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지금 우리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잊어버리기가 쉽습니다. 이런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우리들의 삶에 끊임없이 사건을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의지하는지 확인하라고, 과연 주님의 은혜로 사는지 확인하라고, 하나님이 우리를 다스리심을 잊지 말라고 쉬지 않고 일하시고 계십니다. 삶에서 하나님을 발견하시고 그 하나님을 마음에 두도록 하십시오. 이 일에 게을리 하지 마십시오. 그럴 때 여러분은 그 어떤 것이 여러분을 유혹한다고 해도 보이는 것에 매이지 않고 보이는 사람의 다스림을 받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살아가는 믿음만 증거 하게 될 것입니다.